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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조선족축구를 만방에 알린 노년축구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일전 김재율씨를 단장으로 하는 연변70대 노년축구팀인 흰구름 축구대표팀이 한국 제주특별시 종합체육장에서 있은 제1회 제주“장수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제 3 위에 오르는 영광을 지녔다. (겨울철에도 훈련을 견지하고 있는 흰구름축구팀 성원들) 대회에 참가한 16개 축구팀을 보면 중국에서 3개팀, 일본에서 2개팀이 참가했으며 나머지 11개 팀이 한국 본토팀이었다. 성적순위를 보면 1위와 2위가 모두 한국팀이 차지했으며 해외팀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팀이 연변 흰구름축구대표팀이었다. 경기에서 연변흰구름팀은 1조에 편입, 조리그에서 한국 서울광진팀과 1 : 1로 비기고 제주장수팀과 역시 1 : 1로 비기었으며, 일본 도쿄노년팀을 2 : 1 제압하고 3 : 0으로 한국장수홍보팀을 완승해 조1위를 기록했으며 득실차에 의해 결승경기가 없이 3위에 올랐다. 중국에서 참가한 3개 팀 중 상해노년팀은 60대 연령단계어서 성적기록이 없는 순 친선경기형식으로 참가했고 청도팀은 70대 연령단계었지만 조경기에서 탈락한 상황, 이러고 보면 연변 흰구름노년축구대표님은 연변만이 아닌 전반 중국의 노년축구의 실력을 보여준 셈이었고 중국축구를 위해 영예를 빛내인 셈이었다. 이번에 연변 흰구름축구대표팀은 도합 26명으로 구성, 한국방문목적이 순 제주 “장수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고찰과 친선경기를 통하여 한국의 노년축구 현황을 알아보고 향 후의 상호교류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대표팀은 대회의 개최를 약 일주일간을 앞두고 한국에 입국, 11월 11일부터 선후로 서울, 인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지방의 노년팀들과 8차에 달하는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교류와 친선을 돈독히 하는 한편 중국 조선족노인들의 축구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 제주에서 제1회 제주 장수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여 남긴 기념) 한편 이번에 한국행을 하면서 이 축구팀 노인들은 1명당 100위안씩 내놓아 가정 특별사정으로 한국행이 어려웠던 한 노인의 노비를 부담해주는 것으로 화목하고 서로 도와주는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3월에 정식으로 연변흰구름축구팀으로 고고성을 울린 이 축구팀은 매주 3차씩 훈련을 견지하는 한편 주내외에 있은 많은 경기들에 참가하기도 한다. 또한 이 축구팀의 스폰서를 담당하고 있는 연길 흰구름이불공장의 최기춘 사장은 매달 축구팀에 정기적으로 1000위안씩 협찬, 이번의 한국행에도 5000위안을 지원하였다.
    • 스포츠
    2014-12-21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9)
    ■ 허 헌 (전번기 계속) 샤와를 마치고 나오니 저녁식사를 한다는 호출이 있었다. 복도로 나오니 마침 국가청년팀 선수들이 줄을 지어 식사하러 가기에 그들이 들어가는 식당홀에 들어서자 접대원이 우리의 앞을 막으며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회의하러 온 축구팬 대표라고 말하자 접대원은 대표들의 식당은 저쪽 큰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축구팬 대표들에게 향해지는 접대는 5성급 호텔 차원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접대원이 알려준 식당홀에 들어서니 이미 아주 큰 식탁 3개가 준비되어 있었고 상위에 오른 요리 개수를 세어보니 무려 36가지나 되었다. 그리고 매 상마다 미녀 5명씩 차렷 자세로 우리를 맞아주며 곱게 인사하였다. 이어 하나 둘씩 자리를 찾아 앉자 위주임이라는 기지의 책임자가 나를 자기의 옆에 앉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연변축구의 현황에 대해 이 것 저 것 물으면서 나한테 맥주를 부어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조선족은 맥주보다 배갈을 더 즐긴다고 하자 그는 인차 접대원한테 부탁하여 모태주를 올리게 하였다. 명주인 모태주는 확실히 기타 다른 싸구려 술과는 근본 맛이 달랐다. 맛도 유유했지만 향기가 더욱 좋았다. 그래서 그 책임자한테 값이 얼마인가고 물었더니 3000위안이라고 했다. 어머, 3000위안? 그럼 내가 반근을 마시면 1500위안어치 마시는 셈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촌 놈이 좋은 술이 생겼을 때나 콱 마셔야지.) 아니나 다를가 내가 한잔 마시기 바쁘게 대기하고 있던 미녀 접대원이 계속 잔을 채워주군 하였다. 한편 연회의 무드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기지의 위주임은 29명의 대표들을 향해 차례로 자아소개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맨 끝에 있는 연회상부터 소개되다 보니 위주임의 옆에 앉은 나의 차례는 맨 마지막으로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술기운을 빌어 큰 소리로 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연변에서 온 대표이며 이름은 허헌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있는 대표들중 유일하게 소수민족으로 조선족입니다. 저는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니며 조선족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수많은 중국인 중의 일원입니다.” 나의 소개가 끝나기 바쁘게 박수소리가 터졌다. 여기서 힘을 얻은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노래 한곡 불러드려 되겠습니까? 제목은 ‘나의 중국마음(我的中国心)’입니다.” 접대원이 노래방 기계를 틀자 전주에 이어 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산과 강은 이 내 꿈 속에 있고 내 마음 항상 조국과 함께 있다네 타향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중국 맘 변할 수 없다네 … 나의 노래에 감동을 받았는지 많은 대표들이 눈물을 보이었고 후렴에 가서는 사업인원들과 대표 지어는 접대원 아가씨들까지 모두 기립하여 합창으로 이어지면서 장내의 무드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아 올랐다. … 이튿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빠개질듯이 몹시 아파났다. 