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동포투데이] 연변프로축구가 10년간 중국축구 갑급권리그에서 버티던 끝에 끝내 “천애절벽”같은 갑급고지에서 추락하며 강등이란 쓴 맛을 보게 되었다.

요즘 연변의 날씨는 쌀쌀하다. 추위가 막 덮쳐들기 직전이다. 하지만 연변의 축구팬들한테는 닥쳐오는 추위보다 연변천양천팀의 강등소식이 더욱 냉혹하게 뼈속까지 스며들고 있다.
 
1994년 중국축구가 프로화단계에 진입한 이래 연변축구는 두번 강등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첫 번째는 2000년 시즌 갑A리그의 결속을 몇 경기 남겨두고 앞당겨 강등하였다. 1997년 갑A의 4강에 올랐었고 1999년에는 갑A의 “거물킬러”로, 축구협회컵 4강에도 진입했던 연변축구가 그 이듬해 무너지기 시작하니 거침없었다.

2004년 연변축구가 을급으로부터 갑급으로 진입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한시기 박성, 김경도, 한청송, 배육문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을 때인 2010년에는 갑급 3위라는 놀랄만한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헌데 그 뒤 박성, 김경도, 한청송 등이 이적해가고 그 다음부터는 해마다 시즌 후반부터는 갑급잔류를 위해 버둥대며 늘 “연변보위전”이 펼치군 하였다.

올해도 홈구장 연 6경기가 있던 6~7월경에 들어 벌써 연변구단에는 “연변보위전”이란 슬로건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올해의 “연변보위전”이 실패하면서 추락되는 구단을 “동산재기”시키지 못했고 나중에는 갑급강등팀이란 “오점구단”으로 되고 말았다.

“연변팀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점검도 하고 추측도 많이 하였다. 일찍 갑A시절 어떤 사람들은 “연변팀은 기수해(单数)에는 잘 되고 우수해(双数)에는 잘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기수해란 바로 최은택이 사령탑을 잡던 1997년과 고훈감독이 리더로 있던 1999년이었다. 우수해란 간신히 갑A잔류를 하던 1996년과 강등이 결정되던 2000년이었다. 또 당시 연길시 낡은 체육장의 길을 수건하자 내지의 어떤 매체들은 “길림오동팀이 갑B로 내리막질을 하는 길을 수건한다”고까지 빈정댔다.

하다면 올해 연변팀의 대부분 경기가 새로 건설된 연길시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하다면 올해 새경기장에서 경기를 하자 을급으로 추락한 것일까?

“기수해”와 “우수해” 그리고 낡은 경기장시절의 길수건과 올해 현대적인 새경기장에서의 경기- 그렇다면 이는 진짜 그 무슨 오묘한 련관이 있는 이치일까?

요즘 갑급권에서의 연변팀 강등을 놓고 화제가 뜨겁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축구법칙에 따르지 않은 경영방식과 비프로적 결책실수”,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은 봉페적인 선수기용으로 국내의 우수선수 영입 무시”, “하혈만 하고 수혈을 하지 않은 실책”, “빈번한 감독교체로 구단 불안정”, “고종훈 감독부임 시간상의 차질” 등으로 신문과 인터넷을 도배되고 방송의 목소리도 높다.

참, 모두가 축구전문가들이고 연변구단의 사정을 속속히 꿰뚫어보고 있는듯한 느낌(연변축구클럽에 자주 드나드는 필자도 잘 모르는 사정임)이다.

총적으로 “탁상공론”이고 연변팀에 대해 이때라 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풍조 아닐까? 기자들은 또 “특종”이나 만들어볼까 하고 말이다.

연변구단의 경영방식이 어떻단 말인가? 연변의 현실에서 다른 구단들처럼 시장화진입이 쉬운줄 아는가? 구단의 경영방식이란 수학공식이 아니다. 현지상황에 맞는 결책이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한번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필자의 소견이라면 선수들의 기량문제와 감독의 능력여하이다. 특히 외적용병의 능력여하이다.

모두가 알다싶이 1997년 최은택 교수가 감독석에 있을 때도 연변오동팀은 첫 5경기에서 1점밖에 따지 못하였다. 그러다 유진 블라이마, 졸라와 카리싸 등이 합류하면서 일약 반전에 성공하며 최종 갑A의 4강고지에 올랐다. 이는 결코 국내 선수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문제가 아니다. 연변팀은 그래도 조선족 위주의 구단이 돼야 풍격도 독특하고 배합도 이상적인 구단이 될 수 있다. “8군 연합군”이 독판치는 중국의 축구무대라 할 때 더욱 그렇다 할 수 있다. 외적용병이 없는 갑급무대를 한번 상상해 볼까? 연변팀은 절대 강등할 팀이 아니다. 아니, 갑급4강내에는 장담할 수 있는 팀이다.

