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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3분의 “흑색기록” 연변팀 심수홍찬에 0 : 1 석패
    [동포투데이 김철균] 연변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의 원정 1승이 끝내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12일 저녁 7시 30분,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5라운드 심수홍찬과의 원정경기에서 연변팀은 최종 3분의 추가시간내 상대방에 한골(결승골) 허락하며 아쉬운 패전을 기록했다. 이날 연변팀의 이호은 감독은 4231포메이션으로 수비역습의 기전술을 구사했다. 심수홍찬팀은 경기 초반부터 홈장우세를 빌어 기선제압에 나섰다. 경기 6분, 9분, 11분 홍찬팀은 연속 코너킥과 프리킥 기회를 만들어내며 연변팀 문전을 위협했으나 연변팀의 밀집방어와 골키퍼 윤광의 선방으로 득점까지는 이어가지 못했다. 이어 전반 20분과 26분경, 홍찬팀의 바바카와 주사패 선수가 연속 슈팅을 때렸으나 역시 득점에는 실패했다. 전반 39분경, 연변팀은 최인 대신 한국용병 김도형을 교체멤버하면서 서서히 공격에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후반들어 연변팀은 밀집방어에 치중하는 한편 역습기회를 노렸으나 늘 어딘가 카드 한장이 모자라는듯한 감을 주었다. 양측 변선을 이용하거나, 득점전야의 센터링까지는 좋았으나 최종 공처리가 완벽하지 못해 수차 득점에 실패했다. 한편 연변팀 문전을 자주 괴롭히던 홍찬팀은 드디어 경기 추가시간의 프리킥 기회를 빌어 임붕선수가 헤딩으로 득점에 성공했고 연변팀은 최종 3분간의 “흑색기록”으로 상대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기결속후에 있은 정기 프리핑에서 연변팀의 이호은 감독은 “마지막 3분을 지켜내지 못해 아쉽다”면서 패전원인을 재차 “상병요소”라고 밝혔다. 12일까지의 갑급순위를 보면 석가장영창이 4승 1패 12점으로 갑급선두를 달리고 있고 연변팀은 1무 4패로 갑급꼴지에 머물러 있다. 오는 19일, 연변팀은 신강천산팀을 불러 들여 올시즌의 첫 홈장경기를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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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3
  • 연변팀 홈장경기 축구팬 전용뻐스 선로 개통
    [동포투데이 김철균]오는 19일,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5라운드 첫 연길홈구장 경기가 펼쳐지게 된다. 이 날이 다가옴에 따라 최근 연길경기장 티켓 종류와 가격이 출범되고 연길경기장으로 통하는 축구팬 전용버스의 노선이 정해졌다.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에 따르면 올시즌 연길경기장의 티켓은 3가지 종류로 분류, 각각 일반 티켓(20원), 세트 티켓(200원)과 주석대 티켓(50원)이며 티켓 종류에 따라 관람석도 부동하게 분류돼 있다. 또한 키가 1.2미터 이하의 어린이(보호자 동반)와 70세 이상 노인(보호자 동반, 신분증 휴대) 및 장애인(장애자증 휴대)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티켓은 경기 1주일전부터 연길시안의 우정편민봉사소거나 경기 당일 경기장 티켓판매처 혹은 임시판매소에서 구매할 수 있다. 임시판매소들로는 시대광장 즉석복권판매소, 서시장 주차장 북쪽문 즉석복권판매소, 연길시공안국 맞은켠 15002호 복권판매소, 주방역소 서쪽 복권판매소 등 곳이다. 세트 티켓은 첫 홈경기 2주일전부터 구락부에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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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2
  • 연변 홈구장 티켓 세트판매 개시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는 4월 7일 오전 9시부터 2014 중국축구 갑급리그 연변경기구 티켓 세트판매를 시작했다. 올해 연변팀 홈구장 티켓 세트의 가격은 200위안으로 앞 순위 200명 구입자에 한해 인민폐로 가치가 70위안에 달하는 축구팬 스카프와 티셔츠를 선물한다. 축구팬들은 티켓 세트 구입시 2촌짜리 탈모 증명사진 한장을 제시해야 한다. 