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7)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돌아오자 동네사람들이 정주칸이 넘쳐나게 모여들었다.
“여보슈, 명기어른, 개천에 용 난다구 우리 동네에 여수재가 났수다. 얼마나 기쁘겠수?! 우리가 이렇게 자랑스럽구 기쁜데 민기어른이야 여부가 있겠수? 참 축하하우다.”
“중학교에서도 항상 우등생이 됐다면서요?”
“졸업장에는 박규찬 교장님의 큼직한 도장이 찍혀 있다우.”
“글쎄 박규찬 교장님의 추천으로 연길현교육국에서 희숙이를 선생님으로 배치했는데 서성구 소학교로 가게 되었다오.”
김명기어른은 연길현교육국의 도장이 찍힌 교원초빙통지서를 내보이며 동네사람들한테 자랑했다.
……
교원초빙통지서를 받고 떠나던 날이 되었다.
어머니 윤씨가 씻어 말리워 다리미질까지 한 옷을 갈아입고 이불짐을 등에 진 순자의 가슴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일찍 동년시절부터 선생님이 되리라던 꿈을 가졌었고 봉천의 방직공장에 끌려가 근로봉사를 하면서 모진 학대와 기시를 받으면서도 버리지 않았었으며 배움의 길이 막혀 산에서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괭이질을 하며 약재를 캐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교원의 꿈이었다.
그날 그것이 현실로 됐다. 그날따라 하늘도 유난히 높고 푸르렀고 얼굴을 스치는 미풍도 무척 살갑기만 했다.
뒷동산기슭의 붉은 꽃송이/ 네 먼저 내 먼저 다투어 피고// 시냇가 버들이 늘어지는/ 건설의 봄날이 찾아왔다네// 농촌의 사시는 풍년의 노래/ 자유와 행복의 꽃이 핀다네…
순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이 때었다. 함께 동구밖까지 동행하던 어머니가 순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라고 했다.
“어머니 왜요?”
순자는 어머니가 궤춤에서 용돈을 꺼내 자기한테 주려고 그러는줄 알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저만큼 뛰어가 앞장서서 걸었다.
“얘, 희숙아! 잠간만 서서 내 말 좀 듣거라.”
“왜 또 웬 말씀을 하시려구요?”
“얘야, 저길 좀 보거라! 가더라도 저 총각의 속을 좀 풀어주고 가려므나!”
어머니는 손을 들어 마을의 제일 마지막 집 굴뚝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김용환이가 외롭게 서서 순자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는 매일 운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저렇게 서있구나! 참 불쌍한 청년인데…”
어머니는 뒷말을 흐렸다.
어머니의 그 말에 순자는 길에 못박힌듯 멈춰섰다.
순간, 순자는 된 방망이에 뒤머리를 얻어맞은듯 큰 충격에 휩싸이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듯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9세부터 고아로 되었다는 김용환 총각,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눈물만은 모른다던 그가 순자가 떠난다고 하니 지금 울고 있다. 순자가 가 버리면 다시는 그녀처럼 순박하고 재덕도 겸비한 처녀를 만날 수 없다고 실망한 나머지 굵은 사나이의 눈물을 휘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용환 총각이 정식으로 순자한테 청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순자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적은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할진대 용환 총각이 아무리 실망하며 절규한다고 해도 순자가 양심적 가책을 받을 일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떠나버리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시각 순자가 생각한 것은 달랐다. 순자는 분명 용환총각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것을 알았고 자기 또한 그것이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정식으로 된 언약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천성적으로 맘씨가 곱고 자기보다 남의 심정을 더 잘 헤아리는 순자는 용환 총각이 자기를 맘속에 담고 있는 것이 마치도 자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졌고 순박한 총각의 가슴에 찬물을 껴얹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로 간주됐다. 교원이 아니라 더 큰 벼슬자리가 기다린다고 해도 절대 용환 총각을 실망시킬 수 없다고 여긴 순자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용환 총각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윤씨도 딸이 옳게 생각한다고 여겼던지 아니면 용환 총각이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졌던지 순자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용환총각한테로 다가간 순자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저를 용서하세요.”
“그것이 어찌 순자 너를 탓할 일이냐?! 기실 내가 주제넘지. 나같은 신세에‘장원급제’하는 너를 넘보다니 참 어리석은 노릇이지…”
“아니예요. 저도 이젠 마음을 정했어요. 뭐 선생이 되나 가정주부가 되나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겠어요?!”