아무리 명주라지만 과음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엇다. 하지만 이 날에 있을 행사를 생각하면 정신만은 올똘하게 차려야 했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들어서니 각종 반찬 중 눈에 확 띄우는 것이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김치가 있었고 된장국은 아니었지만 된장국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국(汤)”이 있어 그나마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다. (청도와 광주에서 온 미녀 축구팬 대표들과 함께 ) 아침식사가 끝나 얼마 안되어 북경으로부터 취재팀이 온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마중을 나가자 몇대의 승용차들이 대문으로 들어와 칙 하고 멈춰서더니 차안에서 기자들이 카메라와 각종 기재들을 들고 내렸다. 그들은 바로 중앙TV방송국과 국가급 매체의 기자들이었다. 이어서 중국 축구협회 상무 부주석이며 중국 축구운동관리센터의 위적 주임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두손을 높이 추켜들고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각 지에서 온 축구팬 영수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축구팬 대표들을 영수라고 부르다니… 영수라고 하면 이전에 떠올려 봤던 중화 인민 공화국 창건자 모택동 주석만이 영수라고 했었는데 우리를 영수라니 우스꽝스럽고도 조금은 당황하기까지 하였다. 위적 주임은 우리 대표 한사람씩 악수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위주석님, 저는 연변에서 온 대표입니다. 그리고 이건 저의 명함장입니다.” 나의 명함장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당신은 치과의사입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치과의사가 축구팬협회의 영수라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나를 추켜올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념으로 집체사진을 찍을 때 나의 손을 꼭 잡고 중간좌석에서 자기와 나란히 앉게 하였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회의장소에 들어섰는데 맨 앞좌석에 내가 앉을 장소로 “연변대표석”이라고 씌어져 있었고 옆에는 “청도대표석”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알고 보니 청도대표는 여성으로, 청도 해우축구팬협회의 부 회장으로 활약하는 미녀축구팬이었고 성은 서씨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먼저 중국 축구운동관리센터 주임이며 중국 축구협회 위적 부주석이 발언하였다. 헌데 그의 첫 마디 발언이 나를 놓고 시작될 줄이야. “각 지에서 온 축구팬 영수 여러분, 오늘 제가 본 주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한마디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제일 먼 곳에서 오시고, 더구나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운 변강에서 오신 허헌 대표 말입니다. 그는 치과의사랍니다. 전국에서도 제일 많은 축구팬을 소유하고 있고 전국을 놀래울 정도로 연변축구팬들은 열정이 넘치고 문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연변축구팬 령수가 치과의사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응당 여러 대표분들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봅니다.” 위적 부주석의 발언이 끝나자 모든 사업인원들과 대표들이 한결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박수를 보냈고 그 답례로 나는 우리 민족이 할 수 있는 분명한 경례로 답사를 하였다. (중국축구협회에서 마련한 축구팬대표 좌담회 전경) 이날 회의의 주요 내용은 중국축구계의 많은 문제점을 적발하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예하면 안보, 비리, 가짜볼, 검은 호르래기 등과 중국축구의 앞날에 대해 심각하고도 투철하게 고민해 보는 것 등등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연변축구계에서도 자주 나타나군 하는 현상이였다. 연변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그것도 우리 조선족들로 주로 무어진 축구팀이라는 명칭이 업신여겨서인지 우리 연변축구는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부분적 축구팬들은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심판과 상대방 선수들을 욕해대는 현상도 비일 비재로 존재하군 했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열거하면서,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나의 일가견들을 숨김없이 밝히었다. 회의에서 나의 발언은 큰 인기를 얻었다. 비록 한어발음이 서툴고 정확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집어내는 문제들은 확실히 보편적인 문제들이었고 또한 반드시 시정돼야 할 사항들이기 때문에 회의 참가자들은 명심해 청취하고 기록하군 하였다. 회의는 오전 오후로 계속 진행되었고 휴식은 오전 중간에 30분, 점심시간 2시간, 오후 30분이었는데 휴식시간마다 각 지의 대표들이 나한테로 찾아와서는 연변축구팀의 현황을 물어보군 하였다. 특히 고종훈은 지금 뭘 하는가고 묻는 사람이 제일 많았고 또한 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대표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청도에서 온 미녀대표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게 된 나는 기분이 한결 좋았다. (다음기 계속)
    • 스포츠
    2014-12-17
  • 연변축구 “동산재기”로 우뚝 솟으라!
