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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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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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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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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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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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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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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존해있는 “옛상해의 마지막 아가씨”ㅡ 엄유운
    엄유운(严幼韵) ㅡ 그녀는 민국시기 자가용을 몰고 교정으로 드나드는 “복단대학의 꽃”이었다. 첫 남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는 그의 출신, 경력, 용모와 학력 등은 모두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주었다. 민국시기 엄유운은 복단대학의 첫기 여대생이였고 전란시기에는 국민정부 외교관의 부인이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를 견증하는 옛상해의 마지막아가씨었다. 엄유운은 절강 녕파의 출신으로 지난 9월 108세 생일을 쇠었다. 다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퇴색해가고 있지만 그녀한테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사진들은 여전히 황홀했던 그제날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복단대학 교정의 “사랑스런 꽃”  1925년 엄유운은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입학했다가 2년 뒤에 복단대학 상업학부에 전학, 복단대학의 첫 여대생으로 되었다. 당시 엄유운은 정안사(静安寺)에 거주, 대학과 비교적 먼거리 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기의 자가용에 앉아 학교로 드나들었다. 집에서 그녀한테 운전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그 시기 엄유운 역시 차를 몰줄 알았기에 자주 운전기사가 옆에 앉고 그녀가 차를 몰군 하였다. 그 시기 그녀가 모는 자가용의 번호는 “84”번이었다. 이 번호를 두고 당시 어떤 남학생들은 영어 “eighty four”를 상해방언으로 발음하며 “사랑스런 꽃”이라고 하였다. 엄유운은 워낙 생김새가 이뻤으며 거기에 부친 또한 상해 남경로에서 비단옷가게를 운영하였기에 그녀는 아빠의 가게에서 늘 각종 비단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엄유운이 매일 바꿔입는 복장은 항상 가장 앞서가는 패션이어서 눈부실 정도였다. “사랑스런 꽃”이란 그녀의 말도 그냥 온 것이 아니었으며 재빨리 복단대학 교정내에 파급되었고 그녀의 사진은 당시 상해의 이름난 잡지의 표지에도 실리게 되었다. 엄유운은 공부에도 아주 큰품을 들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영어공부에서의 성적이 아주 높았다. 이는 후일 그녀가 외교사업을 함에 있어서의 아주 훌륭한 토대로 되었다. 조부는 “녕파방” 개척의 선구자 엄유운의 가족을 말하자면 그녀의 조부 엄신형부터 시작해야 한다. 엄신형의 고향집은 현재의 상해 강북구 장교가두의 비시촌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 엄씨가족의 대본영인 수지산장(寿芝山庄)이 있는 곳이었다. 엄신형은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이름있는 실업가로서 일찍 항주에서 호설암이 개설한 신원은루(信源银楼)의 비서로 있었고 호설암의 소개로 이홍장한테 추천되어 중용을 받기도 했다. 후에 엄신형은 소금업을 경영하여 많은 재부를 축척하였으며 회화와 서법에서도 큰 재능을 보이었다. 특히 갈대밭 그림을 잘 그리어 소문놓았는데 현재 녕파에는 전문 그의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엄신형은 주로 민족 공상업과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1887년 그는 백은 5만냥을 투자하여 녕파만에 중국의 첫 기계타면공장을 세웠고 후에는 상해에 투자하여 밀가루공장과 기름공장을 세웠으며 1902년에는 상해의 첫 상업단체인 상해상업회의공소의 초대총리로 되기도 했다. 녕파시 정협 문사위 특별위원이며 원 상해시 강북구 문사위 책임자였던 사진성 선생에 따르면 엄신형 선생은 다년간 금융업과 공상업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녕파적 인사들을 자기의 주위에 흡입하여서는 “녕파방”을 구성, 낡은 식의 상업망을 근대식 기업가단체로 개조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녕파방”의 개척 선구자였다. 한편 엄신형 선생은 딸 둘과 한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엄자균은 개명한 상인으로 가업을 진일보 확대하였다. 바로 그런 가정환경속에서 엄유운이 태어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와 그녀의 언니들인 엄채운과 엄연운 모두 중국의 제1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엄유운의 첫 결혼 엄유운과 첫 남편 양광생의 만남은 역시 “사랑스런 꽃”과 연관이 있었다. 양광생 역시 한 상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말에 상해에서 견직업에 종사, 양광생이 처음 엄유운을 볼 때는 그녀가 바로 “사랑스런 꽃”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양광생은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엄유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같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양광생은 친구의 소개로 엄유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6일, 엄유운과 양광생은 혼례를 거행,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혼례는 당시 매스컴에서 다투어 보도하는 화제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혼례사진이 신문에 발표되자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청년남녀들이 보을 따는 패션으로 되었다. 또한 이 사진은 근 한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여전히 옛상해의 혼례문화를 반영하는 견증자로 되고 있다. 1938년 양광생은 필리핀 주재 중국영사관의 영사로 부임되었다. 그러자 엄유운은 1939년초에 3명의 딸을 데리고 마닐라로 가서 남편과 합류하였다. 당시 총영사의 부인으로서 엄유운은 직접 영사관내의 모든 장식을 설계하고 그 작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명예주석으로 있는 필리핀 화교부녀협회는 금은장신구를 헌납하는 운동을 발기하여 애국헌금활동을 펼치었으며 전선의 전사들을 위해 100만개에 달하는 구급의료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남편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엄유운의 그 나날들은 보람이 있었다. 한대의 피아노로 고통스런 나날을 동반하며 엄유운이 딸들과 함께 귀국한 뒤 1942년 1월 2일, 마닐라가 일제에 의해 함락되고 양광생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그해 4월 17일 양광생과 기타 7명의 중국외교관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하지만 엄유운은 오랫동안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남편이 일제에 이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찍 어릴 때부터 세상에 부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고 고생이란 거의 겪어보지 못한 엄유운이었건만 돌변된 운명앞에서 그녀는 모든 아픔과 비애를 이겨내는 생활의 강자로 되었다. 그녀는 조난당한 기타 외교관들의 아내들과 함께 야채를 심고 신을 만들었고 울안에는 닭과 돼지도 치면서 생활하였고 세 딸을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줄곧 낙관적인 심태를 유지했으며 마음이 허전할 때면 피아노앞에 앉아 추억의 음악을 치면서 한곡씩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엄유운은 당시를 추억하면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애들을 살리고 키우려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생활을 직시하며 살아야 했었다”고 말하군 한다. 두번째 남편 고유균과의 행복한 만년 1959년, 엄유운은 저명한 외교가인 고유균(顾维钧)과 멕시코에서 결혼등록을 하였다. 그해 엄유균은 54세었고 고유균은 71세었다. 고유균과 엄유운의 첫 만남은 1946년 7월 고유균이 주미대사로 지내던 시기었다. 당시 미국으로 간 엄유운은 여권이 만기가 되어 중국대사관으로 찾아갔다가 고유균을 알게 되었고 당시 고유균은 엄유운을 위해 직접 국민정부 외교부에 여권연기 신청을 해주기도 했다. 퇴직후 고유균은 장기간 외국에 있으면서 국제법관으로 지냈고 두 남녀는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 뒤 고유균과 결혼하여 함께 있게 되자 엄유운은 훌륭한 가정주부로, 간호사로 또한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하면서 고유균을 돌봐주었으며 매일 아침, 고유균이 기상하면 우유를 풀어주었고 그의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직접 자기가 만든 것으로 대접하군 하였다. 고유균과 엄유운은 26년간 함께 생활, 고유균은 1985년에 타계했는데 향년 97세였다. 생전에 고유균은 자기의 양생심득에 대해 3가지를 담론하면서 “산보, 소식과 부인의 관심”이라고 개괄했다. 향수 치고 하이힐 신는 108세의 노인 “어머니는 올해 108세예요. 어머니는 특별히 흥성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하여 딸들이 매일 어머니에게 활동을 배치해주는거죠.” 이는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이 하는 말이다.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은 올해 77세이고 언니 양뢰맹은 82세었다. 