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팽설풍(彭雪枫)은 중국 노농홍군내의 저명한 군사가로서 모택동이 크게 아끼던 장군이었다. 그는 문무가 겸비하고 군정사업에서 모두 우수하였다. 동시에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무릇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되면 상급지휘관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모택동 앞에서도 마찬가지었다.  이로 인해 한번은 그와 모택동 사이에 큰 쟁론이 벌어졌는데 쟁론이 격화됨에 따라 서로 언성을 높인건 물론 주먹으로 책상까지 치면서 얼굴을 붉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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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30일, 팽설풍이 홍군 제1군단 제4사의 간부들을 거느리고 주둔지에서 출발, 녹부현(鹿阝县ㅡ지금의 부현) 동촌에 도착하여 홍군 제1방면군 군영이상 간부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회의 후 4사의 간부들은 다시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팽설풍은 계속 남아 중앙수장과 담화하게 되었다.


팽설풍과 담화를 나누게 될 중앙수장은 바로 모택동이었다.


“듣자니 최근들어 2종대 내부가 잘 단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영이 있어 당신더러 남으라고 했소.”


모택동 역시 단독직입적으로 본 화제를 꺼냈다.


헌데 이는 팽설풍으로 놓고 말하면 일종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종대는 1935년 9월 22일에 설립되었다. 그 날 중앙홍군은 중국노농홍군 섬감지대 (陕甘支队)로 개편하여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위로 하였으며 산하에 1종대, 2종대와 3종대를 두었는데 2종대의 사령원이 곧바로 팽설풍이었다. 그리고 정위에 이부춘(李富春), 부사령원에 유아루(刘亚楼), 정치부 주임에 나서경(罗瑞卿)이었고 참모장에 소경광(肖劲光)이었다.


헌데 그가 2종대 사령원에 부임되자마자 일련의 난감한 일에 부딪쳤다. 우선 첫째로 종대의 주요 지휘성원들이 대부분 원 홍1군단에서 왔기에 2종대(원 홍3군단) 지휘원들의 불평불만을 야기시켰다. 둘째로 2종대의 주요 지휘원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심이 충만되었으며 거기에 혈기가 왕성하고 승부욕이 강한 젊은이들이었기에 사업중 일정한 분규와 모순이 생기는 것을 피면하기 어려웠다. 이는 홍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단결과도 연관되는 문제었고 또한 일부 고급지휘관들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팽설풍은 진작 이 일로 하여 모택동을 찾아 담화하자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후과를 염두에 두고 잠시 머뭇거리던 참이었다. 헌데 모택동의 어투를 보니 그냥 넘어갈 태세가 아닌 것 같았다. 팽설풍은 머리를 쳐들고 엄숙한 표정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2종대가 설립될 당시부터 모순과 분규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부분적 간부와 전사들은 종대의 지휘성원구성에 대해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제외하고 종대의 주요 지휘원들은 모두 제1군단에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3군단에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하지만 분규가 발생한 후 우리는 반복적인 사업을 거쳐 이미 사상상의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습니다. 헌데 먼저 생긴 문제를 풀자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겨 모순이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문제란 뭐요? 상세하게 말해보오.”


모택동이 팽설풍을 직시하며 물었다.


“2종대가 설립돼서 섬북에서의 회사에 이르기까지 31일간 발생한 주요한 사건은 두가지었습니다. 하나는 비판투쟁하면서 일부 간부들을 처리한 것이고 두번째는 일부 사람들을 처형한 것입니다.”


“처형당하고 투쟁맞은 사람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오? 그리고 무슨 원인으로?”


모택동이 엄숙하게 따졌다.


팽설풍은 주저하지 않고 내리 설명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두가지 방면에 있습니다. 첫째는 개별적인 지휘관들이 생활상에서 특수화를 부려 군중들의 불만을 샀으며 둘째는 소수간부들과 전사들이 군중규율을 위반한 행위가 있었습니다. 홍3군단은 팽덕회 사령원의 감독으로 간고소박한 작풍을 견지하였으며 특히 장정도중의 극도로 곤란한 조건에서 상하가 일치하고 관병이 평등하였으며 간부와 사병의 화식은 완전히 동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3군단에 파견되어 온 몇몇 지휘관들은 생활상에서 특수화를 부렸으며 경상적으로 모여 생활개선 등을 하는 것으로 제3군단 많은 장병들의 강렬한 불만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런 작풍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아래의 간부들과 병사들은 불만을 품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방면으로는 그 때의 생활은 극도로 간고하였으며 특히 화식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결과 어떤 사병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군중의 집에서 먹을 것을 훔치는 등 군중규율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팽설풍은 계속 이어내려갔다.


