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김철균

긴것 같으면서도 짧은 것이 인생인가부다. 특히 할일이 많고 뭔가를 추구하면서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일수록 늘 자신의 인생이 짧다고 생각한다.
 
2004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 들어 순자네 가정엔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들이 닥쳤다. 남편 용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졌던것이다.
 
뇌혈전이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뇌혈관에 피덩어리가 생기면서 혈액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용환 영감한테 이러한 증상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있었다. 두통, 현기증과 손발저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지만 영감은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마누라가 몸이 허약하다며 신경을 기울여왔던 영감이었다.
 
“나한테도 그렇고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로 마누라가 건강히 오래 살아야 그 가정이 잘 운영되는 법이라오.”
 
영감은 평소에도 이런 말을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 마누라가 좀 아프다고 하면 손발을 주물러주고 약방에 가서 약을 사온다,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하며  자상하게 굴었고 자식들한테까지 “너희들이 어머니한테 절대 등한히 굴어서는 안된다”며 자주 당부를 하던 영감이었으나 자기 자신한테만은 항상 그 정반대었다. 간혹 순자가 영감의 몸에 대해 걱정이라도 하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서 보양할테니 당신은 걱정마오”라고 하며 안심시키군 하던 용환 영감이었다.
 
헌데 그러던 용환 영감이 쓰러졌다. 평소에 별로 잔병들이 없고 건강하기만 하던 사람이 앓는다고 하니 아주 치명적이었다. 의사가 자기의 몸에 더 등한하다더니 그 말이 틀림이 없었다.
 
영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지자 가족은 물론 연변위생연수학교의 지도부에서도 용환 영감의 병치료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치명적인지라 그 치료가 몹시 힘들었으며 완치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한동안의 입원치료와 순자의 정성어린 간호로 용환 영감의 병세는 어느 정도 호전되었지만 바깥출입은 근본 할 수 없었고 이전처럼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순자의 손이 따라 가야 했다. 죽을 끓여 입에 떠넣어 주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2일에 한번씩 요자리를 갈아 주어야 하는 등으로 마치 갓난 아기를 돌보듯이 돌봐야 하는 것이 뇌혈전으로 반신불수가 된 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순자는 영감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감한테 가장 값진 걸 대접하고 싶었다. 값진 것이란 다만 비싼 물건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면 곧 바로 값진 것이었다.
 
용환 영감이 투병생활을 시작해서부터 순자는 매일 영감한테 죽을 쑤어 대접했다. 순자가 영감한테 끓여 대접하는 쌀죽은 결혼 때 갖고 왔던 것으로 거의 60년간 보관하고 있던 “예장함의 쌀”로 지은 것이었다. “예장함의 쌀”이란 딸이 결혼할 때 부모가 딸의 함속에 넣어서 보내주는 쌀이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조선민족의 풍속으로서 딸이 시집간 뒤 농사를 잘 지으라고 원래는 “종자벼”를 넣어서 보내었으나 후에는 그것이 변화되면서 아예 매일 이밥을 먹으며 살라고 함속에 쌀을 넣어서 보냈던 것이다. 순자는 수십년동안 아무리 식량고생을 하면서 살면서도 이 쌀만은 터뜨리지 않았다. 보다 관건적인 시각에 이 쌀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타산이었다. 헌데 이젠 그 “대장함속이 쌀”을 터뜨릴 때가 된 것이었다. 쌀이 없어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 쌀을 터뜨려야 할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순자는 용환 영감이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면서도 영감의 병상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이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영감한테 쌀죽이라도 끓여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쌀죽을 끓일 때마다 흘린 눈물이 죽속에 떨어져 말그대로 쌀죽보다는 “눈물죽”으로 될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용환 영감이 투병생할을 하고 있는 동안 연변위생연수학교에서는 전문간호원을 배치해 주려 했으나 용환 영감이 거절했고 순자 역시 영감을 남한테 맡기고 싶지를 아니했다. 아무리 유능한 간호원이라고 해도 마누라인 자기보다 나을 수가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고 용환 영감도 이에 아주 동감인듯 했다.
 
영감을 간호하는 동안 순자는 늘 영감의 머리맡에서 신문을 읽어주고 방송에서 들은 얘기를 들려주군 했다.
 
