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동포 한국생활 체험담
2008년 1월, 나는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 혜택자의 한사람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짐을 푼 곳은 충북 어느 시골마을의 단칸방,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온 오빠가 자취하고 있는 월세방이였다. 추운 겨울내내 전기장판으로 버티고 있다는 방은 들어서자 냉기가 확 몰려왔다.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안에 발을 들이밀고 녹이면서 나는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어려움들이 내 앞에 닥쳐왔음을 느껴야 했다.
이튿날, 첫 절차로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고 취업교육을 신청한 후 하루라도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인들의 말투나 억양, 생활습관 등을 살폈다. 그럭저럭 두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취업교육을 받게 되었다. 같이 한국에 온 많은 중국동포들과 어울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아 이래서 교육이 필요한거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다. 별로 번거롭기만 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돼 교육받으로 가기전 까지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는데 갈팡질팡하는 동포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성공한 이국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필요이상의 교육이였다. 그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먼가 자신심도 생겼다.
교육이 끝난 이튿날 나는 곧바로 교차로 신문을 주어다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식당은 일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다던데 회사쪽으로 알아볼가? 아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알아보자,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비용을 줄여야 돈이 많이 남을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최대한 교통비 없이 다닐 수 있는 구역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외국인은 채용 안한다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행이도 면접오라는 곳이 하나 생겼다. 숨이 훌 나온다. 그래, 래일 좋은 인상을 남기는거야, 하나하나 물어가며 열심히 하는거야, 열심히 하느라면 되겠지. 설마 한국땅에 내가 발붙일 자리가 없으랴. 나는 스스로 화이팅을 부르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약속된 식당에 도착했다. 손짜장면집이다. 중년의 첫인상에도 칼칼해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다. 인사가 끝나고 식당일은 해봤냐, 어데 사냐 등을 묻는다. 나는 솔직히 식당일은 못해봤고 중국에서 왔으며 사는건 걸어서 십분정도 거리밖에 안되는 곳이라고 털어놓았다. 잔뜩 긴장해서 단숨에 총알처럼 털어놓고나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이 넓어 청소가 힘들거라면서 이틀 일해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야호, 아무튼 면접은 합격되였다.
첫 출근날, 나는 규정된 출근시간 십오분전에 도착했다. 열심히 해야지, 사모님이 나와서 밀걸레며 비자루를 꺼내주고 청소부터 하라고 한다. 이런 저런 지적을 받으며 겨우 청소를 끝내니 이번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라고 한다. 꾸중반, 핀잔반을 들으며 머리 들 새도 없이 겨우 청소를 끝내고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훌 나온다. 여태 나는 청소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바보였단말인가. 물 한모금 마시고 숨을 들이쉬는데 사모님이 메뉴판부터 익히고 홀 테이블 번호부터 장악하란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생소한 낱말들을 잔뜩 긴장해서 외우고 홀번호를 눈으로 헤아리는데 치익 하얀 승용차가 문앞에 정차하더니 남자손님 두분이 들어온다. 어쩔가. 어쩔가.
“머해요? 메뉴판 가지고 물과 컵 들고 빨리 손님 맞이해야지.” 사모님이 냅따 소리지른다. 이미 내친 걸음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메뉴판을 옆구리에 끼고 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물병을 들고 손님앞에 다가갔다. 아, 그 떨림과 긴장감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아무튼 얼떨결에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전표에 적어 사모님한테 가져다가 보이니 장부에 먼저 적은 후 주방에 소리치면서 들여보내란다. 짜장면이면 짜장 하나 있어요 이렇게 말이다. 장부에 적고 개미소리만하게 짜장 하나에요...하니까 주방에서 면빼는 아저씨가 크게 소리쳐야지 그렇게 속삭이면 못들어요 한다. 어정쩡해 있는데 사모님이 빨리 반찬 챙겨가야지 머하냐고 한다. 부랴부랴 김치를 담으려니 김치를 어떻게 담으면 좋을지 또 망설여진다.
말귀를 못알아들어서 혼나고 주문 잘못 받아와서 혼나고 음식을 다른 테이블로 가져가서 혼나고. 아무튼 온하루 혼났다. 일이 끝나고 퇴근 준비로 마무리를 하면서 나는 아무래도 온하루 혼나기만 했으니 이제 짤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님과 사모님이 머라고 의논하더니 사모님이 래일부터 계속 나오라고 한다. 식당일을 첨 해봐서 많이 서툴지만 열심히 하고 노력하려는 태도가 좋단다. 울다가 웃을 일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가볍던지, 드디어 한국에서 내가 일할 자리를 찾았다는 기쁨, 먼가 새로운 발자국을 비로소 내디뎠다는 뿌듯함이 몰려와 하루동안의 피로도 저 멀리 날려간듯 했고 하루동안 깨지고 혼난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나는 퉁퉁 부은 다리를 매만지면서도, 손님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내가 일할수 있게 된것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가고 배워가면서 내 집처럼 아낄수 있는건 아끼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가면서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손님들한테도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일부 손님들은 가면서 “연변아가씨가 참 착실하네요” 등의 칭찬도 해주군 했다. 걸음걸음 따라다니던 사모님 잔소리도 어느날 보니 뚝 끊긴게 아닌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머, 하면서 긍정도 보내주었다.
