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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조선족축구원로시리즈(3) 벅차던 축구선수의 나날에
    [동포투데이 연변 리포터 김철균] “축구란 체능, 기술과 정신력을 토대로 하는 종합스포츠이다. 또한 하나의 축구팀한테 있어서 총체적 배합도 중요하겠지만 속도가 빠르고 돌파능력이 강하며 슈팅성공율이 높은 스트라이커를 육성해 내는 것도 자못 중요한 고리이다.” 이는 지난 50-60년대 중국축구무대에서 “제비”라 소문놨던 길림성축구팀 동경춘 원로의 축구운동에 대한 일가견이다. 1937년 왕청현 쌍하촌 태생인 동경춘은 체력이 왕성하고 한번 뛴다고 하면 군마를 탄 일본헌병마저도 붙잡지 못했다고 하는 할아버지 (동경춘 원로의 할아버지가 뛴다고 하면 한번에 밭고랑 세고랑씩 건너 뛰었다는 설도 있었음)를 닮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축구, 농구, 스피드 스케이팅, 육상 등 체육운동을 몹시 즐겼는데 그 중 제일 큰 장끼는 그래도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그의 속도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늘 어머니의 심씨와 동네 어른들의 총애를 받음과 더불어 자주 어른들이 치르는 축구경기에도 선수로 뽑히군 했다. 동경춘의 속도는 1952년 길림시에서 있은 전 성 중학교육상경기대회에서 재능이 과시됐다. 100미터를 11초 06(후에 11초 03이 절정이었음)에 달렸다. 그리고 만메터경주에서도 5등을 하여 내력이 강함도 보여줬다. 동경춘의 이런 장끼는 선후로 있은 성, 주와 국가급 축구경기에서는 물론 1957년 길림성 축구팀에 가입해서부터 더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 동경춘은 키가 고작 1.65미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그가 공을 몰고 달린다 하면 상대방 선수들은 따를 수가 없어 혀를 내두르기가 일쑤였고 경기장 아나운서도 늘 길림성팀의 키가 작고 고수머리인 동경춘에 대해 일장소개를 늘어놓군 했다. 그래서인가. 허느 한번 길림성팀이 경기를 관람하고 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었던 하룡원수는 동경춘한테 “모터찌클”이란 별호를 달아주었으며 당시의 축구팬들 또한 그를 길림성팀의 “제비”라고 정답게 불러주군 했다. 동경춘이 이렇게 불이우게 된데는 물론 천성적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속도장끼”가 작용한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 훈련양을 견지하고 소화해 낸 그 정신력의 결실이라고 함이 더 지당할 것 같다. 당시 길림성팀의 많은 선수들은 매일 3 - 4시간씩 되는 집단훈련외에도 늘 시간을 이용하여 산길달리기를 견지, 그야말로 흐르는 땀이 염분으로 되어 몸에 하얗게 내돋기가 일쑤였다. 하긴 그 시기엔 누구 하나 돈을 보고 고생을 사서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당과 인민이 선수로 되게 한 영예와 집에서 고생하는 아내 때문에 모두가 하나같이 경기에서 정신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고로 동경춘은 해마다 체능시험 때면 1등으로 뽑히워 인민일보, 해방군보, 광명일보 등 많은 보도매체들에서도 앞다투어 그의 사적을 대서특필하군 했다. 1965년은 동경춘의 축구생애에 있어서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그 해에 길림성팀이 전국우승을 한 것과 더불어 그는 건장칭호를 받았고 간염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낙선됐지만 국가팀에서 가장 욕심을 내는 선수로 되기도 했다. 헌데 그가 계속 경기장에서 청춘을 빛낼 무렵 문화대혁명이 터지었다… 문화대혁명 후 동경춘 원로는 길림성 청년팀 감독, 연변 여자축구팀 감독, 연변 체육공작대 기술통계원 등 사업에 종사하면서 후대양성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중엔 당년에 길림 오동팀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김광주, 고종훈, 이광호, 황동춘, 김영수, 장경화 등도 망라됐다. 또한 동경춘 원로 역시 1967년에 국가 고급감독증서를 수여받았고 선후로 “중외 축구명인 사전”, “중국 체육인재 사전”, “중국 전문가 사전” 등 명인록에도 수차 수록됐었다. 한편 동경춘 원로는 선수생애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늘 연변축구에 대해 관심하고 있는 몸이다. “연변팀이 아무리 시골팀이라지만 정신력은 옛날과 변함이 없으며 핵심인 많은 새로운 스타들이 속출돼 우리를 기쁘게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축구무대에서 생존하는 비결이 아닌가 본다.” 그러면서 그는 한개 축구팀이라 할 때 우수한 스트라이커 1 - 2명은 꼭 있어야 하는바 연변팀도 이런 기둥선수양성에 보다 진력했으면 하는 마음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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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1
