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 설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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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조선족으로 살다보면 가끔 겪는 난감한 상황들이 있다. 민족팀인 한국과 조국팀인 중국이 경기를 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사실 지금까지의 입장을 되새겨보자면 나는 거의 중국팀을 응원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팀이 더 약하니까. 둘중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다 좋은 경우에는 나는 단순하게 상대적인 약팀을 응원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싶이 중한대결에서는 거의 한국이 완승이었다.
 
그러나 감정이란 참 묘한것이 응원하던 중국이 패했다고 해서 한족팬들처럼 비통의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였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역시나 우리 민족의 팀이 이겼다는 환희가 스물스물 춤추고 있었으니 오히려 흐뭇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리고 7년전에 한국팀이 딱 한번 중국에 패했을 때도 한국인들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참담함까지는 못느꼈다. 그대신 우리 조국의 팀이 이겼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면 됐으니까.
 
아무튼 어느 한쪽으로 감정이 기울지 않고 누가 이기든 단순,유쾌하게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조선족이라는 신분이 참 맘에 들었던 때가 있었다. 예선전에서 중국을 응원하다가 중국이 탈락되면 월드컵 본선에서는 계속해서 한국을 응원할 수 있는건 조선족들만의 특권이였으니까.
 
그러나 이번 경기를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은 예전과는 좀 다르다. 지난 23일에 진행된 중-한대결은 나한테 기존과는 많이 다른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가져다주었다. 그 감정들을 다 정리해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가슴 아프다"이다. 세계적인 명장 리피감독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한국의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패배한 한국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중국의 승리를 축하하는 동시에 어깨 처진 모습으로 돌아서는 한국선수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한구석이 쓰라렸던 사람이 나뿐이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른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번 글은 철저히 한국팀의 입장에서 분석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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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6라운드 경기에서 중국팀은 1-0으로 '숙명의 라이벌'인 한국을 눌렀다. 사실 정확히 짚자면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쓰고 있던 표현이지 정작 한국인들은 중국을 라이벌따위로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는게 맞을 것이다.
 
앞선 5경기에서 2무 3패로 탈락 위기에 몰렸던 중국은 이번 경기에서 패하게 되면 월드컵진출의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장 마르첼로 리피감독이 이끌고 있는 중국팀은 '넘을 수 없는 산'으로 불리웠던 한국을 보기좋게 잡으면서 월드컵예선 소조진출의 가능성에 작은 불씨를 살렸다.
 
역대 중국과의 전적에서 18승 12무 1패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는 기록이 말해주다싶이 한국은 중국과의 경기에서 항상 자신감을 드러냈었다. 아무리 손흥민과 이청용이 결장했어도 기성용, 구자철, 지동원 등 핵심 자원들이 버티고 있는 정예 멤버로 출전했으므로 한국은 경기전 기자회견에서까지도 여전한 자신감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한증'에 너무 취해 있어서 중국측의 철저한 준비를 간과하지 못한게 아닐가 싶은 한국의 패배는 7년 전 일본 도쿄에서 0-3으로 패배한 후 다시 이어온 '제2의 공한증 신화'를 일단락시켜버렸다.
 
한국인들에게 중국축구에 대해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무조건 이겨서 점수를 따야 하는 당연한 상대"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지난 경기처럼 월드컵 본선 티켓을 두고 싸우는 관건적인 경기에서 눈에 차지도 않던 상대인 중국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아직도 현실적으로 못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이며 "가장 어이없는 경기"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한국의 패배는 과연 '어이없는 패배'였을까? 리피감독의 행보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졌던 사람이라면 '어이없는 패배'라는 표현에 동의를 못할 것이다에 한표를 걸고 싶다. 두 팀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준비다. 리피감독은 한국을 잡기 위해 철저한 상대 분석을 했다.
 
