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takungpao_com_20131014_205146.jpg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이것은 “문화혁명”초기 홍위병들이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면 몰밀어 자산계급분자라 여기여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그들을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꺽꾸러뜨려야한다고 주장하다보니 부르짖게되였던, 가장 반인륜적이고도 지독한 구호였던 것이다. 그당시 “홍위병”들은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라면 “사류분자”, “오류분자”나 별반다름없다고 여겨 몰풍스레 증오하고 적대시했는데 그들이그러는원인을 보면 다른게 아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발동하기 전에 진작 중국의 지식분자는 후대들에게 존경이 아니라 경시를 받겠끔 인도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11여년 전이였던 1957년에 모택동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지식분자가 대략 5백만되는데 그 중에서 2백만가량의 지식분자는 자산계급학교를 나왔으니 다가 자산계급지식분자인 것이다 라면서 우리는 그들을 단결, 개조, 리용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은 틀리지 않는 말이요 명랑한 태도라 말할 수 있다! 한데 그가 리치에 맞는 말은 그렇게 듣기좋게 해놓고나서 취한 행동을 보면 판판달랐던 것이다. 그가 요긴하고도 고귀한 의견을 들어보겠다해놓고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반우파”운동은 확대화되여도 형편없이 확대화되여 결국은 전국 5백만에달하는 지식분자의 가슴을 전부 얼음장같이 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응당 적진에나 던져야 할 살상력이 강한 수류탄을 자기의 진영에다, 말하자면 인민내부ㅡ자기를 믿고 따르는 순진한 사람에게다다 던졌던 것이다. 그랬으니 그게 잘된것이였던가? 꼴이 어떻게 되였는가? 그는 시종 그번의 “반우파투쟁”은 응당하고 잘된걸로 여겼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대로 지식분자들을 반항못하는 순복공구로 만들어놓앗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은 실제상 지식분자들에게서 언영 신용을 잃어버렸거니와 저주를 받는다는것은 죽을때까지 철저히 깨닫지는 못한것  같다.

그 무슨 고린내나는 첫째요 둘째요... 몇째요 했다. 보아하니 아마 “문화혁명”이 다 끝나서야 지식분자에 대한 그따위 반갑잖은 멸칭(蔑稱)이 없어진것 같다. 나는 당시 소학교선생이였다. 그래서 “고린내나는 하홉째”라는지 “고린내나는 스믈한번째”라는지 듣기가 과연 역겹고도 저주로운 그놈의 별명을 하사받은 신세였던 것이다. 마치도 히틀러가 2차대전때 유태인의 앞가슴에다 허연표식을 달게했던것 처럼 그가 우리들한테 딱지를 붙여주니 기분이 대단히 잡치는 일이였다. 대체 왜서 그랬는가? 모택동을 보면 그 본인역시 지식분자였는데 그가 지식분자를 그토록 경멸하고 멸시한게 과연 리해되지 않았다. 왜서 자기를 믿고 애대하고 따르면서 성의를 다하는 지식인에게마저 굳이 그따위 듣기싫은 이름은 달아놓고 “사상개조”를 시켰지? 도대체 왜서 선생들을 제가 배워주는 학생들에게마저 존경보다 멸시를 더 받게했는지 그게 지금까지도 전혀 풀리지 않는 일이다.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문화혁명”이 오자 “홍위병”들은 증오가 하늘을 꿰찌를지경인 그따위 사나운 구호를 웨쳐대면서 우선먼저 자기에게 글을 배워주었던 선생부터 잡아내여 투쟁하는것으로서 동란의 서막을 열었다. 그때의 표현구로는 “계급투쟁뚜껑”을 열어제낀 것이다.