  • 2014년 중국축구갑급리그순위표 (제 1 륜)
    2014년 중국축구갑급리그순위표 (제 1 륜) 갑급성적 제1륜(3월 15-16일) 청도해우 1 : 1 성도성천 광동일지천 2 : 2 하북중기 북경리공 0 : 1 심양중택 석가장영창 1 : 0 심수홍찬 청도중능 1 : 1 신강천산 중경력범 1 : 2 호남상도 무한줘르 1 : 2 천진송강 북경팔희 0 : 0 연변천양천 갑급대결 제2륜(3월 22-23일) 청도해우 : 신강천산 심수홍찬 : 성도천성 석가장영창 : 연변천양천 중경력범 : 북경팔희 호남상도 : 천진송강 북경리공 : 무한줘르 하북중기 : 심양중택 광동일지천 : 청도중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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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7
  • 연변 장백산천양천팀, 올 시즌 첫 원정서 0 : 0 무승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올시즌 첫 상대로 원정에서 베이징파시(八喜)팀과 접전, 90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0 : 0으로 상대방과 손잡았다. 그날 연변팀 이호은 감독은 새로운 4231포메이션을 구성, 경기 초반부터 상대방을 밀어 붙이면서 압박형 축구를 운영했다. 상대방은 연변팀의 공격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경기 10분부터 외적용병을 앞세우고 경기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드센 연변팀의 플레이에 갈팡질팡했다. 연변팀은 공격축구로 내용은 화려했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전반전에 연변팀은 페널티킥 기회가 있어 한국용병 김도형이 키커로 나섰으나 그가 실축하는 바람이 절호의 득점기회를 날려보냈다. 후반 들어 연변팀은 여전히 공격축구로 화려한 경기장면을 연출했다. 공방이 짜임새가 있었고 선수들의 플레이도 화려했다. 야간경기에 약하다는 연변팀이었건만 그 것이 더는 연변팀의 약점이 아니었다. 연변팀은 경기내내 상대방을 밀어붙이면서 상대방의 문전을 파고 들었으나 그냥 그 화려한 내용에 그쳤을 뿐 마지막 처리가 미비했으며 끝내 득점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 공처리에 들어 득점까지 끌고가지 못하는 것이 올들어 연변팀이 해결사항으로 보여지는 올 시즌의 첫 대결이었다. 오는 23일, 연변팀은 역시 원정에서 스쟈좡융창(石家庄永昌)팀과 대결하게 된다. 동포투데이 연변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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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1) 끈끈한 추구 후회없는 인생
    ●김철균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이 무패기록으로 조별경기에서 출선돼 16강에 들자 당시 중국 CCTV의 이른바 “축구평논가”들은 한국팀이 “안방”이란 우세로 심판의 덕을 보아 16강에 들었다고 비하하기 시작, 특히 한국축구대표팀이 8강을 거쳐 4강신화를 이룩하자 중국 CCTV의 “한국폄하” 론평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러자 중국 연변의 조선족 축구노장었던 이광수옹은 장거리 전화로 중국 CCTV방송국의 축구프로리포터 유건홍(刘健弘)과 설전을 벌였다. “나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인이고 또 중국축구를 사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턱대고 한국축구대표팀을 비하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한국이 심판의 덕을 보고 있다고 하는 건가?!” “중국축구가 아시아와 세계에서 꼴기 없이 무너지는 우리 중국축구의 자체 문제이다. 반드시 우리가 반성해 봐야 한다. 남을 폄하하기보다 우선 자신한테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중국축구인들의 자세이다.” 유건홍씨와 전화로 싱갱질을 벌이던 중 화가 난 이광수옹는 갑자기 전화수화기를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이 발생했던 것이었다. 1930년 이광수옹이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의 물리거우(지금의 조양천진 덕신촌)라는 산골이었다. 때는 한창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기 전해라 용정과 연길을 포함한 간도 각지에서 반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었다. 