    ■ 김철균 연변 프로축구의 “박태하”호가 “출항의 닻”을 달고 긴 고동을 울렸다. 총망히 재정비되었지만 새로운 기별도 육속 전해지고 있으며 얼핏 봐도 근사하고도 탄력있는 구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여 흐뭇하다. 원 연변축구의 동량들이었던 문호일, 허파, 배육문, 조명 등 선수들이 대거 귀환했고 유명한 “국내호” 프리킥 대가인 서량이란 선수도 연변팀에 “점목”됐다. 최근 몇년간 가장 이상적인 포메이션을 형성할 조짐이다. 우선 스트라이커선에서의 문호일과 허파 등 “해결사”들의 맹활약이 기대된다. 이 중 문호일은 2006년 시즌 갑급리그 골잡이 2위를 기록한 “킬러”로 세월의 흐름에도 크게 녹쓸지 않는 플레이를 보이는 것 같으며 어찌보면 경험의 축적으로 보다 더 성숙성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주력수비로 국가청년팀에까지 발탁된 적이 있었던 조명 선수 또한 인상적이다. 특히 연변팀의 갑급입문 초기, 조명의 변선공 던지기는 전국의 일품이었다. 그가 변선공 던지기를 한다 하면 흔히 던지는 공이 상대방 문전 중앙에 가 떨어지면서 동료한테 슈팅기회를 자주 만들어주군 했다. 2004년 연변팀은 중국축구 을급리그 북방구 경기에서 한 한번의 패전도 없이 그 해의 10월 말 정주에서 있은 8강전에 합류하며 갑급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하다면 문호일과 조명은 당시 갑급진출에 성공할 때의 공신이다. 10년이 지난 오늘 이들 두 선수가 재차 연변팀의 갑급진출을 위해 그라운드에 나선다는 것 그 자체가 자못 큰 뜻을 담고 있다. 최정예 멤버들의 합류와 명년도의 을급리그, 이것이 묘한 일치가 될 수 있겠다는 분석도 조심스레 해본다. 거기에 한국적 박태하 감독의 특출한 아이디어와 용병술이 기대되며 명년 을급리그에서의 연변팀아 “천하무적”의 구단으로 2004년의 굴기를 재현시킬 수도 있겠다는 분석이다. 한편 연변축구구락부도 “머리가 보다 명석”해졌다는 분석이다. 지난해의 강등을 통해 문제점을 많이 찾아낸 것 같고 또한 “자아반성”도 충분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렇다면 지난해 연변팀의 강등이 100%의 나쁜 결과만 초래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평가를 하고 싶다. 이는 결코 변명이 아닌 객관적 논리와 축구발전의 법칙으로 받아들여 졌으면 좋겠다. 왜냐인가 하면 강등의 쓴맛은 비록 가슴아픈 건 사실이나 이 강등이 연변팀한테는 그냥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아반성하고 해결점을 찾는 “약”이 됨과 더불어 동력이 되고 또한 “동산재기”의 밑거름으로 될 수 있겠다는 활기찬 기대를 가져보는 바이다. 새해의 시즌을 앞두고 예감이 괜찮다는 기분이다. 첫 스타트가 좋다. 그리고 이제 있을 과정도 더불어 좋겠다는 생각이며 결과는 더더욱 이상적이여서 명년도 갑급복귀 목표가 꼭 현실로 도래하리라는 확신성을 가져본다.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 스포츠
    2014-12-14
  • 연변천양천 명년리그 위한 준비 가동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4일, 2015년 갑급리그 복귀를 슬로건으로 내건 연변 장백산팀(50명)이 신임감독 박태하의 인솔하에 동계훈련 행으로 연길을 떠나 해남 해구에 있는 훈련캠프로 향했다. 박태하 감독에 따르면 동계전훈 제1단계에서는 체력위주의 훈련에 돌입하게 된다. 연변팀은 해남 해구에서 60여길간 훈련, 구정은 연길로 귀환해 쇠게 되며 이어 2차 전훈으로 한국으로 향발, 한국전훈을 통해 최종 멤버를 확정한 뒤 2015년 시즌 제1라운드에서 맞붙게 될 팀 지역으로 이동해 막바지 담금질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연변팀 코치 왕건에 따르면 최근 대량의 정예멤버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원 연변팀에서 뛰었던 문호일, 배육문, 허파와 조명 등이 고향팀으로 돌아와 그라운드에 나서게 되며 장춘아태에서 활약하던 연변적 선수들인 이광, 이상 형제도 고향팀의 초청에 응했다. 그리고 중국축구무대의 이름난 플리킥대가이며 상해신화팀에서 뛰던 서량 선수가 연변 축구구락부 관원의 설복에 의해 새해 연변팀 전포를 입고 뛸 전망이다. 한편 지난 10일,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는 한국적 축구인 박태하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최은택, 조긍연에 이어 세번째로 연변축구의 “한국인 감독시대”를 열었다. 박태하 신임감독은 1968년 5월 29일 출생, 전 한국국가대표팀의 선수, 2011년 12월까지 한국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였으며 그 뒤엔 FC서울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었었다.
