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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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대백과(12)“몸”을 감추는 “검은 동굴”
    “몸”을 감출줄 아는 “검은 동굴” “검은 동굴”이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는 “큰 검은 구멍”으로 알겠지만 기실 여기서 말하는 “검은 동굴”이란 일종 아직 인류가 알지 못하는 천체를 말하는데 그것의 “몸집”이 대단히 크고 밀도가 아주 높으며 자기마당능력이 아주 강하여 지어는 그 어떠한 빛도 그것의 세력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인류가 직접 관측할 방법이 없기에 과학자들은 그것을 두고 형상적으로 “검은 동굴”이라고 한 것이다. “검은 동굴”은 자기의 “몸”을 감추는데 아주 정통했는바 과학가들은 오직 그것 주위의 천체상태와 그것이 내뿜는 ×광선을 통해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행성들이 다른 방향을 향해 발산된 빛이 가능하게 “검은 동굴”의 강한 자기마당에 의해 다시 발산되어 지구로 오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항성이 “얼굴”을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동시에 그것의 측면과 뒤면도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에 미국의 천문학자들은 은하계의 중심에 “전원발산기지”가 있다는 것을 탐측, 이 결과로 보아 은하계중심에 “검은 동굴”은 은하계중심에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대다수의 우주학자들은 “검은 동굴”은 대형성계의 중앙에 있으면서 장기간 물질을 흡인하고 저장하여 형성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영국의 연구일군들은 도리어 가능하게 우주에 많고 많은 작은 “검은 동굴”이 있었고 이런 “검은 동굴”들이 “독립성장”을 하다가 서로 융합되면서 비로서 지금의 아주 큰 “몸체”를 가진 “검은 동굴”로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천문학자들은 “검은 동굴”이 “노래”할줄도 안다는 것을 발견, 그러나 그 소리는 아주 낮아 인류의 귀로는 도무지 들을 수 없다. 이는 지금까지 우주에서 탐측해낸 가장 낮고 침침한 소리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7
  • 연변천양천 , 슈퍼리그서 뛰던 외적선수 영입할 듯
    [동포투데이 스포츠] 신문화보에 따르면 연변구단은 슈퍼리그서 뛰던 외적선수를 영입할 계획인 것으로 밝혀졌다. 올시즌 11라운드까지의 경기를 치른 연변팀, 단 8골을 기록하며 형편없는 공격수준을 그대로 내보였다. 강급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외적선수를 교체해야 하는 실정이다. 중국 갑급리그의 외적선수 정책은 3+1이다. 즉 시즌도중 단 한번의 외적선수교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연변팀에 있는 3명의 외적선수가운데서 고작 김기수만 괜찮을뿐, 수비수 원태연과 스트라이커 김도형은 이미 감독진의 신임을 잃었다. 그러나 외적용병영입 제한으로 단 한명만 교체할 수 있다. 연변팀 코치는 “누구를 교체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반드시 교체해야 하는 것이 있다. 위치 역시 명확해졌다. 바로 공격수이다. 목표는 바로 중국슈퍼리그 2차 이적에서 도태되어 나온 외적선수이다. 이런 외적선수들은 몸값도 비싸지 않고 중국 생활에도 적응이 되었다”고 밝혔다. 현재, 광주부력팀의 라얼슨과 하남 건업팀의 스트라이커 라페르 등이 구단의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시즌들을 살펴보면 연변팀이 시즌도중 교체한 외적선수는 늘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예하면 2012시즌의 보스니아 스트라이커 지치와 2011시즌의 말리 국가대표팀 쿠리바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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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中 광동성 시 청급 “나체관원” 9명 직위 조정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광동성 조직부에 따르면 목전까지 광동성에서는 “나체관원(裸官)”들의 직위를 집중적으로 조정한 가운데 그중 시와 청급 관원 9명이 직위를 조정당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망이 일전 전했다. 