한편 당시 진보사상을 갖고 있는 간도의 조선인들은 서방의 선진사물을 대량적으로 흡수하기도 했다. 그속에는 축구, 야구와 핑퐁(탁구)을 비롯한 체육종목도 망라돼 있었다. 목적은 선진적인 체육활동으로 민족의 신체소질을 증장시키는 한편 약소민족한테 계몽사상을 취입시키자는데 있었다. 바로 이런 급변기에 태여난 이광수였기에 어릴적부터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흡수능력을 키웠던 것이다. 특히 이광수의 모친 안일심 여사는 인근에 소문난 그네뛰기, 널뛰기 및 달리기 능수라 어린 이광수는 모친의 영향을 각별히 많이 받기도 했다. 그 뒤 1937년 허진네 형제라고 부르는 두 선생이 물리거우에 와서 서당을 차리자 8살에 나는 이광수는 제일 선참으로 서당에 다니게 됐다. 그때 서당에 다니는 학도들로는 대부분 12살, 15살씩 되는 이들이고 8살짜리는 이광수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 영리하고 약삭 빠른 소년이었다. 또한 그 때인즉 조선청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1년 뒤라 그 소식이 한동안 전반 동만을 휩쓸었으며 어린 이광수의 가슴에도 어느덧 꼭 이름난 체육인이 되리라는 불씨가 심어지게 됐다. 그때로부터 이광수는 체육에 대한 그 어떤 이념같은 것을 갖고 거기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하긴 그때까지도 그는 자기가 스포츠의 어느 종목을 전공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없었고 또 손잡고 이끌어주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용정이나 조양천에 가서 운동대회 구경을 하고는 제법 그대로 하느라 흉내를 내군 했는데 거기에는 축구뿐아니라 핑퐁, 스케이트, 야구, 테니스 등 별의별 종목이 다 있었다. 하긴 당시 모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그는 곧잘 머리를 쓰군 했다. 그 사례로 축구공이 없으면 헝겊공을 만들어 차기도 했고 장소가 없으면 감자를 파낸 밭이나 강변의 백사장을 택하군 했으며 일본인들이 쓰던 밥주걱으로 탁구채를 대신해 “핑퐁게임”을 할 때도 많았다. 1945년 1월, 가정에서는 연길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이광수의 요구대로 연길로 이주했고 그는 연길에 잇는 간도국민고등학교(연길시 2중 전신)에 입학하게 됐다. 그뒤 얼마 안되여 드디어 “8.15” 광복이 됐다. 이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방황하던 수많은 조선인청년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 줬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맘껏 우리 글도 배우고 지겨운 군사훈련 대신 체육기량도 닦을 수 있게 됐다. 광복은 이광수한테도 무궁무진한 희망을 주었다. 이광수는 욕심이 크기도 했다. 그는 글공부에서뿐만 아니라 체육운동인 축구, 스케이트, 농구와 야구 등 종목에서도 남다른 장끼를 보여줬다. 헌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반급의 반장과 체육위원까지 겸직하고 교정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인 1947년 중국국내의 내전이 터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동북에 진주하더니 오래지 않아 길림성의 교하현까지 점령했고 미구하여 하발령을 넘어 연변으로 쳐들어 온다고까지 했다. 연변의 청년들은 고향지키기에 나섰다. 거기에는 어린 이광수도 포함됐다. 하발령저격전 당시 이광수는 기타 청년들과 함께 포탄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탄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고 포연자욱이 얼굴을 스치던 그 나날 이광수는 민주연군전사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피를 흘렸고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기 자신도 고향을 지키는 성스러운 싸움에 뛰여들고 싶다는 충동도 몇번이고 받았다. 국민당군대의 진격은 영용한 민주연군에 의해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됐고 나중엔 전선의 상황도 점차 호전을 가져왔다. 그러자 상급에서는 전선원호에 투입됐던 나어린 학생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학업을 계속 하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광수는 당시 연변의 소학교들에 교원이 적은 상황에 의해 조직의 배치대로 연길시 하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헌데 그때까지만도 그는 교원사업이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자기의 지식수준이 짧음을 감안한 그는 재차 떼를 써서는 연변고중에 입학하여 학업에 달라붙었다. 헌데 운명은 청년 이광수한테서 배움의 권리마저 앗아갔다. 