    • 스포츠
    2014-12-14
  • 연변팀 신임감독 박태하 출사표 "목표에 최선!"
    [동포투데이/길림신문] 한국인 박태하가 연변장백산천양천축구팀 신임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부진의 늪에서 재기를 꿈꾸는 연변팀은 최은택, 조긍연감독 이후 세번째로 한국인 감독을 초빙, 《제3의 최은택선풍》의 돛을 올렸다. 12월 10일 오후 연변주체육국 2층 회의실에서 있은 연변장백산산축구구락부 신임감독 조인식에서 한국인 박태하가 연변장백산천양천축구팀 감독으로 선임되였다. 한국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 국가대표, 부천_SK_프로축구단, 포항스틸러스 등 팀에서 경력했던 1974년 4월 29일 출생인 오명관이 조리감독으로 팀을 이끌게 된다. 새로 선임된 박태하 감독은 "계약기한은 1년이다. 사실 구락부에서 2년을 제기해왔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구락부의 최종 명년목표가 갑급리그 승격이기 때문에 승격을 이루고 나서 제 업무를 평가를 받기 위해서 1년을 하는것으로 합의했다.","사실 심중하게 고민을 많이 했다. 아시다싶이 한국의 감독들이 중국에 진출해서 크게 성공을 못봤기 때문에 그 위험부담이 컸기에 결정하기 싶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나자신이 도전하고 싶었다. 연변팀이 지금 비록 을급리그로 떨어졌지만 갑급리그로 진출하기 위한 노력들과 열정이 감독직을 수락하게 된 배경이라 보겠다." 연변팀 선수들에 대해 박감독은 "선수 개개인 능력이 있다고 본다. 앞으로 훈련이나 경기를 하고난후에 말할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말씀드릴 상황은 아닌것 같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그런 부분은 장점으로 보고있고 그 열정들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축구에 접목시켜 경기장에서 경기성적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연변팀 운영에 대해 박감독은 "선수들과 그런 얘기를 했다. 선수이전에 사람의 모든 일을 열정적으로 할 때 자기가 하고싶어할 때 열정이 나온다. 그 열정을 운동장에서 최대한 보여주라. 그런 열정들이 선수 하나하나가 엄청난 팀의 운동력의 열정이다. 그리고 오늘 놀란것은 한국에서는 3부리그에 떨어지게 되면 관심이 떨어진다. 그런데 오늘 많은 기자들앞에서 얘기할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은데 이런 관심이 나한테 부담과 앞으로 더 신중하게 팀을 잘 만들어서 연변축구팬들한테 좋은 경기로 보답하는 그런 생각을 할수 있는 계기라 생각한다."고 말한뒤 박감독은 "가족 같은 분위기로 선수들을 최대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생각을 해보았다. 강해도 약해도 안되는 그런 부분에 대해 한국대표팀 수석코치를 하는동안 터득한 부분이 있다.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선수들과 친해질수있고 운동장에서 웃고 운동도 즐겁게 하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명년 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된만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태하 신임감독은 1968년 5월 29일 출생, 전 한국국가대표팀의 선수, 2011년 12월까지 한국 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였으나 조광래감독의 경질로 인해 사임하였다. 사임 후 바로 FC서울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였다. 박태하(朴泰夏)간력 출생: 1968년 5월 29일 키: 177cm 학력: 한국 경주종합고등학교, 대구대학교 1994년 제15회 미국월드컵 국가대표 1998년 제16회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2005년-2007년 포항스틸럴스 2군코치 2007년-2010년 한국국가축구대표팀 코치 2010년 남아공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 2010년-2011년 한국국가축구대표팀 수석코치 2012년 FC서울 수석코치 수상: 포항스틸러스축구팀 1992년 프로축구 베스트11 1998년 프로축구 빅스포상 1998년 프로축구 어시스트상 1992년 K리그 우승 1회 1993년 리그컵 우승 1회 1996년 FA컵 우승 1회 1996년, 1997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길림신문 기자 김룡