구매지점: 구락부 3층(연변체육국 청사내 위치) 연계전화: 0433-273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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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1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8) "뿌리없는 나무 있을수 없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옛날에 대한 자랑은 아니지만 오늘날 연변팀의 풍격은 그제날 길림성팀에서 형성한 것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킨 것이 틀림없다. 뿌리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이 나는 이 풍격이 민족적 기질에서 왔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이전부터 군인과 축구선수를 몹시 숭배해 온 민족이다. 양자가 모두 정신력과 용감성을 선행하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항일전쟁과 동북해방전쟁에서의 조선인 장병들이 모두 대단히 용감했는가 하면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중국축구 갑급리그에서 뛰던 길림성팀의 선수들도 남달리 용맹했었다.” 이는 일찍 1950년대 길림성축구팀 주력선수로 뛴 적이 있는 황용수 원로가 우리 민족과 조선족 축구를 귀납한 말이다. 1935년 안도현 명월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낸 황용수 원로, 그의 회억에 따르면 일제시대인 소학교시절에는 황용수란 이름은 히라우미 류슈로 고쳐야 했고 체육시간에도 군사식 대열훈련 등을 강요하면서 일절 볼같은 건 차지도 못하게 했으나 조선사람이란 뿌리만은 잊을 수 없어서인지 형한테서 몰래 “가갸거겨”하며 조선글을 배웠고 또한 또래들끼리 팀을 만들어 공차기를 했다는 그의 동년이었다. 그후 광복이 되자 시름놓고 뽈을 찰 수 있었던 황용수 원로는 소속학교팀 일원으로 제2회 연변축구운동대회를 포함한 많은 명목의 축구경기에 출전, 1955년에는 제1대 중국국가팀 선수였던 김용호 감독의 눈에 들어 그가 이끄는 국가임업팀 선수로 뽑혔는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당시 그 팀의 선수 100%가 조선족으로 구성됐다는 그 점이었다. 1958년 국가임업팀이 해산되자 황용수 선생은 다시 조선족들로 무어진 연변팀을 거쳐 길림성팀에 입선, 거기에서 수년간 뛰다가 다시 1961년에 고향의 부름을 받고 안도현 체육운동학교로 와서 축구지도직을 맡게 됐다. 축구지도교원으로 있으면서 황용수 원로는 늘 제자들한테 “나는 뾰족한 기술도 풍부한 경험도 없다. 나는 다만 풍격과 정신력을 팀에 주입할 것이다”라고 강조, 또한 남자라면 한번쯤 군인이나 축구선수로 돼봐야 더욱 사나이다와진다면서 말 그대로 매 선수들로 하여금 꺾어질지언정 휘어들지 않는 정신력을 키우게 했다. 결과 황용수 원로는 안도라는 그 협소한 지역 내에서도 국가청년팀에 간 유명복을 포함한 김영수, 임춘권, 구재익, 김은성, 이태관, 최락현 등 20여명의 프로선수를 배출, 그 것은 곧바로 정신력 선행을 주축으로 한 축구사상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편 황용수 원로는 오늘날 연변팀의 생존을 무던히도 관심하는 축구원로 중의 한분이었다. “뿌리없는 나무는 인차 넘어진다는 말과 같이 나는 연변팀이 어떤 기전술을 도입하든 정신력 선행의 전통풍격을 잃는 날이자 중국축구무대에서 곤두박질하는 날이라고 본다. 전통풍격이란 민족적 근성을 떠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또한 유일한 소수민족팀인 연변팀의 존재는 아직도 조선족이 우수한 민족이란 걸 말해주며 연변팀의 퇴화는 곧바로 전반 민족의 퇴화를 말해주는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현재 황용수 원로는 여전히 연길시 원로축구팀의 일원으로 자주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군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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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연변을 사랑한 졸라, 아들을 연길학교에 다니게 해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길 북산소학교에 가면 흑인어린이 한명이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흑진주”처럼 생긴 그 애가 바로 당년에 연변오동팀 전포를 입고 중국축구 갑A무대를 주름잡던 졸라의 아들 올해 13살에 나는 앨리아이다. 앨리아가 태어난 곳은 중경이다. 중경과 연길, 연길과 중경ㅡ 생활환경이나 공부환경 모두가 연길은 중경과는 비길 바도 못된다. 하지만 졸라는 사랑하는 아들을 연길에서 공부하게 하고 있다. “산간오지”에 속한다는 연변이지만 그는 연변이 좋았고 연변사람들한테 정이 들었기 때문에 아들애가 8살 때인 2009년에 연길시 북산소학교에 전학시키기에까지 이르렀다. 앨리아는 공부를 잘한다. 