당시 반도남북의 정세가 긴장해 남북간의 “38선충돌”이 잦더니 드디여 1950년 6월 26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전쟁초기 전선은 조선인민군한테 유리했다. 인민군은 전쟁개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수원남측의 오산에서는 미군 스미스대위가 이끄는 부대와 첫 접전, 미군부대를 가볍게 격파하고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7월말경에 이르러 한국의 90% 이상의 땅과 인구를 해방시켰다. 그러다가 9월에 이르러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정세는 조선북측에 몹시 불리하게 급변했다. 유엔군은 10월 19일 조선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뒤이어 압록강변까지 들이닥쳤다. 정세는 건국 1년밖에 안되는 중국땅에도 위협이 큰 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원군이 파병됐고 이광수가 다니는 연변고중에도 전시동원령이 내렸다. “지금 미제에 의해 조선이 불바다로 되고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청년들, 조국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불속에 잠긴 조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학생들은 분분히 참군에 탄원했다. 그러자 학교 청년단총지 위원이며 중점당원 양성대상자인데다 신체까지 건강한 이광수는 대뜸 선발되어 지원군 모사의 통역원으로 배치받게 됐다. 이광수가 소속된 부대는 원 중국인민해방군 왕패부대인 38군이었다. 그 부대는 그해 10월 19일 압록강을 도강한 후 며칠뒤인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에 첫 총포를 쏜 부대었다. 그것을 계기로 부대는 청천강에서 대동강으로, 대동강에서 다시 38선까지 진격하며 많은 큰 전역을 치를 때마다 항상 전선의 선두부대로 참전했다. 이렇게 부대를 따라 남진하면서 이광수는 부대에서 맡겨준 통역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을뿐만 아니라 풍부한 전투경험도 쌓았으며 오매에도 갈망하던 중국공산당 당원의 일원으로 비준받기도 했다. 1953년 5월, 정전을 얼마 앞두고 지원군 총정치부에서는 이광수한테 전근령을 내렸다. 그가 전근통지서를 갖고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이가 바로 그제날 그의 축구지도였던 임근원 선생이었다. “광수야, 이 3 - 4년간 어디서 뭘했어? 난 널 죽도록 찾아다녔지 뭐겠어. 지원군 축구팀이 금방 섰는데 잔말 말고 이제부턴 뽈이나 열심히 차라.” 이광수는 실로 오래간만에 축구장에 다시 나서게 됐다. 이전에 스포츠로 잔뼈를 굳힌데다 전쟁의 세례까지 받은터라 이광수는 대뜸 축구팀의 주력으로 뛰게 됐다. 당시 지원군축구팀은 국내의 여러 경기뿐 아니라 조선인민군 축구팀과도 자주 친선경기를 치르군 했다. 경기에서 이광수의 째임새가 강한 공방조직, 정확한 패스와 출중한 드리블기술 등은 늘 상대방 축구감독의 호기심을 자아내군 했다. 후에 조선인민군 축구팀에서는 리광수가 조선족임을 알자 공개적으로 끄당기기 시작했다. “광수동무가 우리 팀으로 오고 싶다고만 하면 조직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소. 그러니 아무 때건 생각나면 우리를 찾소.” 조선족으로서 조선을 대표하여 뽈을 찬다는 것 역시 보람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광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는 중공당원입니다. 당기앞에서 한 맹세를 저벌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이런 권고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듯 이광수는 입장이 견정했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잘 아는 청년이었다. 1954년 지원군축구팀이 해산됐다. 그러자 이광수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해방군 8.1축구팀에서 초청하는 것도 마다하고 공부를 더 할 일념을 안고 연변으로 달려왔다. 헌데 이럴 변이라고야. 그가 연변3중에 붙어 얼마 안되어 원 만주국축구팀 선수였으며 당시 길림성 축구팀의 감독이던 박노석 선생이 어떻게나 지청구를 들이대는지 이광수 역시 거절끝에 어쩔 수 없이 길림성축구팀 전포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길림성 축구팀에는 이광수란 새로운 미드필더진 선수가 나타나 경기장을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특히 그가 지청용, 손중천 등 선수들과 발을 맞춰 진공을 조직한다 치면 상대방은 늘 진영이 흐트러지고 갈팡질팡하기가 일쑤였다. 