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추진해온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우크라이나 지원 구상이 막판에 좌초됐다. 결정적 변수는 프랑스였다. 핵심 동맹으로 기대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종 국면에서 반대 진영으로 돌아서면서, 베를린은 사실상 ‘기습’을 당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지시간 12월 19일 새벽, 벨기에 브뤼셀에서 16시간 넘게 이어진 EU 정상회의 끝에 러시아 동결 자산을 직접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방안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신 회원국들은 EU 공동 채무를 발행해 900억 유로를 조달하는 대안에 합의했다. 이 방안은 벨기에 총리 바르트 더 베버르가 수주 전부터 제안해온 절충안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 “마크롱 대통령은 정상회의 전까지 독일 제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해당 제안의 법적 문제를 제기해왔다”고 전했다. 특히 공공부채 부담이 큰 프랑스로서는 국가 보증 제공이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 이탈리아와 벨기에 등 다른 국가들까지 반대에 가세하자, 마크롱은 최종 국면에서 반대 진영에 합류했다.
브뤼셀 협상에 정통한 한 EU 고위 외교관은 “마크롱은 메르츠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정치적으로 약해진 마크롱은 결국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 뒤로 물러섰다”고 말했다.
FT는 이번 대립이 유럽 양대 강국의 역할 역전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최근까지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독일 정부는 메르츠 취임 이후 보다 공세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반면, 임기 후반에 접어든 마크롱 정부는 국내 정치 불안과 높은 부채로 인해 결정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츠는 5월 집권 이후 향후 10년간 최대 1조 유로 규모의 국방·인프라 지출을 예고하며 베를린의 존재감을 키웠다. 반면 파리는 재정 압박과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제약에 묶여 있다. 미국 마셜펀드 파리 사무소의 조지나 라이트 선임연구원은 “브뤼셀에서는 이제 베를린이 ‘큰 플레이어’로 인식되고 있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메르츠는 전임 숄츠 정부 시절 연정 내 이견으로 EU 표결에서 기권을 반복하던 이른바 ‘독일식 투표’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다. 집권 직후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신뢰하기 어려워진 미국을 전제로 유럽 방위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원전 반대 입장 완화와 EU 규제 축소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재정적으로 묶인 마크롱’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유라시아그룹의 무즈타바 라흐만 유럽 책임자는 “지난 4~5년간 프랑스는 독일의 약세가 유럽의 행동력을 떨어뜨린다고 봤다”며 “이제는 지정학을 이해하고 유럽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려는 독일 총리가 등장했지만, 파리는 약속을 이행할 여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양국의 충돌은 무역 문제로도 번졌다. 이번 브뤼셀 정상회의에서는 EU와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간 자유무역협정이 또 다른 갈등의 축으로 부상했다. 25년 협상 끝에 연내 서명을 목표로 했던 메르츠의 구상은, 마크롱이 멜로니와 손잡고 서명을 수주 연기하면서 무산됐다. 이는 메르츠에게 또 하나의 정치적 좌절로 남았다.
독일 베르텔스만재단의 다니엘라 슈바르처는 “양국 모두 보다 효율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 프랑스가 받는 압박이 더 크다”며 “무역 문제가 그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엘리제궁은 마크롱이 협상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의 조지프 드비크는 “메르코수르 협정에서 프랑스는 몇 주를 벌었을지 모르지만, 큰 싸움에서는 졌다”며 “우크라이나 지원과 무역 두 사안 모두에서 공동 리더십은 없었고, 메르츠만 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긴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향후 수주 내 양국은 1천억 유로 규모의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 사업인 FCAS(미래 공중전투체계)를 둘러싸고도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가 전체 사업 물량의 80%를 요구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독일은 미국산 F-35 전투기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FT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의 관세·주둔군 압박에 공동 대응하며 우크라이나 지원, 유럽 전략적 자율성, 시장 보호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다”고 짚었다. 그러나 라이트 연구원은 “메르츠 체제에서 EU는 그 어느 때보다 ‘프랑스식’이 되었지만, 정작 마크롱이 후퇴했다”며 “브뤼셀에서는 ‘프랑스는 말뿐이고 행동이 없다’는 오래된 평가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전했다.
마크롱의 선택으로 메르츠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무역 협정이라는 두 축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이는 국내에서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을 비롯한 야권의 공세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브뤼겔 연구소의 군트람 볼프 선임연구원은 “메르츠에게 빈손 귀환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라며 “마크롱에게도 두 핵심 사안에서 메르츠에게 정치적 타격을 안긴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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