국가, 배우자 자녀 해외이주 관원 엄히 관리 올 2월, 중국 중앙판공청과 국무원판공청에서는 “배우자거나 자녀들이 이미 해외에 이주한 국가 공무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데 대한 시행규정”을 새로 발부했고 광동성에서는 “나관”은 원칙상에서 당정 정급 직무(正职)거나 중요하고 민감한 일터의 지도간부 직무를 담임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앞서 국가에서는 공무원들에게 배우자거나 자녀의 해외이주 상황을 여실히 신고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지난해 중반부터 시작된 중국 반부패에서 중앙규률검사위원회는 “나관”들에 대한 조사관리를 엄히 진행하고 있다. 광동성, “나관” 직위 전면 조정 특히 중앙 제8순시조는 광동성에 대한 순시조사를 마친 후, 광동의 일부 지역에 “나관” 문제가 엄중하다고 지적했고 따라서 광동성에서는 “나관”들을 엄히 조사, 전면 정돈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제일 먼저 대외개방을 실시했던 광동성에는 아내와 자식을 해외에 이주시킨 “나관”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광동성에서는 “나관”들에게 외국에 정착시킨 아내를 돌아와(귀국시켜) 살게 하든지, 아니면 정한 기한 내에 관원의 직무일터를 조정하든지 두가지중 한가지를 선택하게 했다. 이렇게 광동성에서는 성급 소속의 관원들에 대한 조정을 4월 말 전으로 기본상 끝냈고 기타 관원들에 대한 조정은 5월 말 전으로 기본상 끝냈다. 홍콩, 오문과 이웃한 동관시에서는 도합 127명 관원들이 직위, 일터를 조정당했고 교향강문에서는 128명 간부들이 이미 임직해 있는 일터, 직위를 조정당했다. “나체관원”과 부패 “나체관원”들은 탐관과는 다르다. 하지만 양자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체관원”들은 첫째, 가족을 해외에 이주해 보내고 그 방대한 지출을 대기 위해서는 뇌무수수를 하지 않을 수 없고 둘째, 아내와 장기간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나관”들은 국내에서 “정부(情妇)”를 부양하고 있는데 탐오회뢰를 하지 않으면 정부를 부양할 수 없으며 셋째, “나관”들은 탐오회뢰한 거액의 자금을 해외에 전이시키면 안전하다고 인정하고 넷째, 탐오회뢰가 들통이 나 조사를 받더라도 가족은 연루되지 않고 재산도 손실 볼 것 없으니 자기만 희생하면 된다고 인정, 뒷근심이 없어 더욱 대담하게 부패를 행한다고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최근년래 탐오부패사건 관원들 가운데서 “나관” 비례가 날로 커지고 있다. 절강성 건설청 전 부청장 양수주, 운남성 전 성위서기 고엄, 귀주성 교통청 전 청장 로만리, 섬서성 전 정협 부주석 방가옥, 복건성 공상행정관리국 전 국장 주금화 등 탐관들이 모두 “나관”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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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재외동포재단, ‘한상넷’ 개편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글로벌 한민족공동체 구현의 중심기관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조규형)은 최근 재외동포의 모국과의 경제활동 증가 추세에 맞춰 '한상넷'(http://www.hansang.net)의 주요 기능을 개선하고 컨텐츠를 보완해 새롭게 오픈했다고 밝혔다. 이번 개편은 재외동포들의 국내 경제활동 시에 필요한 정보 수집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자 편의제고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새롭게 단장한 한상넷의 메뉴는 ▲한상 BIZ GUIDE ▲한상정보 ▲한상소식 ▲다시 보는 한상대회로 구성되었다. 특히, ‘한상 BIZ GUIDE’ 내 <국내경제활동가이드>를 통해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 부동산투자, 예금 등 거래형태별로 기본 절차 등 필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전문가를 통한 메일 상담도 가능하다. 또한, 한상넷의 대표 비즈니스 메뉴인 ‘1:1 비즈니스 매칭‘은 실시간 자동 검색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사용자가 입력한 주요품목 키워드를 통한 매칭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다. 모바일 페이지도 개편됐다. 기존 한상넷 회원은 모바일을 통해서도 한상대회 등록이 가능하며, 한상넷의 주요정보도 온라인과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오는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한상대회’의 사전등록이 8월 10일까지 진행된다. 온라인 등록은 한상넷(hansang.net)을 통해 가능하며, 오프라인 등록은 등록신청서 작성 후 본부사무국으로 송부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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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전망대] 연변천양천 2연승 쟁취, “효력카드”는 사력
