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1) 부산 낙동강 그리고…
부산항구, 길게 울리는 배고동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선창으로 내다보니 배는 이미 오륙도를 지나서 바야흐로 입항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도선사가 이미 올라 입항로를 안내하고 있었고 옆으로 지나는 크고 작은 선박들마다 고동을 울리며 반겨주었다.
부산항구, 선수와 선미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은 흥분에 젖어 웃고 떠들며 서로 안고 빙빙 돌았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오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렇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배달민족의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던 부산항구었더냐.
북으로는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으로, 남으로는 부산을 거쳐 현해탄 지나 일본땅으로 나라 잃고 살 길을 찾아 타관땅, 낯선 곳으로 떠나던 사람들, 순간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모습과 정경들이 눈앞에 금시 안겨오는듯 했다.
밤비 내리는 부산의 파지정
파도도 올고 갈매기도 울었다
정든 사람 떠나보내는 여인도 울었다
다시는 돌아오기 힘든 고국산천 뒤돌아보며
사나이도 주먹으로 눈물 닦았다
부산에서 시모노스끼까지 여덟시간 뱃길이지만
못살아 돈벌러 가는 길이라
놓고 싶지 앟는 그 사람 손목 놓고가는 길이라
천리길 만리길보다 멀었다
그날 도항증을 받으로 갔다
일본인 순사한테 발길에 채이고
뱃머리에서 고등계 형사에게 뺨을 맞아가며
서러운 뱃길을 떠나던 사람들
지금은 모두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 옛날 설음에 찬 물결에
젊은 나그네의 머리위에서 울던 갈매기
지금은 몇이나 남아 있을 것인가
갈매기들도 늙었으리라
아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리라
… …
어디 그뿐이었더냐. 어릴적 고향의 엄마한테서 듣던 그 이야기- 이수일과 심순애는 서로 서로 눈이 맞은 사이었단다. 이수일이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자 심순애는 부모님의 말씀 거역할 수 없어 평양부자 김준배한테로 시집을 갔단다. 그 후 일본에서 돌아온 이수일은 돈의 노예로 된 심순애를 호되게 꾸짖으며 그 더러운 돈을 심순애한테 던져주고 심순애는 또 심한 갈등에 모대기다 부산 앞바다의 서슬푸른 파도속에 몸을 날리고…
이는 봉건혼인에 반항해나서는 한쌍의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었다. 이렇듯 부산은 외국의 자본주의의 신흥사상이 바다를 통해 인입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 다음은 가렬처절하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다. 전주, 정주, 광주로! 대전,대구, 부산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한민국의 90% 이상의 지역과 92% 이상의 인구를 내주고 대한민국정부가 하마트면 부산앞 남해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그 시기, 그 때 부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숨통이기도 했다. 그 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한 인천상육작전과 낙동강에서의 공방전, 그것을 계기로 전선은 다시 북으로 밀려 3.8선부근에서 고착되고 그후부터 조선반도의 남과 북은 정치와 사상의 다른 이념으로 해서 지금까지 갈려져 살면서 서로 보고 싶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고 싶은 땅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강대국의 인위적인 분열책략에 의해서 두동강이 난 3천리강산, 분통한 일이다.
입항한 이튿날, 나는 본선내의 몇몇 중국조선족선원들과 함께 낙동강으로 향하게 됐다.
6.25 당시 한국국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가열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던 곳- 낙동강, 우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한시간푼 달리니 낙동강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날은 잔잔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안개비속에 7월의 낙동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폭이나 흐름새가 어찌보면 북중변경의 두만강을 연상케 하는 700리 낙동강, 우리 넷은 하염없이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우리 4명의 중국 조선족선원을 놓고 보면 모두가 가족의 부친이나 백부 그리고 할아버지 등이 북측인민군에 참가한적 있는 사람들, 특히 나는 낙동강전투에서 공까지 세운적 있는 아버지와 4촌형 김송춘씨한테서 많은 전쟁이야기를 들어온터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
(한국 전시가요)
가렬한 전투의 저기 저 언덕
피흘린 동지를 잊지 말어라
… …
(조선 전시가요)
이렇게 3년 1개월간이나 서로 총을 맞대고 싸웠으나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 군사분계선은 그대로 남아있고 수많은 고아와 과부와 이산가족만을 낳은 전쟁, 아니 그 6.25때문에 오늘날 더욱 화해하기 힘든 것이 반도남북의 현실이 아니란 말인가. 전쟁이란 강압정치로서 통일에서의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단일민족이라는 전제밑에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옛날의 알륵들을 풀어야만 통일이란 대업도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역시 조선인민군의 후예들인 우리들까지도 그 옛날 가열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이 낙동강반에서 활개치며 다닐 수 있는데 민족과 나라를 위한 마음이라면 삭일 수 없는 원한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보슬비 내린다. 열기 띤 가슴속까지 적셔주면서 잔잔히 내린다. 그 안개비속에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낙동강반의 하늘은 과연 언제 개일런고?…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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