특히 그는 시간집중이 좋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반급규율도 잘 지킨다. 그리고 앨리아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유창할뿐만 아니라 중국어구사도 중국애에 못하지 않다. 그 외 앨리아는 천성적으로 아빠를 닮아서인지 축구를 잘한다. 앨리아와 한 반급에 다니는 오진우 학생은 “앨리아가 어느 팀에 가맹하면 그 팀이 곧 이긴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타 반급애들은 “흑진주” 앨리아가 다니는 반급을 몹시 부러워 할 정도라 했다. 한편 앨리아는 연길생활에 몹시 만족하고 있다. 특히 그는 연변조선족들의 민속음식인 찰떡을 아주 즐겨 먹는다. 그리고 반급에 몇명 안되는 조선족애들과도 무척 친하고 있으며 어느덧 연길이란 이 작은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언젠가는 나의 조국 콩고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나 그 때 가서 그 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가봐 걱정돼요.” 어찌보면 이는 앨리아의 진실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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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7
  • 0 : 2 연변팀 원정징크스에 허우적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6일, 칭다오시 국신체육장에서 펼쳐진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4라운드에서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칭다오해우팀에 0 : 2로 완패, 시즌 초반의 원정 1승이 점점 묘연해가고만 있다. 경기초반 쌍방은 비교적 대등한 경기양상으로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을 선보이는 듯 싶었다. 전반 전 연변팀 선수가 날린 헤딩슈팅이 상대방 문대위로 날아 지나는 장면도 있었고 14분경에는 상대방의 강슈팅을 골키퍼 윤광이 잽싸게 막아내기도 했다. 전반 전 종료까지 연변팀은 0 : 0으로 상대방과 손잡았다. 액운은 후반에 있었다. 후반 들어 칭다오해우팀은 선후로 선수를 교체멤버시키면서 전술도 조절, 압도하는 기세로 연변팀을 몰아붙였다. 이에 연변팀은 진영이 흩어지면서 패스연결이 매끄럽지 못했고 실수도 난발, 결국 후반 35분경에 한골을 허락하고 2분 뒤 재차 실점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연변팀은 공격다운 공격을 조직해보지 못하고 0 : 2란 결과로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오는 12일, 연변팀은 역시 원정에서 심수홍찬팀과 갑급 제5라운드 경기를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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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6
  • 올 갑급리그 펼쳐지게 될 연길경기장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사진은 오는 12일부터 올시즌 갑급리그가 치러지게 될 연길경기장 외경이다. 연길경기장은 장백산 서로 북쪽과 연천거리 서쪽에 위치, 총 투자액이 2.2억위안이고 부지면적이 6.6만㎡이며 건설면적이 29739.71㎡로 다기능의 중형 조명체육장이다. 경기장 설계표준은 을급이며 3만개의 관중석으로 전국성적인 단항목 경기와 지구성 종합운동회를 개최할 수 있다. 이 경기장은 2014년부터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의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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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6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 (7) “골키퍼는 절반 축구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1.82미터 되는 훤칠한 키, 일찍 복싱에 유능하였다는 투박하고 큰 손과 허리보다 더 긴 두 다리…이는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축구 1부리그인 갑급축구무대에서 우승보좌에 오를 당시 골키퍼로 소문났던 박장수 건장의 생전모습이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골키퍼가 절반 축구팀이란 말은 여전하다. 