    [축구평론가 민함] 7일 오후 3시, 연변팀은 연길홈구장에서 심양중택팀과 동북 더비전을 치르게 된다. 현재의 연변팀 사정은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출중한 스트라이커(前锋)이 없는데다 수비선의 경기력도 허점이 자주 보이며 선명한 중원핵심도 없는 상황이다. 비록 지난 청도중능과 비기고 광동일지천과도 2 : 1로 이겨 구단분위기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연변팀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란 지적을 다시 한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감독의 기전술카드, 그것이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지난 2경기에서의 1승 1무가 그것을 잘 시사해준다. 하지만 감독의 카드 그것 역시 전반 경기를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플레이는 선수들이 펼치고 골은 선수들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제날 차범근 감독이 한국의 수원삼성을 지휘하던 시기 한 경기에서 팀이 상대방과 승부차기에 돌입하자 차범근 감독은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구나” 하며 휴식실로 들어가 승부차기 장면을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승부차기에 들어서면 감독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다면 경기전에 감독이 아무리 잘 포치해도 직접 공을 다루는 선수들이 잘 이행해주지 않으면 어쩌는 수가 없다. 이번 대 심양중택전은 자못 의의가 큰 경기이다. 우선 홈장 2연승을 기록해 팀 상승세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웃으면서 다음단계의 경기를 맞아옴에 있어서도 자못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홈장2연승이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론과 감독의 지휘에 의해서만이 이룩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효력있는 “카드”는 그래도 직접 공을 다루는 선수들의 “사력”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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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해외견문 시리즈(8)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스페인 항구도시 비고와 마린에서 눈코뜰사이 없이 바삐 보내다보니 날자가 가는줄조차 모르다가 그날 기관실의 김영림군한테 물어서야 그날이 6월 21일이란걸 알았다. 마린은 자그마한 항구도시었는데 첫 번째 특징이라면 하루해가 23시가 되어서야 지군 했다. 해마다 6월이면 그곳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해뜨는 시간도 늦지 않아서 아침 3시좌우에 일출하니까 해가 진 후 잠간 어두워졌다가 인츰 밝아지는 셈이었다. 마린의 두번째 특점이라면 항구를 벗어나면 그 다음의 도시건물은 몽땅 경사도가 비교적 강한 산비탈에 우중충 세워져 있는 것이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모두가 자가용을 몰고다니니 말이지 중국처럼 자전거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라면 큰 일이겠구나 하는 감이 들었다. 자가용이라 하면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흑인인부들마저 자가용을 몰고와서 일하고는 다시 옷을 바꿔입고는 자가용을 몰고 퇴근하는 것이 퍽 우리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바로 그 마린에서 주방장이 몬테비데오에 입항했을 때 무단적 외출로 며칠간 근무하지 않아 강제하선을 하는 통에 내가 부득불 주방장 직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방장이라 하면 갑판장과 기관실의 조기장과 같은 계급장이었는데 승선한 뒤 석달밖에 안되는 나한테 있어서 그 진급은 너무나도 빨랐고, 또한 그만큼 힘에 부치기도 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눈코뜰 사이 없다는 말도 나왔고 또한 한낱 중국 조선족선원인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와는 반대로 항구에 와서는 해상과 달리 인부들의 작업과 작업량만을 감독하고 체크만 하는 선원들은 팔자가 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무식한 “배놈”들의 취미란 뭐겠는가. 또 계집들의 궁둥이를 밝히는 수밖에. 그 때 항구입구에서 약 500미터쯤 도보로 걷노라면 전문 “배놈”들을 대상해서 차린 창녀촌이 있었는데 본선의 선원들은 쩍하면 거기로 찾아가기가 일쑤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값을 흥정하여 아가씨 한명씩 “임대”해서는 선박으로 데리고 와서 온밤 즐기기도 했다. 