길림성 축구팀은 창립된 1957년부터 1960년 사이 전국갑급리그에서 두번 4등 하고 두번 5등 하는 전과를 올리었으며 이광수는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었던 화룡원수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의 중형탱크”란 별호까지 얻게 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길림성 축구팀은 신노교체를 한데다 다른 여러가지 원인으로 우려곡절을 많이 겪었으며 특히 1963년에는 을급리그로 강급하는 불운까지 지녔다. 그때 이광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선수복을 벗은 뒤었다. 하지만 길림성팀의 불행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이광수는 재차 경기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한편 당시 팀 감독이었던 박만복 선생을 협조하여 훈련 및 경기 방안을 짜는 등 여러 가지 알심을 들이군 했다. 그런 보람이라고 할가? 1964년 을급리그 2위로 갑급에 진격한 길림성 축구팀은 1965년 전국축구 갑급리그에서 우승보좌에 앉는 빛나는 한페이지를 엮게 됐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터지자 이광수 역시 “파쑈감독”, “외국간첩”이란 모자를 쓰고 투쟁받다가 훈춘현 영안향의 한 농촌으로 쫓겨가게 됐다. 이렇게 쫓겨가 감독과 제재를 받는 몸이었지만 당시 농민들은 축구건장인 이광수를 아주 높게 우러러 보면서 운동대회 때마다 그를 선두에 내세우군 했다. 당시 그들 부부(부인 최혜숙 여사는 유명한 배구선수로서 중국에서 제일 첫진으로 배구건장칭호를 수여 받았음)가 경기장에 나서기만 하면 전반 경기장이 떠나 가도록 소문을 놓군 했다. 그러던 이광수 선생이 다시 중용을 받아 연변대학에 발을 붙힌 것은 1975년,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고 있지 못한 이광수 선생이었건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은 그이로 하여금 맡은 바 대학교수 과제를 넘쳐 수행하게 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2년 정령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역임하면서 양성해낸 제자들로는 허준호, 방인권, 이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 그들 모두가 연변대학, 연변축구팀 및 각 분야에서 한 몫을 크게 담당하고 있다. 에필로그 사람은 누구나 과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과거가 없을 지경으로 과거에 대해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그 과거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광수옹은 나라의 수요 때문에 대학공부마저 포기한 인간이다. 후에 그는 직함평의 때 그 학력 때문에 많은 저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광수옹은 과거에 대해 할 얘기와 자랑거리가 많다. 도시락을 싸들고 사흘동안 들어도 다 듣지 못할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담, 거기에는 사람의 자세를 바로 잡아줄만한 철리가 그렇게도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광수옹의 인생담을 들을 수가 없다. 이광수옹이 이 세상과 작별한지도 어언간 12년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감출 수가 없다.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큰 별이었던 이광수옹 ㅡ 부디 하늘 나라에서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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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중국 조선족 박성 국가팀 발탁은 시간문제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얼마 전에 있은 2014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제2차 경기 베이징 - 서울전에서 “최우수 선수상(MVP)”을 받은 중국 베이징 궈안 팀의 조선족 선수 박성에 대해 요즘 중국 축구계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저명한 축구평논가인 바오야위(博亚雨- 박아우)는 “이대로라면 박성의 국가팀 발탁은 시간문제”고 극찬했다. 북경스포츠 중계방송 해설자는 한국국가팀 선수들이 운집한 서울과의 중원싸움에서 여유있게 공방을 조절하는 박성과 하대성의 현란한 배합을 수차 찬사, 박성을 국가팀에 추천했다. 경기 후 서울감독 최룡수도 북경팀의 가장 인상깊은 선수로 장시저(张希铁- 장희철)과 박성(39번)을 꼽았다. 국내의 스포츠전문지 “체단주보(体坛周报)”는 박성과 하대성이 중원에서 치륜 돌아가듯 손발이 맞았다며 국안의 중원 쌍벽은 이날 경기의 제일 볼거리었다고 평했다. 현재 베이징 궈안에서는 박성과 한국용병 하대성의 조합을 “성성(成成)조합”이라 하면서 높이 평가하고있다.