양설란에 따르면 엄유운은 기억력이 좋아 아직도 책을 읽고 마작도 논다고 하며 특히 친구를 사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일기도 쓰는가 하면 이미 미국에서 영어로 쓴 책도 한권 출판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엄유운의 전화번호책에는 자주 이용하는 전화번호가 수십개가 있었는데 108세가 되는 노인이 그걸 거의 암송하고 있었다. 또한 수십년래 줄곧 개변하지 않은 습관이 있다면 노인은 아직도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향수를 치고 있었다. 엄유운의 세딸 모두 출중한 여인들이었다. 장녀 양뢰맹은 편집원출신으로 “사랑이야기”, “키신져의 회억록” 등 250여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일찍 미국 저명한 쌍일출판사의 주필을 맡아한적도 있었다. 차녀 양설란은 기업가로서 일찍 1989년 미국 제너럴모터스사(通用汽车公司)의 유일한 화상 부총재를 지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삼녀 양천은은 한시기 부동산개발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머니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사진 글 출처 :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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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7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8)
    ■ 김철균 1 기숙사식당의 일군들과 학생과 독신교원 및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 속에서 그렇듯 인기가 놓은 순자였으나 그 임시직원일도 그냥 할 수가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남편이 “외국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갇혔지만 일정기간 순자는 학교기숙사식당의 임시직원일만은 계속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학생들의 반란으로 학교지도부 일군이 교체되면서 하루밤 사이에 순자는 그 임시직원의 일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아니, 자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숙사식당 관리원의 입장을 고려하여 스스로 나와버렸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남편 김용환이 “외국간첩”란 누명을 쓰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 전의 어느해엔가 해방전 용정에서 김용환과 소학교 동창생으로 지내다 광복후 조선으로 나간 한철혁이란 사람이 연길로 오게 되었다. 눈과 얼굴 교정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철혁은 조선인민군 군의관이었다. 6.25당시인 1950년의 8월 낙동강전투시에 지뢰를 밟아 터지는 통에 그의 얼굴과 눈이 흉하게 이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던 한철혁이 10여년 뒤 조선정부와 중국정부의 소개로 당시 주정부 주장인 주덕해와 연락이 통하게 되었고 결국 연변변원으로 와서 얼굴과 눈을 치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용환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던 중 주장 주덕해의 비서가 찾아와 주덕해동지가 김선생을 보자고 한다기에 부랴부랴 수업을 마치고는 비서와 함께 찦차에 앉아 주정부로 향하게 되었다. 용환이가 주정부에 도착하여 비서의 안내로 주덕해 주장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웬 중년남자손님이 쏘파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용환이 이 친구야, 나야 나, 한철혁이.” “아니 한철혁이 자네가 어떻게…” 둘은 대뜸 서로를 끌어안았다. 거의 20년만에 만나게 된 소꿉시절의 친구, 반갑지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점심 한철혁은 주정부 외사판공실에서 초대하려는 것도 마다하고 소학교 동창생인 김용환네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그 날 점심 두사람은 용환이네 집에서 미역쌈을 먹으며 옛추억을 더듬으면서 술잔을 나누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 용환이는 주정부 외사판공실에서 차린 파티에 초청되어 몇번 한철혁과 만나 식사를 함께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 뒤 병치료를 끝낸 한철혁은 인차 귀국하였고 그 후에는 서로가 사업이 빠쁘다 보니 일절 아무런 연계도 없었다. 헌데 그 때의 그 만남이 김용환으로 하여금 주정부 주덕해 주장과 더불어 외국과 내통한 “외국간첩”란 혐의를 받게 되었으며 위생학교의 특실에 갇히게 되었다. 김용환이 갇히고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에서 나온 후 새로 교체된 위생학교 지도부에서는 수차 순자를 찾아와 남편과 철저히 계선을 나누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착한 순자는 워낙 부지런하고 남을 잘 돕는 습관은 몸에 배였으나 함부로 지도일군들한테 대드는 성미가 아니었다. 필경 연약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만은 달랐다. 순자는 강해졌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남편을 쭉 지켜보며 살아왔고 남편의 인간됨됨이와 일거일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남편과 계선을 나눌 일이 없다고 굳게 믿는터였다. “순자동무, 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동무의 남편은 오래전부터 한철혁과 잦은 연계가 있었으며 몇년전 한철혁이 연변에 왔을 때 그한테 많은 비밀을 넘긴 한편 구체적인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오. 그리고 그 때 한철혁이란 자가 동무의 남편한테 무전기와 사진기를 넘겨 주었다는 제보도 들어왔소. 그러니 동무는 남편과 철저히 계선을 나누고 남편의 간첩행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몽땅 적발해야 하오. 알겠소?!” 하긴 당시 용환이네 집에서 식사를 하던 날 한철혁이 친구간의 우정에서 출발하여 이러저러한 얘기를 많이 나눈 것은 사실이었다. 헌데 그것이 간첩활동접선이라니. 더군다나 거기에 무전기와 사진기까지 제공됐다고 하니 실로 어이가 없었다. 그 지도일군이 말하는 무전기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집에 있는 사진기는 한철혁과 만나기 퍽 전부터 김용환한테 있던 물건이었다. 학교지도부 일군의 위협에 순자는 강경하게 맞섰다. “우리 나라가 색갈이 변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간첩이거나 계급이색분자들을 색출해내야 하는 걸 저도 잘 안답니다. 그래서 아마 모주석께서도 문화혁명이란것을 일으켰겠지요. 하지만 조직에서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서 한 전호속의 전우를 적으로 취급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착오랍니다.” “아니, 이 동무가 이 자리에서 누구를 함부로 두둔하는거요?! 김용환 교원이 ××의 중앙일군과 만나서 식사도 함께 한 것이 그래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이요? 그 때 구체적으로 어떤 비밀내통을 했을 수도 있단 말이요. ××이란 나라는 수정주의국가란 말이요.”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우리 중국과 친선적인 국가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당시 주정부의 주덕해 주장까지도 그를 소개하여 연변병원에서 병치료를 하게 했고 저의 남편은 그저 그 기회에 한철혁과 만나서 단 한번의 식사를 함께 했을뿐인데요. 그것이 간첩행위라니 정말 말도 안돼요.” “순자동무, 주덕해가 어떤 사람이요. 그는 항일전쟁시기 왜놈들한테 체포된 뒤 변절한 계급이색분자요. 그리고 장백산 천지의 적지 않은 부분과 두만강 하류의 섬 하나를 ××이란 나라에 넘겨준 자란 말이요.” “오, 그랬습니까? 당신 아주 직접 보는듯이 말하는군요. 그럼 당중앙과 모주석께서는 왜 변절자인 주덕해를 연변의 주장으로 임명했을가요? 그리고 또 주덕해어른이 아무리 주장이라지만 과연 장백산천지의 적지 않은 부분과 두만강하류의 섬을 ××나라에 넘겨줄 권리가 있었을가요? 그리고 그 때 왜 모주석과 당중앙에서는 가만 있었을가요?” …… 위생학교 지도일군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이나 꺽꺽거리더니 제법 으름장을 놓았다. “이 동무가 이거 안되겠구만. 자식도 많고 또 당사자가 아니니까 가두지 않고 교육을 좀 하려 했더니. 그래 동무도 갇혀봐야 정신을 차리겠소?” “당신들 그래 저까지 계급의 적으로 만들 작정입니까? 그럼 어디 한번 가둬보세요. 항일군정대학의 학원생이고 당의 우수한 아들인 김선생을 간첩으로 몰아가두더니 이젠 ‘뢰봉학습표병’인 저까지 가둔다고? 어디 한번 우리 신흥가두의 광범한 혁명적 군중들과 물어보세요. 이 김순자가 계급의 적인가를 말이예요!” 순자의 말은 거침없었고 그 지도일군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조리가 있었다. …… 말을 마친 순자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저런 저 지독한 아낙네같으이라고…” 등 뒤에서 위생학교 지도일군의 악에 받친 욕설이 터져나왔다. 2 문화혁명에 대해 말할라치면 시초엔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혁명의 취지에 대해 의심하고 반대한 간부와 군중은 별반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순자와 같은 여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이 그 문화혁명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당중앙의 결책이라면 모든 것이 정확하고 영명하다고 믿고 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지속됨에 따라 그것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이란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처음에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이른바 가두시위를 벌이고 북경에 가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 외지의 조직과의 횡적연계를 맺는 등으로 그저 소란스럽기만 하던 것이 날이 감에 따라 광범한 노간부들을 붙잡아내고 그들의 집을 수색하는 쪽으로 파급되었으며 나중에는 전반 사회가 무정부상태에 휘말려들면서 조직과 조직 사이의 파벌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그것도 처음에는 고무총이나 몽둥이를 들고 서로가 싸움을 벌이던 것이 어느 날엔가 연길시 거리에 총소리가 울렸으며 건물에 불을 지르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던 중 전반 연변에 악명이 자자한 “개산툰 유혈사건”이 터졌고 이어서 해방군이 한쪽 파벌의 켠에 서서 다른 한쪽 파벌을 진압하는 이른바 “좌파지지”행동이 개시되었다. 