그날 아침도 내가 주방에서 밥지을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한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무쵸아밍고 올라?(친구, 안녕하세요?)”라고 하더니 나의 볼에 살짝 키스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뒤이어 2항사 정명복씨가 따라들어오면서 이 아가씨가 배고파서 그러는데 라면 한그릇 좀 꿇여줄 수 없는가고 했다. 참, 두 사람이 할 주방일을 혼자서 도맡은 것도 억울한데 남이 즐기던 년의 음식까지 만들어주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국사람들이 돼지라면 돼지로 되는 선박이고 그들이 죽으라 하면 죽는 흉내까지도 내야 하는 세상이니까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매일마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는 밤 10시까지 바삐 돌아쳐야 했는데 선박이 세계에서 유명한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것도 한번 얼핏 보았을뿐이었다. 선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중동사태의 긴장함에 따라 미군함정들이 그 때 수에즈운하를 지났고 본선에 무기를 실었나 해서 미군의 헬리꼽터가 날아와서 선장과 무선전대화까지 했다는데 나는 그것을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1박 2일간 입항해 있은 것은 그렇게도 기억에 똑똑히 남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바쁘고 지쳤기 때문에 각별히 인상에 남은 모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기루타항에 입항하자 어떻게 알고 몰려 들었는지 숱한 당지의 한국노무자들이 배에 오르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그들이 온 목적은 술이나 얻어먹자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긴 철두철미하게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식당에서 술을 파는 사람도 술을 마시는 사람도 붙잡기만 하면 영창에 처넣을뿐만 아니라 근본 술을 만들지도 수입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다체제는 성행하고 있으나 매음업만은 엄금하는지라 일단 매음업을 하는 것만 발견하면 그 여자건 사내건 초죽음을 당하고도 극형을 받는다 했다. 그러니 고도로 발달한 술문화로 술에 인이 박히고 또한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노무자들이 그런 곳에서 어떻게 배겨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단 한국선박이나 중국선박이 들이닥치면 그들은 통금령을 내린 거리에 나서는 사람마냥 살금살금 부두에 모여 드는 것이 상례었고 이런 선박들에 올라서는 술이나마 얻어마시는 것으로 인생을 달래는 것이 일쑤었는데 원래는 선박에서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 엄금된 나라였으나 한국노무자들이 하도 지꿎게 달려드는 통에 인젠 세관측에서도 한쪽 눈을 슬쩍 감아주는데까지 이르게 됐던 것이다. 허나 무턱대고 “무사통과”인 것만은 아니었다. 중동나라들에서 도둑놈을 키우면서 벌금과 세금액을 올린다 하더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관들에서도 이런 술군들이 선박에 오르게 하고는 부두입구에서부터 배에서까지 돈을 받아내군 했다. 그러건 말건 술미치광이들은 사처로부터 꾸역꾸역 모여 들었는데 아마도 60~70명은 잘되는상 싶었다. 한편 선내에서는 누구나 다 하기 싫어하는 주방장이었고 또한 늘 남들한테서 밥투정질을 받기만 하던 내가 그 날만은 선박의 마스터인 선장보다도 인기가 더 높을 지경이었다. “아이구 주방장님, 억수로 욕보시네요. 술안주 딱 한가지만 챙겨주이소.” “주방장형씨, 형씨의 요리솜씨가 중국에서도 일품이고 한다 하는 한국요리사들도 뺨칠 지경이라더군요. 한번 좀 맛봅시다구요.” “일본말로 요리사를 ‘주자’라고 하는데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사람들한테 주자,주자라고 해서 주자라고 했대요.” 보아하니 끝을 보지 않고서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익, 치사하기를 불알쪽같은 놈들! 저놈들속에서도 말단들과는 떵떵거리는 자들이 있겠지? 허나 오늘만은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로다. 술이나 얻어 처먹겠거든 내 말을 곰상곰상 들어야 한다. “이 양반, 나살깨나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리도 치사하게 노는기요? 당신 계집이나 딸년들이 보면 욕한당께요 욕해.” “아, 정말 주방장님 죄송합니다. 하도나 술먹고 싶어서요. 참.” 저런?! 나는 그들이 놀아대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겉과 속이 다른 저런 인간들이 있기에 옛날 이씨 조선도 망하는 수밖에 없었지. 