을급리그 시절인 2004년 연변팀은 북방경기구 리그에서 단 한번의 패전도 없이 정주에서 펼쳐진 8강전에 합류했고 8강 결승전에서 준우승을 하였다. 감독인 고훈 선생의 능력을 보여준 그해의 리그였으며 그의 공로가 컸다. 동시에 을급리그에 외적용병이 없다는 점을 반드시 감안해야 할바이다.

중국축구의 갑급무대에서 외적용병의 역할이 어느 정도 큰가 하는 것은 연변팀의 10년 갑급여정을 살펴보노라면 “기수해와 우수해의 법칙”과 “낡은 경기장의 길수건과 새경기장에로의 진입”이란 논법이 황당하고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란 답이 나온다.
2005년 연변세기팀의 시발점은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협찬기업인 연변세기그룹에서 이럭저럭 미루며 협찬금을 주지 않은데서 연변축구클럽은 심한 자금난에 시달렸으며 해남성 금흠전훈시 감독 고훈선생이 주머니를 털어 감독진과 선수들의 생활비용을 발급하기도 했다.

이렇듯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연변팀은 그해 10승 3무 13패로 갑급 8위가 되었다. 이해 시즌 연변팀 선수멤버들을 보면 원 갑A시절의 선수들인 현춘호, 천학봉, 김청, , 고수춘, 송소우, 왕광위, 정동칠, 유봉 등이 있었는가 하면 공격라인에는 정림국과 문호일이 있었고 중원에는 한송봉이 버티고 서있었으며 수비라인에는 조명, 한광화, 백승호 등이 활약했었다. 특히 이해 시즌엔 1970년생인 졸라가 용병으로 가담해 크게 한몫 하였다. 

2006년 이 해는 연변팀에 있어서 정붕휘란 내지 사람이 와서 한바탕 휘저어놓고 간 해이다. 하지만 고훈, 김광수을 중심으로 한 감독진은 드팀없었다. 이 해에도 연변팀은 시즌 중반 이기지 못한 경기가 연속 6경기나 되었다. 그해 자금사정은 역시 갑급제후들 중의 가장 힘든 “빈곤호”였다. 이 해 연변팀은 8승 5무 11패로 역시 갑급 8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 해의 연변팀 멤버들을 보면 정동칠, 왕광위, 송소우 등 갑A시절의 주력들이 은퇴하고 지난 세기 80연대생들인 탕초, 강홍권, 최영철, 최남일, 지문일 등 신진들을 수혈하였고 정림국, 문호일, 한송봉, 조명 등이 가장 큰 중임을 떠멘 주력멤버가 되었고 6번 현춘호, 11번 천학봉, 14번 김청 등이 그냥 팀에 남아있으면서 신진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해 졸라가 역시 연변팀 전포를 입고 큰 동량을 떠멨으며 외적용병으로는 브라질적 월리엄이란 선수가 있었다.

그해 연변팀의 성적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한 것은 신로교체해였던 관계가 가장 컸으며 기타의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2007년 이 해의 연변팀은 비교적 안정한 기록을 낸 해로 되고 있다. 이 해에 연변팀은 현춘호와 졸라가 퇴역하고 신진으로 박성과 최인, 허파 등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출한 스타는 없지만 조선으로부터 영입한 김영준 등은 그래도 몸값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2007년 초기 연변의 모 기업인이 연변클럽을 도맡고 총경리로 되었다.

연변의 문체사업에 관심을 둔 그였으나 그 역시 방대한 축구클럽을 운영하자고 보니 인맥상, 재력상 힘이 몹시 딸리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시즌에서 조선용병들인 김명철(34번), 김영준(35번), 서혁철(36번), 김성철(37번)은 개인기가 고르고 거의 나무람할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특히 김영준은 조선국가대표로 그 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까지 참가한 선수였다.

이 해 연변팀은 9승 6무 9패로 갑급 6위를 기록, 그 중 제13라운드부터 제17라운드까지 5연승을 달성했고 넣은 골이 36골이고 허락한 골이 35골이었다.

연변팀의 2008년 시즌은 감독풍파로 얼룩진 한해였다.

이에 앞서 2007년 시즌이 한창이던 그 해의 10월경, 필자는 어느 한 축구팬으로부터 “새해 시즌엔 고훈을 자르고 조영원을 감독으로 기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헌데 그것이 현실되 되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해 11월 20일, 연변 주 체육국 회의실에서는 이른바 감독초빙선거가 있었으며 말 그대로 고훈 감독이 잘리고 조영원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되었다.

