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1939년 이후 상하이의 거리는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됐다.
전선에서는 중국군과 일본군이 맞섰지만, 조계지와 골목, 은행과 신문사에서는 국민당 정보기관 군통(軍統)과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기관 '76호'가 치열한 비밀전쟁을 벌였다. 총격과 납치, 암살과 고문이 이어졌고, 변절자는 곧 상대 진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겉으로는 항일 정보조직과 친일 특무기관의 대결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일본 정보기관, 소련 정보망까지 얽힌 복잡한 암선이 존재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76호는 일본의 지원 아래 항일세력과 언론, 금융계를 탄압한 대표적인 친일 특무조직이었다.
76호를 이끈 핵심 인물은 이사군(李士群)과 정묵촌(丁默邨)이었다. 이사군은 공산당 정보조직과 국민당 중통을 거쳐 일본 정보기관과 손잡았으며, 일부 연구에서는 이후에도 소련 또는 공산당과 일정한 접촉을 유지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결정적 사료는 부족하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일본의 자금과 무기를 바탕으로 76호를 조직해 항일세력 탄압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1939년 일본의 지원으로 출범한 76호는 정보·통신·행동·심문 조직을 갖춘 거대한 특무기관으로 성장했다. 상하이 시민들에게 '76호'는 한 번 끌려가면 살아 나오기 어려운 공포의 상징이었다.
군통 역시 상하이에 잠복조직을 유지하며 일본군과 친일 인사 암살, 정보수집, 파괴공작을 계속했다. 1939년 군통은 청방 거물 계운경을 암살했고, 이후 양측은 암살과 보복을 거듭하며 피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특히 군통 간부 왕천목이 76호로 투항하면서 군통의 상하이·화북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반대로 군통도 일본군 장교와 왕징웨이 정권 인사들을 겨냥한 암살을 이어가며 맞섰다.
비밀전은 언론과 금융 분야로도 번졌다. 76호는 왕징웨이 정권을 비판한 신문사를 습격하고 기자와 편집자를 잇달아 살해했으며, 군통은 친일 언론인을 암살하며 대응했다. 1941년 왕징웨이 정권이 중앙저축은행을 설립하고 중저권 유통을 추진하자 군통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암살과 폭탄공격에 나섰고, 76호는 충칭 정부 계열 은행을 공격하며 맞불을 놓았다. 그 과정에서 은행원과 언론인 등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1943년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면서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도 균열이 나타났다. 당시 76호의 실권을 장악한 이사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일본군 내부와 왕징웨이 정권에서도 점차 경계의 대상이 됐다.
1943년 9월 일본 헌병 관계자가 마련한 연회에 참석한 그는 식사 후 급성 복통 증세를 보였고 사흘 뒤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독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실행 주체와 경위는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다. 군통의 공작, 왕징웨이 정권 내부 권력투쟁, 일본군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사군의 죽음 이후 76호는 급속히 약화됐고,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이 붕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겉으로만 보면 군통이 마지막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비밀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없었다. 군통 역시 변절과 조직 붕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76호도 일본 제국의 몰락과 함께 종말을 맞았다.
결국 승패를 가른 것은 암살 기술이나 첩보 공작이 아니라 전쟁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이름 없이 거리와 은행, 신문사,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상하이의 비밀전쟁은 영웅과 악당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침략과 협력, 저항과 배신, 신념과 생존이 뒤엉킨 민국 시대의 가장 어두운 역사로 남아 있다.
BEST 뉴스
-
[연변 기행 ⑥] 한눈에 3국을 품은 땅, 훈춘 방천… 국경 끝에서 만나는 동북아의 역사
중국 지린성 훈춘시 방천민속촌 입구. 전통 양식의 대형 패루를 중심으로 조선족 문화 체험과 향토음식, 민속공연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연길의 조선족 문화와 서시장의 활기까지 둘러본 연변 기행은 이제 동북아의 가장 동쪽 끝을 향... -
[민국의 그림자 ④] ‘구국’을 내세운 투항…왕징웨이의 선택은 왜 실패했나
[인터내셔널포커스] 1910년 봄,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 섭정왕 자이펑을 겨냥한 폭탄 암살 계획이 적발됐다. 주도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혁명가 왕징웨이(汪精卫·왕정위)였다. 체포된 그는 죽음을 각오한 듯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옥중에서 남긴 “칼을 끌어 한 번 통쾌하게 죽어 젊은 날의 뜻을 ... -
줄 하나 못 지키면서 관광대국을 말할 수 있나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이곳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첨단 시설이 아니라 '질서'다. 그런데 최근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일부 중국인 이용객 수십 명이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자 차단봉 아래를 통과해 한꺼번에 뛰어가는 장면이 공개됐다. 정상적으로 줄을 서 있던 승객들은 순... -
[연변 기행 ⑦]두만강이 들려주는 역사… 도문에서 만난 국경과 독립운동의 현장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국문(國門) 일대. 북한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국경 관문이 나란히 자리한 중국 대표 국경도시의 모습. [인터내셔널포커스] 연변 기행 여섯 번째 이야기인 훈춘 방천이 '한눈에 3국을 바라보는 동북아의 끝'이었다면, 이번에는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 -
천년의 '해동성국'…훈춘 발해고진, 역사와 야경이 빚어낸 여름 명소
[인터내셔널포커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발해 문화와 현대 관광 콘텐츠가 만난 중국 지린성 국경도시 훈춘의 발해고진이 여름 관광 성수기를 맞아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당나라 양식의 건축미와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 화려한 야간 콘텐츠가 어우러지며 중국 각지뿐 아니라 러시아 등 해외 관광객... -
[연변 기행 ⑧] 홍범도의 함성이 울려 퍼진 봉오동… 화룡에 새겨진 독립전쟁의 기억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봉오동 전투기념비.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봉오동 전투를 기리는 역사 현장이다. [인터내셔널포커스] 도문을 떠나 남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자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던 국경 풍경은 어느새 깊은 산세로 바뀌기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