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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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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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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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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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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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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조선족의 특수성
    조선족의 형성 조선족이란 중국에 정착해서 사는 한국인 후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선족이란 개념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시각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는 “동포”이고 “겨레”이고 하며 “피는 못속인다”는 것으로 동질성을 크게 떠들어대고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이요,“조선족동포”라고 하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라며 역시 목소리가 높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시각상 모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중국내에서 조선족이 형성된 그 시대와 역사적 배경을 분석해보면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국조선족의 그 대규모로 되는 인구유동을 말하면 아마도 “한일합방” 전후인 지난 세기 초엽으로 잡을 수 있다. 당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은 주로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한가지 부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투사 및 그 가족들이었고 다음 한가지 부류는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해 건너온 사람 및 그 가족들이었다. 이 두가지 부류의 공통점이라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난 뒤, 또는 돈을 벌어 크게 한몫 잡게 되면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헌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면 약소민족인 조선인들은 자아의지와는 별도로 중국인과 손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중국 또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항일을 위해 통일전선을 구축했지만 정치적 대립은 여전히 첨예했다. 그 와중에 중국으로 진출한 조선인들 역시 중경의 한국독립군과 연안의 조선의용군 및 동북의 항일연군 등으로 여러개 파로 나뉘었다. 그 뒤 1945년 드디어 조선은 광복되었다. 하지만 이 광복은 조선인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구 소련의 힘에 의해 즉 남들의 도움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한반도 중간지대에 38선이 그어졌고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다. 이는 약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귀국하였지만 중국,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 등 나라에 널려있던 한민족동포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귀국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38선과 두동강이 난 조국이 싫어진 이유도 적지 않게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중국의 조선인한테는 농민들한테 토지를 나눠주고 조선인을 중용(군부대에 조선인이 많았음) 크게 중용해주고 약소민족을 차별시하지 않은 공산당의 정책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중국의 소수민족 즉 중국조선족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중국조선족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중국조선족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그닥 곱지 않다. 공산권 나라에서 생활하는데다 지난 세기 50연대에 있은 “6.25” 전쟁에 중국 조선족출신 부대 3개 사단이나 북측 인민군에 편입되어 낙동강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한테 있어서 “6.25”의 상처는 오래갔다. 필자가 제일 처음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인 강××는 “당신들이 공산권에서 왔기에 머리에 뿔이라도 났는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군”하며 농조로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화권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은 토배기 중국인을 닮아 돈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지러운 작업도 꺼리지 않고, 사기치고 등쳐먹고, 여인들은 또 돈이라면 60~70대의 노인하고도 함께 침대에 오른다고 말이다. 한편 한국인들은 색안경을 끼고 조선족을 보면서도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드넓은 중국대륙을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족이란 “지팽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이들도 많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본토인들과 “인맥”이 큰 조선족들의 힘을 빌어 사업체를 활성화시키고 하여 한국인들은 조선족에 감사해하고 있고 거기에서 한몫 크게 덕을 본 조선족도 많다. 반면에 중국 조선족사기군에게 크게 당해 빈털털이로 나앉은 한국인도 많다. 아마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도 엇비슷한 희로애락이 많다. 다르다면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 거개가 힘들고 기시는 받았지만 그래도 부를 축적하고 환고향 뒤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의 갈등이 많이 생겼고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호 좋은 점만 생각하고 말하면 갈등이 작아지겠으나 나쁜 점만 골라가며 목청을 높이니 그 갈등의 벽은 높아만 가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서울”ㅡ 연길시 현재 연길시는 몰라보게 변했다. 여기에는 연길시가 중앙정부의 서부발전계획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수십만명 인력이 한국으로 진출해 벌어들인 재부의 힘도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한국으로부터 연변으로 송금되는 돈은 연평균 10억달러(2010년 기준) 이상으로 이는 연변 GDP의 35% 좌우가 된다고 한다. 35%ㅡ 대단한 것이다. 지금 연길시는 낮이면 승용차 행렬이 거리의 풍경선을 이루고 밤이면 매 고층건물마다 휘황한 네온싸인으로 반짝이면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크게 달라졌다. 어제 서울에서 그 어떤 패션이 선보였다 하면 오늘 연길 서시장의 전문점에 그 패션이 진열될 지경이다. 사람들의 얼굴도 화기가 넘치고 걸음이 씩씩해졌다. 그리고 여름만 되면 진달래광장은 거의 매일 저녁 “맥주절”, “미식절” 등으로 인파가 붐비고 새로 만들어진 청년광장 또한 거의 밤낮으로 여러가지 축제가 열리면서 공연무대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렇듯 열광적인 축제의 뒤가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조선족들의 삶을 반성한다. 한국의 덕으로 이만큼 생활이 다채롭고도 풍요로와 진 오늘 사람들은 중국경제가 한국을 따라잡고 있는 것에 대해 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다. 한국경제가 중국보다 우월했기에 현지의 조선족들은 본토중국인들보다 월등한 생활수준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경제가 한국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면 조선족들의 이런 우월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중국경제가 추락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중국에 큰 정이 있으니까. 중국조선족의 이중성 중국조선족은 그 형성된 자체거나 지나온 역사 등 요인으로 이중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사례로 중국축구대표팀과 한국축구대표팀이 축구경기를 펼칠 때면 그런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필자의 한 친구는 한국에서 중한축구경기를 시청할 때면 중국팀을 응원하고 중국에서 중한축구경기를 시청할 때면 한국팀을 응원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인 혹은 본토중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조선족 일원인 필자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중성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한국과 중국에 모두 정이 있고 두 나라를 모두 사랑하니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다음 한반도 북측과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조선족은 진짜 한국인도 혈육으로 대하고 조선인도 혈육으로 대한다. 