    • 스포츠
    2014-03-16
  • 이장수 칭다오서 중국 갑급리그 관전
    [동포투데이 연변 리포터 김철균] 15일, 한국의 “마귀감독” 이장수가 칭다오에서 중국 갑급리그 개막전인 칭다오 해우팀과 청두텐청팀(成都天诚)의 경기를 관람, 경기장 분위기를 돋구었다. 한국 축구계의 “중국통(中国通)”으로 불리우는 이장수 감독의 청도행, 그가 칭다오 해우팀의 사령탑을 잡게 될가? 10여년 전에도 칭다오 이중팀의 감독직을 맡아 중국 슈퍼리그우승을 이끌었던 그가 칭다오 해우팀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 스포츠
    2014-03-16
  • 2014년 갑급리그 연변장백산천양천 경기 일정표
    올해부터 연변축구팀은 장백산천양천팀으로 관명하며 갑급리그에 출전하게 된다. 연변일보에 따르면 일전 길림삼공집단과 연변구단은 합작협의를 체결,향후 4년간 이 집단에서 연변구단을 후원하기로 했으며 연변축구팀의 명칭도 연변장백산천양천팀으로 개칭하기로 했다.천양천음료제품유한회사는 길림삼공집단산하의 기업으로서 2011년에 일떠섰으며 중국에서 대형생태음료제품기업가운데 하나이다. 최근년에 이 기업에서 생산한 천양천표 천연약수는 선후로 “중국명표”,“중국명상표”,“중화인민공화국 지리표지보호제품”,“중국최고시장경쟁력구비브랜드”로 명명받은바 있다. 올해 연변팀은 갑급리그에 출전할 때 유니폼 앞뒤에 “장백산천양천”과 “길림삼공”이라는 글을 새기고 나서게 된다.
    • 스포츠
    2014-03-14
  • 연변축구 올시즌 어떻게 준비했을까
    [동포투데이=스포츠] 3월 16일 연변장백산천양천팀은 북경조양체육센터에서 북경팔희팀과 2014시즌 중국축구갑급리그 첫경기를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연변팀은 준비됐을까? 연변TV뉴스에 따르면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연변팀에서는 가장 빠른 시간내에 연변본토의 선수들이 고향에 돌아와 고향축구를 위해 뛰게하는것을 중요한 사업목표로 내세웠다.여러 면의 노력을 통해 귀주지성팀의 강홍권선수, 강선련성팀의 고만국선수, 호남상도팀의 한광화선수가 고향팀으로 복귀했다. 이밖에 북경리공팀에서 활약하던 리훈선수, 귀주지성팀의 진효선수, 국가청년팀에 선발되였던 왕맹선수, 하남성의 류순선수도 연변팀에 합류하여 연변팀의 실력을 확충했다.이밖에 올시즌 연변팀에 합류한 한국선수들의 활약도 기대된다. 김기수선수가 연변팀과 재계약을 마쳤고 원태연선수와 김도형선수도 연변팀에 가입했다.김기수선수가 이미 광범한 연변 축구팬들의 인정을 받은 반면 나이가 어리고 경기경험이 부족한원태연선수와 김도형선수는 아직 축구팬들의 질의를 받고있는 정황에서 리호은감독은 축구팬들이 경기에서 이 선수들에게 격려를 보내주기를 당부했다.올시즌 연변장백산축구구락구에서는 새로운 한기 감독진에 다음과 같은 임무를 주었다. 갑급리그에서 중류수준을 유지하고 연변축구 가지속발전의 장원한 목표를 실현하는것이다. 중류수준이란 순위 8위안에 드는 전제하에서 4강을 목표로 하는것이다 한편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서 알아본데 따르면 올해 연변장백호랑이축구팀의 명칭에 변화가 생기는데 구락부에서는 ‘연변장백산천양천축구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축구갑급리그를 뛰게 된다고 밝혔다.일전, 길림삼공집단과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에서는 합작협의를 달성했는데 협의에 따르면 삼공집단에서 앞으로 4년동안 장백산구락부에 협찬하고 축구팀의 명명권을 가지게 된다. 