그만큼 골키퍼 위치가 중요했다는 얘기다. 골키퍼로 되자면 우선 고생스러운 것과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장시기의 목표를 내걸고 자신심을 키워야 한다.” 여느 축구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박장수 원로 역시 어릴 적부터 운동을 즐겼었다. 그는 축구, 롱구, 배구, 핸드볼, 복싱 등 운동을 닥치는대로 했다. 그중 그래도 가장 장끼가 있는 종목이라면 복싱과 핸드볼이었다. 1959년 그가 연길에 와서 어느 한 핸드볼경기에 참가했을 때 그걸 지켜보던 길림성축구팀의 박상복 감독이 그가 보기 드문 골키퍼감이라고 점찍었다. 그 때는 조직의 배치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때였다. 하여 그 때까지만도 꼴키퍼에 대해 그닥 흥미가 없었던 박장수였건만 조직의 배치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점 즉 영으로부터 축구 골키퍼의 생애를 시작했지만 열심히 훈련했다. 그의 말마따나 앞의 선수들은 경기 때 힘들고 골키퍼는 훈련이 힘들다는 말이 맞는듯 싶었다. 달빛아래에서의 개별훈련과 유명한 국가팀 골키퍼인 장진수밑에서의 고강도훈련, 워낙 운동을 즐겼었고 또한 핸드볼선수였던지라 그의 꼴키퍼 재능은 재빨리 제고되었다. 박장수는 무서움을 모르는 선수였다. 1962년에 있은 한차례의 경기 때 그는 상대방 선수와의 충돌에서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40여분간이나 쇼크상태에서 헤맸었다. 당시 많은 축구팬들은 그의 건강과 길림성팀의 수비선 때문에 몹시 걱정을 했다. 하지만 상한지 6일만에 경기장에 재출전, 독종이란 별명까지 붙게 됐다. 이렇듯 이악스럽게 달라붙은 결과 길림성팀은 오래동안 공격선이 강하고 수비선이 약하던 국면을 돌려세우게 됐다. 특히 1965년 을급팀에서 갓 올라온 길림성팀이 전국축구갑급리그에 참가했을 때 박장수는 비범한 실력을 과시, 그가 4 – 5미터씩 날아 오르며 공에 덮친다 하면 호랑이를 방불케 했고 아무리 출중한 상대방의 스트라이커라 해도 하도 기세가 당당한 길림성팀의 골키퍼앞에서 주눅이 들어 슈팅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다. 길림성팀이 우승하던 그해에 박장수는 실점골 8개밖에 허락하지 않아 전국축구계가 놀라게 했으며 동경춘, 정지승, 당봉상, 정종섭 등과 함께 건장칭호를 수여받게 됐다. 그 뒤 문화혁명 등 사연으로 골키퍼 생애를 마쳤고 후비력양성도 별반 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기층에 뿌리박고 많은 사업을 하면서 연변축구 특히는 지난 세기 90연대의 원 오동팀축구에 관심을 보이군 했다. 당시 원 오동팀에서 자체 골키퍼를 제대로 양성해 내지 못한 원인에 대해 박장수 원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50연대와 1960연대에 비해 애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때의 길림성팀은 전국 4강중의 하나였지만 이 몇년래의 오동팀은 한해 건너 갑A보존 때문에 전전긍긍한 팀이라 시름놓고 자체의 골키퍼를 단련시킬 겨를이 없다. 골키퍼 양성이란 힘든 노릇이다. 합격된 골키퍼로 되자면 판단, 반응, 의식 등이 빨라야 할뿐더러 항상 타박상을 입을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경기시간의 수십배에 해당되는 훈련이 타선수들에 비해 곱절 힘들며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5-6년의 세월을 잡아먹기에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골키퍼 양성에 있어서의 박장수 원로의 주장 역시 명확했다. “우선 소학교부터 목적성 있게 골키퍼양성에 모를 박고 알심들여 훈련시키는 한편 각종 경기에 자주 참전시켜 경기경험을 쌓게 해야 하며 조급성으로 나타나는 단기행위를 극복해야 한다.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는 훈련시 지도의 훈련방법이 100%가 정확할 수는 없기에 부단히 자아 특점에 맞는 훈련방법과 훈련기술을 개발하기에 노력해야 하며 경기시에는 강한 기질을 보이는 것으로 상대방한테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그외에도 경기장에서의 골키퍼의 임전지휘 능력, 경우에 따르는 출격 또는 문전고수, 페널티킥을 당했을 때 상대방에서 슈팅하는 선수에 대한 심리파악 등은 모두 그 개성과 참고적 가치가 있었다. 평소에 박장수 원로는 후에 죽은 뒤에도 연변축구가 전국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박원로는 몇해전 지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하다면 저 멀리 하늘 나라에서 박장수 원로가 현재의 연변팀 축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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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시리즈(6) 새중국과 더부러 살아온 축구인