때는 바로 “문화혁명”초기ㅡ 모택동이 천안문에 올라 <<홍위병>>붉은완장을 낀 팔을 쳐들어 저으면서 련거퍼 10여차나 전국각지에서 북경에 쓸어들어드는, 자기의 용모를 한번만이라도 보자는 따촨랜대오를 접견함으로 하여 혁명기세가 충천할지경 들끓어번지기 시작했던 1966년 8월이였다. 관방의 통계자료를 보면 그 한달에만도 북경에서 중학생들이 자기를 배워준 선생을 끌어내다 투쟁하고는 무자비하게 때려죽인것이 1,772명에 이르는 것이다. 피비린내풍기는 살기찬 그 바람은 쉬사리 전국에 파급되였던 것이다.

위만시대에 태여난 내가 소시적 8.15해방을 맞앗던 북방의 도시ㅡ 송화강을 끼고있는 쟈므스(佳木斯)에서도 그러했다. 의과대학(?) 홍위병들은 두패싸움을 하면서 선생하나를 서로빼앗아다 투쟁하는 놀음을 했는데 나중에는 홍무니에 칼을 박아 그의 목숨을 앗아낸 것이다. 죽일때 발가벗긴 그대로였는데 당시 나도 그 정경을 “참관”하러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소름이 내돋는 끔찍한 참경이였다. 위대한 분이 손수 일으키고 지휘한 중국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ㅡ 그것은 형상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참혹한 대내란이였지 진정 다른 그 무슨 거룩한 행동은 절대아니였다. 홍색공포에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해버린 그런세월에다다 어찌 “혁명”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랴. 그것은 그야말로 비극을 자초하고 혼란을 자초한 세상웃기는 짓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혁명이 아니라 아이들의 작난이였다고 평가하고있다.  

중국은 그 놀음을 며칠몇달을 하고 제꺽거둔것이 아니다. 장장 10여년간의 세월을 고통스런 광란에 모대기친 것이다. 잘된게 뭔가? 일호반점도 없다. 하마터면 나라가 없어질번한 끔찍스런 대재난이였을 뿐이다. 이래도 옛구성(救星)이 그리워 "동망홍"을 지금도 넋두리하듯 흥얼거리는 사람을 보면 다시보게된다. 어쩌면 그리도 무지할가?!  

김학철선생이 말을 잘했다. 제가 힘들여 애써구축한 사회를 제손으로 훼멸하는 바보독재자는 중국의 모택동을 내놓고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택동이 혁명은 성공했어도 건설은 착오가 있고 문화혁명은 죄를 지엇다고 한거고 그런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보지 않는다고 한거다.  

문화혁명과 같은 그런 대비극이 왜서 우리 중국에서, 모택동의 몸에서 발생했가는 앞으로계속 더  깊이 연구해야 할 바라고 본다.

문화혁명에 온 나라가 대체 무슨꼴이 되었는지를 한번디시 돌아보자.  억만인민이 다같이 부르는 이른바 영명한 수령이라 하여, 대구성이라 하여, 마음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라면서 그 하나만을 지고무상한 성인(聖人)으로 하늘높이 떠받들어 올리다보니 이 나라는 민주와 법제가 결국은 그한사람의 욕구에 따라서 짓밟혀 유린당하고말았던 것이다. 따져보면 중국공산당은 당내의 민주를 잃은데다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를 더 허용하다보니 큰 실수를 한것이요 민중은 다가 지나치게 들끓어오르는 열애심에 지배자를 성인(聖人)으로만 여기고 받들어 숭배하다보니 그 어른을 한심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잔폭한 군주(君主)로 만들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수천년간을 경천법조(敬天法條)로 삼아오던 모든 풍속과 질서가 여지없이 짓밟힌 것이다. 지어는 수천년간 대대손손 지켜 내려오던 부모자식간의 골육의 정마저도 헝크려졌거니와 개별적인 현상이라 하겠지만 지어는 가정에 대한 가치관념마저 전부 깨지고 으깨지고 부셔지고말았던 것이다. 그 반면에 머리를 치켜든것이란 영웅의 권능에 대한 지나친 기대였다. 그렇다보니 오직 모택동 그 한사람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발광적인 숭배열이 한심할지경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 숭배의 열을 맨먼저 일으킨 사람은 바로 당장에 마저 후계자라 명문으로 밝혀놓기까지 했던 림표였던 것이다. 1966년 8월 18일에 있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그가 한 강화가 새삼스레 상기된다.  불과 1000여자밖에 안되지만 그 내용이 과연 희한했다.

