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 허 헌

10월 28일 저녁 9시 30분경, 우리가 탄 중형버스는 중화민족의 발원지인 하남성 정주땅에 도착, 거기서 기차로 정주에 도착한 연변축구팬협회 유장춘 회장네 일행 4명과 합류했고 또한 우리를 마중나온 연변축구협회의 이동철 주임의 알선으로 어느 한 초대소에서 잠시 하루밤을 묵은 뒤 이튿날 아침 정주시 강하호텔로 다시 숙박처를 옮겼다.

이날 아침 우리는 강하호텔에서 행장도 풀지 못한채 세기팀 선수들이 훈련한다는 하남성 체육센터 1호경기장으로 찾아갔다.

머나먼 중원땅에서 다시 보는 낯익은 얼굴들, 우리는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아침전훈련이 끝나자 우리들의 감격적인 상봉이 시작됐다. 고훈 감독과 지도들, 그리고 선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의 손을 잡아주면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라고 위로해주는 순간, 급기야 나의 아내인 이순복씨가 “와…”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눈시울이 붉어진건 우리도 마찬가지었다.

그날 아침 김국진 부장이 “연변팀” 하면 우리는 “필승! 필승! 필승!”하고 3창하는걸로 세기팀 선수들한테 백전백승의 자신감을 주입한 뒤에야 호텔로 돌아와 행장을 풀었다.

제1라운드의 1차전 대 산동태안구거룡팀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10월 30일, 우리는 아침 5시경에 기상하여 분주한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한복을 나눠줄 차례가 되자 유회기 부장이 제일 먼저 차려입었는데 한족이었지만 그는 그 어느 조선족에 못지 않은 극성팬이었다. 그리고 그 한복은 내가 연길시 하남가두 맥천사회구역의 채영숙 치보주임을 통해서 가져온 것으로서 맥천사회구역의 노인들은 연변축구의 갑급진출을 위해서라면 뭐가 아깝겠느냐며 환갑 때 한번만 입어보았던 한복들을 서슴없이 내놓은 것이었다.

차에 올라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유장춘 회장이 “오늘의 응원은 허헌 부회장이 총지휘하게 되니 멋지게 한번 해보자”고 지시하자 나는 근심이 앞섰다. 성공적으로 해낼수 있을까? 20여명밖에 안되는 응원팀으로 그 넓은 경기장에서 아무리 웨친들 소리가 제대로 전달될까 하는 우려가 태산같이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날 아침 7시경에 경기장에 도착하여 깃빨을 박고 프랑카드를 달면서 모든 사전준비에 착수, 앞줄에 한복을 입은 팬들로 북 6개에 징 4개를 갖게 했고 뒷줄엔 붉은 응원복에 머리엔 모두 “세기팀 필승”이란 글을 쓴 흰 천을 이마에 동여매게 했다.

오전 8시 정각, 제1라운드 1차전 대 구거룡팀전이 개시되자 우리의 응원은 상상외로 잘 되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합창하던 리듬에 따라 총지휘자인 내가 “연 ㅡ 변 필승!”하면 타악기들인 북과 징이 “×ㅡ× ××”하고 울렸고 뒤끝엔 “와”하고 응원의 클라이막스로 이끌어갔으며 또 내가 “연변팀” 하면 아래에서 “필승, 필승, 필승”하는 3창으로 응해주군 했다. 이렇게 우리의 응원이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 “잘한다, 잘한다, 우리 선수 잘한다”는 응원리듬소리를 냈다. 뒤돌아보니 송경천 부회장과 그를 따라온 젊은이 배학송군의 목소리었다. 뒤이어 우리는 2002 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부르던 우리 민족의 명곡 “아리랑”을 빠른 리듬으로 합창, 그 멜로디에 맞춰 세기팀의 득점율도 높아갔다. 1 : 0, 2 : 0에 이어 계속하여 4 : 0까지 됐을 때 정주 TV방송국 기자가 나한테 마이크를 들이댔다.
   
문: 연변축구가 갑급진출에 성공할 수 있는가? 연변축구의 지난날과 앞으로의 전망은?

답: 이번에 연변축구는 꼭 갑급진출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연변은 축구의 고향이다. 1965년엔 중국갑급리그의 우승보좌에 올랐고 1997년엔 갑A리그의 4강신화를 일궈냈다. 연변축구가 갑급은 물론 앞으로 슈퍼리그에 진출하여 우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 축구가 그렇게도 좋은가?