이는 당시 고훈 감독도 진작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냥 맹목적으로 자르자고 하니 구단이 안정되고 성적도 좋으니 자를 명목이 없었던 것이다.

조영원이 감독으로 된 그 해 연변 주 체육국과 연변구단은 “슈퍼리그 진출과 전국체전에서 우승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른바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 해 조영원 감독은 몇경기를 지휘하다 성적부진이 지속되니 사표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 조영원 감독의 뒤로 황용이 팀을 맡았다가 역시 경질되었고 현춘호도 2경기를 지휘(2전 2승)했었으나 결국 지휘봉은 김광주한테로 넘어갔다.

이 해 연변팀은 레비, 산토스 등 외적용병을 영입했고 통역 겸 선수였던 졸라까지 전포를 입었으나 최종 8승 4무 12패로 두마리의 토끼는커녕 쥐 한마리도 잡지 못하였으며 겨우 갑급잔류에 턱걸이를 하였다.

2009년 시즌 역시 김광주 감독의 지휘하에 연변팀은 비교적 안정된 성적을 따내였다. 이 해에 연변팀은 원 국가청년팀 대표였던 김경도를 합류시키면서 팀을 보강시켰으며 최종 7무 8승 9패로 갑급 6위를 기록, 팀을 안정세로 돌려세웠다. 이 해 연변팀에서 영입한 외적용병들로는 압둘살람. 리카도, 이만뉴얼, 꽈예 등 아프리카와 남미 선수들로 비교적 외적용병 영입사업이 성공적이었다.

>2010년 이해 시즌에 연변팀은 갑급사상 가장 휘황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 시즌 연변팀은 기존의 주력외 콰예, 레비, 루둘라 등 외적용병을 영입,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어 최종 12승 4무 8패의 기록으로 갑급 3위에 올라섰다. 이 해 연변팀은 슈퍼리그진출의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나 당시 갑급에는 광주항대와 성도셀틱이란 두 “거물”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 두팀을 꺾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2011년 연변팀은 많은 변동이 있었다. 구단 절대적인 주력이던 박성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해가고 관건위치에서의 주력 선수가 몹시 결핍하였다. 이 해 초반 연변팀의 외적용병들로는 이광재, 박종우, 우주령 등 외적용병들을 영입하였으나 그들의 작용 또한 이상적이지 못하였으며 성적부진은 계속되었다.

이 해 연변팀의 성적은 8승 5무 13패로 갑급 11위였다.

2013년 연변팀은 정상룡이 맡았다. 그것은 그 전해 김광주 감독이 이룩한 성적이 그닥지 않아 강등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파악이 있는 감독을 선정한다는 것이 바로 정상룡이었다. 하지만 그해 연변팀이 영입한 외적용병들이 앞구실을 잘하지 못하는데다 김경도, 한청송, 최영철 등이 이적해간데서 연변팀은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시즌중도에 정상룡이 경질되고 한국인 조긍연이 사령탑을 맡았으나 부진국면을 돌려세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조긍연 감독은 선수들의 체능문제를 발견하고 시즌중도였지만 체능올리기에 정력을 쏟으면서 엄한 관리를 하였었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불만을 야기, 그 역시 시즌 후반단계에 들어 지병을 구실로 사표를 냈으며 그해 역시 김광주가 지휘봉을 잡아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2012년 시즌의 외국용병은 홍진섭, 버비치, 쿠리바리 등이었다. 이 중 쿠리바리가 시즌 후반단계에 출전하면서 연변팀의 갑급잔류에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 그 해 연변팀은 10승 4무 16패로 갑급 13위에 머물었다.

2013년 시즌 연변팀은 재차 한국적 조긍연 감독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조긍연이 복귀한다는 소식에 배육문, 한광화, 고만국, 최영철, 허파, 강홍권 등 주력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조긍연 감독에 대한 불평을 표했다. 이에 조긍연 감독은 손군, 박도우, 석철 등 신진들로 겨우 팀을 구성해갖고 이 해의 시즌에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초반의 성적이 좋을리 만무했다. 또한 시즌 도중 내부불화가 생겨 주력선수들이 훈련거부로 팀을 이탈하면서 결국 조긍연은 재차 보따리를 싸게 됐다.