혈육이라고 하면서도 “북한”이라고 욕하는 한국인이나 역시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남조선”이라 질책하는 조선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혈육이요,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유엔에까지 등록된 국호 “대한민국”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쓰지 않고 왜 자기들이 만들어낸 상대방을 자극하는 “별명국호”를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5~6살 되는 애들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 개막되던 9월 19일, 북측대표단이 입장하자 사회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제대로 방송했다. 이는 아주 정상적이고 상대방의 국호를 존중하는 자세이다. “북한” 이란 “별명국호”가 한국의 일반 서민들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청와대 관원과 국회의원들의 입에서까지 스스럼 없이 나온다는 것은 심사숙고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느 해엔가 북측 또한 남북축구경기를 놓고 태극기게양과 한국국가 주악을 거부한데서 그 경기가 제3국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필자의 주견이라면 2006년도엔가 KBS와 조선중앙TV가 공동으로 금강산에서 펼친 “열린음악회”에서 사회자가 “남과 북”, “북과 남”이란 언어를 골라 사회하였다. 상대방의 진짜 국호를 제대로 불러주기 싫으면 이런 언어의 선택도 괜찮다는 분석이다. 중국조선족은 이런 수법은 쓰지 않는다. 조선이면 곧바로 조선이고 한국이면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 불러준다. 그래서 한국인들로부터 입장이 모호하다는 책망도 듣는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의 이중성(삼중성이 될수도)은 한반도 남북에 유리할뿐만 아니라 중한 또는 한중 관계에 있어서도 유리하다. 중국이 한국의 제1무역파트너로 될 수 있은데는 중국조선족의 기여도 어느 정도 점한다는 생각이다. / 김철균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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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1
  •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1992년 5월 12일, 나는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한 기선에 몸을 실었다. 남들이 하듯이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서 29시간을 기선에서 보냈다. 푸른 물결이 끝간데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 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올리 솟는것도 처음으로 보았다. 이로서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바깥을 나오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커다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떠들썩하였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커다란 텔레비화면에서 나오던 드라마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에 접하였던것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와 같다는, 같은조상의 후예라는것을 실감하는 시작이였다. 인천부두에 도착하였지만 새볔이라서 해관 사무원들의 출근을 기다리느라고 다 도착한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보내고 늦은 아침이 되여서야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걱정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몸은 편하였으나 한달 벌어서 한달살기가 모자라는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서 개인 사업을 벌릴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 별로 큰 고민도 없이 신청을 하였고 1987년에 출근을 그만 두고 자체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하여 지방의 상점들에 넘겨주기도 하다가 침직 기계 몇 대를 사 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였다. 그때 출근하면 한달 월급이 인민페 76원이였으나 류행에 맞는 털실세타를 연구 개발하면 하루에 인민페 280원씩 벌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한국땅을 밟고 처음으로 서울전철역에 갔다. 젊은 아줌마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약들을 차려놓고 앉아 있으면 되는판이다. 가방을 든채로 왔다리 갔다리 몇 번을 반복하였지만 손바닥만한 이 얼굴을 내놓고 편히 앉아있을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돌아왔고 노원구의 한 식당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그때에는 일하는 교포들이 없었고 아마도 그때가 일하는 시작이였을것이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맡기고 친구가 주는 한화액수 그대로 받아넣고 말았다. 삼계탕을 하는 자그마한 식당이라서 주인장하고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갔다가 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주방일과 집청소에, 그집의 빨래까지 하여야하였다. 아줌마가 시키는대로 세탁기를 돌렸고 찌든때는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돌렸지만 빨간 쇠물이 든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적이 있었다. 안주인이 빨래감을 들고 나와 “아줌마~”하고 부른다. 가슴에서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감에 몸이 오싹해온다. “예”하고 내가 주방에서 내다보면 그 빨래감을 들고 서서 흔들어 댄다. 저번에 빨때도 때가 안 졌다고 뭐라하던 그 빨래감이다. 세 번째로 그 빨래감을 들고 흔들어댈때 나는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렇게도 세제를 선택하여 바르고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넣었지만 그냥 그 본새로 흔적이 남아있고 나는 나대로 안주인한테서 번번히 질책을 들여야하였다. 그 빨래감을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 보며 “ 아무래도 쇠물 흔적인 같아요” 라고 말해서야 그 다음부터 안주인의 성화가 뭠췄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면 눈물을 한동이는 흘렸을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받아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만하면 충분히 리해할 수가 있을법도 하건만 중국의 급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했던 그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리해할수 없는 일종의 모욕감에 치를 떨면서 밖에 나가 눈물을 흘리던 날들이 며칠건너 한번씩이였다. 중국이라는 넓고 넓은 땅우에서 몇십년을 한족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언어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섞어져버린 버릇이 몸에 밴 나는 우리 민족의 바른례절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중국에 비해 발전한 한국사람들의 그 예민한 반응과 그네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도 거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주인들은 또 나를 보기가 얼마나 한심하였을가 싶다. 처음으로 잇발쑤시개라는것을 접했던 나는 주인과 마주 앉은 밥상에서 손으로 입을 막지도 않고 잇발을 쑤셔대기도 하고 한 사발의 밥을 먹던 중국의 습관에 한국의 작은 밥공기로 밥을 먹어야하는데 그 식사가 또 너무나 맛있었다. 한공기를 더 달랄수는 도저히 없는 나의 체면에 식사때마다의 나의 곤혹이 얼마나 컸을지 그분들은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을것이다. 처음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그 집을 나오려고 하였다. 안주인이 나를 고발하여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든다고 방방 떨면서 나를 소개한 친척에게 전화하며 난리법석이다. 방법이 없어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다이어트약을 주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돈으로 꽤나 비싼 약 4곽을 전부 주고 그집을 나올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의정부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일년이 지나게 되자 손님들이 나를 보고 “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 들으면서 한국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를 감추기 위하여서는 한국말을 빨리 잘하도록 애써야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 듣고 나의 인격을 긍정받기 위해서는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군데없이 깔끔이 하여야만 되었다.