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 허길성

2003년의 어느날,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한 한국혈통의 미국인이 나를 찾아왔다.

김찬영이라고 부르는 그 분은 교육학 박사로서 세계 여러개 나라를 돌아다니며 우리 민족들한테 도움을 주는 자선가이기도 했다. 당시 김박사가 나를 찾게 된 리유는 자신이 연변내에 집을 지어 자선사업을 하게 되자 건축설계에 미립이 터있는 나의 손을 빌자는것이였다.

“허선생님, 선생이 건축설계분야의 전문가란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하는 사업이 저를 위한 일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위한 자선사업이니 선생님께서 저의 한팔로 되여주시면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당시 돈을 벌자고 들었다면 나는 그 미국적 한국인을 돕지 않아도 되였다. 내가 하고있는 곰사육업을 잘 해도 별로 돈곤난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 차마 거절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번 마주앉다 보니 김찬영이란 분의 인간성도 매우 좋았고 인상이 깊었다.

나는 결국 김찬영이란 자선가의 청을 받아들였다. 가정의 곰사육업도 몹시 힘들었지만 남의 청이라면 거절하지 못하는것이 나의 흠이라면 흠이였다.

헌데 김찬영이란 분과 합작하다 보니 내가 해야 할일이 단지 건축설계뿐이 아니였다. 그분이 연변에서의 자선사업뿐 아니라 기타 나라에 가서도 자기가 할일이 별도로 있다보니 연변에서의 일은 내가 도맡아할 때가 많았다. 례하면 고아원에 식량과 모포(毛毯) 등을 보내주고 빈곤지역에 소를 지원하고 또한 그런 지역에 소우사칸을 지어주는 등 일은 내가 직접 조사하고 계획을 짜고 그분한테 신청할 때가 많았다.

한편 이런 사업을 하다 보니 직접 나의 돈을 투자하여 벌이는 일은 아니였지만 보람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또한 나와 내가족이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 이 세상엔 아직도 계절에 따라 바꿔입을 옷이 없고 래일 솥에 앉힐 쌀이 없어 근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고 하니 가슴이 찡해나기도 했으며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이야말로 신성하고도 보람있는 사업이란것을 재삼 절감하군 했다.

김찬영이란 자선가와 손잡고 일하는 10여년간 나는 그의 사업을 동조하며 규모가 큰 호텔 하나, 양로원(훈춘) 한채, 고아원과 유치원 그리고 탁아소 각각 한채씩 설계해냈을뿐만 아니라 이런 건물을 짓는 공사의 질감독까지 맡아하였다.

한편 김찬영박사는 연길에 체류하고 있는 6년 기간 부인과 함께 공원뒤에 있는 나의 집에 거주, 집안에 있는 TV, 랭장고 및 기타 가구는 모두 우리가 쓰던 그대로 김찬영박사 내외간이 사용하게 했다.

김찬영이란 분과의 합작은 오늘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있다. 아마 이내 몸이 더 늙어 운신하기 힘들 때가 되여서야 완전히 손을 떼게 될런지?
……
다른 한편 그 언제부터인가 나한테는 늘 마음속 한쪽 구석에서 걸리는것이 있었다. 즉 남을 도와주는 인생에서 어딘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것이였다. 인생은 베푸는것이고 또 거기로부터 인생의 보람도 만끽한다고도 하는데 하다면 여태껏 내가 남한테 베풀어줌에 있어서 너무 린색하고 너무 자사자리한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몸은 편안해도 마음은 편안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는 김찬영이란 한국계 미국인을 알게 되고 그와 손잡고 함께 자선사업에 몸을 담그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바로 이럴즈음, 많은 농촌들에서 학교들이 페교가 되면서 숱한 학생들이 도시로 대거 몰려들었는데 그중에는 개산툰에서 태여나고 자랐던 송정동이란 애도 있었다.

나는 그애를 우리 집으로 데려다 키우면서 공부시키자고 안해한테 제의했다. 이에 안해는 그애의 처지에 대해 동정은 하면서도 처음에는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그 리유는 여러가지였다.