그 뒤 이광호가 팀을 맡고 모든 선수들을 아껴주고 관심해주면서 이 해의 갑급잔류를 완수하였다. 이 해 연변팀은 외적용병으로 이재민, 고기구, 김기수 등 3명의 한국선수들을 영입했는데 이 해의 갑급잔류에는 이들 3명의 기여가 컸다. 특히 이 해 이재민은 연변팀을 위해 도합 18골을 성공하며 골잡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해 연변팀은 9승 7무 14패로 갑급 11위를 기록했다. 

주지하다싶이 올해는 연변구단의 갑급 10년이래 자금투자가 가장 많이 들어간 한해이다. 관명권 기업도 나타났고 선수들의 대우상에서도 많이 개선되었다. 감독진도 이호은, 김광주, 이광호, 고종훈, 김청 등으로 갑A시절의 감독과 주전들이었다.

헌데 외적선수 영입상 크게 실패했다. “킬러”감으로 한국의 김도형을 영입했지만 그의 실력은 너무 수수했고 원태연은 주력멤버에도 들지 못하였고 이 중 제일 괜찮은 용병이래야 김기수었지만 올들어 그가 상하고 옐로카드 누적 등으로 불참한 경기가 여러번 되었다. 또한 본토선수들의 실력도 저하되었다. 지난해 시즌 싹수가 크게 보이던 손군 선수가 상병으로 1년내내 치료받는 상황이고 절대적 주력인 최인도 자주 상병으로 시달렸으며 비교적 큰 활약을 펼친 선수로는 지충국을 꼽을 수 있었으나 그 역시 공을 패스해줄 선수가 마땅치 않은 고전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활약적인 선수로는 최민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는 가끔씩 치명적인 실수가 나타나 축구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약체로 투신한 올시즌 결국 이호은 감독은 9경기에서 겨우 4점을 기록한채 경질되었고 이광호가 지휘봉을 잡았으나 그 역시 용빼는 수가 없어 제22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고종훈한테 넘겨주고 말았다. 그 뒤 고종훈은 대담한 공격축구의 카드를 내들고 사활전을 펼쳐 제23라운드 홈장에서 천진송강팀과 1 : 1로 비겼고 제24라운드 북경이공과는 4 : 2로 이기면서 갑급잔류의 희망이 보이는듯 했다. 그러다 제25라운드 하북중기와의 홈장에서 0 : 1로 패했다가 원정에서 청도중능과 1 : 1 무승부를 기록, “원정킬러”로 되는듯 했으나 지난 11일 광동일지천과 1 : 4로 패하면서 갑급잔류의 목표가 영영 물거품으로 되었다.  

올들어 지금까지의 경기를 보면 객관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는가 하면 자아실책도 많았다. 시즌초반 5경기가 원정이었고 “헤이소(黑哨)”가 크게 난무했으며 3차의 페널티킥 실축에 자책골까지 있었다.

이상 10년간 연변팀의 갑급여정을 살펴보면 산재한 이러저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노출되었지만 관건적인 실패는 외적용병 영입의 실패가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즉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잘된 해인 2007년, 2010년에는 구단성적이 기본상 이상적이었다. 특히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잘되고 본토선수들까지 알준하던 2010년의 경우 그 당시 구단의 자금투입만 크게 늘였다면 슈퍼리그진출도 가능하지 않았을가 하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리고 본토선수진영이 엉망이던 지난해는 그래도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성공적인데서 갑급 11위라도 했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올해는 그럴만한 카드가 없었다. 외적용병, 본토선수 통털어봐야 최전방에는 골을 많이 낼만한 “킬러”가 없었고 중원 또한 공방조절을 확실하게 할만한 기둥선수가 없었으며 수비선 또한 실수투성이로 어이 없이 실점할 때가 아주 많았다. 말그대로 선수들은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공방조절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기량이 모자랐으며 거기에 운도 몹시 나빴다.

현재 축구클럽의 관리와 시장화 문제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연변 장백산천양천 축구구락부를 자주 도마위에 올리고 있다. 하긴 확실히 기타 구락부들에 비해 문제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올해는 많이 개선됐고 비교적 잘한것 같다. 축구경기장 도우미들도 조직했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시도를 한 것이다.

연변축구의 갑급시대는 올해로 끝이 나고 있다. 그냥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단지 그 강등의 비운이 지난해가 아니고 올해에 왔다는 것 뿐이다. 강등의 운명, 이는 연변축구만 당하는 일도 아니다. 중국축구권내 슈퍼리그와 갑급리그의 32개 팀 중 이러한 비운에 빠지는 팀은 많다. 그것에 울며 너무 통탄하지 말자. 새로운 모습으로 신들메를 조이자. 연변축구의 갑급복귀 그것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다.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김철균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좁쌀”에“보총”으로“핵폭탄”과 대결해온 10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