불똥은 순자의 큰 아들 영남이한테도 떨어졌다. 당시 영남이가 가입한 조직은 해방군의 지지를 받는 조직이 아닌 그 반대쪽의 조직이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군의 지지를 받는 조직은 반란이라는 명목하에 주덕해, 요흔, 전인영 등 노일대 혁명가들을 타도하려는 극좌의 노선을 걷는 조직이었고 영남이네가 가입한 조직은 위에서 언급한 노일대 혁명가들 특히 민족간부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려는 이른바 “보황파”조직이었다. 영남이네 “보황파”조직은 해방군의 지지하에 소총까지 갖춘 상대방 조직과 파벌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어느 한차례의 파벌싸움 아니 파벌싸움이라기보다는 상대방조직의 무자비한 진압행동속에서 “보황파”조직은 풍지박산이 됐고 조직의 많은 책임자들이 붙잡혀 연행되었다. 그 중에는 순자의 큰 아들 영남이도 있었다. 상대방 조직에서는 갇혀있는 영남이네 조직성원들한테 밥 한술, 물 한방울 공급하지 않아 그들 모두가 허기질대로 허기진 상태였다. 당시 영남이네는 연변의학원의 어느 한 교실에 갇혀있었는데 바로 학교마당에는 콩밭이 있었다. 어느 날 며칠이나 굶은 영남이와 그의 동료들은 밖에 나와 해볕쪼임을 하는 기회를 타서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콩밭에 쓸어들어가 콩잎을 뜯어먹었고 어쩌다 보니 그 소문은 순자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가뜩이나 아들 영남이 때문에 속을 조이던 순자는 영남이네가 배고파 콩잎을 마구 뜯어 먹었다는 소문을 듣자 쇠꼬챙이로 가슴을 긁어내는듯 했다. 아들한테 밥을 날라다주려고 했으나 들리는 말에 따르면 대문을 지키는 상대방 조직성원들이 검사하면서 먹을 것은 일절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영남이와 그의 조직성원들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순자는 한동안 신통한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을 굴리던 순자는 무릎을 탁 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어쩌겠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 아닌가! 발각되어도 뭐 죄를 짓는 일도 아니고…” 이날 순자는 기장밥을 한 가마밥솥을 해서 보자기에 싸서는 앞배에다 띠였다. 그러고는 임신부처럼 그 위에 헐렁한 옷을 입고 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가 얼핏보면 흡사 임신부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기미를 보이지 않던 순자가 임신이라니 무척 놀라는 사람들이 한두명 아니었다. 순자가 아들 영남이네가 갇혀있는 의학원 대문쪽으로 가니 역시 듣던대로 자식면회를 왔던 몇몇 여인들이 제발 밥만은 들여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문을 지키는 상대방 조직의 성원은 소리를 꽥꽥 지르며 한사코 들어주지 않았다. 인정같은 것은 꼬물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저런 보황파 새끼들은 며칠씩 굶어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밥같은 것을 해오겠거든 아들을 볼 꿈도 아예 꾸지 마시오.”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몇몇 여인들은 울면서 갖고온 밥보자기를 문지기한테 맡긴 다음 빈손으로 아들을 면회하러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아줌마는 빈손으로 왔구만. 잘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무턱대고 가슴이 아파하며 아낄 것이 아닙니다. 저런 새끼들은 좀 혼나봐야 사상개조를 할겁니다. 지금 어느 세월이라고 한줌도 못되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들이 보호하려고 들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반란의 연대로서 반란에는 도리가 있습니다. 저 그리고 저 새끼들이 죽지 않습니다. 2-3일 굶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랍니다…” 대문을 지키는 조직원은 순자의 “뚱뚱한 배”를 희한하게 여겨보며 유달리도 말이 많았다. 이에 순자는 짐짓 모르쇠를 놓으며 “뚱뚱한 배”를 어루쓸었다. “들어가시오. 들어가서 아들을 잘 교육하시오.” 순자는 이렇게 대문을 순리롭게 통과하였다. 순자가 영남이네가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서자 영남이는 갑자기 뚱뚱해진 어머니의 배를 보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해하는 것이었다. 미구하여 순자가 배에 띠였던 보자기를 풀자 놀란것 영남이뿐 아니라 방에 있는 영남이네 또래들 모두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영남의 어머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습니까? 아무튼 머리를 잘 썼습니다.” “영남의 어머니 덕분에 오늘 생활개선을 하게 되였네 허허허.” 갇혀있는 몸이었지만 젊은이들이라 활발하고 낙천적이었다. 순자는 여럿이 똑같이 나누어먹으라고 하면서 손수 둥글게 주먹밥을 만들어서는 여럿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몸을 조심하면서 앞날을 생각하라며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남이와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져나올 때 순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갈 때는 “뚱뚱한 배”를 내밀며 임신부처럼 가장했으나 나올 때는 그럴게 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대문을 지키는 조직원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운놈 떡 하나 더 주라고 순자가 나오면서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했으나 “흥”하고 코방구를 뀌면서 대꾸도 없었다. 그 조직원은 들어가는 사람들만 중시할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인 모양이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0-22
  • 실화연재(2) 만년에 장학량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월 29일, 여정조는 뉴욕 맨하탄 패조이(贝祖贻) 부인의 저택에서 처음으로 옛상급인 장학량을 배알했다. 첫대면이지만 여정조는 예절성적인 인사말과 예물을 증송하는데 그쳤다. 이튿날 오전, 여정조는 맨하탄에 있는 모든 외부인들을 피한채 한 스위스은행 총재의 집무실에서 장학량과 조용히 만났다. 그들의 담화는 약 한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여정조는 먼저 등영초가 보낸 친필편지를 장학량에게 넘겨주었다. 편지를 본 장학량은 대뜸 감개무량해하였다. 그는 확대경을 사용하면서 두번이나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다 읽은 장학량은 “주은래 선생은 내가 잘 안다오.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소. 나를 대신하여 등여사한테 문안을 전해주길 바라오”가고 하며 여정조한테 부탁했다. 이어서 여정조는 장학량에게 그에 대한 등소평, 강택민, 양상곤 등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들의 문안을 전하면서 동시에 장학량 장군이 이번에 미국행을 했던 김에 대륙으로 돌아가 친인척들을 방문한다면 조국대륙에서는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장학량은 몹시 감동되어 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차 어조를 바꾸면서 “나로 놓고 보면 진짜 대륙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 소원이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오. 나의 움직임은 곧 대륙과 대만에 모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오. 나는 나 개인의 일때문에 정치상에서 복잡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소.” 그 뒤 뉴욕의 각계 인사들이 장학량을 위해 각종 축수활동을 벌였지만 중공의 대표인 여정조는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이 활동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6월 4일, 뉴욕에서의 축수활동이 끝나자 장학량은 주동적으로 여정조와 만나자고 제기해왔다. 지점은 유엔주재 중국대표단 단장 이정상의 관저였다. 이날 장학량과 여정조는 장장 3시간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담화범위도 매우 넓었다. 이날 여정조는 장학량한테 중국공산당의 한 나라 두가지 제도 및 조국의 평화통일방침 등에 대해 소개했고 장학량은 중국공산당의 이런 주장에 대해 찬동을 표하면서 자신도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저그마한 힘이라도 바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전에 나는 이를 위해 일을 하였었수다. 지금 나는 역시 나의 이 신분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소. 내 나이 이젠 90여살이지만 나를 원하는 곳이나 일거리가 있다면 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중국인으로서 중국을 위해 힘을 바칠 것이우다.” 이어 장학량은 여정조에게 솔직하게 아직은 대륙방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친필로 등영초한테 쓴 편지를 내놓았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주부인 영초누님 혜감(惠鉴): ×××선생이 미국까지 찾아와 존찰(尊札)을 베풀어준 것에 대해 매우 기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학량이 대만에 기거하면서 어느 하루도 고향에 대한 정감을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향후 기회와 인연이 닿는다면 긍정코 고향의 땅을 밟아보렵니다. ×××선생을 통해 영초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경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면서 무더운 하계(夏季)의 안녕 빕니다. 1991년 6월 2일 그 뒤 장학량은 미국에서의 볼일을 마무리하고는 1991년 6월 27일 부인 조일적과 함께 하와이를 거쳐 대만으로 돌아갔다. 