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허성운


영어사전에는 중국항구도시 상해(上海) 지명을 어원으로 유래한 단어가 새겨있다. 영어에서 shanghai는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또는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에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19세기 후반기에 외국인들이 행한 납치의 일종이다. 당시 중국 많은 연해 항구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개방하게 된다. 이런 개항항구에서는 화물선의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남자들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배에 태워 출항시켜 버렸던 것이다. 배가 출항하고 나면 배에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 선원들은 망망한 바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차츰 동남아지역과 조선 일본 등지로 탈출하여 정착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차이나타운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 근대화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산동반도 수많은 이재민들이 바다를 건너 만주와 해외에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연해주에 까지 진출하여 울라지보스또크 등지에서 장사를 벌인다. 그러다가 볼쉐비키혁명 전후로 러시아 백계 귀족들과 부르죠아들이 밀려나게 되자 훈춘 등지로 들어와 가격이 폭락한 루불로 바깥세상에 눈이 어두운 토호들에게 넘겨 금을 사들이고 토지를 매각한다. 당시 훈춘 국자개 등 시가지 많은 상품 점포 명칭들에는 이들 산동전통문화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지난세기  80년대와 90년대에 개혁개방 붐을 타고 연변사람들은 샤하이(下海)하게 된다. 드넓게 열린 세계와 만나기 위해 원양화물선에 오른 젊은이들은 목숨 걸고 바다에 나가 달러를 벌어왔고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거쳐 나온 사람들은 빈곤 탈출을 꿈꾸며 로무송출 해외친척방문 국제결혼 등 험난한 암초와 거센 풍랑이 이는 인생항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외국나들이 비자 문이 열리게 되자 기업부진과 구조조정으로 샤깡(下崗)하게 된 도시 중년 세대주들 거기에 농촌 농민들도 가세하여 분분히 밭을 양도하고 집을 팔아버리고 외국으로 떠나는 질풍노도에 휘말러 들어가 험한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개혁개방 30년이라는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자그마한 연길 공항은 끊임없이 확장되어가고 중국 남방항공 대한한공 아세아나 항공이 쉼 없이 오가며 하늘 길을 열고 화려하게 단장한 연길 도시모습과 정통의 맛을 쏟아내는 음식가게들은  연변민속풍경을 구경하러 고속철을 타고 오는 유람객들을 반긴다. 하지만 이러한 밝은 빛 뒤 면에는 취업사기 덫에 걸려 재산을 날리거나 빚더미에 앉아 가정파탄 감옥행 등 참혹한 비극을 낳은 어두운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다. 실로 엄청난 숫자의 중국조선족들이 국내외사기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끔직한 재앙을 겪어야만 했었다. 지금의 연변은 한세대의 뼈아픈 교훈과 슬픈 사연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20년 30년 넘도록 타향생활을 하고 있는 50대 60대의 수많은 조선족 중년세대들이 건설현장 인부, 음식점 도우미, 가사 도우미로 온갖 설움을 견뎌내며 악착같이 일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이국땅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옛 선인들에게 재산이라고는 괴나리봇짐뿐이었던 과거, 해방이 되어도 땅과 소 그리고 곡물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집체화시기 단순노동에 매달려 보수를 받아 왔던 사람들은 올바른 자본투자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사회 아픈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80년대9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거리는 오늘날에 와서 조선족 밀접지역으로 바뀌고 연길 냉면 화룡 온면 훈춘 꼬치 간판들이 즐비하게 서고 조선족 특유의 억양이 물씬 풍겨 나오지만 자아동질성을 잃어가며 경제문화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진다. 서로 다른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얽히고설키며 때로 원치 않는 인생길에 들어선다.  

오늘날 상해는 중국 개혁개방의 아이콘으로 중국 경제중심지로 부상했다. 그 옛날 수천수만 쿠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딛고 일어선 동방명주를 비롯한 초고층 빌딩은 치욕스런 과거사를 떨쳐내고 있다.

중국 조선 러시아 황금삼각 지대에 자리 잡은 연변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있는 곳이다. 20세기 초 중국전통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선 속을 비집고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들어섰다. 홀몸으로 연변을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보따리 장사로부터 시작하여 엿방 두부집 국수집을 차려가면서 차츰 연길서시장같은 건물을 일떠세웠다.

80년대 90년대에 불어 닥친 거센 회오리바람에 연변조선족공동체 흔들림으로 보이스피싱 토막살인 연변거지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중국조선족 이미지에 따라 붙었다. 오늘날 시대는 이미 변화의 바람을 타고오고 있으며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 연변 조선족 이미지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핵심변수는 우리세대의 몫에 달려있으며 우리세대가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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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상해와 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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