    • 스포츠
    2014-12-11
  • 박태하 연변FC 신임감독으로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 의하면 연변장백산축구팀의 신임감독에 한국인 박태하가 선정된것으로 알려졌다. 연변장백산천양천팀 박태하 신임감독은 1968년 5월 29일 출생, 전 한국국가대표팀의 선수, 2011년 12월까지 한국 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였으나 조광래감독의 경질로 인해 사임하였다. 사임 후 바로 FC서울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였다. 박태하(朴泰夏)간력 출생: 1968년 5월 29일 키: 177cm 학력: 한국 경주종합고등학교, 대구대학교 1994년 제15회 미국월드컵 국가대표 1998년 제16회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2005년-2007년 포항스틸럴스 2군코치 2007년-2010년 한국국가축구대표팀 코치 2010년 남아공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 2010년-2011년 한국국가축구대표팀 수석코치 2012년 FC서울 수석코치 수상: 포항스틸러스축구팀 992년 프로축구 베스트11 1998년 프로축구 빅스포상 1998년 프로축구 어시스트상 1992년 K리그 우승 1회 1993년 리그컵 우승 1회 1996년 FA컵 우승 1회 1996년, 1997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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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6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 (8)
    ■ 허 헌 중국축구협회 전국축구팬좌담회에 참가했던 나날 많은 사람들이 얘기가 좀 길어지다보면 의례 자기 자랑이 나오기 마련이다. 제 잘난 멋에 산다는 말과 같이 자신의 부족점을 감추고 우점만 골라 자랑하는 본성은 나를 포함해 누구나 다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한 때 날린 남자야”란 한국가요에서 반영된 가사구절처럼 날린 시기는 한 시기뿐이고 날리지 못한 인생이 대부분이다. 좋았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부족하거나 어려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면 이 노래의 가사는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나도 한 때 날린 남자야”란 가사에 맞춰 내가 “날리던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 되풀이하려고 보니 어쩐지 벌써부터 가슴이 훌렁거린다. 치과의사로 일한지도 어느덧 지구의 자전으로 태양주위를 돌고 돌아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항상 들뜬 마음과 생기로 넘쳤던 나로서는 지루하게 치과의사로만 살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20대에는 음악예술을 해보았고, 30대에는 장사를 해보았으며, 40대에는 취미로 낚시와 축구에도 참여해 보았는가 하면 50대에는 연변 축구팬협회 회장직까지 맡아보기도 했다. 한편 음악예술은 중도포기를 했고 장사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보니 부모와 형제들에게 경제적 타격과 정신적 고통만 안겨주었고 나 자신은 또 삶의 용기마저 잃었었다. 그러다가 이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면 축구팬협회에서 활동할 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고 그 때는 확실히 나 역시 날린 것 같다고나 할까? 1999년 8월, 연변 축구팬협회에 가입, 이듬해 협회 부회장으로 발탁……2010년 연변 축구팬협회 회장ㅡ 축구팬협회의 일개 말단회원으로부터 10년만에 회장직에까지 오르게 된 나였다. 헌데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10월, 당시 김광주 감독이 이끄는 연변팀이 한창 갑급의 강자들을 꺾으며 승승장구(최종 갑급 3위)하고 있을 때인 어느날 갑자기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허헌 회장이십니까? 