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근사한 식당하나 꾸리려는 목적이라서 한식당의 기술을 배웠다싶으면 다른 메뉴의 식당으로 옮겨서 일하군 하였다. 한번은 회사내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 그 분량을 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하였는데 일하는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어서 눈앞에 불찌가 날리는 정도였다. 그래도 힘 다내여 일하느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이 가끔 와서 돌아보고는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식당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이 있었다고 하면서 월급을 10만원 올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사모님이 성깔을 부리기 시작하였고 며칠후 일이 터지였다. 일도 아닌것을 붙들고 나를 닦아 세우려고 괜히 폼을 잡고 언성을 높이는데 불법체류자인 내가 대들어버렸다. 여자 둘이 한창 피대를 높이고 시야비야하는중에 사장님이 오셨다. 걸상에 앉아서 오가는 말을 듣던 사장님이 일어서더니 선포하였다. 사모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면서 “당신, 래일부터 여기 나오지마. 여기 얼씬거리지 말란말이야.” 하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이튿날 저쪽 식당의 아줌마가 점심때에만 건너와서 나를 도와주고 사모님은 과연 얼씬하지 않았다. 그후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어디에 사용하는지도 모를 알수 없는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중국 흑룡강에서 온 한국땅을 밟은지 한달도 채 안된 김철이라는 남자교포가 있었다. 김철이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 되였다. 중국에서 한가히 살아가던 일상에 습관된터라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뒤에 가서는 혼자서만 담배를 피우고 나오면 류수작업이 차질이 빚어지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하는데 물건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다. 평시 누구하고 걸고 들어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라는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최씨가 자기보다 이상나이인 김철이한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떼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오른다. 뺨을 붙들고 서 있는 김철이를 향한 최씨의 욕지거리는 완전 거지 취급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큰소리를 하신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이도 원망스럽고 교포라고 인격이하로 취급하는 최씨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에게 불똥이 떨어진것은 그날 이후부터였다.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위들을 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너같은 불법 체류자 교포는 내가 이래도 할말이 없다.”하는뜻이 그의 언행에서 튀여 나오고 있었다. 한 두 번은 참을수 있으나 아무 반항이 없는 나에게 무시하는 짓꺼리를 해대는 그를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하여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획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 “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 “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쨓단 말인데?” 최씨는 완전히 의기양양하였다. “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 “이 미친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이 있다는 것이 내가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것이 끝나자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전후과정을 듣고 있었다. 사장님께 다가가 여쭈었다. “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 “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야. 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 “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로 갈랍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말씀했다. “저 사람이 못 그러게 내가 한다니깐. 책임지고. 아줌마한테 사과하게 할게.”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나는 느낄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놀려주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한 웃음을 웃을수가 있었다. 그 후 공장의 나날들이 즐거웠던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이상한것은 한달가량 지나자 최씨가 나한테 적극적인 호의을 보여줬던 일이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다문 얼마간이라도 세상이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해방을 받았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 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같은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했던 그 나날들이야말로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 역할이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 교포님들이 건강하시고 돈도 많이 벌면 좋겠다. 그리고 하루 빨리 이산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는 해결책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한다. 중국 연길시 김미선
    • 오피니언
    2014-11-17
  • 삶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도문시향상가 리원수 “따르릉, 따르릉…”제길, 알람이 끊기지 않고 울고있다. 나의 힘든 하루가 시작된것이다.낮이고 밤이고 알길없는 고시원이다. 나는 오늘도 새벽 5시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보도블럭까는 일에 나가야 하기때문이다. 요사이는 왜서 비도 안오는지 하느님도 무심하다고 욕하고 싶다. 연속 두주일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고 계속 찜통더위다. 어제도 식염정을 몇개나 주어먹었는지 모른다. 땀이 흐르다 못해 처음에는 짜던 땀이 나중에는 맹물이 흐른다. 땀이 흐르지 않고 내 골수가 흐르는 같다. 그래도 랭수가 최고다. 일하다가 랭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면 그래도 속은 시원한데 그 물이 바로 땀구멍으로 흘러나온다. 하는수 없이 또 랭수를 마시군 하는데 더운 열기를 식히기는 판부족이다. 어릴적에 읽은 소설 “락타샹즈”가 떠오른다. 내가 “샹즈”와 비슷하지 않은가? 21세기 현시대 “샹즈” . 아침식사랍시고 콩나물국에 고시원 랭장고안을 뒤져 김치몇조각을 찾아먹고 일터로 향하는 전철에 오른다. 전철안은 현장일을 나가는 아저씨들로 붐빈다. 나는 구석쪽을 향해 자리잡고 앉았다. 피로가 쌓인 몸으로 출근길에 오르니 집생각이 불같다. 오늘까지 한국에 나온지 딱 스물하고도 이틀이다. 그사이 고기집에가서 하루일하고 전자회사에서 삼일 일했는데 다 짤렸다. 문제는 내가 일을 할줄 모르기때문이였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사무상앞에서 신문이나 읽고 차물이나 마시며 컴퓨터나 다루던 내가 할줄 아는 일이란 정말로 없었다. 다행히 친척의 소개로 보도블럭까는 일을 하게되였다. 어렵게 얻은 일이라 힘들고 뭐고 가릴 경황이 없었다. “다음 역은 세류역입니다.” 전철안내방송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터에 도착한것이다 “오늘 적어도 20아르는 깔아야 해.” 사장이 아직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쉰살도 넘은 반장한테 반말을 하며 지시하고있다. (아이쿠 오늘 죽었구나. 20아르면 저녁 퇴근전까지는 담배 피울새도 없이 일해야 하는구나.) 나는 머리가 다 뗑해났다. 오늘만은 제말 하느님이 선심을 베풀어서 비가 오게 하라고 기도드렸지만 오늘도 낮 최고기온이 34도란다. 비가 와야 하루라도 쉴텐데. “아저씨는 보도블럭을 날라오고요, 저기 아저씨는 나라시를 하고요…” 반장님의 분부가 시작된다. 나는 밀차를 끌고 보도블럭 쌓은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번에 서른두장씩은 날라야 한다. 아침이지만 밀차를 미는 내 등은 언녕 땀범벅이다. 안전화속도 물이 들어간 장화속처럼 질척거린다. 블럭을 실어다가 블럭까는 아저씨옆에 쌓아놓아야 한다. 블럭 깔때 도면에 따라 색상이 부동한데 블럭 까는 아버씨는 내가 붉은색을 많이 날라왔다느니 아이보리를 적게 날라왔다느니 불평이 많다. 