섬나라 쪽바리라고 일본을 욕하다가도 일본인들앞에서는 실웃음을 지으며 굽신거리는 놈들. 이런 인간들에 비해 일본민족은 퍽 월등하다고도 할만 했다. 한국인들은 유럽쪽이나 미국쪽으로 가면 쥐구멍 찾듯이 피해다니다가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쪽으로 가면 마치도 제 잘난듯이 술 처먹고 오입질하고 떵떵 큰소리치지만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를 막론하고 우쭐거리지도 그렇다고 굽신거리지도 않는 일본민족, 아니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었지만 대국에서 태어나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들도 이 면에서만은 한국인보다 퍽 자질이 높은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선장앞에서 “예예, 선장님 알겠습니다”라고 하다가도 일단 돌아서면 “씨팔놈, 싸가지없는 놈”하고 욕하지만 우리들만은 그토록 앞뒤가 다르지는 않았다. 좀 예의가 없다는 책망을 가끔씩 들어서 그렇지 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날 선박에서는 라스팔마스에서 올린 술을 몽땅 높은 값으로 팔아먹었다. 글쎄 영국의 “죠오네카” 위스키를 50불에 한병씩, 독일의 “하이네킨” 맥주 한깡통에 10불씩 받아 먹었으니까 장사래도 큰 폭리를 얻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하긴 지고가라면 못가도 처먹고 가라면 굽까지 핧고 가는 술미치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장사였으니까. 그외 사막지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이 몹시도 긴장하여 물값이 기름값보다 억수로 더 비쌌는데 우리 선박과 항구측에서는 기름과 물을 아무런 차가도 없이 막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본선이 라스팔마스에 있을 때 그렇게도 물을 많이 올리던 비밀을 알 수가 있었다. 이제 그걸 싣고 기름이 긴장한 곳으로 가면 그 기름을 주먹치기로 막 팔아먹을 판이었는데 듣는 바에 따르면 그때 가면 매 선원당 300불은 어렵잖게 차례진다고 했다. 그렇지 오케이!(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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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06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
    ■ 김철균 4 두만강을 건널 때 눈이 내렸고 또한 눈내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까지 드렸건만 김명기네 가족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자 바람으로 중국인 마적떼를 만나 그나마 약간 몸에 지니고 있던 금은붙이를 몽땅 털리었다. 그러니 진짜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간도로 들어올 때는 용정지구만이 아닌 간도밖의 목단강이나 할빈쪽으로 가서 정착하면서 새로운 계몽활동을 할 계획도 없지는 않았으나 두만강을 건너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그 계획을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돈과 금은붙이 등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몽땅 털리고 말았으니 내지는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 거처부터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로 나섰다. 다행히도 당시 간도 용정의 대문동이란 곳에는 김순자의 어머니 윤명숙 여사의 친정 쪽으로 가까운 친척 몇집이 있었기에 한겨울에 바깥에 나앉는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친척들 거개가 마음씨들이 고왔던터라 사랑채를 내주는 집, 쌀과 감자 따위를 갖다 주는 집과 땔나무 등을 갖다 주었기에 김명기네 일가는 별로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대문동에 정착하여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두만강을 건너올 때 드린 기도 때문이어서인지 여하튼 건너온 뒤 마적들을 만나 귀중품들을 털린 것 외에는 모두가 무사한 편이었다. 하긴 어지럽고 뒤숭숭한 세월에 월강하면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법이었다. 당시 간도 역시 태평한 지방은 못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대륙침략을 획책해 오던 일제는 간도 용정에 총영사관을 건립했으며 투도구, 팔도구 등 곳곳에 영사분관을 세우고 헌병대를 주둔시키면서 동만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한 탄압을 실행했던 것이다. 