답: 그렇다. 연변축구는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
……
그 사이에 경기성적은 5 : 0에 잇달아 6 : 0으로 됐고 우리의 열광적인 응원은 계속됐다. 한편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정주의 관중들은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응원을 구경할 지경이었으며 이튿날의 “정주일보”, “정주석간”, “대하보” 등 신문들에서는 연변 원정팬들의 응원으로 경기장은 완전히 연변홈장같은 분위기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1라운의 쌍회합전을 거쳐 연변세기팀은 총점 8 : 4로 구거룡팀을 제압(11월 1일의 2차전에서는 전부 후보진영이 출전해 2 : 4로 졌지만 우리의 응원은 변함없었음), 4강에 선뜻 올라섰다. 그러자 11월 2일 우리는 소림사관광을 떠났다. 소림사엔 불상도 있고 향불을 피워놓고 념불을 외우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물론 불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걸 믿는건 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은 돈을 내고 자기의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두손을 합장해 미동자세로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그것인즉 연변세기팀의 갑급진출성공을 소망하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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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에 여념이 없는 연변라디오방송국 일꾼들

11월 3일은 갑급진출을 결정하는 관건경기의 첫 게임, 어차피 부딪쳐야 할 결사전을 각오해야 했다.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 경기장으로 가는 동안 유장춘 회장의 훈시가 또 있었다.

“오늘의 경기가 관건이라는걸 모두 알 것이다. 우린 이 날을 위해 4년이나 기다렸다. 어떡허나 응원도 잘하고 경기도 이겨야 한다. 여하튼 여러분들을 믿는다.”

이렇게 말을 마친 유장춘 회장은 눈물을 좔좔 흘리였다. 이겨야지, 아무렴 이겨야 하구말구, 전날 소림사에 갔을 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머리를 깎고 소림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싶다던 유장춘 회장의 얘기가 그냥 농담으로만은 들리지 아니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생각밖으로 조선족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하남성 허창시의 조선족팬, 정주에서 공부하는 30여명의 조선족대학생팬 및 화룡시축목국에서 출장간 일꾼들까지 합세하니 100명은 될 것 같았고 당지의 축구팬들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연변축구를 알게 됐다면서 우리의 대오속에 끼여들기도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2일전 할빈협력팀을 7 : 1로 쓰러뜨린 그들은 그 여파를 빌어 세기팀을 압도하려 시도, 슈팅한 공이 세기팀 문대에 맞혀나오고 문전혼란이 펼쳐지는 등 아슬아슬한 장면도 몇번 있었다. 이에 우리 세기팀은 침착하게 응전했고 우리의 팬들은 목이 쉬도록 응원성세를 올리였다. “싸워라, 싸워라, 우리 선수 싸워라”, “잘한다, 잘한다, 우리 선수 잘한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선수 이겨라”…100여명의 함성과 북소리, 징소리는 하늘땅에 메아리쳤고 그 응원에 힘입어 경기 개시 4분경 문호일선수가 선제골을 작열, 14분경 정림국선수가 추가골에 성공했다. 이렇게 세기팀이 승기를 잡았지만 상대방은 굽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키가 큰 우세로 대거 진공을 발동, 손바닥에 땀이 배이는 긴장속에 상대방 14번 선수의 헤딩슈팅이 골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기 중간휴식시간 나는 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단소를 들고 나섰다. 그러자 주위의 카메라 렌즈들이 나한테로 쏠리었다. 중원의 경기장 관람석에서 단소를 부는 한 조선족사나이의 “농부가”가 아미 인기를 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지인들은 조선족 복장을 보고 신기하게 만져보았고 민족타악기인 북을 보고도 뭔가고 물어보군 했다.

후반들어 세기팀은 2 : 1로 앞선 기세를 몰아붙이며 전반전보다는 퍽 원활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고훈 감독의 전술변화도 보이었고 선수들의 기동력도 매우 날이 섰다. 드디어 후반 27분경, 한송봉이 살짝 넘겨준 프리킥을 김청이 힘있게 슈팅 ㅡ 공이 그물에 철렁 걸리자 승부는 이미 결정된 셈이었다. 환호하는 경기장, 격동의 눈물 ㅡ 경기장은 대뜸 환락의 도가니로 변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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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슈퍼축구팬의 수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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