    ●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우리 연변에 일찍 새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전업축구선수 생애를 시작한 축구원로 한분이 계신적이 있다. 성함은 이봉춘, 몇년전에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새중국의 축구역사가 바로 이분들에 의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봉춘 원로가 태어나던 시기만 해도 “9.18”사변이 발발되기 직전이라 많은 조선의 애국자들은 간도땅을 발판으로 여러 명목의 반일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었다. 그중 축구운동은 축구라는 스포츠종목을 빌어 반일고조를 일으키던 형식이라 가장 보편적이고도 활발하게 진행된 종목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소년 이봉춘도 일찍 7살 때부터 축구와 접촉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연고로 축구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됐으며 1981년 정령퇴직할 때까지 장장 반세기 동안이나 축구공과 씨름하게 됐다. 1949년 축구동인 최증석, 김용호, 김호주 등과 함께 동북축구팀에 입선. 1951년 동북축구팀 일원으로 천진에서 진행된 전국축구경기대회에서 우승 쟁취. 1952년 최증석, 김용호, 김병구 등과 함께 중국국가올림픽팀에 입선. 1957년 국가팀에서 퇴역한 뒤 1975년까지 선후로 국가야금부, 국가공안부와 북경시청년축구팀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김지양, 왕준생 등 200여명의 국내의 축구유명인재를 양성.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연변1중의 체육교원으로 사업…이봉춘원로의 프로필은 비교적 간단했다. 뿐만 아니라 건장칭호는 물론 그 무슨 직함도 받지 못하고 퇴직한 이봉춘 원로이다. 그도 그럴것이 1957년 국가팀에서 퇴역할 때는 중국내의 건장칭호제가 실행되기 전이었고 그뒤 1981년까지는 또한 중국국내의 축구감독의 직함평의제도가 실행되기 전이라 어찌보면 이봉춘 원로는 아주 재수없는 축구인, 어찌보면 바친 대가보다 얻은 것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인생이기도 했다. 일찍 1942년에 부인 최유송녀사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언제 한번 부인과 자식한테 잘해주지 못했던 이봉춘 원로, 그 아픔에 늘 가슴이 짜릿했으련만 한편 사망되기 몇해전까지만 해도 축구장의 격렬한 분위기에 말려들어 가군 하는 이봉춘 원로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전, 꼴 넣은후의 쾌감, 환호하는 관중석, 그래서 남자라면 한번은 축구선수로 돼봐야 한다고 늘 외우던 이봉춘 원로었다. 그리고 지난 세기 90연대말 중국축구무대의 “오동현상(용감무쌍하고 굴할줄 모르는 풍격)”에 대해 이봉춘 원로는 “오동현상”이란 말만 90연대에 나왔을 따름이지 그런 현상은 옛날부터 있었다고 고집했었다. 이봉춘 원로의 추억에 따르면 옛날에도 팀에 조선족선수 2 - 3명만 끼우면 팀풍격이 달라지는 건 물론 다른 팀들에서 모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다면 우리 조선족은 천성적으로 축구재질을 타고난 민족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봉춘 원로는 갔다. 하지만 우리한테 남겨놓은 조선족축구인들의 문화유산은 많다. 하다면 현재 살아있는 우리 세대가 이런 노일대들의 업적을 기리며 역사만은 기록해야 할 것이 아닐가?
    • 스포츠
    2014-03-31
  • 2014 갑급리그 제3라운드 연변팀 순위표
    갑급리그 연변팀 순위표(3월 30일까지) 갑급성적 제3라운드 석가장영창 2 : 3 중경역범 무한줘르 1 : 0 하북중기 광동일지천 0 : 1 신강천산 청도중능 1 : 1 심양중택 북경팔희 1 : 0 천진송강 호남상도 4 : 1 북경이공 성도천성 2 : 1 연변천양천 심수홍찬 0 : 0 청도해우 갑급대결 제4라운드(4월 5-6일) 북경이공 : 북경팔희 청도중능 : 무한줘르 광동일지천 : 심양중택 하북중기 : 호남상도 천진송강 : 석가장영창 청도해우 : 연변천양천 중경역범 : 성도천성 심수홍찬 : 신강천성
    • 스포츠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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