여기는 주 축구협회입니다.” “예, 제가 바로 허헌입니다.” “예, 중국 축구협회로부터 전해온 긴급통지로서 북경에서 전국 축구팬좌담회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허회장이 연변축구팬을 대표하여 북경으로 가야 할까 봅니다.” 뭐라?! 이게 무슨 자다가 콩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뭐 수도 북경에 가서 중국 축구협회에서 조직하는 회의에 참가하게 되다니… 사실 역대적으로 중국 축구협회에서 축구팬대표를 초청한 일은 전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축구팬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해에 운 좋게도 그런 영광이 차례지다니. 이게 꿈인가? 아니면 생시인가?… 1 2010년 10월 12일, 내가 앉은 보통 쾌속열차는 제시간에 맞춰 북경을 향해 연길역을 떠났다. 나는 오랫동안 침대석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창곁의 의자에 않아 창밖을 내다보며 한없는 흥분에 잠겼다. 그 순간, 차창밖을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가을의 경치도 이내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지어는 내가 기차에 앉았다는 것마저 망각될 정도었다. 한편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즉 연변의 축구팬 대표라는 막중한 책임감이 나의 두 어깨를 무겁게 하기도 했다. 북경에 간 후 나의 일거일동이 전부 연변축구팬들의 위망과 연관되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디 북경으로 가십니까?” 앞에 앉았던 점잖게 생긴 손님이 문득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예, 그렇습니다.” “북경에는 무슨 일로 가는지요?” 그러자 나는 더는 에돌지 않고 곧이 곧대로 “중국 축구협회의 초청으로 회의하러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손님은 대뜸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럼 무슨 사업을 하고 계시는지요?” “예, 올해부터 연변 축구팬협회를 맡아하고 있는데 허헌이라고 합니다.” “아, 정말 대단합니다. 저도 사실은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축구팬입니다.” 손님은 진짜 반가워하였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우리 침대칸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 없이 서로 자기가 갖고 온 술과 반찬들을 내놓았다. 바로 이때 윗층 침대에 있던 꽤나 나이가 있는 부부로 돼보이는 두분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며 알은체를 했다. “위에서 듣고 보니 선생님은 참 좋은 일을 하는 분이시구만요. 실례이지만 우리 함께 술이나 한잔 합시다.” 그러자 앞좌석의 손님과 나의 대답은 거의 동시에 나왔다. “예, 그럽시다.” 술이 몇순배 돌고 있을 때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 지금 어디서 뭘하십니까?” 나의 큰 딸이 광주로부터 걸어온 전화였다. 나의 큰 딸 허리나와 작은 딸 허영미는 광주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둘 다 인물체격이 나무람할 곳이 없다. “오, 내딸 리나구나. 아빠는 지금 중국 축구협회의 초청으로 연변축구팬을 대표하여 북경으로 회의하러 가는 중이란다.” 나의 말은 어느덧 술기운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아버지, 정말 대단합니다. 축하합니다.” 이렇듯 기쁜 일이었건만 어쩐지 큰 딸은 울고 있었고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다구? 너는 서로 사랑하는 남자친구 그리고 또 동생 영미와 함께 있겠는데 그리움은 나보다 더 할까?… 2 (전국축구팬 대표좌담회에 참가하였을 때 남긴 기념사진) 10월 13일, 드디어 북경에 도착, 북경역 출입구를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니 10분도 안되어 북경시 동성구에 있는 중국 축구협회에 도착했고 건물 출입문옆에 중국축구협회라는 작은 간판이 어슴프레 눈앞에 안겨왔다. 거리는 조용하였으며 좀 오래된 건물에 8층으로 된 중국축구협회 청사였다. 