“당신한테 참… 미안하구려.…당신은 그 옛날부터 …나한테 모든 것을 희생했고 오늘까지도 …”
 
룡환령감은 병석에 있으면서 자주 이러한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불편한 입을 실룩거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생각밖으로 그 노래는 한국에서 한시기 많이 유행됐던 비교적 신식노래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여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알고보니 영감은 언젠가 한번 어느 한 모임에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듣고는 그 노래를 부른 사람한테 졸라서 그 노래의 가사를 베끼였으며 그뒤 일부러 몇번 혼자 친구의 딸이 운영하는 노래방을 다니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랬다. 세상에 하많은 사연들중 김용환/김순자 노부부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순자의 헌신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일찍 용정에서의 꿈많던 처녀시절 교원으로 될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포기하고 용환청년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순자ㅡ 그 후 이들 부부는 수십년간의 풍운조화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국내해방전쟁, 공화국창건, 자치주창립, 반우파운동 및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렇게 희로애락속에서 어느덧 이들 노 부부의 사랑은 세기를 뛰어 넘어 2000연대에까지 이끌어 왔다.
 
그래서일까? 용환영감의 병문안을 왔던 노인들 거개가 순자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된 나머지 자기들의 만년도 용환 영감과 같은 팔자로 되였으며 좋겠다고 했다. 또한 모두들 사람의 팔자에서 마누라보다 먼저 저승으로 가는 것이 상팔자고 마누라를 앞세우고 자식들의 손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불행중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남정들한테 있어서 마누라는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영감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들에 따르면 아무리 박식하고 유능한 남정이라고 해도 어리석으면서도 철부지같은 단순한 심리가 있기에 어려서는 낳아준 어머니의 손길을 닿아야 하고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에 투신하면서도 함께 사는 아내앞에서는 어리궂게 놀기 마련이며 특히 늙고 병들고 외로울 때면 더욱 아내앞에서 아기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3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어느날 순자는 잠자는 영감의 모습을 내려다 보다 문득 그 옛날 둘이서 손잡고 마을 뒤산의 숲속을 거닐던 때가 기억에 떠올라 그때 함께 부르던 노래 “낙화유수”를 조용히 부르다가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잠자는줄로만 알았던 영감이 번쩍 눈을 뜨며 그 노래를 계속 불러 달라고 했다. 기실 영감은 자지 않았으며 눈만 감고 있을뿐이었다. 자기가 눈을 뜨면 마누라가 부르던 노래를 멈출가봐서였다.
순자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계속 노래를 이어갔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마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봄으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노래를 듣고있던 용환 영감의 눈빛은 생기가 돌았다. 영감은 순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떠듬거리며 노래 한곡조를 뗐다.
 
“고향산기슭에…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그러자 순자도 따라불렀다.
 
고향산기슭에 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아/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아침 닥쳐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
 ……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추억은 어느덧 그 옛날 고향마을의 그 뒤동산으로 나래쳐갔다.
 ……
그날 교원초빙통지서를 갖고 화룡 서성구로 가다가 용환 총각한테로 다시 발길을 돌린 순자는 끝내 교원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으리라 맘속으로 다졌다.
 
그날 둘은 고향의 뒤산에 올랐다.
 
“순자, 난 모든것이 꿈만 같구려. 순자가 글쎄 있는 밑천이라고는 이 한몸뚱아리뿐인 나한테 마음의 쪽문을 열어주다니 말이요. 정말 고맙소. 나 영원히 오늘을 잊지 않으리다.”
 
“그런 말 마세요. 전 그냥 저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했을 뿐이예요.”
 
용환이는 순자를 꼭 끌어안고는 앞날에 대한 무한한 동경에 취해 갖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낙화유수”였다. 순자 역시 행복감에 푹 젖어들었다. 그 순간 하늘의 해빛은 찬연하였고 바람도 잔잔하였다. 다람쥐 한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저 멀리 달아났다. 둘은 온세상을 차지한듯 오래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김소월이 시에서 쓴 것처럼 그대로 굳어져 바위로 된다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미구하여 침묵을 깬건 그래도 용환이었다. 잠시나마 취해있던 꿈에서 깨여나 이지를 회복한 모양이었다.
 
“순자, 앞으로는 어떻게 할 타산이요?”
 
“전, 그냥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그냥 공부를 하세요. 제가 뒤받침을 해줄게요. 전 아무래도 좋으니 당신만은 꼭 성공할거예요.”
 
“그래? 고맙소. 난 순자만 있으면 더없이 행복하며 온 천하를 얻은거나 마찬가지요.”
 
그 날 두사람은 서로 껴안고 무한한 행복의 무드속에 푹 잠겼다. 둘은 자기들의 젊음이 영원한 것을 바랐고 또 그럴 것이라 믿기도 했다.
 
둘은 해가 서산에서 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 윤씨가 씨암탉을 잡아 솥에 앉히고 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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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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