“위대한 령수”

“위대한 통수”

“위대한 창거”

“위대한 승리”

“가장가장 위대한”

“가장가장 강대한”

  “가장가장 예리한”

불어도 분수있지 이것들은 피끗들어도 아첨하는 문구들이였다. 보면 그가 모택동사상을 가장정통했고 모택동혁명로선에 가장충성하며 모주석을 가장열애하는 것 같았다. 하긴 수를 잘썻다. 수억만이 그를 따라 그모양으로 모택동 그 한사람을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신처럼 높이높이 떠받들게 만들었으니! 사실그랬다. 억만백성이 림표를 따라서 그 모양으로 숭배했으니 세상에 그보다 더 놀랍게 무지한 짓이 어디있으랴!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 더 큰 실수를 한데는 각성못한 백성모두의 책임도 있는 골고루있는 것이다. 노예적인 아첨숭배는 언녕내동댕이쳐야한다. 하건만 아직도 상급만 만나면 허리도 못펴고 깝신거리는 사람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욕지기가 생긴다.

병신같은 짓은 그만하는게 좋다.

모택동이 맑스주의를 진정 잘 알았던가? 그런것같지 않다. 그가 깊이연구한건 맑스의 저작이 아니고 “자치통감”이였다고 한다. 이건 20여년간을그의 비서로 지내다가 버림받게 되니 서재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전가영이 남긴 말이다. 모택동 그는 지고무상한 현대의 황제노릇을 하고싶어했던 것이다. 1957년후부터 개인숭배를 반대하면 제 권위를 수립함에는 저촉되고 해롭다는 것을 심심히 느낀 모택동은 1958년 3월에 열리였던 성도(成都)회의때 벌써 개인숭배에 대한 제 개인의 관점을 내비친바있다. 그후 1964년가을,  쏘련에서 쓰딸린의 생전독재를 청산했던 흐루쇼브가 권좌에서 물러났을적에 미국기자 스노가 모택동을 만나 그와 “쏘련사람들은 지금 중국에서는 개인숭배를 하고있다고들 말하는데 그게 사실인가?”고 물은바있다. 이에 모택동은 “흐루쇼브가 내려앉은건 개인숭배가 너무없었기때문이다. 중국에는 확실히 개인숭배가있다. 개인숭배는 좀 있어야한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과연  전당, 전국민이자기를 숭배하게끔 노력한 것이다. 문화혁명이 끝나자 주덕의 비서가 적발한것을 보면 모택동은 1950년도 국경절경축구호를 선정할 때 자신이 “모택동만세!”구호를 가첨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택동의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욕구는 건국직후부터 이미 생겨 쓰딸린과마찬가지로 뿌리박았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벽초부터 림표가 그의 심정에 맞춰서 마치 신을 모시듯이 전국민이 모택동을 숭배하여 받를게끔 운동을 일으켯던 것이다. 로산회의(庐山会议)후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조가 전국범위에서 일어났다. 여러판본의 모택동저작이 나와서 대량적으로 발행되였거니와 전국일판에서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국일판에 모택동의 동상, 석상이 수풀같이 일떠섯고 매일마나 "동방홍"노래소리울리고 충성무가 생겨나 그것이 군중성적인 운동으로 되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지어는 내가 소시적에 직접 목격했던, 일본이 망하면서도 하던 짓거리 궁성요배모양의 삼경삼축(三敬三祝)은 모택동을 신화(神化)했으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한심해서 부끄러운 짓이였던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들으면 그젯날에는 어쩌면 그같이 무지한 일도 다 있었느냐며 웃기나 할 일이였다.