“아니다. 너 나를 섬기노라면 한평생 고생을 밥먹듯 해야 될거다. 널 넘보는 건 다만 나의 욕심때문뿐이니 너 이제라도 너의 이상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너의 머리속을 혼란하게 만든 나를 많이 욕해달라…”
“그만, 그만하세요. 저도 이젠 교원의 꿈을 접었어요. 저는 우리 둘의 인연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어요.”
순자는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용환총각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렇게도 동경하던 교원의 꿈을 접었다. 그러고 보면 순자도 천성적으로 다혈기질이 다분히 타고난 모양이었다.
……
어느 사이에 모였는지 아버지, 오빠들과 올케들도 순자네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저 맘이 여리고 착해빠진 것, 아무렴 착하지 않으면 우리 집 희숙이 아니지…여보, 우리 아들 하나 더 두었다고 칩시다.”
어머니 윤씨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었다.
용환 총각과 약혼한 뒤 순자의 이름은 희숙이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재차 고쳐졌다.
(다음기 계속)
BEST 뉴스
-
중국을 싫어한다면서 왜 마라탕은 먹을까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생성 이미지 최근 중국 SNS에서는 한 베트남인 노동자가 올린 영상이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직장에서 중국인 손님이 오면 일부 한국인 관리자들이 뒤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한국 사회에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
태극기 뒤에 숨은 극단주의의 얼굴
한국 사회에서 극우는 더 이상 주변부 현상이 아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와 일부 집회 현장에서만 목격되던 극단주의 담론은 이제 정치권과 종교계, 유튜브 생태계, 거리 시위까지 확산되며 공적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벌어진 계엄 논란과 탄핵 정국, 부정선거 음모론, 법원 난입 사태 논란 ... -
겉으로는 선진국, 현장은 왜 아직도 후진국인가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대한민국은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 산업을 앞세워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했다. 첨단 기술과 AI 혁신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선진국이라 부른다. 그러나 산업현장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 화려한 외형과는 다른 장면이 여전... -
외국인이 언제 투표권을 달라고 했나
선거철만 되면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사회적 갈등이 커지거나 정치적 논쟁이 격화될 때마다 외국인 투표권 문제가 다시 소환된다. 그리고 그 화살은 어김없이 특정 국가 출신 외국인, 특히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향한다. 하지만 논쟁이 시작될 때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사라진다. ... -
혐오의 이름으로 소환된 연변 사람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증거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음모부터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투표소와 개표소 주변에서 "중국이 개입했다", "조선족... -
[연변 기행 ①] 천년의 시간을 품은 둔화 육정산, 불심과 역사가 만나는 곳
중국 길림성 둔화 육정산 문화관광구의 금정대불.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청동 좌불상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육정산은 불교문화와 발해문화가 어우러진 연변의 대표 관광명소로, 세계 최대 규모의 비구니 도량인 정각사와 함께 동북아 불교 성지로 꼽힌다. (사진=육정산 문화관광구) ...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스포츠
more +-
[북중미 월드컵] 콜롬비아 2연승 질주…포르투갈과 조 1위 격돌
[인터내셔널포커스] 콜롬비아가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에서 DR콩고를 제압하며 가장 먼저 K조 32강행을 확정했다. 콜롬비아는 24일(한국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 -
[북중미 월드컵] 부디미르 결승골! 크로아티아, 파나마 1-0 제압…모드리치 200경기 자축
[인터내셔널포커스] 크로아티아가 주장 루카 모드리치의 국가대표 200번째 출전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 경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크로아티아는 24... -
[북중미 월드컵] 케인마저 침묵…잉글랜드, 가나와 0-0 무승부로 조 1위 경쟁 안갯속
[인터내셔널포커스] 우승 후보 잉글랜드가 가나의 끈질긴 수비를 끝내 뚫지 못했다. 해리 케인의 결정적인 실축까지 겹치며 조별리그 2차전 승리를 놓쳤다. 잉글랜드는 24일(한국시간) ... -
[북중미 월드컵]비판 잠재운 호날두…포르투갈, 우즈벡전 5골 화력쇼
[인터내셔널포커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또 한 번 월드컵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포르투갈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대회 첫 승을 신고했고, 호날두는 멀... -
"골 대신 해삼?" 월드컵 보며 터진 중국 팬들의 분노
[인터내셔널포커스]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뜨거운 열기를 이어가는 가운데 중국 축구팬들의 씁쓸한 자성론도 확산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우즈베키스탄, 요르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월... -
[북중미 월드컵] 6개국은 웃고 4개국은 울었다…월드컵 조별리그 희비 교차
[인터내셔널포커스]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32강 진출팀과 조기 탈락팀이 하나둘씩 가려지고 있다. 23일(한국시간) 열린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와 프랑스, 노르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