아마 블럭 까는데 내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니 짜증내는것 같다. 눈치만 보인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물통의 물이 또 바닥이 났다. “어이, 아저씨 이리와.” 사장님이 나를 부른다. “편의점에 가서 얼음하고 물을 사와.” 만원짜리 한장이다. 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물통에 감사를 드리고싶었다. 편의점안은 에어컨을 틀어놓아 아주 시원했다. 정신이 버쩍 난다. 랭동실에서 식용얼음 몇봉지와 삼다수몇병을 비닐봉지에 담아들고 값을 치렀다. 편의점을 나가기 싫었다. 늘쩡늘쩡 일하는곳까지 가니 다행히 사장은 보이지 않고 모두들 담배쉼을 하고있었다. 나는 얼음과 물을 물통에 넣고 종이컵에 물을 담아 반장님한테 권했다. 반장님도 교포다. 이젠 50도 많이 넘으신 분이신데 일솜씨가 재고 기술도 있다. 측량도 하시고 도면도 볼줄 알고 경계석도 잘 놓으신다. 그리고 절단기기술도 엄청 좋아서 우리는 땜빵할때 펜으로 긋고 자로 재고 하지만 반장님은 눈으로 보고 절단기로 쓱 자르면 백발백중으로 다 맞는다. 정말 탄복할만한 분이다. 같은 교포라고 나를 많이 챙겨주시는 분이다. “이선생도 한대 하지.”반장님은 말보루담배 한개비를 나에게 건넨다. 나는 반장님이 주신 담배를 붙여물고 그늘을 찾아 앉았다. 해는 아직 동쪽하늘에 걸려있다. 언제면 점심을 먹을가?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해서 벌써 배가 고프다. “이선생은 왜서 중국에서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여기 한국에 와서 개고생을 하오? 리해가 안가는구만. 우리 같은 농촌놈들이나 한국에 와서 돈이나 벌어서 로후나 챙기지.” “반장님두, 중국의 직장은 편하고 좋지만 고까짓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집살림을 하고 부조를 하고나면 일전도 남는것 없답니다. 지금 중국도 몇년전과 달라 물가가 엄청 올라서 살기 힘들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돈 좀 벌자고 직장도 버리고 온게 아니겠습니까? ” “그래도 늘그막에 퇴직금도 나오고 그럴텐데 직장을 버리는것은 조금 아깝지 않겠나? ”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언제 늘그막의 일을 다 고려하겠습니까? 애도 학원보내야 하고 집값도 할부로 물어야 하고 돈 쓸곳은 많고도 많은데 돈 나올데는 없고, 할수 없지요.” 멀리서 사장님의 그림자가 보인다. 우리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끄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낮의 땡볕은 무자비하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뒤잔등은 땀에 절고 해볕에 지지우다 못해 막 아리고 쓰리다. 장갑안의 손은 언녕 허옇게 퍼지고 얼굴은 술먹은 사람처럼 벌겋게 익어있다. 물통옆에 있는 식염정 통에 벌써 세번째로 손이 간다. 아무리 먹어도 효과는 별로다. 기계적으로 몸을 놀려 블록을 쌓고 나르고 할따름이다. 얼마나 일했을가? “식사하러 갑시다.” 라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점심시간인가보다. 우리는 땀벌창이 된 몸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메뉴는 백반이다. 점심먹을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어야 오후일을 하기때문이다. 숟가락을 잡아쥐였지만 손이 마구 떨린다. 보도블럭을 쌓고 나르느라고 손에 기운이 빠졌기때문인것 같다. 밥인지 모래알인지,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모르고 점심식사를 끝냈다. 나는 주방으로 찾아갔다. 렴치를 불구하고 아줌마하고 청을 들었다. “아줌마, 소금물을 좀 타주시겠어요?” “뭔 소금물을 그래요? 몸이 안좋은가요? ”주방아줌마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보는것이였다. “아니요. 땀을 많이 흘려서 염분을 조금 보충하려고 그럴뿐이예요. ” “아, 그래요? 아저씨 교포예요? ” “네.” “몸을 돌보시며 일하세요. 건강이 최고거든요.”아주머니는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소금물이 든 양푼을 나한테 건네준다. “감사합니다.” 나는 소금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속이 조금 개운해졌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하는곳으로 가서 저마다 종이박스를 찾아들고 그늘을 찾아 누워있었다. 그늘밑이라해도 별로 시원하지도 않다. 한국은 매미가 어찌나 많은지 매미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기세로 들려온다. 그늘밑에 누워있어도 그놈의 매미소리에 온몸이 찡찡 저려온다. 그래도 종이박스우에 누워있으니 편안하다. 안전화속의 발도 장갑속의 손도 오랜만에 바람을 쐬여본다. 땀이 너무 흘러내려 웃옷은 물론 팬티까지 땀범벅이다. 에라, 볼게 있냐? 나는 웃옷이고 반바지고 다 벗어버리고 팬티바람으로 박스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후일은 더 고달팠다. 며칠전에 물집이 져서 터진 발가락과 손가락이 아물지 못한채 빨간 속살을 드러냈다. 보도블럭을 쥘때마다. 해진 장갑사이로 손가락이 쓰려 어찌나 아픈지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다. 게다가 걸음을 뗄때마다 물집이 터진 발가락이 안전화에 쓰려 피가 터지며 아픔을 호소한다. 안되겠다싶어 휴지를 꺼내서 발가락을 감싸주니 조금 아픔이 덜하다. “아저씨, 왜 그렇게 꿈질거려요? 아저씨 빨랑해요. 그렇게 해서는 오늘 물량을 완성못하거든요. 그렇게 한장씩 쌓아서 되겠어요? 넉장씩 쌓아요. 일당 8만원씩이나 받으면서 일은 왜 이렇게 못하는지.” 사장님의 불호령이다. 사장은 항상 내가 일을 못한다고 야단이다. 일당8만원, 중국돈으로 500원돈인데, 나도 일당이 높다고 이 일을 택하지 않았던가?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쾅” 밀차에 실었던 보도블럭이 무너지면서 내 발등을 짓뭉갰다. “아이쿠.”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자리에 물앉았다. “어디 다친데는 없나? 조심하지 않구.”반장님이 제일먼저 달려와서 내 발우에 쌓인 보도블럭을 치워주신다. 다행히 안전화를 신어서 발은 다치지 않았다. “아저씨, 왜 그리 조심하지 않아요? 아저씨 예전에 보도블록을 깔아봤다고 해서 내가 받은건데, 아저씨 이런 일 해보았어요? 상하기라도 하면 병원비를 누굴 대라고?”사장님은 또 푸념질이다. 벨이 울컥 치민다. 누구는 상하고 싶어 상하는가? 누구는 조심하지 않아서 그러는가? 맨날 빨리빨리 해라고 해서 빨리하느라고 그러다가 사고친거지. 그래도 참았다. 지금은 일자리도 찾기 힘든 세월에 어렵게 얻은 일자리인데. 게다가 일당도 그만하면 초보자치고는 높이 주고하니… 저녁 여섯시이다. 저녁식사시간이다. 그래도 사장은 밥먹으러 가라는 말도 없다. 오늘 물량을 완성못했기때문이다. 나는 이제는 내 몸같지 않은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밀차를 끌었다. 내가 밀차를 끄는지 밀차가 나를 끄는지? “이젠 그만 합시다. 저녁식사를 합시다. ” 고마운 반장님의 말씀이다. 사장님은 한켠에서 보기만 한다. 우리는 줄레줄레 연장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그래도 시래기국에 편육볶음이 나왔다. 나는 공기밥을 추가로 하나 더 먹었다. 난생처음 이렇게 밥을 많이 먹어본다. 중국에 있을때에는 항상 고양이밥처럼 먹는다고 안해한테 야단맞았었는데. “아저씨, 이리 와봐요.” 주방아주머니가 나를 부른다. “아저씨, 이걸 마셔요. 소금물이예요. ”아주머니는 양푼에 든 소금물을 내민다. 배가 불렀지만 쭉 단숨에 마셨다. 짭짜름하고 달콤했다. 아주머니가 소금물에 설탕을 섞어 풀어준것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번마다 페를 끼쳐드려서.” “아니, 뭘 고마울게 있다고 그래요. 저도 교포예요.” 아주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그러는 아주머니가 꼭마치 고향사람을 만난듯 반갑고 고마왔다. 공짜커피를 한잔 뽑아들고 나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한시간넘게 전철을 타야 고시원에 도착할텐데. 몸은 물먹은 솜처럼 나른하다. 전철안은 시원했다. 내가 앉은 옆자리가 비여있지만 누구도 내곁에 와 앉으려 하지 않는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 (래일에는 역화장실에서 땀이라도 씻고 전철을 타야지.) 하면서 나는 졸기 시작했다. 드디여 고시원에 도착했다. 시원히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찜통더위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네각이 다 물러나는것 같았다. 너무 더워 환풍기를 돌려도 땀은 줄줄이 흐른다. 그래도 자야 한다. 자지 않으면 래일 일을 못나가니깐. 자리에 누우니 중국에 있는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전화기를 꺼내 안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일은 힘들지 않아요? 더운데 고생많아요.” “아니, 일은 힘들지 않고 더워도 괜찮소. 쉬는 시간도 많고…” “아빠, 보고싶어요. 아빠, 사랑해요.” 가족이 힘인가보다. 전화를 하고 나니 금방 기운이 나는것 같다. 가족을 위하여 이국땅에서 고생을 하여도 보람을 느끼는것 같다. 여보, 사랑해, 이쁜 내 딸 사랑한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안해와 딸애를 보았다. 안해는 딸애와 함께 공원에서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고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고싶었다. 그들한테도 달려갔다. 그러나 두발은 땅속에 묻히기라도 한듯 끔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억지로 두발을 움직여 본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나는 고통의 신음을 토했다. 왜 이렇게도 움직일수가 없는지. 너무도 그들한테로 다가가고싶었다. “어--”나는 또다시 신음을 토했다. 두눈이 번쩍 떠졌다. “따르릉, 따르릉--”알람소리가 귀청을 째며 들려온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것이다.