사실 슈틸리케 감독한테는 쓸 수 있는 공격카드가 굉장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패턴을 누구나 다 꿰고 있다는게 문제다. 딱히 뾰족한 장점이 없이 둥글둥글한 이정협을 선발로 내세우고 간을 보다가 후반전에 장신공격수 김신욱과 교체하고 그 다음은 날다람쥐 황희찬이 투입된다. 김신욱이 투입되고 나서부터는 그 패턴이 더 단순하다. 측면으로 파고든 선수들이 크로스를 올려주면 김신욱이 헤딩패스로 2차기회를 만들고 그 사이에 침투한 구자철이나 지동원같은 2선 선수들이 그 다음의 공격을 풀어나가는 아주 뻔하디 뻔한 패턴의 반복. 그 전의 몇번의 경기와 똑같은 전개였으므로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까지도 백프로 예상하고 있었고 리피감독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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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짜놓은 각본대로 전의 경기를 복사하듯이 진행되는 경기양상앞에서 리피 감독의 대응은 완벽했다. 한국측에서 김신욱이 투입되는 즉시 4-3-3 포메이션에서 양 측면을 강화하는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했고 중국의 안방으로 깊숙히 침투하는게 어려움을 겪게 된 한국은 결국 단조로운 롱패스를 시도하는 것 밖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측면 크로스가 아닌 후방 롱패스는 김신욱을 외롭게 만들었고 어쩌다 헤딩을 해서 공을 떨어뜨려줘도 받아줄 선수지원이 부족했다. 김신욱을 지원해주기 위해 투입된 황희찬의 움직임을 좁히기 위해 리피감독은 吴曦를 투입하여 郑智와 나란히 수미를 세웠다. 그 전에는 그나마 에이스 손흥민이 있어 상대의 수비진을 교란시키면서 김신욱이 1대1 몸싸움을 통해서 제공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받쳐줬으나 이번에는 손흥민도 이청용도 없었다.
 
중원에서 기성용이 중심을 잡고 있었으나 어차피 기성용한테로 흐르는 흐름은 중국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에서는 아무리 기성용이라도 기가 막힌 찬스를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경기막바지에 가서는 왼쪽라인의 남태희를 통해 김신욱한테로 눈 먼 크로스만 뻥뻥 올려대는 장면을 보고서는 "슈틸리케감독이 더 이상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누구나 쉽게 했을 것이다.
 
손흥민이 빠진 자리가 전력면에서 꽤 큰 손실을 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팀을 이끌고 있는 감독이라면 그 빈자리를 어느정도 극복하는 임기응변능력정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연변팀의 박태하감독은 지난시즌 수비의 주축인 니콜라가 부상당한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잘 극복해냈으며 그 덕분에 연변팀의 '젊은 별' 리호걸선수까지 발굴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리피감독이 꺼내든 카드는 판을 흔들정도로 강력했다. 전술 변화를 위해 투입한尹鸿博는 지난 1월 리피감독이 차이나컵을 통해 발굴한 선수다. 한국은 이 뉴페이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공격의 루트를 여러번 尹鸿博한테 차단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尹鸿博의 교체투입은 슈틸리케 감독이 내놓을 변화를 뻔히 예상한 리피 감독이 준비한 '신의 한 수'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항상 '점유률 축구'를 강조해온 사람이다. 경기를 앞두고 가장 먼저 언급하는 전략의 첫 조건도 언제나 '점유률'이었다. 하지만 실전을 통해 그 효율성을 따져봤을 때 슈틸리케의 '점유률 축구'는 겉보이기에만 그럴듯한 '껍데기철학'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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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경기에서도 한국은 역시 점유률 우위를 점했다. 64.3% 와 35.7%라는 수치로부터 보면 그냥 점한게 아니라 완전 압도적으로 점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효율이다. 거의 2배 차이나는 점유률만큼 내용적으로는 압도하지 못했으며 양측의 슈팅횟수는 똑같이 12이였다. 골이 결국 중국팀에서 나왔으니 위협적인 슈팅도 중국이 더 많이 했다고 보는게 무리 없을것 같다.
 
