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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 인물열전 ⑪] '오사운동 3대 매국노' 조여림…권력의 정상에서 역사의 심판대까지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7.1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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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운동 당시 베이징 시위와 조여림(曹汝霖)을 역사적 장면으로 재구성한 이미지.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오사운동 이후 '3대 매국노'라는 역사적 평가를 안고 생을 마감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한 사람의 외교적 선택은 평생의 명예를 좌우하기도 한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조여림(曹汝霖)만큼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도 드물다. 청나라 말기 최고의 엘리트 관료로 출세해 북양정부 외교·재정의 핵심 실세가 됐지만, 1919년 오사운동 이후 그는 '3대 매국노'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반면 말년에는 자선사업과 일본 괴뢰정권 참여 거부 등으로 또 다른 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1877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조여림은 어려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1900년 일본으로 유학했다. 와세다와 도쿄 법학계열 학교에서 근대 행정과 법률을 공부한 그는 귀국 후 진사에 급제했고, 청나라 외무부 차관급까지 오르며 외교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원세개 정부에 합류해 외교차장, 교통총장, 재정부장, 교통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 교섭과 해외 차관 도입을 주도하며 북양정부의 핵심 권력층으로 성장했고, 일본과 협력을 중시한 이른바 '신교통계' 관료 집단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외교 현장에서의 선택으로 뒤바뀌었다.


1915년 일본이 중국에 강요한 '21개조 요구' 협상에 참여한 그는 일본과의 타협을 추진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는 독일이 산둥에서 갖고 있던 권익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당시 그는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현실적 선택이 불가피했다는 입장이었지만, 국민들에게는 국가 주권을 포기한 외교로 받아들여졌다.


분노는 결국 거리에서 폭발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은 "외쟁국권, 내징국적"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조여림·육종여·장종상을 '3대 국적(國賊)'으로 지목했다. 학생들은 베이징 자오자러우에 있던 조여림의 저택으로 몰려갔고, 그는 하인 복장으로 뒤편을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이른바 '자오자러우 방화 사건'은 오사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역사에 남았다.


거센 여론은 결국 정부를 움직였다. 같은 해 6월 조여림은 교통총장직에서 파면됐고, 불과 42세의 나이에 정치 생명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삶은 오사운동 당시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정계를 떠난 그는 중앙병원 운영에 참여하며 빈민 의료와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겨울이면 생활이 어려운 인력거꾼들에게 솜옷을 익명으로 나눠주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빈민들에게 관을 지원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은 그의 명성과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차례 괴뢰정권 참여를 권유했다. 그는 일부 명예직을 받은 적은 있지만 실제 행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운영에 관여한 병원 역시 일본 측의 통제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 국민정부도 그를 적극적인 한간(漢奸)으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1949년 중국 대륙을 떠난 조여림은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고, 이후 미국 디트로이트에 정착했다. 그는 말년 회고록 <조여림 일생의 회억(曹汝霖一生之回忆)>을 집필하며 오사운동 당시 자신의 선택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 외교였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이미 굳어진 역사적 평가를 바꾸지 못했다.


1966년 8월 4일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조여림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날 중국 역사학계에서도 조여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국제정세 속에서 현실적 선택을 한 외교관이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신뢰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시각도 여전히 강하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조여림은 뛰어난 행정가이자 외교관으로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지만, 단 한 번의 역사적 선택으로 '오사운동 3대 매국노'라는 이름을 평생 짊어진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외교는 현실이지만, 역사의 평가는 결국 결과와 국민의 기억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오늘날에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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