하다면 당시 장학량이 이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있었음에도 왜 조국대륙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를 두고 해내외 언론들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그때 홍콩 “신보(信报)”의 한 기자는 “장학량의 동향, 먼저 대만으로 돌아간 뒤 다시 두번째 방안 강구할 것”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장학량은 행동으로 자신의 중의(重义)를 증명했다. 그는 이 중의를 위해 미국에서 직접 대륙으로 날아가 조상묘를 첨앙하고 친인척을 만나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장군 신변의 인사에 따르면 장군은 이번에 중공의 여정조 선생을 만난 뒤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에 중공에서는 여정조 선생을 미국에 파견하여 장학량 장군을 배알하고 그를 대륙으로 초청하는 등 높은 품위를 보여주었다. 여정조 선생은 장군한테 대륙의 모든 사람들, 특히는 동북 고향의 사람들은 장군이 하루 빨리 대륙으로 가는 것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고 전했다. 하지만 장군은 심한 심리적 아픔을 참으면서 이를 사절했다. 장군이 미국에 있는 기간, 외계에서는 모두 그가 중국의 통일과 양안의 관계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지켜보았다. 하지만 장군은 조국의 통일이나 양안관계 등 정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기자들의 취재를 접수할 때면 그저 동북군 시절의 이왕지사에 대해 회고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장군한테 국가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하려는가에 대해 물었을 때 장군은 웃으면서‘나 지금 한운야학(闲云野鹤)처럼 떠도는 몸으로 진짜 국가통일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저 국가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을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군은 국민당에 충고하기를 ‘공산당과의 담판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학량은 제일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후 가고 싶었던 조국대륙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특히 1년 뒤 재차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에 가서 영구성 정착을 한 후 그가 만년에 대륙으로 가지 않은 것에 대해 각종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해내외 매체들의 분석은 각양각색이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0-22
  • 이상권변호사 칼럼 - 지급명령 이의신청시 주의점 소개
    ■이상권 변호사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의 이상권 변호사는 지급명령 이의신청시 주의점을 소개했다. 채무자가 임의로 돈을 주지 않는 경우 법에 의해 강제집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판결과 같은 집행권원이다. 지급명령제도는 소송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간단하게 집행권원을 얻어 집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지급명령에는 청구원인사실을 주장만 하면 되고 증거를 붙일 필요가 없다. 지급명령에 대해서는 이의신청을 하면 소송으로 전환되게 된다. 채권자의 지급명령신청에 대해서 이의를 하는 경우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이의신청서에는 이의신청 사실만을 적는다. 이의신청서에 답변의 내용을 적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이의신청서에는 이의를 한다는 내용만을 적는 것이 좋다. 이의신청서에 왜 이유를 하는지 이유를 적을 필요도 없다. 다만 ‘이의신청한다’는 취지를 적어서 간략하게 내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소장에 대응하는 준비서면은 오랜 시간을 숙고해서 적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의를 하면서 답변서에 적을 내용을 적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둘째, 이의신청을 한 후 상대방의 보정을 기다린다. ​이의신청을 한 후에는 상대방이 보정을 기다려야 한다. 채무자가 이의신청을 하면 법원은 상대방에게 소송에 필요한 인지와 송달료를 추가로 납부하라고 통지서를 보낸다. 그런데 여기서 상당한 사람들이 인지대와 송달료를 납부하지 않고 각하를 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급명령을 일종의 ‘찔러보기’나 ‘의사타진’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권추심업체나 대부업체 중에는 무차별적으로 지급명령을 한 후 이의신청을 하는 것은 다 각하를 당하고 이의를 하지 않는 사건만 채권추심을 진행하는 업체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지급명령의 활용도를 알고, 반드시 상대방이 보정을 하였는지 여부를 기다려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증거제출을 기다린다. ​지급명령에은 청구원인을 주장만 하면 되고 증거를 붙여 제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다투지 않을 것을 전제로 집행권원을 신속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이 지급명령제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채무자가 이의신청을 하면 채권자는 인지대와 송달료를 납부해야 할 뿐 아니라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채무자는 채권자가 청구원인은 입증하는 증거를 제출하기까지 답변서를 제출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전혀 증거가 없으면서도, 혹은 제대로 된 증거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급명령신청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증거를 제출하면 먼저 증거에 대해서 검토를 하고, 그 다음에 청구원인사실을 검토하여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넷째, 답변서는 신중하게 제출한다.​ ​답변서를 제출할 때에는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를 면밀히 검토하여 신중한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답변서나 소장이나 준비서면에서 한번 뱉은 말은 거의 되돌릴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한번 한 말을 번복하기 시작하면 그 소송은 졌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한 후에 답변서를 내야 한다. 특히 상대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즉시 이의사항이 있으면 이의를 해야 한다. 만약 상대방의 증거가 원본이 없는 것 같으면 원본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위조된 것 같으면 위조항변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낸 증거에 대해서 다투지 않다가 추후에 이야기를 하면 ‘책문권의 이의상실’의 대상이 되어 이의신청을 하지 못할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적시에 이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가능하면 변호사를 선임한다. 소송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기술적이다. 변호사가 개입하지 않고 일반인이 답변을 하는 경우, 스스로 자인을 하거나 상대방이 입증할 사실을 인정해주거나 하는 실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소송에 대해서 경험이 아주 많고 소송이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닌 이상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지급명령 신청서와 증거자료를 갖고 최소한 변호사와 상담을 해야 한다. 변호사와 상담을 한 후 본인이 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소송을 진행하든지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을 하든지 선택을 하시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소송에서 서면의 작성은 매우 기술적이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매우 요령있게 매우 정중하게 매우 설득력있게 써야 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답변서를 쓰는 데에도 매우 요령이 필요하다. 어떤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요령있게 인정하는 서면을 써야한다. 상대방의 청구원인을 인정한다고 해도 일단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다면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 옳다. 채무는 인정하더라도 그냥 인정하는 것과 요령있게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분할납부를 해 달라고 주장하는 경우 그냥 주장하는 경우 상대방의 청구원인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청구원인을 부인하지만 설령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사유를 들어서 분할을 해 주시거나 혹은 기간을 연장해 해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 소송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변호사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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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6
  • 이상권 변호사 칼럼 - 가족간의 돈거래는 냉정해야