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7개월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마음 편하게 내 집같은 식당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서 집에 보낸 돈도 적지 않다. 요즘 나는 먼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충실함에 행복해진다. 내가 노력한만큼 주어진다는 말,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한국에 오는 모든 동포 분들에게 해주고싶다. 그러면서 누구나 참되고 성공한 한국생활을 이룩해나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김경화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중국동포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이튿날, 첫 절차로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고 취업교육을 신청한 후 하루라도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인들의 말투나 억양, 생활습관 등을 살폈다. 그럭저럭 두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취업교육을 받게 되었다. 같이 한국에 온 많은 중국동포들과 어울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아 이래서 교육이 필요한거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다. 별로 번거롭기만 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돼 교육받으로 가기전 까지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는데 갈팡질팡하는 동포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성공한 이국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필요이상의 교육이였다. 그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먼가 자신심도 생겼다.
교육이 끝난 이튿날 나는 곧바로 교차로 신문을 주어다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식당은 일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다던데 회사쪽으로 알아볼가? 아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알아보자,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비용을 줄여야 돈이 많이 남을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최대한 교통비 없이 다닐 수 있는 구역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외국인은 채용 안한다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행이도 면접오라는 곳이 하나 생겼다. 숨이 훌 나온다. 그래, 래일 좋은 인상을 남기는거야, 하나하나 물어가며 열심히 하는거야, 열심히 하느라면 되겠지. 설마 한국땅에 내가 발붙일 자리가 없으랴. 나는 스스로 화이팅을 부르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약속된 식당에 도착했다. 손짜장면집이다. 중년의 첫인상에도 칼칼해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다. 인사가 끝나고 식당일은 해봤냐, 어데 사냐 등을 묻는다. 나는 솔직히 식당일은 못해봤고 중국에서 왔으며 사는건 걸어서 십분정도 거리밖에 안되는 곳이라고 털어놓았다. 잔뜩 긴장해서 단숨에 총알처럼 털어놓고나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이 넓어 청소가 힘들거라면서 이틀 일해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야호, 아무튼 면접은 합격되였다.
첫 출근날, 나는 규정된 출근시간 십오분전에 도착했다. 열심히 해야지, 사모님이 나와서 밀걸레며 비자루를 꺼내주고 청소부터 하라고 한다. 이런 저런 지적을 받으며 겨우 청소를 끝내니 이번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라고 한다. 꾸중반, 핀잔반을 들으며 머리 들 새도 없이 겨우 청소를 끝내고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훌 나온다. 여태 나는 청소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바보였단말인가. 물 한모금 마시고 숨을 들이쉬는데 사모님이 메뉴판부터 익히고 홀 테이블 번호부터 장악하란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생소한 낱말들을 잔뜩 긴장해서 외우고 홀번호를 눈으로 헤아리는데 치익 하얀 승용차가 문앞에 정차하더니 남자손님 두분이 들어온다. 어쩔가. 어쩔가.
“머해요? 메뉴판 가지고 물과 컵 들고 빨리 손님 맞이해야지.” 사모님이 냅따 소리지른다. 이미 내친 걸음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메뉴판을 옆구리에 끼고 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물병을 들고 손님앞에 다가갔다. 아, 그 떨림과 긴장감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아무튼 얼떨결에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전표에 적어 사모님한테 가져다가 보이니 장부에 먼저 적은 후 주방에 소리치면서 들여보내란다. 짜장면이면 짜장 하나 있어요 이렇게 말이다. 장부에 적고 개미소리만하게 짜장 하나에요...하니까 주방에서 면빼는 아저씨가 크게 소리쳐야지 그렇게 속삭이면 못들어요 한다. 어정쩡해 있는데 사모님이 빨리 반찬 챙겨가야지 머하냐고 한다. 부랴부랴 김치를 담으려니 김치를 어떻게 담으면 좋을지 또 망설여진다.
말귀를 못알아들어서 혼나고 주문 잘못 받아와서 혼나고 음식을 다른 테이블로 가져가서 혼나고. 아무튼 온하루 혼났다. 일이 끝나고 퇴근 준비로 마무리를 하면서 나는 아무래도 온하루 혼나기만 했으니 이제 짤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님과 사모님이 머라고 의논하더니 사모님이 래일부터 계속 나오라고 한다. 식당일을 첨 해봐서 많이 서툴지만 열심히 하고 노력하려는 태도가 좋단다. 울다가 웃을 일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가볍던지, 드디어 한국에서 내가 일할 자리를 찾았다는 기쁨, 먼가 새로운 발자국을 비로소 내디뎠다는 뿌듯함이 몰려와 하루동안의 피로도 저 멀리 날려간듯 했고 하루동안 깨지고 혼난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나는 퉁퉁 부은 다리를 매만지면서도, 손님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내가 일할수 있게 된것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가고 배워가면서 내 집처럼 아낄수 있는건 아끼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가면서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손님들한테도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일부 손님들은 가면서 “연변아가씨가 참 착실하네요” 등의 칭찬도 해주군 했다. 걸음걸음 따라다니던 사모님 잔소리도 어느날 보니 뚝 끊긴게 아닌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머, 하면서 긍정도 보내주었다.
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7개월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마음 편하게 내 집같은 식당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서 집에 보낸 돈도 적지 않다. 요즘 나는 먼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충실함에 행복해진다. 내가 노력한만큼 주어진다는 말,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한국에 오는 모든 동포 분들에게 해주고싶다. 그러면서 누구나 참되고 성공한 한국생활을 이룩해나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김경화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중국동포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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