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영국이 또 한 번 정치적 전환점에 섰다. 키어 스타머 총리가 물러난 뒤 집권 노동당의 새 당수 앤디 번햄(Andy Burnham)이 7월 20일 찰스 3세 국왕의 임명을 받아 총리에 취임했다. 최근 10년 사이 일곱 번째 총리다. 잦은 정권 교체는 영국 정치의 불안정성과 경제·사회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리버풀 인근 노동자 가정 출신인 번햄은 보건장관과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을 지내며 지방분권과 공공서비스 개혁을 추진했다. 버스 공영관리와 지역 투자 확대를 중심으로 한 '맨체스터 모델'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노동당 대표에 올랐다.
그가 내세우는 노선은 전면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다. 시장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철도·에너지·주택·의료 등 필수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철도와 버스 공공성 확대, 공공주택 공급, 국민보건서비스(NHS) 투자, 지방정부 권한 강화가 핵심 공약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다. 영국 예산책임청(OBR)에 따르면 공공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약 95%에 이르렀고, 영국 재정연구소(IFS)는 대규모 복지 확대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국가통계청(ONS)과 영국 중앙은행(BoE)도 소비와 기업투자가 여전히 부진하고, 고금리와 물가 부담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평가한다.
민영화의 후유증도 부담이다. 템스워터를 비롯한 공공 인프라 기업들은 부채와 투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철도와 에너지 분야에서도 공공성 회복 요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정상화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산업 경쟁력 회복 역시 쉽지 않다. 제조업 기반이 약화된 상황에서 영국산업연맹(CBI)은 "투자자 신뢰와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성장 전략을 추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라고 평가했다. 반면 런던정경대(LSE) 등은 번햄이 맨체스터에서 추진한 교통 통합과 지방분권이 지역경제 활성화와 생활비 부담 완화에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고 분석한다.
외교·안보에서는 큰 변화가 예상되지 않는다. 번햄은 미국과의 동맹, 우크라이나 지원 등 기존 노선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제에서는 변화를 시도하되 외교에서는 연속성을 택해 시장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번햄 정부의 실험은 단순한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마거릿 대처 시대 이후 40여 년간 영국을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사회계약으로 대체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공공성 강화와 재정 건전성, 성장 회복이라는 세 과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면 영국은 물론 유럽 복지국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재정 부담과 성장 둔화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온건 사회민주주의' 역시 현실을 바꾸지 못한 또 하나의 정치적 이상으로 기록될 수 있다. 번햄 정부의 성패는 앞으로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경제·복지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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