동만조선인들에게 계몽사상과 반일정서를 주입하던 많은 사립학교들이 폐교되었고 한시기 기세가 드높던 반일운동은 크나큰 좌절을 당하였으며 반일조직들은 지하로 잠적할 수 밖에 없었다.한편 대문동에 정착한 김명기는 화전밭을 일구고 약재를 캐는 등으로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했으나 한번 기울어진 가세를 춰세우기가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조선에서 건너올 때 가산을 헐값으로 처분한데다 얼마 안되는 금은붙이마저 털리웠고 거의 빈손으로 대문동에 정착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처가편 친척들 몇집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도 워낙 여유가 없다 보니 정착할 때 얼마간의 도움을 줬을 뿐 계속되는 도움은 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럴즈음인 1929년 3월 18일, 순자가 대문동의 김명기 어른과 윤명숙 여사의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 순자가 태어날 때 순자의 위로 오빠 셋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김구정, 김구준과 김구완으로 불리었으며 순자가 태어나서 몇년 뒤 또 순자 아래로 남동생인 김구춘이가 태어나 순자네는 결국 4남 1녀의 5남매로 형제를 두게 되었다. 순자는 자라면서 오랫동안 자기가 5남매 중 외동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기실 순자가 원래부터 김씨가문의 외동딸인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갓 태어났을 때 순자한테는 그와 나 차이가 많은 언니 한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쁘장하고 활달했으며 서당에서 공부할 때도 항상 하나를 배우면 열가지를 알아내군 하던 언니었다. 그러던 그 언니가 19살에 시집갔다가 22살인 아름다운 꽃나이에 몹쓸 병인 늑막염에 걸려 절명했다는 것, 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 어머니 윤씨가 막 까무라치며 상두앞을 막아서기에 상두를 멘 장정들이 한동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 등은 순자가 후에 아버지 김명기 어른한테서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순자 어릴 때의 애명은 기숙이었다. 제 2 회 총명하고도 착한 아이 1 큰 딸을 잃은 후 뒤늦게 본 딸자식이라 어머니 윤씨는 어린 순자를 각별히 아끼었다. 쥐면 꺼질가 불면 날가 또한 추울세라 더울세라 애지중지 키웠다. 그리고 오빠 셋 역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 귀여워하기는 마찬가지었다. 그러면 여느 집 애들 같으면 어리광을 피우고 자기밖에 없는 척 할 법도 하지만 유독 순자만은 그렇지 않았다. 천성이 착해서인지 순자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도와 간단한 살림살이를 배우기를 즐겼고 제법 남을 잘 도와주기도 했다. 순자는 여덟살이 되자 산건너 마을에 있는 육도소학교에 붙게 되었다. 그러자 홀 몸으로 남의 집 방살이를 시작했다. 어린 순자였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남의 집 방살이를 잘했다. 당시 아버지 김명기 어른이 달구지에 땔나무와 쌀 그리고 남새같은 것을 가져다 주면 제법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했다. 예하면 쌀같은 것을 한달치씩 가져다 주면 그것이 중도에서 떨어지는 법이라고는 없었고 항상 남아돌군 했다. 그런가 하면 틈이 날 적마다 주인집 아줌마를 도와 터밭김도 매주고 아기도 봐주고 하면서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특히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다보니 부모님과 남들한테서 꾸중을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다. 방살이를 하는 동네에서도 어른들은 자기 집 애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너 왜 이 모양이야, 언제 철이 들래? 저 고개넘어 마을에서 온 기숙이를 좀 보렴아. 혼자 남의 집 방살이를 하면서도 얼마나 부지런하고도 예의가 바르고 착한가” 라고 하며 자주 순자를 입에 떠올리군 했다. 순자는 총명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날 배운 것은 반드시 그날로 소화해 냈으며 하나를 배우면 열가지를 알 정도로 배운 것을 응용하군 하였다. 그 때 벌써 순자는 일기란 것을 쓰기 시작했고 또한 육도소학교에 단 한부밖에 오지 않는 조선문 신문을 교원들이 윤번으로 본 뒤엔 꼭꼭 순자가 읽어보군 했다. 이렇게 순자는 어릴 적부터 동네 아이들의 본보기로 되었다.한편 주말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순자는 이상 올케들을 몹시 따랐다. 