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남자들은 모두 성감적인 여인을 좋아한다. 그녀들한테 일종 특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면 민국시기 남자 3000명의 자기의 석류치마폭에 감고 논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민국의 서적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흔히 임휘인, 사빙심 등 여재들의 스토리를 볼 수 있으나 광주의 여미언(余美颜)에 대해서는 크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실 지난 세기 20년대 여미언은 세상에 잘 알려진 가문의 규수었으며 그녀의 인생행로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화려하였다.
한편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기에 조용하고도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었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늘 집밖에서 돌다보니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어 늘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녀는 3000명에 달하는 사내들과 여관방에서 나체로 침대에 올랐는바 말그대로 민국시기 제1의 “성개방”조류의 선봉었다. 그녀는 남자들한테서 받은 정서(情书)를 책으로 출판하였을뿐만 아니라 책이름을 “모던정서(摩登情书)”라고 달았다. 당시 그녀가 출판한 이 책은 서점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중의 하나로 되었다고 한다.
여미언은 광동 대산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태가 아름답고 총명하였는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체로 영문을 전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딸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미언은 공부를 마친 후 늘 고담준론과 자유해방을 주장하는 신문학파로 변하였다. 그녀의 출신신분은 봉건색채가 짙었지만 그가 배운 교육은 오히려 서양문명이었으며 특히 외국서적들을 통해 그녀는 서양의 애정스토리를 많이 접촉, 이는 그녀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계기로 되었다.
청춘기에 들어서면서 여미언의 아름다운 자태는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그녀는 신생사물을 좋아했는바 새로 나온 패션을 입기 좋아했고 친구사귀기를 즐겼으며 특히 남들과의 접촉에서 호방하고 대범하기도 했다.
친구들 속에서 그녀는 늘 독특한 주장을 내세웠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친구들이 많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는 일부 부랑배들도 있었다. 당시 여미언의 부친은 늘 상업에 몰두하다 보니 딸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못했고 모친 또한 그냥 딸에 대해 엄숙하게 타이르지 못했다.
한번은 여미언이 외갓집으로 갔을 때 옆집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또한 여미언도 상대방의 준수한 모습에 추파를 보내기도 했으며 나중에 둘은 “백년가약”을 약속했으나 여미언의 부친 여대경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여대경은 상인이었기에 줄곧 딸이 배경이 좋은 가정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것을 바랐으며 그것으로 자기 상업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과 부친의 노력을 거쳐 여미언은 개평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담씨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여미언의 남편 역시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였으나 그들의 결혼생활까지 순리로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여미언의 남편은 상업경영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여미언은 고독한 여인으로 되었다. 이미 남자를 알게 된 여미언은 결국 탈선행위를 하게 되었고 얼마 뒤 그녀의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남편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혼한 여미언은 부친에 의해 기예학교를 다니면서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여미언은 더는 모든 것이 염두에 없었다. 애정에 대한 갈망 등은 그녀로 하여금 더는 유언비어에 얽매이지 않게 했으며 자신의 성적취향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녀는 각종 유형의 사내들과 교류, 그들이 돈만 쓰면 그들을 상대로 춤을 추고 침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내들과는 무릇 그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짧디짧은 4년간 여미언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사내와 침대에 함께 올랐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탕녀”라고 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생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사내들과의 많은 교류중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또한 남자들을 냉대하면서 조롱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개변할 수 없었으며 자기의 이상 또한 달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차 자유와 이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8년 4월, 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한 여객선 갑판에는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이런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더니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며 바다로 투신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여미언이었다.
그녀는 기이한 여인이었고 시대의 “욕녀”이기도 했으며 더욱이는 고집스레 자유를 추구해온 여인이었다.
BEST 뉴스
-
엇갈린 시선, 닿지 않는 마음 — 한중 젊은 세대의 온도차
● 허 훈 최근 한국에서 발표된 한 여론조사 결과가 중국 온라인 공간에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 청년층의 다수가 중국을 ‘가장 비호감 가는 국가’ 중 하나로 꼽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마치 이웃이 적의를 품고 노려보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기묘한 장면처럼 ... -
왜 예술인에게 ‘재교육’이 필요한가?
6월의 비는 쉼과 시작 사이를 적신다. 벌써 반년이 지나고, 빗소리는 지나온 시간에 안부를 전하듯 마음을 두드린다. 그리고 지금, 그 빗줄기처럼 우리에게 용기를 속삭인다. ‘다시 시작하라, 다시 배움에 도전하라’ 라고... 무용, 음악, 미술, 연극, 뮤지컬 등, 예술을 전공한 수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 -
“나도 드라마 속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다”
● 허 훈 가난한 사람을 다루는 드라마를 네 나라, 한국·미국·중국·일본의 작품을 함께 놓고 본다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네 나라 중 유독 한 곳만, 가난이 너무도 ‘예쁘게’ 포장돼 있다. 바로 중국이다. 요즘 중국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미드·한드·일드나 본다”는 말이 유행처럼 ... -
“중국이 최대 피해자”?…美·伊 전쟁 프레임 뒤에 숨은 불안한 백악관
미국 언론이 “미국과 이란이 충돌할 경우 가장 큰 피해자는 중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테헤란의 폐허가 된 거리에서는 한 청년이 무너진 벽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있고, 제국에겐 최후통첩뿐이다.” 이 짧은 문장은, 대결 국면의 중심에서 중국을 지목하는 서방의 담론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 -
디아스포라와 AI 시대, 한글교육의 도전과 과제
허 훈 | 칼럼니스트 “디아스포라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지난 6월 23일 서울 종이나라박물관에서 열린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 제10회 발표회에서 전후석 다큐멘터리 감독이 던진 이 말은 한글교육의 본질과 미래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표현이었다. 한글교육은 더 이상 단순한 문자 교육... -
역사 속 ‘신에 가까운’ 일곱 사람…제갈량도 5위 밖, 1위는 누구였을까
각 시대마다 역사 흐름을 바꾸는 탁월한 인물들이 등장해왔다. 이들은 그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불리며 사회와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삼국연의>로 널리 알려진 제갈량은 이러한 인물 중 대표적으로 손꼽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그조차도 ‘신인’ 순위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실시간뉴스
-
“제주도가 중국인의 섬?”…무질서한 중국 관광객에 쏟아지는 비판
-
역사 속 ‘신에 가까운’ 일곱 사람…제갈량도 5위 밖, 1위는 누구였을까
-
단동의 밤, ‘해당화’ 식당에서 피어난 이념의 그림자
-
“9·18 사변의 전주곡—만보산 사건의 전말”
-
[역사 바로보기] 중국사 속 3대 허위사실…'주유왕 봉화사태'부터 '강건성세'까지
-
국경을 초월한 영웅, 이다 스케오의 희생과 평화의 메시지
-
연변조선족자치주 8개 현·시 지명에 스민 역사와 문화의 숨결
-
1960년대 북-중 관계의 악화와 저우언라이 방북
-
중국 5대 종교 중 신도가 가장 많은 종교는?
-
중국 유명 역사 이야기 10편 01 : 와신상담 (卧薪尝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