    • 오피니언
    2014-11-15
  • “지팽이”의 감수
    ● 박철원 세상에는 두 눈 뜨고 앞 못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두눈은 실명했어도 밝은 마음으로 널리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맹인에게 있어서 지팽이는 생활필수품이며 몸과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첫째로 공구이다. 나는 “지팽이”감수를 남 다르게 체득하며 자신의 노후를 설계해 나가고 있다. 연길시 북산가두 단산사회구역에는 올해78세인 맹인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신다. 내가 그 분을 알게 된 것은 5년전부터이다. 방송애청자인 나도 “연변방송”을 들으며 늘 “가요 다이데트”나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김봉숙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 뇌봉반 반장을 맡으시고 매일 매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애태우는 김할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돈보다 정을 더 중히 여기며 사랑나누기를 생의 낙으로 삼고 지내면서 웃음을 만들며 즐겁게 살아가시는 분이다. 2010년 6월 “뇌봉할머니”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을 때 나는 그이가 열사기념비 앞에서 한 대학생 처녀와 함께 선서하는 사진을 배합한 글을 썼고 7월1일자 연변 “노인의 벗”신문에 실렸다. 그 때로부터 나는 이 할머니의 소행이 우리 노인생활의 특수한 활력소임을 감수하게 되었다. 그 때 이 할머니의 생활은 80고령의 뇌봉반 고문인 한무길 선생과 80세 박연희 노인이 전담하고 있었다. 연장자 노인들이 맹인을 모시고 다니는 그 정경이 나에게는 특별한 모습으로 빛났다. 그들이 김봉숙 노인의 남편을 이어선 제2대 “지팽이”라 하겠다. “나젊은 내가 김노인의 제3대 ‘지팽이’로 되어보자.” 김할머니를 돕거니와 다른 노인들의 힘도 덜어줄 수 있지 않는가? 내가 어린시절 큰 아이들을 따라 길가에서 맹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며 “퇴!”하면서 침을 뱉고 달아나군 하였고 절음발이를 만나도 흉내내며 기시하였지만 지금 너무도 마음에 찔리며 미안함이 그지없어 마음속으로 다시 다시 속죄하군 한다. 그 옛날의 시대는 장애인들이 업신당하던 험한 세상이었다. 독거노인인 이 할머니에게 믿음을 주면서 할머니의 생활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6살에 공장일터에 나선 그는 29살 나는 외동딸을 잃은 비통으로 두눈이 실명되고 남편도 페암으로 저 세상에 갔으며 지금은 언니의 자식들이 조선땅에 있을 것이고 계모로 들어와 알뜰히 성가시킨 두 이붓 아들이 흑룡강성 그 어디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집도 땅도 저금도 없는 청빈한 노인이었다. 나와 아내는 이런 노인을 모시기로 작심했다. 그 무슨 재산이 있거나 직계친인이 있다면 시속의 편견 때문에 시끄러움이 두려웠지만 근근히 퇴직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이 불쌍한 노인이 우리의 마음에 꼭 다았다. 2010년 음력설을 맞으며 나는 아내와 아들딸, 두 손군을 이끌고 할머니 집에 가 설을 쇠게 되었다. 뇌봉반 노인 몇분도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맹인노인 김봉숙을 “고모”라 부르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할머니를 사랑하는 이유: 1. 우수한 분이기에 존중하며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라 배워야 한다. 노인 뇌봉반 반장을 맡으신 할머니는 밝은 마음으로 널리 내다 보신다. 결혼반지를 팔아 지진이재민을 지원해 사천을 울렸고 전국을 감동시킨 분이다. 2005년 3월 유체기증도 선참으로 등록하였다. 언제나 자비를 앞세우고 사랑의 마음을 전해가며 사회에 기여하는 분이다. 매일 매일 사랑으로 들끓는 본보기 노인이다.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2. 불쌍한 분이기에 도움이 수요된다. 정상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참아가며 정신으로 살고 즐거움을 만들며 살고, 기쁨을 찾으며 산다. 할머니는 방송과 함께 산다. 때문에 세상만사를 빨리 알고 많이 알면서 시대를 따른다. 정상인들인 우리가 하루 방송을 몇 분 간 들으며 신문은 얼마를 읽는가? 우리가 할머니의 눈이 되고 “지팽이”가 되어야 한다. 3. 할머니는 전주 김씨이고 봉선(아내)이도 전주김씨이다보니 민속적으로도 “고모”로 모시고 살펴 드려야 한다. 앞으로 할머니의 생활을 살피며 뇌봉반 사업을 협조하는 “비서”로, 생활의 “지팽이”로 나서야 한다. 동정하여 돕고, 우수하여 돕고, 친척되여 모신다. 이어 우리는 차례로 큰 절을 올리며 할머니의 승낙을 받았다. 할머니는 날따라 늘어나는 “식솔”들의 정성에 감격하며 아이들에게 의미심장한 덕담도 들려 주었다. 그 날로부터 나는 정식 김할머니의 “지팽이”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승진에 마음부터 설레며 충실히, 알뜰히 살펴 드리리라 작심했다. 몸이 불편하신 한무길 선생도 내가 제3대 “지팽이”로 나서는 것을 기꺼히 승낙하여 주며 구체적인 일들을 인계하여 주었다.. 단산사회구역에서 노인대학을 세울 때 할머니는 첫 사람으로 학잡비를 냈다. 이 “지팽이”도 가이드학원이 되어 아침에 모셔가고 하학 후에 모셔오면서 열심히 배웠고 어떤 날에는 다른 행사가 있다 보면 학교에 모셔다 드리곤 달려가 행사활동을 마치고 다시 모시러 가군 했다. 할머니의 마음은 그렇게도 순결하고 사랑으로 넘쳤다. 언제나 감사를 앞세우고 자비부터 생각하는 분이다 보니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할머니 신변에 있는 나의 마음도 늘 정화된다. 이것이 “지팽이”가 된 첫째 수확이다. “삶을 웃음으로 살고 베풀줄 알며 살아야 한다.” 이는 이 “지팽이”가 할머니에게서 배운 삶의 방식이다. 하루는 아내가 조용히 이야기한다. “너의 남편은 왜 소경할머니의 팔장을 끼고 다니느냐?”, “너의 복을 다 떼간단다”하는 친구가 있다고. 그 때 아내는 “우리 남편은 기자이다!” 라고 한마디 대꾸했단다. 참 잘한 대답이다. 너무도 감사한 대답이다! 사회의 편견에 대항하며 이해가 따라가지 못하는 친척들께 해석하는 압력과 고민을 이겨가며 나를 떠밀어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상에는 장애자를 기시하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으니 가슴 아프다. 퇴직 후의 나는 정의를 호소하고 시대 선봉을 홍보하며 사악한 기풍을 폭로하는 기사를 다루며 여러 매체의 “특약기자”로 초빙되어 활약하고 있다. 하기에 74세 맹인노인의 입당선서장면도 취재하고 애심의연현장도 많이 다녀온다.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도움이 수요되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간성에 맞는 행위이거늘 자기만 자기, 돈만 돈이라는 경향은 저주받아야 한다. 한번은 할머니를 모시고 버스에 올랐는데 두 사람이 일어서면서 자리를 내주어 인차 앉게 되었다. 