    ○이상권 변호사 2014년 9월 19일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는 ‘mbc 오늘아침’에 기획기사를 제공했다. 이 기획기사는 가족간의 돈문제를 다룬 것으로 제목은 ‘남보다 못한 가족, 돈 앞에 무너지는 가족애’라는 내용이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타인과의 거래만큼이나 빈번하다. 그런데 가족간의 돈거래는 가족이기 때문에 더 깊은 파국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에서 제공한 사례 중에는 형부가 처제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가 있다. 형부가 처제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못하자, 결국 형부와 언니가 이혼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례는 가족간의 돈거래가 가진 위험성을 잘 말해준다. 가족간 돈거래의 특징은 무엇이고, 가족간 돈거래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민사적으로는 가족간의 돈거래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차용증을 쓰고, 금전소비대차 계약을 하고 돈을 빌려주며, 소송에서 이를 입증하려면 차용증과 계좌이체내역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차용증’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형사법에서는 친족상도례라는 것이 있다. 친족상도례는 강도와 손괴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서,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호주, 가족과 그 배우자간의 재산죄에 대해서는 형을 면제하고, 이 외의 친족간에는 친고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식이 가출하며 아버지 재산을 절취해도, 절도죄는 형의 면제를 받게 되며, 사촌이 절취하면 친고죄가 된다. 이런 형사문제와 달리 민사적으로는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가족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거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 타인과 거래를 한다면, 그 사람의 재산과 신용을 체크하고 믿을 수 없다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이 있다면 담보를 제공받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간의 거래에서는 돈을 갚지 못할 줄 알면서도 거래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므로 가족간의 돈거래에는 이런 점들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가족간의 돈거래도 냉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때로는 돈과 함께 가족을 잃을 것이라는 위험성을 안다면, 가족간의 돈거래도 냉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족간의 거래는 위험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을 넘어서서 돈을 빌려주건, 대출을 하여 빌려주거나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간의 돈거래에서는 가능하면, 빌려주는 액수를 줄이고, 자신의 감당할 수 있는 돈을 그냥 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둘째, 가족간의 돈거래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경에 의하면, ‘가족과 친구는 위기의 때를 위해서 있다’는 말이 있다. 가족에 대해서는 우선 애정을 가지고 도와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족간의 돈거래도 차용증을 정확히 받는 것이 좋다. 가족의 경우 타인에 비해 채무자에 대한 정보를 잘 알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이 돈을 갚을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지, 장래성은 어떤지 등을 정확히 계산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라면 빌려주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족간의 돈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경제적인 기반을 닦도록 도와주는 것의 일환으로서 돈거래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고기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거래해야 한다. 단순한 돈거래보다는 더 지속적이고 깊은 도움이 필요하다. 가족관계에서는 단순한 차용보다 가족구성원이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와주는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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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2
  • 살기 좋은 우리 서울
    ●연 통 서울은 살아볼수록 참 살기 좋은 도시라는 느낌이 온다. 물론 앞에 반드시 ‘돈만 있으면’이라는 규정어가 붙어야겠지만 말이다.오래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태우 정부가 근로자의 임금을 대거 인상해 주고 복지예산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김영삼 정부 시절에 글로벌화를 부르짖으며 선진국 진입을 선언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서울에 1년을 살아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누가 배달민족이 아니랄까 봐 배달은 곳곳에 24시간 존재한다. 시골의 다방 커피 배달부터 도시공원의 짜장면 배달까지…밤중에 치맥을 시켜도 쪼르르 달려오는 배달민족. 사실 배달을 시키는 쪽이 미안해 말을 꺼내기가 무색할 정도로 배달 시스템이 어찌나 발달해 있는지, 돈 앞에서 굽실거리는 허리가 가엾기까지 하다. 또 필요 이상으로 문화시설과 복지시설에 투자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문화시설과 복지시설은 가동률은 50%를 넘지 못한다. 심지어 가동률이 1% 미만의 시설들도 쉽게 짚어낼 수 있다. 선거에 나서면 개나 소나 지역구민들께 숱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느라고 전반적인 국면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내 선거구’의 이익만을 위하여 발바닥이 부르트는 의원님들과 지자체장님들의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옆의 구에서 스포츠센터 하나 세우면 ‘우리 구에서도 없으면 안 되지’ 하고 그걸 선거 구호에 집어넣어 가동률이 10%도 안 되는 스포츠센터 하나 데꺽 만들어낸다. 그 돈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한국 정부와 여당이 내년 복지예산을 10% 이상 늘린다는 정책에 따라 복지예산이 처음으로 국가 예산의 30%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지자체들은 복지정책에 따른 지방재정의 고갈 때문에 중앙정부에만 손을 내밀다 못해 서민세를 대폭 올린다고 난리고 중앙정부는 담뱃값을 대폭 인상하겠다고 난리다. 복지 디폴트가 생길 정도로 선진국 수준의 국민 총생산을 올리지 못하면서 복지나 문화에는 선진국보다 더한 예산을 쏟아붓겠다고 하니…. 민주선거의 악성 순환이 이런 데서 보인다. 그래도 필자와 같이 한국의 정치생활과는 무관한 ‘외국인’은 참 소비가 편하고 서비스가 물샐틈없이 슴배어 있는 서울이 살기가 참 좋다는 게다. 서비스가 이제 더 슴배일 곳이 없을 거야 하고 살피면 또 예상외의 서비스 품목이 속속 발생한다. 이윤을 좇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는 시장의 속성…….이제 중국에 가면 참 불편한 감이 든다. “쩌거…메이유…너거 뿌싱~”이 중국은 아직 수두룩한 분야에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시민이 “우리 동네 네거리에 유턴이 없으니 참 불편하오!” 하고 떠들면 다음 달에 그 네거리에 유턴 신호가 생긴다. 그래서 서울의 거리는 네거리마다 거의 다 유턴 라인이 있다. 북경에서는 유턴이 정말 가물에 콩 나듯 너무 드물어서 불편했는데, 이건 달리다가 유턴해야겠다 싶으면 바로 앞 네거리에서 유턴하면 된다. 북경은 “아차, 길 건너편의 목적지를 지나쳤네!” 하고 유턴을 하자면 네거리를 보통 다섯 개 이상은 더 가야 유턴 라인이 보인다. 서민이 난전을 벌여 “소비돈이나 좀 벌어야겠소” 하고 떠들면 골목길이 다음 주면 벼룩시장이 된다. 북경에서는 말도 안 돼! 시정감찰대가 와서 와당탕 짓부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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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7)
    ■ 김철균 1966년 순자는 연변위생학교 지도부의 배려로 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직원으로 배치받았다. 이른바 가정에 잔밥들이 많고 생활이 어려운 김용환 교원의 가정에 대한 학교지도부의 특별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임시직원 –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알수 없으나 중국땅에서 임시직원이란 신조어가 나타나기 시작해서부터 임시직원은 정식직원들이 늘 “색안경”을 끼고 업신 여기는 직종의 하나로 굳어져버렸다. 또한 노임은 정식직원보다 훨씬 적으나 하는 일은 정식직원에 곱절 많고 힘든 직종으로 되군 했다. 순자 역시 맡은 일이 많았다. 기숙사 칸마다 불을 때주고 복도의 청소를 해야 했으며 그것을 마치면 식당에 가서 밥을 그릇에 담아 교직원과 학생들한테 공급하는 일까지 맡아해야 했다. 하지만 일이 몸에 밴 순자는 자기가 맡은 임무를 다 하고도 오히려 일을 더 찾아했다. 남들의 말을 빈다면 일을 찾아서 하고 또 “싱거운 걱정”까지 하군 했다. 예하면 부모가 없이 삼촌집에서 자라다가 위생학교로 온 학생의 단추를 달아주고 옷과 양말을 기워준 일, 감기에 걸린 학생한테 입쌀죽을 쑤어준 일과 위생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하는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배워준 일 등으로 한순간도 손에서 일거리를 놓으면 속에 탈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자질구레한 일 같았지만 자그마한 이런 것들이 흔히 남들을 깊이 감동시키군 했다. 당시 기숙사식당으로 출근하는 40대의 여인들중 자식이 외지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이도 몇명 있었다. 