리유를 들어보니 안해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나 역시 여태껏 죽도록 고생한 안해가 이제부터라도 편안하게 로후를 보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제날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고생할 때 도와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런 사람들의 처지 역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즉 그냥 수수방관할수가 없었다. 안해의 몸이 고달프고 나 또한 신체가 예전과 같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안해를 설복하면서 송정동이를 키워보자고 제의했다.

나의 지속적인 설복에 결국 안해도 끝내는 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기실 안해 역시 그애를 데려다 키워줄 생각을 했으나 다만 자신과 나의 신체가 걱정돼 우려했을 따름이였다.

송정동은 6살부터부터 우리 집에 와서 자라기 시작했다. 애는 천성적으로 예술세포가 있는 애였다. 후에 송정동은 국내의 모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고있는 상황이다.

한편 송정동이란 애 한명만을 데려다 키운다고 했으나 한번 참여하면 계속 하게 되는것이 바로 이런 일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뒤 우리는 계속 마지막이라고 하면서도 선후로 서중걸, 리해, 송정복 등 애들을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게 되였다. 물론 정력과 시간을 많이 쏟긴 했지만 현재 그애들이 잘되고 또 잘되여 가는것을 보노라니 그만큼 보람도 컸다.

그리고 여기서 분명 밝힐것은 송정동에 이어 우리 집에서 자라며 공부한 애들중 서중걸이란 애는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근무하고 리해라는 애는 중앙민족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본교에 남아 교편을 잡고 있으며 송정복이란 애는 현재 장춘재정대학 재학중이란것이다.

현재 이애들은 명절이나 우리 부부의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오며 그때마다 우리 부부의 덕분으로 자기들의 오늘이 있게 됐노라며 늘 우리한테 감사해하고 있다. 

2003년 우리 부부는 연길시 민주촌에 작으마한 집 한채를 사놓았다. 금방 샀을 때 그 집은 40여평방이나 되는 작으마한 초가집이였으나 후에 우리는 해당 부문의 허가를 맡고 그 집을 확장, 확장된 집은 180평방메터였고 뜨락까지 합치면 약 2000평방메터가 됐다.

내가 이 집을 산 목적은 겨울이면 도심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내고 봄부터 가을 사이에 촌에서 살며 포도나 복분자같은것을 재배하면서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잔병이 많은 안해를 위해서도 그런 생활이 필요했다. 도심의 아파트에서 “갇혀사는 생활”보다 공기가 맑고 생활의 진가를 체험할수 있는 교외생활이 스트레스 해소나 다른 건강에도 좋을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집을 사자바람으로 정원에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사과배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등을 심었으며 오미자, 구기자, 딸기 등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2000평방여메터가 되는 집둘레에 철근배자를 세웠으며 개와 닭 등을 쳤다. 그뒤엔 곰우리를 만들고는 시내에 있던 곰도 그곳으로 옮겨 사육했다.

우리는 과일나무와 오미자 등 경제작물에 화학비료를 일절 쓰지 않고 개, 닭과 곰 등 동물들이 배설하는 오줌이나 똥을 비료로 만들어 주군 했다. 그러자 과일나무들과 경제작물의 자람새가 매우 좋아 몇년후부터는 과일과 오미자, 구기자, 포도 등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팔지 않았다. 과일은 철에 따라 친척집과 친구들한테 나누어주었고 오미자 등 경제작물도 가을에 수확해서는 일부는 팔고 일부는 여러 가정에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중 살구같은 과일은 제때에 다 먹을수 없어 씨만 받아서는 그것을 깨먹기도 하고 약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안해의 친구들이나 나의 친구들은 곧잘 우리 그 집을 찾아와 들놀이를 하는 동시에 뜨락에서 수확한 콩으로 두부를 앗아먹기도 한다.
나의 그 집은 민주촌의 산기슭에 있기에 경치가 아름답다. 그리고 집에는 침실 3개, 객실 3개, 위생실 2개가 있고 노래방기계, TV등 시설이 구전하며 지하 40메터 깊이에 있는 샘물을 뽑아올리기에 물맛 또한 으뜸이다. 거기에 절기에 따라 앵두, 살구와 오얏 그리고 복숭아와 사과배 등을 맛볼수 있기에 사람들이 즐겨 찾군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빠뜨릴수 없는것은 안해를 위해, 또 안해의 건강이 념려되여 민주촌의 정원생활을 선택한 나였으나 내가 줄곧 사회활동에 많이 참여하다 보니 그 집의 관리 즉 정원을 가꾸고 개, 닭과 곰에 대한 사육과 관리는 기본상 안해가 도맡아했다. 그러니 내가 또 안해를 고생시키고 안해한테 빚을 진셈이였다. 또한 이러한 안해가 있었기에 내가 시름놓고 사회활동에 참여할수 있은것도 사실임을 분명히 밝히는바이다. 그저 현모량처인 안해한테 고마울뿐이다.