그런데 옆에 앉았던 한 중년여성이 할머니를 쳐다 보더니 대뜸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온역”이라도 만난듯 피하는 그녀의 거동에 나의 심장이 짜릇해 났다. 나는 가는 곳마다에서 “지팽이” 주인인 “뇌봉할머니”의 사적을 소개하며 사회문명을 호소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마음의 정화를 받으라고. 2011년 8월,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구태시 신립촌을 방문하였다. 그 곳의 노인들은 “연변뢰봉”의 사적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연변의 맹인할머니가 저렇게 자랑찬 삶을 사시는데 몸 성한 우리들이 왜 못하는가? 하면서 그들도 노인뇌봉반을 뭇고 불우이웃 돕기에 나서며 사회에 열심히 기여하고 있다. 나는 이로서 또 한번 “지팽이”활약의 희열을 느꼈다. 때론 할머니가 조용히 “신세”이야기도 들려준다. 남편 생전에 늘 오토바이뒤에 앉아 나들이 하며 그토록 정답게 지냈다고, 임종시 눈먼 아내를 혼자 남겨두고 간다며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던 정경도 여러번 들려 주었다. 할머니의 그리움, 서러움을 덜어 드리려면 더 충실히 “지팽이”노릇을 하여 더 많은 편리를, 더 많은 즐거운 기회를 도모해 드리는 것이 나의 “직책”이라 하겠다. “취재”행사에 참가해야 하고, 올해부터는 또 원 직장에 “출근”도 해야 하는 실정이지만 나는 짬짬히 할머니 집으로 달려간다. “지팽이”를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2012년에는 90차, 2013년에는 계획 200차 실제로 272차 내왕하며 지팽이 노릇을 하였다. 연길시 하남에서 자전거로 북대언덕을 올라 할머니 댁에 가고나면 겨울에도, 여름에도 땀벌창이 되군 하지만 부모뵈려 간다는 마음에 힘든줄 모르고, 환한 웃음으로 문을 열어주며 반겨줄 때마다의 그 기쁨은 오로지 이 “지팽이”만이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하루는 건너도 이틀은 넘기지 않고 달려간다. 뇌봉반 행사도 설계하고 전화도 눌러 드리며 혈압을 재여드리고 생활쓰레기를 버려드린다. 어떤 때에는 할머니 혼자서는 식미가 없지만 이 “지팽이”를 위해 식사를 갖추며 함께 맛나는 식사도 하는 기분에서도 특수한 감수를 받는다. 지난해에는 반년간 약수도 날랐다. 우리 집에서는 딸이 사다준 정수기 물을 마시고 있지만 할머니는 수도물을 마셔왔다. 나와 아내는 한가족인 우리 할머니도 좋은 물 마시게 하려고 이틀에 한번씩 약수를 날라 드렸다. 아무리 시간이 바빠도 오늘 못가면 할머니가 목 말라하신다고 생각하니 짬이 꼭꼭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 보건품경영 회사의 경리가 할머니 집에 놀려왔다가“약수사연”을 알고는 할머니건강도 살피고 “박기자”도 해방시킨다며 자기네 회사의 정수기 한대를 무료로 놓아 주었다. “지팽이”의 “약수배달”이 실업당한 셈이었다. 2012년10월15일 “세계 시각 장애인의 날” 나는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맹인들의 도우미로 방천유람의 길에 나섯다. 예전에는 여러차 입원하였고, 심장병으로 구급까지 받았던 노인이 감사하게도 이 “지팽이”와 함께 다니면서부터 병원출입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보건도 따르고 정신요법도 따르니 건강상황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 “지팽이”로서 너무나도 기쁘다. 할머니의 입당소개인의 한분이신 한무길 선생은 10년간 매일 새벽이면 김봉숙 할머니의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그 가운데서 두번이나 병에 시달리는 상황을 발견하고 입원치료를 조직하여 드렸다. 할머니의 세 “양딸”들도 효성이 지극하다. 역시 “연변방송”의 인연으로 무어진 “모녀”들이다. 큰 딸 최혜숙은 5년전 할머니가 입원한 한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신변에서 살뜰히 보살폈고, 둘째 김명휘는 한국에서 할머니의 사계절복장을 전담하고 셋째 허애자는 할머니의 식생활 생필품을 전담하며 살핀다. 그들도 이 “지팽이오빠”와 함께 “지팽이” 감수를 향수한다. 김할머니는 방송과 더불어 살고 이 “지팽이”를 믿고 살며 베푸는 낙을 만들며 사신다. 할머니는 세상소식도 제때에 접하고 사회의 어려운 사연들도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보니 언제나 도움의 길에 나선다. 고작 1600위안의 퇴직금에서 달마다 1000원은 따로 떼내여 그 누구를 도울 타산부터한다. 내가 매일 일기를 쓰며 할머니의 사랑일기를 적는다. 2012년에는 7500위안의 성금이 나갔고, 지난해에는 1만 2200위안의 사랑의 성금을 내놓았다. 그것도 이 “지팽이”가 많이 설득하며 제한한 실정이다. 아니면2만위안을 넘겼을 것이다. 올들어서도 첫 달부터 언어장애어린이들을 도우며 애심기여가 이어지고 “6.1”절에도 500위안, 운남노전지진에도 2000위안을 기부하고, 노인절 30돐을 맞으며 자기가 받은 상금 5000원을 주노년협회에 기증하는 등 애심은 식을줄 모른다. “지팽이”도 힘이 든다. 그러나 힘든 뒤의 희열은 따로 있다. “지팽이”는 마땅하다. 수요되는 할머니의 마음과 체중을 모두 의탁받는 기둥은 인간도덕의 최저한 실천이기에 누군가는 꼭 나서야 한다. “지팽이”는 영광스럽다. 더우기 “도덕모범”이며 “연변의 훌륭한 인물”인 김봉숙 노인의 “지팽이”는 더욱 영광스럽다. 지난해 8월 중앙인민방송국과 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공동주최한 행사에서 김봉숙 반장과 이 “지팽이”는 나란히 “시대선봉”으로 표창받았다. 나로 하여 한 장애자가 기쁨을 느낄 때 그 속에 이 “지팽이”의 행복도 넘친다. 이 “지팽이”는 할머니의 정신에서 힘입고 아내의 뒤받침 속에서 열심히 뛰어다닌다. 아내는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고모”부터 생각하고 가족사랑시간을 할머니에게 많이 돌리라고 떠받들어 준다. 하루는 낮시간에 짬이 없어 할머니 보러 가지 못하고 퇴근하였는데 “오늘 고모한테 못가지 않았어요?”하고 묻는 정성에 늦어서라도 달려가 보게 되었다. 할머니도 이 “지팽이”를 너무도 아끼며 사랑한다. 취재와 사회활동에 바삐 도는 나를 너무도 잘 아는지라 되도록 적게 부르려고 애를 쓴다.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나부터 챙겨준다. 누군가 닭밥을 보내 왔는데 할머니는 한술도 안들고 나더러 소멸하란다. 장모가 사위사랑을 하듯 주고 받는 사랑이 오가는 감수도 남다르게 체험한다. 때론 매체에서 찾아와 취재할 때면 통역이 수요되어 급급히 부른다. 한번은 저녁에 샤와하시고 미끄러져 팔을 상했지만 이 “지팽이”가 너무 피곤할 것이라 생각하며 온밤을 혼자서 지새우며 알리지 않았기에 이튿날에야 알게 되었다. 믿음과 사랑, 의탁이 앞서는 할머니가 감사하기만 하다. 지닌 8월 13일, 할머니는 큰 타격을 받았다. 입당 소개인이며 친밀한 전우였던 한무길 선생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훌륭한 고문을 잃었다. 제2대 “지팽이”가 쓰러졌지만 제3대 “지팽이”가 드팀없이 지켜드리니 시름 놓으시라고 비통에 모대기는 할머니를 달랬다. 국경절을 맞으며 우리 부부는 할머니를 모시고 동천(氡泉)이라는 온천요양지를 다녀올 타산을 한다. 