좀 실망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찌 생각하면 소박한 건물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출입문을 떼고 들어서니 보안인원이 다가오며 어디에서 오셨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연변에서 온 대표”라고 대답하니 보안인원은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거수경례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어 그 보안인원은 엘리베이터에 나를 안내하고는 8층까지 동행했다가 사업인원한테 소개한 뒤에야 자리를 떴다. 사업인원은 나한테 악수를 청하며 “중국축구협회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대표께서는 제일 먼저 온 첫 손님입니다”라고 하며 나한테 차물을 권했다. 첫 손님이라구? 하긴 그럴 수밖에. 오후 4시까지 집결하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내가 오전에 도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30분이 지났을가 했을 때 두번째 손님이 도착, 젊은 나이로 보였지만 꽤 성숙된 것 같았다. 그는 한국의 “마귀감독” 리장수가 거느리는 광주항대에서 온 축구팬 대표였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말을 번다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통하는데가 있었던지 우리는 누구의 제의라 없이 식당으로 발길을 옮겨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우리는 함께 주위를 거닐었다. 그 와 중 문득 눈앞에 뜻밖에도 삼국연의의 명장 관운장의 동사이 우뚝 솟아있는게 아니겠는가! 나는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선량하고 남자답게 의리를 중히 여기는 대단한 장군의 동상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전국 29개 지구에서 온 축구팬 대표들이 하나 둘씩 모이었고 풋면목이었지만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경기장에서는 서로 “적수”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서로 친구마냥, 또한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운장처럼 의협심이 강한 친구처럼 되여가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니 우리는 중국축구협회의 전용버스에 올라 하북성 향하에 있는 중국축구협회 훈련기지로 향하였다. (중국축구협회 하북성 향하훈련기지에서 남긴 기념사진, 오른쪽 네번째 사람이 필자) 출발한지 2시간만에 향하에 있는 중국축구협회 훈련기지에 도착하자 기지의 1일자인 위주임이라는 분이 직접 마중나와서는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어 그는 우리가 투숙할 호텔방을 배치, 한개 방에 2명씩 들게 되어 나와 광주에서 온 대표가 함께 한방에 들었다. (다음기 계속)
    • 스포츠
    2014-11-28
  • “연변축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집필과정을 소개하는 허헌씨)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1월 24일, 연변의 슈퍼축구팬 허헌씨의 작품집 “연변축구와 함께 울고 웃으며”의 출간식이 연변 주 체육국의 주최로 연길에서 있었다. 출간식에는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 책임자이며 연변팀의 코치 왕건, 원 연변축구팀 감독 고훈, 연변 축구팬협회 초대 회장 유장춘과 축구팬들, 여러 매체의 기자 그리고 중국 조선족 양천허씨 종친회 회원 등 60여명이 참가하였다. 허헌씨는 지난 세기 90연대 말 원 연변대학 체육학원 최동섭 교수의 소개로 연변 축구팬협회에 가입, 선후로 연변 축구팬협회 행동부 부장, 안보담당 부회장, 회장 등 직을 역임하였다. 축구팬들과 함께 (왼쪽 네번째 허헌씨, 왼쪽 세번째 사람 유장춘 초대회장) 허헌씨는 연변팀 응원에 열성적이었을뿐만 아니라 경기에 대한 소감, 경기장에서 있었던 이모저모 등을 일기형식으로 적어두군 하였으며 어떤 글은 매체들에 투고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허헌씨의 글을 보면 언어가 소박하고 구성이 비교적 잘 째이었으며 문학작품과 비슷한 묘사들도 들어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미학적 세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이 날 출간식에서는 허허씨로부터 작품집 집필과정에 대한 소개가 있었고 선후로 연변축구팀 코치 왕건, 원 연변팀 감독 고훈, 원 연변축구팬 협회 유장춘 회장, 양천허씨 종친회 허연일 회장, 매체 기자들인 김창혁, 남철 그리고 친구와 가족의 대표 등의 축하발언이 있었다.