위에 이미 서술된바와 같이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북경의 고등학교와 중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자체로 홍위병을 조직하고는 저들을 가르친 학교령도와 선생부터 진공하기 시작한건데 그 대부분이 폭력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다 모택동은 부채질을 한 것이다. 1966년 8월 1일, 모택동은 청화대학의 부속중학홍위병들에게 편지로 그들이 사람을 붇잡고 때리고 짓부시는 투쟁행위에 대해서 “열열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거니와 “북경뿐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문화대혁명운동을 함에 있어서 그와 마찬가지의 ‘반란행위’에 대해서도 일률로 열렬히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던 것이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들을 접견할 때도 “우리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며 일체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고 요물잡귀들을 타도해야한다”고 했다. 하여 그후부터 전국각지에서 홍위병들이 그 누가 전정대상이라 생각되면 쪼판유리(造反有理ㅡ반란에 도리있다)를 웨쳐대면서 제마음대로 사람을 붙잡아 때리고 들부시고 빼앗는 날강도식의 "혁명"을 정식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북경에 있는 어느 한 중학교는 학생이 무려 천여명이 되였는데 그들은어느날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을 전부끌어내다가 운동장에 줄을 세워놓고는 투쟁을 한 것이다. 학생들은 선생마다 머리에다 종이로 만든 높다란 고깔모자를 씌웟고 목에다는 앞가슴을 가리우는 커다란 판지패쪽을 걸었는데 고깔모자와 판지패쪽마다에 그 선생의 성명과 정치죄명이 씌여있었다.    

한손에다 작은홍보서(小红书)는 “모주석어록”을 쥔 쪼판파사령(造反派司令)이 “투쟁대회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뒷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구호를 웨쳐댔다.

“혁명에는 죄가 없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

“모든 반동적인것은 타도해야한다!”

먼지는 쓸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홍색공포만세!”

“그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실테다!”  

등등.

당시 그것은 보편적인 형상이였던 것이다.

홍위병사령이 높이웨쳣다.

“홍위병전사들, 동학들여! 우리가 그래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보황파, 반동권위, 요물잡귀들이 우리들의 홍색진지를 더럽히게 가만놔둘수있는가?”  

그러면 천여명되는 홍위병들이 일제히 웨치였다.

“가만놔둘수없다!”

홍위병사령은 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해야하는가?”

전체홍위병들은 운동장이 들성하게 웨쳐댔다.

“그자들의 개대갈통을 까부시자!”

“땅에다 꼭그라뜨리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꼭그라뜨리자!”

“영원히 번신못하게 만들어놓자!”

이같이 종교식의 의식을 한바탕 이루고나서 그들은 잔혹한 투쟁을 시작햇던 것이다.... 대표적인 실례를 보이는 장면이다.

엽영렬(葉永烈)이 쓴 <<호극실자술: ‘문혁’때의 團中央>>이란 글을 보면 당시 용기가 오른 홍위병들은 배짱이 자랄대로 자라나 지어는 공청당중앙까지 쳐들어가 공청단령도자인 세 호씨(胡氏)ㅡ 호요방, 호극실, 호기립을 붓잡아놓고는 “너희들은 왜서 모택동의 위대한 사상을 높이추켜들지 않았느냐?” 트집잡으면서 투쟁했는데 그자들이 가죽피대로 어찌나 호되게 때렸던지 호요방은 참지 못해 몸부림치고 딩굴었다면서 매질을 한 홍위병들이 그때는 완전히 리성을 잃은것이였다고 호극실은 말했다.

모택동이 일으킨 홍위병들의 작태가 바로 그러했다.

횡행천하(橫行天下)에 당할자없거늘 과연 무법천지로 돼버린 험악한 야만의 년대였다!
/김송죽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에세이 뼈에 사무치는원한의 구호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