통화지구의 천양( 泉阳)림업국에 있는 동천(氡泉)에는 라돈(氡)이라는 기체가 온수물로 솟아 피부병, 골과부실, 소염효과가 좋다기에 요양지로 소문 높다. “고모”에게 마음의 슬픔과 몸의 불편도 깨끗이 씻어 버리는 향수를 드리련다. 명년에는 할머니가 그리워하시는 조선바다의 해수욕도 체험시킬 타산도 가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할머니의 “지팽이”가 되면서 인생을 다시 한번 터득하게 되었고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더 생생히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부강한 나라에서 조화로운 사회의 넘치는 사랑으로 베풀며 사는 인간으로 되리라 다시 한번 다진다. 할머니의 마음과 체중과 사랑을 모두 감당하는 휘지 않고 꺽이지 않는 합격된 “지팽이”로 되어 한 맹인 “도덕모범” 의 여생을 충실히 살펴드리며 뇌봉정신 고양으로 노후의 꽃노을을 장식하면서 깊고 깊은 “지팽이” 감수를 터득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할머니 시름놓고 이 “지팽이”를 짚으세요!
    • 오피니언
    2014-11-15
  • [역사인물 스케치] 존 케네디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며 미국의 저명한 케네디 가족성원이다. 그는 대통령 임기기간인 1963년 11월 22일에 댈레스에서 자객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였다. 케네디는 1960년에 미국대통령 선거에 성공, 미국 역사상 가장 나젊은 대통령으로 되었으며 또한 미국 역사상 첫 천주교를 신앙하는 대통령이자 유일한 퓰리처금상을 수상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윗 사진은 1960년 4월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수개월전에 미국 중동부에 위치한 웨스트버지나아주에 있는 한 잡화점을 방문하는 모습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의 TV생방송실에서 죤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대통령변론현장의 남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존 케네디가 그의 동생이며 조수인 포비 케네디와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케네디가 로간지구에서 의자위에 올라 강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케네디의 동생 포비 케네디와 그의 부인 에쌀이 매사추세츠주에서 투표에 참가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5월 존 케네디가 신문을 통해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관련된 보도를 읽고 있다. 1960년 7월 미국민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존 케네디를 지지하는 여성들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1960년 10월 뉴욕에서 있은 한차례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한시기 미국에서는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패션이 유행되기도 했다. 사진은 1961년 1월, 뉴욕의 복장전매점에서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모델을 전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1년 1월 존 케네디(왼쪽 세번째)가 곧 만기가 되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취임연설 현장에서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레스의 디리광장에서 한 자객에 의해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가 암살된 후 자객인 오스왈드는 경찰에 의해 감옥으로 압송되던중 스탠드바의 보스 제크 로비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뒤 어떤 사람들은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의 3년간 선후로 18명에 달하는 해당 관건적인 증인들이 사망했으며 196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무려 115명에 달하는 해당 증인들이 각종 기이한 사건중에서 자살하거나 모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홍콩 봉황넷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13
  •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최현예 갤렉시S 갤러리속에 소중히 담아놓은 이 사진한장이 어쩜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체육대회날 우리반 학생 모두가 이같은 단장이였는데 지하철타고 학교가는 사진속 내 모습에 입 싸쥐고 키득거리는 승객들땜에 괜히 무안함을 어쩔수 없었다. 다행히 역마다 오르는 나랑 같은 차림새 애들 덕분에 그나마 괜찮았다. 블랙반팔티에 빵상이라고 화이트로 찍은 유난히 돋보이는 내 얼굴만한 글자는 담인선생님의 별명이고 목에는 학생본인의 별명이 걸려졌다. 기념 될만한 포즈로 찍은 사진중에 이 사진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게 많다.9년 의무교육을 연길서 마치고 작년 4월달에 중앙음악학원 피아노 고전음악작곡반에 입학했지만 7월에 2010글로벌 네트워크 재외동포대학생 청소년 중국대표단 7인중 1인으로 한국에 모국연수로 온것이 지금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니게 된 게기로 되였다. 9월 6일 개학을 맞아 북경중앙음악학원에 입학했지만 추석과 국경절 연휴를 이용해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서울 공연예술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게되였다. 5살부터 배운 피아노 박자에 음성이 아름답기에 합격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중국국적으로 고등학교 유학생 최초 1인자로 에술계의 특목고인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아트홀서 입학식에 참가했다.서공예학교건물과 교장선생님의 사진은 싸이트에 뜬 사진 그래로였다. 꿈에도 다니고 싶던 한국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 입학과 함께 기쁨뒤에 숨은 검은 그림자때문에 앞으로가 걱정되였다. 기쁨반 근심반 생소한 학교 생소한 선생님 그리고 함께 해야할 친구들인데 자란 환경차이로 외래어로 된 한국말도 알아듣지 못한 상태서 개학을 맞았다. 환각같은 한국생활 환상같은 서울 공연예술고등학교 낯선 선생님들과 낯선 친구들 모두가 조심스러웠다.