최근들어 나는 가끔씩 안해의 얼굴을 뜯어보군 한다. 어쩐지 늙었다는 생각이 들기때문이였다. 엊저녁에도 나느 침대에 누운 안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힘없이 자는 모습이 불쌍하고 못내 이 가슴이 쓰려났다.

특히 요즘부터는 초저녁이면 꼼짝 못하는 안해이다. 나는 그래도 저녁밥을 먹고 나면 아파트에서 그닥 멀지 않는 진달래광장에 가서 산책이나 하지만 안해는 그렇지를 못하고있다. 내가 산책이나 운동을 좀 하다가 들어오면 안해는 인기척도 모르고 꿈속에 빠지기가 쉽상이다. 처녀시절의 이쁜 얼굴과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수 없도록 망가진 모습이다.
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나는 늘 이런 안해한테 크게 빚을 진 마음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안해한테 크게 잘해준 일은 거의 없고 그저 나와 이 가정을 위해 고생만 시켜왔으니 말이다. 신혼초기에 있은 나의 로동개조, 중년기에 들어서의 나의 잦은 출장 그리고 집안살림을 도맡아하면서도 자녀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복장공장의 삯일을 했고 해리서와 곰을 키우고 지어는 시집편과 친정편의 학생 여러명의 뒤바라지까지 해온 안해였다. 그것도 몸에 잔병이 많은 안해로서 말이다. 그리고 안해한테는 아무런 명예도 없다. 오직 남편과 자식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 남편과 자식들이 밖에 나가 기죽으며 살게 하지 않게 위해 그 한몸 망가지도록 일만 했다. 그러다보니 잃은것은 젊음이였고 남은것은 병들고 지친 몸뿐이다.

현재 안해는 여러가지로 생각이 많을것이다. 또한 갖고싶은것도 많을것이다. 기실 안해는 현대인들로서는 거의 모두가 누리고 있는것을 누리지 못하였다. 특히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결혼식에서 파마머리를 못했고 너울을 쓰지 못했으며 첫날상도 받지 못한 상황이다.

어찌보면 이 모든것이 내가 못나고 능력이 없어 빚어진 결과인것 같다. 총적으로 내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심정이다.

현재 나 역시 여러모로 생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안해를 기쁘게 해줄수 있겠는가고말이다. 지금까지 나와 동고동락을 함께 해준 안해여 고맙소… 그리고 사랑합니다.

에필로그

인생을 한번 쭉 돌이켜보면서 그것을 정리해보는 이 시각, 나는 행복이란 이 단어를 놓고 여러가지로 음미해본다. 어떤이는 대부자로 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생각할수도 있고 또 어떤이는 크게 출세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간주할수도 있다.

그중 나는 큰부자도, 큰벼슬도 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그것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긴다. 수십년간 나를 따라준 현숙한 안해가 있고 거기에 많지는 않지만 해외류학까지 한 아들과 딸이 있는가 하면 귀여운 손녀가 있으며 또한 지금도 나 자신의 취미와 능력에 따라 살고 있으니 더욱 만족이다.

나의 취미란 곧바로 독서, 그리고 가끔씩 친구나 일가친척들과 모여앉으면 즐겁고도 유쾌하게 마시는 술 한잔 등이라고나 할가?

그렇다. 나는 결코 지나온 나의 인생에 대해 큰 후회가 없으며 또한 이제 다시 태여나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안해와 함께 나의 취미와 생활방식대로 살고 싶음을 고백하는바이다. (끝)

※ 지금까지 애독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장편실화소설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을 연재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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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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