중국축구협회에서 공개한 올시즌 중국축구갑급리그 경기일정표를 보면 연변장백호랑이팀은 이미 ‘연변장백산천양천팀’으로 명칭이 바뀌였다.천양천음료수유한회사는 길림삼공집단산하의 자회사로서 2001년에 설립된 중국의 대형 생태음료수형 기업이다. 그 수원지인 ‘천양천’, ‘협곡천’과 ‘세희천’은 유엔 국제 사람과 생물권 장백산자연보호구 원시삼림에 피복되여있으며 국제음료수조직으로부터 ‘중국. 장백산광천수 가지속발전시범구’로 인정받고있다.근년래 천양천표 천연광천수는 선후로 ‘중국명표’, ‘중국유명상표’, ‘중화인민공화국 지리표지보호제품’, ‘중국에서 시장경쟁력이 제일 강한 브랜드’ 등 칭호를 수여받았다.올 시즌, 장백산천양천팀의 의상 앞부분과 뒤부분에는 모두 ‘장백산천양천’과 ‘길림삼공’ 등 글이 새겨지게 된다.
    • 스포츠
    2014-03-11
  • 새롭게 기대되는 올시즌 중국축구
    ■ 연변 리포터 김철균 전반 중국대륙을 뜨겁게 달구게 할 중국축구 슈퍼리그(3월 10일 개시)와 갑급리그(15일 개시)가 3월에 들어서면서 전면 가동된다. 올들어 중국슈퍼리그는 한차원이 높은 모습으로 보인다. 지난해 광주항대가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고지를 점령한 뒤 중국의 축구인들도 자국축구에 대해 자신심을 가지게 됐으며 슈퍼리그의 각 구단들마다 거금을 쏟아붓는것으로 구단시스템 갱신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다면 올시즌의 중국 슈퍼리그는 한국의 K리그 클래식보다 더 화려하고 관전성이 있겠다는 전망이다. 한편 슈퍼리그와는 달리 올해의 갑급리그는 다소 가라 앉는 분위기로 진단된다. 우선 지난해보다 슈퍼리그진출 경쟁이 그닥 심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해에는 하남건업, 할빈의등, 중경역범, 광동일지천과 호남상도까지 슈퍼리그에 진출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올해는 아직 그러한 “목소리”를 내는 구단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올 갑급리그는 후원기업이 없는 갑급구단이 많을 것 같다. 심양, 호남, 신강, 성도 등 구단이 구단소재지의 이름만 있을뿐 후원기업 관명권을 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어딘가 지난해에 비해 구단투자가 주춤하고 있는 표현이 아닐가? 반면에 우리 연변구단은 지난해 말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알준한 감독진 출범, 성소재지 장춘에서의 연변축구 홍보활동, 거기에 최근에는 장춘에 본부를 둔 모 기업에서 연변축구에 참여하면서 3년간 해마다 1000만원 이상씩 후원하게 된다는 희소식이다. 슈퍼리그와는 달리 다소 침체되고있는 갑급리그ㅡ 어찌보면 이는 연변팀이 “동산재기”할 수 있는 기회로 될 수도 있지 않을가?
    • 스포츠
    2014-03-09
  • 2014 시즌 연변팀 감독진 및 선수 명단
    2014 시즌 연변팀 감독진 및 선수 명단 감독진 코 치: 이광호 감 독: 이호은 지 도: 고종훈, 김광주, 정영학, 김 청 /연변 리포터 김철균
    • 스포츠
    20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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