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얼마 전, 시내로 갔다가 어느 한정식 집 앞에서 녹이 쓴 뽐프(펌프)를 보게 되었다. 공능을 상실한 뽐프는 불그스름한 녹을 온몸 가득 바른 채 우두커니 서서 식당 앞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는 관상용으로 돼있었다.


녹 쓴 뽐프를 마주하고 순간, 내 마음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걸 어쩔 수 없었다. 고향을 수천리 등진 한국땅에서 마주한 녹슨 뽐프는 시공을 가로질러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어린 시절, 물 한바가지 부어넣으면 이내 콸콸 시원한 맑은 물을 올려주던 시골 고향집뽐프가 생각났다. 상수도가 없던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뽐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마시고 쓰는 가정용에 필요한 모든 물이 뽐프를 통해 얻어졌지를 않았던가. 알뜰한 집에서는 뽐프에 뼁기칠도 자주 해주고,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손수건만큼한 천도 씌워놓았었다. 한참을 녹슨 뽐프를 마주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재한동포로 불리며, 현대판 이산가족을 앓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마중물일수는 없습니까. 저 녹슨 뽐프에 물 한바가지 부어넣고 지레대질을 하여 맑은 물을 콸콸 나오게 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수는 없습니까 라고.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한국행은 이제 수십만이라는 수자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보다는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좀 더 현대적이고 윤택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중국 조선족이 한국진출을 하는 가장 주되는 목적이다. 돈을 벌어 잘사는 것, 얼마나 밝고 긍정적인 일인가,


하지만, 이 밝고 긍정적인 화면 뒤에는 수많은 어둠이 드리워져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오랫동안 떨어져있는 관계로 부부사이가 소원해지고, 불신이 깊어지고,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해체위기에 서있다. 중국에 있는 가족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 돈을 적게 보낸다고 원망하고 전화가 자주 안온다고 원망한다. 반면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동포들은 스트레스와 고된 일에 시달리는 자기들을 가족이 이해하여주지 못하고 자기들의 고생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만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다보면 전화상으로도 좋은 말들이 오가지 못하고 점차 서로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을 옆에서 돌보지 못하는 부모는 그저 미안한 마음에 금전으로 모든 것을 보상하려 하고, 아이는 부모가 돈 이외에 해준게 머가 있냐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를 포기할 수 없다. 돈이 대체 뭐냐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게 현실이 아니던가.


결국,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확실하지 못한 채, 모순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신하고, 상처만 입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뼈아픈 삶의 현실이다.


나는 조선족의 한국진출을 긍정적으로 본다. 마침내 우리는 한국행을 통하여 부를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고, 내 고향에서는 미처 몰랐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새삼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힘들어서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을 정도로 한국생활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얻은 것이 더 많은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가족이란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면서 알콩달콩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 서로 헤여져있으니 아무래도 라는 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 참으로 말하고 들을수록 맥만 빠지는 소용없는 말들만 주절주절 어제도 오늘도 되풀이하고 있다. 깊은 한숨을 쉬고 맥 빠진 탄식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뽐프가 아닐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라는 뽐프에 부어줄 마중물을 바라고있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충분한 량의 마중물을 받았을때에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저 뽐프처럼, 조금씩 찔끔찔끔 넣어서도 안 되고 한꺼번에 충분한 량을 넣어주는것과 동시에 지렛대를 반복적으로 작동시켜야만 밑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수가 있는 뽐프처럼, 물 넣는 것만 생각하고 지레대질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무작정 지레대질만 힘차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마중물의 량과 지레대질의 빈도와 강약, 모든 것이 맞물릴 때 비로소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저 땅 밑에서 물을 끌어올려주는 뽐프가 아닐까 모르겠다. 누군가 마중물을 넣어주고 지레대질을 해줘서 보기만 해도 시원해질 것 같은 맑은 물을 콸콸 뿜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운 뽐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마중물을 기다리는 뽐프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마중물이 되는 건 어떨까. 저 땅속 맑은 물을 끌어내는 뽐프의 지혜를 다 배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뽐프와 마중물의 그 끈끈한 애정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을 바로 보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뜨거운 가슴을 열어 내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족과, 내가 뜨거운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지키고자 떠났던 것들을, 지키고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랑하는 것들을, 그 목마른 애정과 그리움들을, 그 눈물겨운 것들을 인내해야 하는 그 이유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내게 가장 소중했던 건 과연 무엇이였는지, 지금 나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슨 모습으로 의연히 서서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마음을 울려 나를 되돌아보게 해준 뽐프를 다시 바라본다. 햇빛에 반사된 녹이 진 붉게 빛난다. 나는 한발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내밀어 녹을 문질러본다. 깔깔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 가득 스며든다.


햇빛이 찬연하다. 녹슨 뽐프가 햇빛아래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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