평소에 그들은 순자한테 임시직원이라고 흔히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자주 차별시하다가도 일단 순자의 재능에 대한 말만 나오면 “우리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의 기숙사에도 순자아주머니처럼 착한 여성이 있으면 좋으련만”하고 탄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두고 순자는 남들이야 자기를 차별시하든 춰주든 일절 개의치 않았고 그저 수걱수걱 일하는 것으로 응부하군 하였다. 출근은 가장 먼저 하고 퇴근은 제일 나중에 하였으며 기숙사에 있는 시간은 줄곧 일에만 몰두하군 하였다. 헌데 순자가 이 기숙사식당으로 출근하여 몇달간 지나자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이곳 기숙사식당도 여느 단위의 종업원식당처럼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가 몇개씩 있고 그 창구앞에 학생들과 독신교직원들이 줄을 서서 밥과 국을 타가게 되어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사람이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보다 순자가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앞에 독신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흔히 기다랗게 줄을 서기가 일쑤였다. 또 어떤 학생들은 다른 창구앞에 줄을 섰다가도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빠져나와서는 순자가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앞에 기다랗게 선 줄 뒤에 다시 서기도 했다. 알고 본즉 밥을 떠줄 때 순자는 자기의 자식한테 밥을 떠준다는 마음으로 밥그릇에 정량표준대로 담아주었던 것이다. 당시 순자의 마음이라면 식당이 밑지지 말아야 하겠지만 학생들도 배곯는 일이 적어야 한다는데서였다. 하긴 순자가 처음부터 밥을 그렇게 담아서 공급한건 결코 아니었다. 기숙사식당에서 하루이틀 일하다보니 밥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버리는 현상을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 하얀 밥들이 구정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저 아까운 밥을 저렇게도 많이 구정물에 처넣다니?! 차라리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독신교직원들이 한숟가락이라도 배불리 먹게 하면 안되겠는가?) 그래서 자기의 창구앞에서 밥과 국을 타가는 학생과 독신교직원들한테 밥을 꾹꾹 눌러 정한 표준대로 담아주기 시작하였는데 그것 역시 옆사람들의 눈치가 보이어 옆사람과는 등을 돌리고 몰래 담아주군 하였다. 하지만 옆사람들이 그 눈치를 모를리가 만무했다. 우선 순자의 창구앞에 기다랗게 줄을 서는 것도 이상했고 순자의 앞에 놓인 대야의 밥이 눈에 뜨이도록 크게 축이 나는 것을 봐도 분명했다. 이른바 임시직원인 처지에 “생색”을 내는 순자를 보고 의논이 분분했다. 어떤 일꾼들은 이해하여주었지만 어떤 일군들은 “누군 생색을 낼줄 몰라서 그러나” 하며 입을 삐쭉거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일이 끝나자 식당관리원이 언짢은 기색으로 순자를 불렀다. “학생들한테 밥을 많이 주는걸 나무람할바는 아니지만 순자아주머니가 창구를 맡은후부터 밥이 모자랄 때가 자주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이곳은 마음치레를 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항상 수입과 지출의 평형을 잡아야 하니깐요.” “잘못했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그저 학생들이 한창 먹을 나인지라 모두가 나의 자식들 같아서요. 그리고…” 순자는 밥을 한대야씩 버릴 때가 많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임시직원 신분에 그런 일에까지 참견하랴 싶어서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순자는 학생들한테 밥과 국을 떠줄 때마다 옆사람들의 눈치가 여간만 보이지 않았다. 5 순자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한지도 어언간 2년철을 잡았다. 그 사이에 우리 중국력사상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연변위생학교에도 해방군 선전대가 진주하였다. 문화대혁명과 해방군선전대의 학교진주 등은 이미 당의 11중 3차 전원회의후에 전면 부정된 역사이다. 하지만 당시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은 비록 상급의 지시에 의해 학교로 진주했고 또 이른바 “좌파지지행동”을 하였지만 대부분 소박하고 인정이 짙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순자 역시 문화혁명기간 남편마저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갇혀있는지라 말을 안했지만 그 문화혁명에 대해 썩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그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만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순자는 그 해방군선전대 성원가운데 김장희라고 불리우는 조선족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 이말 저말 하던 중 그가 길림지구의 유수현에서 온 사람이며 교묘하게도 남편 김용환과 같은 경주김씨라는 것이었다. 당시 남편마저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갇혔기에 순자가 정신상, 생활상에서 받은 압력은 몹시 클 수밖에 없었다. 출근하면 몇몇 아낙네들은 늘 “외국특무”의 가족이라고 순자를 말밥에 올렸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순자의 손만을 기다렸다. 가정이란 필경 여자와 남정들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순자의 가정은 이전에도 순자가 많은 가정일을 도맡아했지만 남편이 갇히고 보니 더욱 그랬다. 아니 그것보다 남편이 없는 가정은 공허하기 그지 없었다. 부부가 함께 있으면 속심말도 하고 서로 의지하기도 하련만 순자는 모든 것을 혼자서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항상 자신이 봉착한 곤란과 애로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순자였다. 그 때 순자는 해방군선전대로 위생학교에 진주하여 기숙사생활을 하는 김장희 군인을 보며 집을 멀리 떠나 몹시 고생하는 것 같아 안쓰러워보였다. 그래서 여러번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를 청하였으나 김장희는 번마다 사절하였다. 인민군대에는 “3대규율과 8항주의”가 있기에 절대 민간인의 가정에 들어가 밥술을 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순자마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한편 그래서인가 김장희군인이 더욱 돋보이었다. 남들은 “해방군이 연변의 실정을 몰라가지고 한쪽켠 조직의 편에 서서 다른 한쪽켠을 진압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급의 지시에 의해서이지 군인들의 뜻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은 가두의 아낙네들 몇몇이 군인 한명을 놓고 욕하고 손사태질을 하면서 집중공격을 할 때 순자는 그 아낙네들을 뜯어말리며 “임자네 아들도 군대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며 설복을 하기도 했다. 재단사는 자기가 지은 옷을 남들이 즐겨입고 또 그 옷이 패션으로 되어 인기가 오를 때 가장 보람이 있고 요리사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 가장 보람이 있다고 한다. 순자는 비록 재단사나 요리사는 아니였지만 자기의 성의가 타인한테 기쁨으로 돌아갈 때 제일 보람있는 인생의 진가를 제법 잘 체험하군 했다. 그러다보니 가정의 사정은 념두에서 깡그리 잊은채 남을 위해줄 때가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순자가 학교식당에서 그냥 버려버리는 양배추뿌리를 주어서는 그것의 껍질을 발라내고 씹기 좋은 여린 속살만을 잘게 썰어 간장에 담궜다가 해방군선전대 장병들한테 내놓았다. 그러자 집에 청하면 깎듯이 사절하던 해방군장병들은 그것만은 받아주는 것이었다. 양배추뿌리로 만든 반찬을 먹어보던 군인들은 맛있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밀더니 앞다투어 저가락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양배추뿌리짠지를 담은 그릇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군인들이 양배추뿌리짠지를 반찬으로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순자는 내심으로 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양배추뿌리로 만든 반찬도 맛있게 먹는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저 사람들도 분명 부모님이 있으련만 그 부모님들이 저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할까? 이튿날 순자는 배추김치, 영채와 깍두기 등을 한바게스나 담궈갖고 식당으로 가져갔다. 점심무렵 순자가 그 몇가지나 되는 김치를 내놓자 군인들을 포함한 교직원과 학생들 할 것 없이 모두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아니, 순자아주머니! 김치를 여기에 몽땅 가져오고는 집식구들은 굶는답니까?” “아주머니, 아주머니를 보노라니 선배들한테서 항일전쟁시기 동북의 한 조선인 어머니 얘기를 듣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저의 그 선배군인은 어느 한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부대와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를 한 조선인 어머니가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부축하여갔답니다. 그러고는 약재를 캐여 민간요법으로 그 선배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한편 딸과 약혼한 사위가 오면 잡아먹이려고 키우던 씨암탉까지 잡아서는 그 선배한테 먹이었답니다. 그뒤 그 선배는 상처가 재빨리 완쾌되여 부대를 찾아갈수 있게 되였답니다. 그 선배군인은 이 얘기를 몇번이나 저희들한테 해주면서 인민의 군대는 절대 인민을 떠날 수 없으며 군대와 인민은 물과 물고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선배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저는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아주머니가 바로 그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해방군선전대 성원들은 아주머니의 이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해방군선전대 책임자는 순자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러자 기타의 군인들 모두가 일렬로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순자한테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낱 임시직원인 순자였지만 기숙사식당의 일군들과 학생 및 독신교원과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속에서의 인기는 아주 높았다. 