    • 스포츠
    2014-11-25
  • 연변구단, 한국적 감독 사령탑으로 선정키로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1월 21일 연변 장백산축구클럽에서는 구단감독 공개초빙 간담회를 마련, 광범한 축구계 인사들의 의견과 건의를 청취한 후 최종 한국적 감독을 2015년 연변팀의 사령탑으로 선정하기로 확정지었다. 지난 11월 7일 연변 장백산축구클럽에서는 클럽 홈페지와 여러 매스컴을 통해 감독 공개초빙 공고를 발표, 연변축구를 위해 큰 기여를 하려는 감독들에게 자아발전의 플랫폼을 제공해주기로 하였다. 공고가 발표된 후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에서는 10여명 도전자들의 개인서류를 접수, 이 중에는 자체로 나선 축구인도 있었고 중국 축구협회와 한국 축구협회에서 추천해온 축구인도 있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우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전제 하에서 몇몇 우수한 도전자 축구인들의 자료를 여러 참가자들에게 제공해 참가자들이 참고용으로 하게 했다. 이 날 간담회에는 연변 주 체육국 각 부서의 일군, 연변 축구계내의 인사, 매스컴과 축구팬 대표가 참가하였고 임종현 연변 주 체육국 국장과 우장룡 연변 주 체육국 부국장 겸 연변장백산축구클럽 주임이 참가하여 매 발언자들의 일가견을 청취하였다. 간담회에서 발언자들은 몇몇 감독후보들은 휘황한 감독경력이 있고 또 후보마다 을급리그 감독을 맡은 적이 있는 능력자들이지만 2015년은 연변축구에 있어서 특수한 한해로서 연변장백산축구클럽은 명년 1년내에 반드시 갑급으로 복귀한다는 목표를 내세운만큼 감독 선정시 반드시 내놓은 목표의 내용과 연결되어야 하며 경미한 실수가 있어어도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담량과 식견, 패기와 예지 등이 신임 연변팀 감독을 선정하는 이상적인 요구인바 감독의 기백은 전반 구단의 기백에 영향을 주며 감독의 예지 또한 전반 구단의 응집력과 경기력을 끌어올린다고 주장하였다. 그럼 연변팀에 있어서 도대체 어떤 타입의 감독이 수요되는가 하는 과제에 들어 간담회 참가자들은 급별놓은 경기의 지휘경력과 실전경험이 풍부하며 관리와 훈련을 통해 단시일내 연변팀의 경기력을 높여 갑급복귀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감독이어야 한다면서 이런 감독이라면 한국적 감독이 가장 적합하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축구가 프로화궤도에 진입한 후 연변구단은 선후로 3차에 거쳐 한국적 감독을 초빙하였었다. 이 중에는 성공한 경험이 있는가 하면 실패한 교훈도 있다. 오늘 연변팀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놓고 보면 능력이 있는 한국감독이 사령탑을 잡고 연변축구의 “동산재기”를 성공시키는 것이 더욱 수요된다는것이 총적으로 이날 간담회 참가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연변 주 체육국은 빠른 시일내 감독선정소조를 무은 뒤 한국에 가서 감독후보들에 대한 면담시험을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표했다. 동시에 이날 연변 주 체육국은 연변 체육운동학교에도 1명의 한국적 총 감독을 초빙하여 연변축구의 각 년령단계팀에 대한 훈련사업을 책임지게 하여 연변프로축구의 장원한 발전을 위해 튼실한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 스포츠
    2014-11-24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7)
    ■ 허 헌 (연변팀 주장 한송봉 선수와 함께) 뒤이어 11월 5일에 있은 갑급진출을 완전결정하는 날이 돌아오자 용정에서 온 이영희씨는 우리 모든 팬들의 손바닥에 하늘이 굽어보니 근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늘 “천(天)”를 써주었다. 한편 대 운남 여강팀과의 2차전이 벌어지는 2호 경기장은 그 둘레에 높이가 2미터도 넘는 철사망바자를 막았으니 어찌보면 동물원을 둘러막은 철사망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철사망밖이면 어떠랴! 우리 결사대의 응원은 그대로 선수들한테 전달됐고 그들의 사기를 높이기에는 족했다. 경기가 시작되어 얼마후 현춘호가 날린 페널티킥이 골로 연결되는 순간 팬들의 사기도 정비례로 높아갔고 후반들어 좌조개의 헤딩슈팅이 골로 멋지게 들어가자 운남팬들은 실망한 나머지 응원석과 멀리 떨어진 풀밭에 누워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들한테는 “이겨도 내형제, 져도 내형제”란 의협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면 뭘하는가?! 이영희씨가 준 하늘 “천”자가 우리의 손바닥에 있는데 말이다. 골홍수가 터졌다. 현춘호의 호선골에 이어 터진 문호일의 쐐기골, 팬들의 열광은 말과 글로는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기종료를 알리는 심판원의 호르래기가 울리자 팬들의 환성은 대뜸 울음소리로 변했다. 오, 얼마나 학수고대해왔던 시각이었던가? 2000년 말 길림오동팀이 갑A에서 강등하여 만 4년만에 일궈낸 갑급진출이었다. (갑급진출에 성공한 뒤) 선수들이 달려왔다. 고훈 감독도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하다, 장하다, 우리 선수 장하다.” …우리는 철사망구멍사이로 서로 손을 잡았다. 순간 우리의 손과 손을 통해 난류가 흘렀다. 아, 얼마나 기다려오던 4년이였던가?!…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즉각 갑급진출성공을 경축하는 파티를 마련, “위하여!” 3창이 연이어 터졌고 “세기팀 만세!”소리가 강하호텔 연회청내에 울려퍼졌다. 연변라디오방송국 남철 주임의 말마따나 이 날은 정주땅에서 있은 “연변의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기 계속)
    • 스포츠
    201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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