점유률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간격을 좁히고 수비라인을 앞으로 올려서 미드필더와 수시로 공을 주고받아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점유률을 높게 가져가는 팀의 가장 취약점은 바로 수비라인의 뒤에 있는 넓은 공간이다.
 
이런 취약점을 막기 위한 방법도 물론 있다. 바르셀로나처럼 전방에서 미리 조직적인 압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공을 중국팀한테 뺏기면 바로 조직압박을 가해 중국팀의 공격전개속도를 늦춰버려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바로 중원압박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서 수비모드로 진입하는 바람에 중국의 역습은 큰 방해를 받지 않고 꽤나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아시아국가들중에 한국과 붙는 나라들은 대부분 수비위주의 전술을 쓴다. 아시아1위인 이란도 한국을 상대할 때는 볼 공제권을 한국에 내주고 수비위주의 축구를 한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예리한 패스와 날카로운 마무리로 이어지지 않은채 높은 점유율만 보여주는 수치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원정에서는 단 1골도 넣지 못했고 A조에서 한국은 최다 실점 팀이다. 이 것이 점유율을 강조한 축구의 결과다.
 
또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최종예선에서 중국에게 실점을 허용한 팀은 한국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홈장에서는 3-2로 손에 진땀을 쥐게 하는 경기를 펼치며 힘겹게 이겼고, 원정에서는 0-1패배다. 숫자적으로는 한골을 먹었을 뿐이지만 이 한골이라는 결과가 한국인들에게는 핵폭탄급의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한국팬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자회견에 나선 슈틸리케감독의 발언은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듯이 무책임하고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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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수비와 한방을 해결해주는 결정력>은 어쩌면 축구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본 공식을 외면하고 의미 없는 횡패스와 백패스를 반복하면서 단순히 공 점유률만 잔뜩 가져간 슈틸리케의 전략은 '대실패'라는 단어로 간단히 요악된다. 슈틸리케감독은 한국의 원정팬들을 중국팬들의 박수속에서 안전하게 귀국시킨 것 말고는 잘한 것이 없다.
 
한국팀의 주장인 기성용은 오죽하면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선수와 모든 코치진이 변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월드컵에 나갈 수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렇게 한국팀은 무덤을 팠고, 중국팀은 무덤에서 탈출했다.
 
중국전체가 아주 그냥 환희로 들끓을 정도로 이 한번의 경기결과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중국매체들은 "중국이 이란을 잡고, 한국이 시리아를 잡으면 두 나라가 같이 A조진출할 수도 있다"라고 과감히 제안하는 대인배의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중국인들로부터 듣는 "韩国,加油"라는 말만큼 한국인들에게 굴욕적인 것은 없었으리라!
 
단순히 축구에서 져서 가슴이 아픈게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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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했다. 50년이면 무려 세계 판도가 바뀌고도 남는다. 과거에는 후진국취급을 받던 중국이 최근들어 종합경제력과 국제적 인지도가 급속히 상승세를 타면서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목소리를 내는 나라로 부상했다. 과거에 일본과 한국이 주름잡던 동아시아의 판도를 통째로 갈아치우며 새로운 동북아의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도 중국이다. 하루가 달리 무섭게 커가는 중국앞에서 점점 내세울게 없어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적어도 축구만큼은 중국한테 지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아픈 것이다.
 
그러나 같은 조에 편성된 시리아가 강팀인 우즈베키스탄을 잡는 놀라운 활약을 한 덕분에 여전히 A조 2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은 여전히 중국보다 진출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한국은 다음번에 시리아를 서울로 불러들여서 안방에서 경기를 치르고, 중국은 조1위인 이란으로 원정가서 힘든 경기를 치르게 된다. 다음 라운드 경기가 끝나고 나면 웃는 쪽과 우는 쪽이 다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한번의 경기에서 졌다고 한국이 모든 희망을 잃은 것이 아니며, 한국을 한번 이겼다고 해서 중국이 완전히 한국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선 것도 아니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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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예선] 조선족의 입장에서 본 한·중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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