그리고 모두들 애로사항같은것이 있을 때마다 곧잘 순자를 찾아 해결방도를 요청하군 했다. 그 중에는 이전에 순자를 고깝게 생각하던 여성일꾼들도 있었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 순자가 식당일을 그만두게 되자 해방군선전대의 김장희 군인은 순자를 진짜 형수님처럼 믿으면서 고향에 있는 가정의 애로사항을 털어놓기도 하고 문화혁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김용환교원은 억울하게 갇혀있는 분이기에 앞으로 꼭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순자한테 용기를 내도록 하였다. 그는 후에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연변위생학교에서 사업하던 때의 그 한단락의 생활을 잊지 못하여 김용환/김순자 부부한테로 자주 서신을 보내오면서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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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1
  • 실화연재 (1) 만년에 장학량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만년에 장학량 장군은 조국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타국의 황야에서 쓸쓸히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일찍 등영초가 미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친필편지를 장학량 장군한테 보내어 조국으로 돌아올 것을 건의하자 장군은 등영초한테 보낸 회신에서 만년에 자신이 귀국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럼 애국장령 장학량이 무엇때문에 만년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의 황야에서 인생을 마치었을까? 이에 대해 지금도 토론하고 연구할 중요한 화제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분석이다. 등영초 편지로 장학량을 초청 중국내의 역사학자들, 특히는 동북의 연구학자들은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에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가 미국으로 건너간 장학량한테 친필편지를 보냈었는가에 대해 쟁론이 많았었다. 그러다가 새세기가 시작될 무렵, 등영초 여사가 보냈다는 그 편지의 복사본이 중국의 기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91년 3월 10일, 장학량 장군과 부인이 대북 도원공항을 통해 미국행을 떠났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오자 중공중앙은 이에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 특히 당시 중앙서기처는 장학량이 대북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중외기자들과 한 담화내용에 대해 더욱 주목했다. 그 때 장학량 장군은 대륙에 돌아와 친척방문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등소평이 이를 알고는 당시의 중공중앙 총서기인 강택민과 국가주석 양상곤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당신들이 전문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를 바란다”고 건의하였으며 장학량이 대륙으로 온다면 잘 맞아줄데 관해서도 부탁했다. 등소평의 부탁에 따라 중공중앙에서는 즉시 전문회의를 소집하였다. 인민대회당에서 소집된 회의는 강택민이 직접 주최했고 중공의 대만판공실, 중국국민당(좌파)의 대만판공실과 중공중앙 통일전선부 등 여러 부서의 책임일군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강택민은 장학량이 미국방문이 끝난 후 어떻게 편리하게 대륙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포치하였다. 뒤이어 중공중앙에서는 즉시 긴장한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당시 강택민이 포치한 것들로는 4가지었다. 첫째, 1991년 6월이면 장학량 장군의 91세 탄신일이기에 생일날 기념경축활동을 조직한다. 둘째, 이해인즉 9.18사변 발발 60주년이기에 기념활동을 대규모적으로 조직한다. 셋째, 일군들을 파견하여 심양에 있는 원수부와 원수릉을 수건하며 장학량 장군이 귀국 후 부친 장작림의 유해를 첨앙(瞻仰)할 수 있도록 사전의 준비를 빈틈없이 한다. 넷째, 중앙 부부장급 책임자 1명을 미국 샌프랜시스코에 파견하여 중공중앙에서 장학량 장군을 열렬히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함과 아울러 장학량이 귀국한 뒤의 일체의 슈켓쥴에 대해서는 전달한다. 준비사업은 비교적 순리로웠다. 장학량 장군의 91주세 탄신기념활동 준비와 9.18사변 60주년 기념활동 준비사업 그리고 심양의 원수부와 원수릉 수건준비 등을 하나하나 적시적으로 진척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를 미국에 파견하여 장학량 장군을 모셔오는가 하는 것이 걸림돌로 되었다. 당시 중앙에서 제출한 부부장급 지도일꾼은 도합 56명이었다. 그 중 축소되어 고려된 것은 이전 장학량의 동북군 시절의 부하였던 일꾼들이었다. 예하면 원 철도부 부장 곽유성, 원 국방과학사업위 부주임 만의, 원 전국정협 부주석인 여정조(吕正操)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중공당내의 노동지들이었으며 또한 장학량 장군과도 특수한 전투적 우정이 있었던 분들이었다. 최종 중앙에서는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여정조를 미국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정조는 장학량의 고향인 요녕 해성사람으로 일찍 동북군의 전포를 입었던 사람이었으며 그가 동북강무당(讲武堂)에서 공부할 때 장학량은 그의 선생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장학량을 도와 “서안사변”에 직접 참가했었기에 장학량과 아주 깊은 사적정감도 있었다. 한편 중공중앙에서 그를 선택한 것은 이상의 조건외에도 그가 선택된 사람들 중 원 직무가 제일 높았던 것도 있었다. 중앙에서 여정조를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 주은래의 미망인인 등영처과 중남해 서화청에서 여정조를 만났다. 이에 앞서 등영초는 중공중앙과 등소평의 의견에 따라 사인의 명의로 장학량 장군한테 보내는 편지를 이미 써놓았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경 선생(汉卿ㅡ한경은 장학량의 별호임): 세월은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수십년간의 세월은 우리를 하늘과 바다를 사이두고 갈라놓고 서로 마주보며 기다리게 했습니다. 생전에 은래는 매일 선생을 외우며 늘 슬퍼하고 애탄했습니다. 현재 선생의 신체가 안태(安泰)하고 만사가 순리로워 만리행을 떠나셨으니 이는 고인에 대한 깊은 위안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선생이 고향을 떠난지가 아주 오래된지라 현재 고향의 친지들은 모두 선생을 기다리고 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최근년들어 양안 사이의 울바자가 점차 거둬지고 내왕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침 지난 겨울부터 올봄에 들어서면서 날씨가 따뜻해져 고국여행이 아주 좋을듯 싶습니다. 금일 이 영초가 등소평 선생의 위탁을 받고 성심성의로 선생께서 편리한 기회를 빌어 부부동행으로 한번 대륙여행을 해볼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고향땅을 돌아보면서 성묘하고, 친인척들을 만나보며 관광도 해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리고 아주 정착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이 편지는 중공당 전문인사 ×××동지가 대신 갖고 감을 소개하며 그와 모든 것을 상의하기 바람니다. 저의 성의를 받아줄 것과 모든 절차를 타당하게 배치할 것을 바랍니다. 선생의 부인 조여사한테도 문안을 전합니다. 이 봄에 들어 옥체만강하기를 기원합니다. 등영초 드림 1991년 5월 20일 이는 등영초가 장학량 장군한테 보낸 두번째의 편지었다. 첫통의 편지는 1년전 장학량이 대북에서 90세 탄신일을 기념할 때 축전을 보낸 것이었다. 당시 등영초의 축하전문은 대북 원산호텔 곤륜청 중앙벽에 높이 걸려 많은 해내외 인사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이번의 요청편지 또한 성의가 짙은 언어로 다듬어져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난 애국장령에 대한 중공원로들의 존경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5월 23일, 중공중앙의 특명을 받은 여정조 일행 5명은 북경을 떠나 미국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한 뒤에야 자기들이 한발 늦었음을 알게 되었다. 장학량 장군은 며칠전에 미국 동부에 있는 뉴욕으로 친척방문을 갔던 것이었다. 샌프랜시스코에 남아있는 사람들로는 장학량의 부인 조일적 여사와 아들 장여림(张闾琳)뿐이었다. 당시 여정조 일행은 샌프랜시스코에서 조일적 여사의 생신축하파티에 참가한 후에야 뉴욕에 있는 장학량한테로 날아갔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0-07
  • “미인계” 실패로 죽음을 맞은 여간첩- 정평여