집안에 어머니외 여자란 올케들 뿐이어서인지 그들을 친언니처럼 믿고따랐고 그네들의 일손을 잘 거들어 주었으며 간혹 부모님들이 며느리한테 뭐라고 꾸중이라도 할라 치면 곧 잘 두둔해나서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아침에 있은 일이다. 그날도 큰 올케가 물동이를 들고 드레박우물가로 물길러 나섰다. 시부모들이 낮이 되어 해가 쭉 펴지면서 좀 날씨가 수그러들면 나가라고 했으나 큰 올케는 낮이 되면 바람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며 아침부터 서둘렀다. 기실 낮이 되면 소여물도 끓여야 하고 또 새끼를 꼴 벼짚에도 물을 뿌려야 하겠기에 물을 쓸 일이 많았던 것이다. 큰 올케가 집을 나서자 어린 순자도 따라나섰다. 어머니 윤씨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추운 겨울에 홑옷바람으로 물길러다니는 올케가 가여워서였다. 그 날은 유달리 추웠다. 눈이 내린 이튿날이라 바람이 세찼고 길도 몹시 미끄러웠다. “형님, 오빠가 형님보다 덩치가 더 크고 힘도 더 센데 왜 형님만 물길러 다니나요? 그리구 왜 집에서는 여자들만 일을 더 하는가요?” “집안에서 일을 더하고 남정들을 잘 받드는 건 여자들의 팔자얘요. 그만큼 남정들이 밖에서 곱절 더 힘든 일을 하잖아요?!” “그래요?”순자는 그러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듯이 올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들은 왜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슬하를 떠나 남의 집으로 시집가 아이를 낳아키우고 시부모와 남정을 섬기면서 일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어린 순자는 물론 알리 만무했다. 그저 남의 집에 들어와 싫컷 고생만 하는 올케가 불쌍하기만 했다.“왜 아직도 모르겠요? 또 남자들이 물동이를 이면 머리꼭대기가 뾰족하여 쉽게 떨어진대요. 그리고 보기도 망칙하고…자, 이런 건 기숙이도 커서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돼 있어요.”올케는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순자가 이뻐서인지 순자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순자와 올케, 어찌보면 순자와 올케는 모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그들 사이는 나이 차이가 있었다. 헌데 바로 그날 사달이 생겼다. 물을 가득 채운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오던 올케가 그만 얼음에 미끌며 뒤로 넘어졌고 물동이가 땅에 떨어져 깨여지면서 산산 쪼각나고 말았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올케는 치마자락과 신까지 물에 푹 젖은 것도 돌볼 사이가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가슴을 붙안고 울먹울먹하는 올케를 바라보며 순자는 그 물동이가 아깝다기보다는 올케가 더없이 불쌍해났다. “형님, 저한테 밀어씌우세요. 제가 장난이 심해 물동이를 깨뜨렸다면 부모님도 그냥 책망하다 말거예요.” “아니, 어찌 그렇게…”하지만 순자는 어디에서 그런 담이 생겼는지 막무가내로 올케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으로 향했다.…… “아니, 네가 물동이를 깼단 말이냐? 그래 뭘하던? 물길러 다니는데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머니, 기실은…”올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순자가 앞질러 답변했다. “엄마 잘못했어요. 형님이 물동이를 일 때 도와준다는 것이 그만 얼음에 미끌면서…형님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이 때 아버지가 웃방에서 나오면서 “됐다. 며늘아기는 옷을 바꿔입고 밖에 나가 돼지먹이나 주거라. 돼지가 배고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난리들이다” 라고 하며 말참견했다. 이윽고 며느리가 나가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입을 삐죽하고 실웃음을 지으며 “정말 기숙이가 물동이를 깬 것 같수?” 라고 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6
  • [단독] 연변축구 잘 할 수 있는 무형산업 (8)
    ■ 민함 연변축구를 놓고 말하면 지난 세기 60연대 후반기로부터 70연대 후반기까지의 10년간은 거의 공백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화혁명으로 인해 전업축구팀이 해산되어 선수들은 농촌이나 기타 공장들에 내려가고 각 체육학교들도 마비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축구운동을 벌일 수도 없었고 축구선수들을 양성할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당시는 전국적으로 동난이었고 문화분야와 체육분야는 그 타격이 더 심했다. 