“군부대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원체 교육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어떤 일은 이해할만 한 것들이었지만 제1군단에서 파견되어온 개별적인 지휘관들은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보면서 이는 혁명의 신념을 상실하는 표현으로 판단, 3군단내에서 규율정돈과 간부심사(실제로는 숙반)를 진행하자고 제기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처형하는 수단까지 취하여 많은 사병들의 물의를 일으켰으며 모순을 격화시켰습니다.”

 

2


팽설풍의 어조는 조리가 있고도 거침없었으며 실제적이어서 이치에 맞고도 인간성이 역연했다.


모택동은 자세히 듣기만 하다가 탐문조로 물었다.


“듣자니 황극성이 앞장에서 규율정돈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도 있었소?”


“이는 완전히 실제적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당시 그는 확실히 그런 작법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으면서 태도 역시 견결하였습니다. 그는 저를 찾아 자기의 견해를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지휘관들과도 규율정돈과 간부심사에 대한 자기의 의견과 견해를 피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부분적 간부와 사병들의 저급적인 정서와 불평 등은 평소 지휘관들이 그들을 잘 교육하지 못한 것과도 관계가 있으니 아래의 사병들을 몽땅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황극성은 또 아래의 사병들이 가끔씩 군중규율을 위반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교육이 위주가 되어야 하지 적을 대하듯이 자기의 동지를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우기 우리는 갓 진펄을 지나왔기에 많은 사병들이 모두 기진맥진하였으며 현재 여전히 곤란이 계속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차 규율정돈과 간부심사를 개시하는 것은 그닥 합리한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말한 팽설풍은 모택동을 직시하며 많은 함의를 담고 물었다.


“전 규율정돈과 간부심사를 반대한 황극성에 대한 모위원의 견해와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모택동은 팽설풍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담배를 붙여물고는 팽설풍한테 반문했다.


“그래 당신은 황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전 황극성의 의견이 정확하며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황극성의 의견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믿음성이 없어하오. 그가 지도사업을 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사병들을 거느리는 것은 더욱 안되며 회의를 열고 그를 비판투쟁을 하자고 제기하고 있소…”


방안에서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러자 모택동은 화제를 바꾸었다.


“됐소됐소. 잠시 황극성에 대해 논하지 말고 사람들을 처형한 일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오. 처형당한 사람들의 이름 및 기본정황과 처형당하게 된 원인 등을 말해보오.”


그러자 팽설풍은 견결했다.


“황극성 동지의 문제를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일을 얘기하자면 황극성과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군사재판소의 소장이었으니깐요.”

모택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설풍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대가 합달포에서의 휴식시일이 너무 짧았기에 사병들의 체력이 제때에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섬북으로 진군할 때 대오에서 떨어지는 사병들이 매일 나타났었습니다. 이를 두고 개별적 지휘관들은 대오에서 떨어진 사병을 적에게 투항할 수 있다고 의심하면서 이런 사병들을 잔혹하게 잡아 군사재판소에서 심판처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재판소는 그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허다한 결정은 상급에서 결정한 후 재판소에서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대오에서 떨어진 한 위생대장에 대해 상급에서 총살할 것을 명령했지만 황극성 동지는 이를 견견히 반대하면서 총살부고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황극성 동지가 극구 막았으나 그 총살은 어김없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외 백성의 집에서 달걀 2알을 얻어먹고 돈을 내지 않은 3군단 제11퇀의 모련 련장인 원평을 사형하려 할 때에도 황극성동지는 견결히 반대하면서 우리의 동지가 죽음의 고비를 헤치며 여기까지 부대를 따라왔는데 그를 믿지 못하는가고 하면서 원평을 변호해나섰습니다. 그리고 11퇀의 정위 역시 원평을 총살하는 것에 대해 견결히 반대하였기에 원평의 문제는 타당하게 처리될 수 있었습니다.”

……

모택동과 팽설풍의 담화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팽설풍은 모택동을 설복해보려고 인내심이 있게 간청하기도 하고 또한 도리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모택동이 성내면 같이 성내면서 타협하지 않기도 하였다. 특히 황극성의 문제를 논할 때 모택동이 군규율을 강조하면서 황극성을 질책하면서 책상을 치자 팽설풍 역시 책상을 치면서 한보도 양보하지 않으며 설전, 끝내 모택동을 설복해내는 것으로 위기에 처한 황극성을 구해냈다고 한다.


후에 팽설풍이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되자 모택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팽설풍이 자기와 엇서던 때의 일을 외웠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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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으로 책상 치며 모택동과 설전한 홍군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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