    정평여는 중국 절강성 난계의 사람으로 1918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정월(郑钺)은 정치이념이 강한 사람으로 일찍 일본의 한 정법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일본시절 정월은 손문(孙中山) 선생을 따라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서 동맹회에 가입하하였다. 정평여의 어머니는 정월이 동경유학시 알게된 일본 명문가정의 규수로 일본이름은 키무라와 나코(木村花子)였다. 당시 키무라 나코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중국을 동정하였으며 이에 반항하여 혁명에 나선 정월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에로 치달아올랐고 결혼에 올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혼 후 키무라 나코는 남편을 따라 중국에 정착, 이름을 중국식 이름인 정화군 (郑华君) 으로 고치었다. 그들은 선후로 자녀 2남 3녀를 보았는데 정평여는 둘째딸이었다. 정평여는 어릴적부터 총명하고도 착했으며 또한 일본인 어머니한테서 일본어를 배운데서 놀라운 일본어구사 능력도 갖고 있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 이후 정평여는 단연히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상해가 일본에 의해 함락된 후 정평여는 그녀 자신의 우월한 조건(양호한 사회관계 및 탁월한 일본어 구사능력)에 의해 상해에서 국민당 군통의 항일지하정보원으로 되었다. 당시 그녀는 갓 19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뻤고 품위가 높았으며 상해의 유명한 미녀이기도 했다. 당시 상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화보는 “양우(良友)”였는데 1937년 7월, “양우” 130기의 표지에는 정평여의 사진이 실리었다. 그 때 그녀는 특수신분이었던만큼 그냥 “정여사”로 소개되었을뿐 그의 진짜 이름이나 기타 내막은 언급되지 않았다. 1937년 8월 13일, “송호항전(淞沪抗战ㅡ상해보위전)”이 폭발하고 그해 11월 11일 중국군이 상해에서 철거하면서 상해가 함락된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색계(色·戒)”는 많은 역사적 화폭으로 당시 상해의 모습을 반영, 영화의 여주인공 왕가지의 원형이 바로 정평여었고 남주인공 역선생의 원형은 곧바로 왕정위의 특공본부 주임었던 정묵촌었다. 당시 정평여는 매우 우수한 정보원이었다. 그녀는 모친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군 고위급 관원들 주위를 배회, 드디어 고노에 후미마로(このえ ふみまろㅡ近卫文磨)가 상해에 파견한 회담대표 하야미즈(早水リサㅡ早水亲重)와 접근하는데 성공,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또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두 아들 및 화중파견군 부총참모장 이마이 다케오(いまいぶふ)의 부인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 군통국에서 그녀한테 맡긴 임무는 일본 수상 후미마로의 아들 고노에 후미타카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후미다카를 납치한다고 해서 일본 수상이 중국침략을 포기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노에 후미타카는 정평여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내걸고 얼마든지 후미타카를 제거할 수 있었다. 헌데 얼마 뒤 군통에서는 그 위험한 “유희”를 그만둘 것을 재차 명령, 후미타카는 자신도 모르게 중일정치의 희생품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정평요는 왕정위(汪精卫)가 곧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중요한 정보를 장악, 무전기로 중경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민정부는 이에 대해 근본 중시하지 않았었다. 후에 왕정위가 진짜로 중경과 이탈하고 일본에 투항해서야 국민정부는 정평여의 활약을 인정하면서 그녀를 적극 기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군통에서는 한간 정묵촌을 처단할데 대한 임무를 정평여한테 맡겼다. 일제통치시기 왕정위 정권은 당시의 상해 치스펠로(极司菲尔路-지금의 만항도로) 76번지에 특공본부를 설치, 주임은 원 군통국 제3처 처장이었던 정묵촌이었다. 당시 정묵촌과 리사군 등 일당들이 왕정위와 함께 일본에 투항했던 것이다. 군통에서는 항전을 포기하고 일제에 투항한 정묵촌을 처단하기로 결정, 행동계획은 상해에 잠입해있는 진립부(陈立夫)의 결의형제 진보화에게 명령하여 정묵촌이 호색한이란 점에 비추어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정묵촌은 소문 그대로 “색중아귀(色中饿鬼)”였다. 그는 어느 한 공공장소에서 정평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시 양장차림의 정평여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정묵촌한테 달라붙어 수시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졌으며 정묵촌으로 하여금 그녀한테 푹 빠져들게 하였다. 그러자 군통에서는 시기가 성숙됐다고 판단, 행동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제1차 행동은 정평여가 정묵촌을 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행동대원들이 정평여의 집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묵촌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헌데 그날 교활한 정묵촌은 차를 몰고 정평여의 집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무슨 낌새를 챘던지 방향을 되돌린데서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군통에서는 상해의 책임자를 장서경(张瑞京)으로 바꾸어 제2차 “정묵촌저격계획”을 짰다. 그 계획은 정평여가 쇼핑을 이유로 시베리아피혁상점에서 정묵촌을 만나게 하고는 그 기회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이 때 장서경이 왕정위 특공본부의 리사군한테 체포되어 “정묵촌저격계획”까지 불어버리었다. 이에 리사군은 비밀보장을 위해 우선 장서경을 보호했고 군통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자 원 계획대로 행동하다가 오히려 정묵촌 특무들한테 걸려들어 계획은 또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정평여는 신분이 탄로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해의 최대의 뉴스로 되었다. 1940년 정평여는 왕정위의 특공대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상해 호중산로의 어느 한 공지에서 처형되었는데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3세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0-06
  • “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인가?”
    지금 중국동포 사회는 … 3시간 법•제도교육, 6주 기술교육, 3일 취업교육, 8시간 건설업취업교육에 4시간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까지 '교육 노이로제' 심화 중국동포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외국인등록을 하고, 또 취업활동을 하기까지 이런 저런 교육들을 필수적으로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지난 9월 이후부터 방문취업 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외국인등록을 하려면 3시간 한국의 법과 제도를 가르치는 사회통합교육을 먼저 이수해야 한다. 그리고 취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3일 취업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건설업종에서 취업하려면 또다시 8시간 건설업 취업등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동포방문(C-3-8) 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교육이 더 많다. 먼저 방문취업 체류자격을 부여받기 위해서 6주 기술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그 다음 역시 3일 취업교육 등을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또다시 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이 떠돌게 만드는 것은, 4시간 동안 받는 건설업기초안전교육 때문이다. 지난해 중반 노량진 침수사건과 방화대교 붕괴사건 등으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정부는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하였다. 이에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려면 4시간 건설업기초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중국동포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4시간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이수했다 하더라도 건설업종에서 취업활동을 할 수 없는 체류자격자(F-4)나. 별도의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는 체류자(H-2)에 대해서도 교육기관이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또 학원가는 경쟁적으로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받으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허위 과장 홍보하여 교육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이런 저런 교육으로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중국동포들에게 ‘기초안전교육이라니...’ 불만이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장으로 동포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이 교육을 이수하면 누구나 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건설업 취업등록 8시간 교육을 3개월 주기로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 일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없는 동포들은 기초안전교육이라도 받아 이수증을 손에 쥐고 건설현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은 결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닌 듯싶다. 동포들을 위한 교육 정책이 좋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학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관계 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이 뒤따라야 할 것같다. <동포세계신문 9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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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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