때문에 연변의 축구사를 보면 그 시기에 연변에서 배출된 축구선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70연대에 들어서면서 연변에서는 축구팀을 재정비, 사처로 흩어져 있던 축구인재들을 재등용하면서 축구운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80연대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유명선수들이 한두명씩 나타났다. 그 중의 대표적인 선수들로는 김광수, 고훈, 염승필 등이었는데 김광수는 길림성팀에서, 고훈은 심양부대팀에서, 염승필은 북경팀에서 각각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었다. 그 뒤 연변에서는 대량적인 스타선수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례하면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박문호 등이었다. 특히 그 중 고종훈은 지난 세기 80연대 후기부터 중국축구무대의 기둥선수로 크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군 했다. 당시 그는 중국국가팀에 자주 이름을 올리군 했는데 국가팀의 “2고(고홍파와 고종훈)”란 말만 나오면 축구팬들은 모두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했다. 고종훈- 그는 연변축구사에서 선수생애를 가장 길게 한 축구명장이었다. 1980년대 중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거의 20년간 그라운드를 누빈 선수였다. 그는 담배와 술과 인연을 끊으면서 몸관리를 중시하면서 축구에 모든 정력을 쏟았으며 현재는 연변천양천팀의 감독조리로 연변축구의 발전과 비약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 한편 지난 세기 90연대는 연변에서 축구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연대이기도 했다. 그 시기 고종훈, 김광주, 이홍군 이 3명은 국가팀 선수로 일본에서 있은 아시안게임에 참가했는데 당시 중국국가축구대표팀은 대회의 준우승(우즈베크스탄 우승), 이는 공화국의 창건 후 중국축구대표팀이 일궈낸 가장 높은 순위었다. 다른 한편 지난 세기 80연대에는 연변의 여자축구도 가장 전성기를 맞던 시기었다. 연변의 여자축구는 당시 연변대학 체육학부 교수였던 최동섭 선생의 발단으로 출범했는데 후에 동경춘, 방정훈 등 축구인들에 의해 전국여자축구계의 강팀으로 소문놓았으며 1983년에는 전국여자축구우승쟁탈전에서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의 선수들인 안영실, 장어금, 이화련 등 3명은 중국여자축구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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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북한, 러시아 기업투자가들에 비자 및 인터넷 개방
    [동포투데이] 북한은 러시아 기업투자가들에 비자를 제공할 것과 핸드폰 및 인터넷 사용을 허가할 방침이라고 5일 갈루쉬카 러시아 극동개발장관이 밝혔다고 러시아 매체가 보도했다. 갈루쉬카 장관은 북한측이 러시아 기업투자가들이 북한에서 사업하기에 필요한 복수 비자 문제 등 일련의 당면 문제 해결을 간소화하기로 결정했으며 또한, 인터넷과 휴대폰을 사용도 수락했다고 밝혔다. 북,러 양측은 북한에서 유리한 사업 개발 지원을 위한 특별 메카니즘을 구성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와 관련해 정부간 회의를 통해 추가협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갈루쉬카 장관은 이와 같은 혜택을 북한측이 러시아 기업인들에게만 허용했다고 언급하면서 오늘날까지 중국을 포함한 해외 투자가들은 러시아 기업인들이 받기로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현재 양국가간 무역량이 1억 1,2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종 목표 거래량을 10억 달러까지 바라보고 있다고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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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4-06-05
  • 아리바바, 광저우 헝다 축구클럽 지분 50% 매입
    2014년 6월 4일 저녁 20시경 광저우, 아리바바의 마윈(馬雲) 대표가 임원단을 이끌고 광저우 헝다센터에 도착하자 헝다그룹의 쉬자인(許家印) 대표는 류융줘(劉永灼) 부총재를 비롯한 임원단과 함께 이들을 맞이했다. 사진출처: 중국청년망(中國靑年網) 헝다(恒大)그룹과 아리바바(阿里巴巴)그룹이 5일 전략적 협의를 체결함에 따라 아리바바 측이 광저우(廣州) 헝다(恒大) 축구클럽 지분 50%를 매입했다고 전해졌으며 구체적인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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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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