자칫 잘못하면 이학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학교폭력도 아마 이 자그마한 교실공간이 시작의 불씨로 될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정말 이것이 문제로다란 유행어와같은 TV에서 늘 보는 학교 폭력도 두려움중의 가장 큰 걱정이였다. 내 짝꿍은 남자였는데 키도 크고 인기좋은 남자애였다. 어쨌거나 개학을 맞았고 얼떠름하게 근심도 걱정도 잊은채로 한학기를 마감하게 되였다. 며칠전에는 중국말로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학교홍보 동영상도 촬영하면서 중국인으로서의 긍지감을 느꼈다. 한학기 4개월동안을 돌이켜 보느라니 고마운 얼굴들이 하나하나씩 내 눈앞에 알른거린다. 중국에서 왔기에 남다른 대우로 배려해주시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그리고 언제나 내 옆을 끈끈히 지켜주시는 담임 선생님이 있기에 아무걱정없이 학교에 잘 다닐수 있었다. 학기말 시험 복습하느라 정신없는데 스마트폰에서 문자 왔숑!문자왔숑!문자알림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앗! 빵상? 무슨일이지? 한국에서는 학생이 선생님 별명을 스스럼없이 부를수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화요일에 시험보는데 혹시 봉사활동 있는거 아닐가? ...... 될수만 있다면 오늘만큼은 연락하고 싶지않은 문자인데 아무튼 열어는 봐야했다.문자 내용이다. <<우린 이미 한배를 탔기에 나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좋은성적~OK>> 휴~중간평가 시험 성적이 좋았던만큼 기대치가 높아진 쌤의 욕심이다.산언덕에 위치한 우리학교청사에 머무는 모든 생명체중 들고양이 다람쥐를 빼고는 알사람은 다 아는 빵상쌤이라면 선배님들도 감히 우리반 애들을 어쩌지 못하리만치 두려워한다. 두렵다면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친절하다면 엄마사랑을 비교할수조차 없을만큼 인정많은 담임쌤이길래 미워할수도 또 더 가까이 친해질수도 없는 그런 사이다. 비오는날 길이 막혀 지각을 했다고 벌점 주고 학교가서 핸드폰을 납부안했다고 또 벌점이다.벌점을 감점하는데는 의무봉사로 학교정원청소도 되고 엄마랑 함께 휴식일 등산 인증사진도 되고 깜지(영어단어)해도 된다. 벌점을 무시하고 감점하지 않으면 벌점 40점 초과시 퇴학 당한다. 그런데 나는 벌점받고 혼나도 또 미워할대신 마음속부터 정말 존경하게 되는데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 없는게 쌤의 매력이다. 얼마전 본의 아니게 생긴 일이다. 아침 등교시간 빠듯이 맞춰서 2호선 지하철을 타러 역에 들어서는데 면바로 지하철이 문이 닫힙니다 하길래 급한김에 탔다. 학교가는 방향이 신림 대림쪽으로 타야하는데 글쎄 반대방향으로 타고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음악과 함께 한잠 편히 자다가 이젠 대림에서 7호선을 환승할시간 된줄 알고 당역을 보니 아뿔사 서초역이 아닌가. 부랴부랴 열차서 내려서 바꿔타고 환승역에서는 죽을힘을 다해 뛰여서 시간을 단축했지만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정문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선배님 2명이랑 우리반 남학생 한명이 선도부들이 정문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고 대문이 조용해지자 시름놓고 선배오빠들을 따라 지하통로 담장밑에 이르렀다. 처음 가본 비밀통로인데 바깥 출입을 막기 위해 막아놓은 담장을 학생들은 불편함을 무릎쓰고 애용한다는 생각에 잠겨 혼자서 허구픈 웃음까지 나왔다. 느슨한 마음으로 선배님들 어떻게 뛰여넘는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지입은 오빠들도 조심스럽게 올라가는데 교복치마가 담장우에 올라가면 민망스러울텐데......어떡하지 하며 혼자 생각하고 있을때다. 내 등뒤 어디선가 불효령이 떨어졌다. <<야! 이거 못된것들아~ 잠간만 꼼짝 말아! 거기 못서?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유령같은 검은 그림자가 벌써 내 시선서 가까와 지더니 눈을 한번 깜빡할사이 벌써 쌤의 구두가 내 신발이랑 닿아 있었다. 정신차리고 올리다보니 매서운 눈빛이 우리를 향해 독기를 뿜고 서있지않는가? 휴~대독이다. 오늘 그냥 넘어가지 못할거다.선배님이 귀속말로 하는말이 내 심장의 박동 차수를 느닷없이 가속시켰다. 선생님 역시 어이 없다는듯이 한발 뒤로 물러서더니 빤히 쳐다보는 나를 향해 대답할 틈도 안주고 혼자 말씀하신다. <<야 야 야! 너 너 누구지? 저기 저 저 1학년 몇반이야 쭝국애 맞지? 너 말 안해? 너도 이제부터 여기 단골이야? 언제부터 담장 넘는거 배웠어? 착한줄로만 알았더니 이제보니 너도 다를바 없는 또라이야 엉? 너 이제 개학한지 얼마 됐다고 이런짓거리 해?아직 2년 더 다녀야겠는데... .... 그리고 넌 넌 2학년 몇반이더라 그리고 넌넌 하면서 선배님들에게도 같은 식으로 훈계하시더니 아무소리없이 휙 돌아서서 2층 층계로 향했다.뒤에 패전장군처럼 우리도 학생지도부실로 머리 숙인채로 따라갈수밖에 없었다.당연히 우린 학교 규장제도 위반으로 벌점을 받았다. 눈을 내리 깔고서도 여기저기 다 곁눈질로 둘러보았다. 저기 구석진쪽 사무상에 익숙한 뒷태......빵상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찬찬히 봐도 내 담임쌤이 맞았다. 어찌된 일인지 담임쌤 사무상도 학생지도부에 있을줄이야! 특별히 충격적이였던지 건너편에 앉아 모르쇠를 놓고 계시는 담임쌤께서는 우리를 나 몰라라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화가 안 내려갔던지 대독쌤은 담임쌤을 향해 계속 얘기하셨다. ≪쟤가 쌤네 반 쭝국애 맞죠? 착한 고양이 부뚜막 먼저 오른다더니 오늘 아침 지하실 담장 넘어가려는거 바로 잡아 왔습니다 .저애 별명이 우아하던데요....뭐 혀네언니? 별명하나 이쁘네.......쌤, 건데 쌤별명은 빵상?으흐흐흐흐......>> (한국은 3월 1일에 새학년을 올라가고 중국은 9월에 새학기를 맞기에 나는 작년 7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학 시험을 쳤기에 올해 3월1일에 개학을 맞았으니 한국에서는 95년생들과 함께 고1에 다닌다 남자나 여자나 혀네언니라고 애칭해서 내 별명도 혀네 언니다) 상황 파악은 까맣게 잃고 나는 푸하 꺽히히 억 크크 터지고 말았다.조용한 사무실서 내가 웃음참는 소리는 유난히도 컸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데 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참으면서 웃는게 얼마나 괴로운지도 처음 알았다. 저쪽 건너편 사무상에 담임쌤쪽을 힐끔힐끔 바라 보는데 담임쌤은 한점 흐트러짐없이 천사같은 목소리로 한마디한마디 천천히 말씀하긴다. <<혀네야 얼른 대독쌤에게 다신 담장 안넘는다고 사과드리고 수업 하러 가~응~>>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참 애교로 가득차서 마치 아무일도 생긴적 없는것 같은데 눈길은 야 너 이제 교실서 혼나봐 안좋은 일 만들지 말라 말했지....너네 경쟁으로 말썽 일으켜? 하는 눈빛이였다. 마치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어린애한테 남들 앞이라 있는수양 없는수양 다 갖추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혼내는 엄마같은 교육방법 다른 쌤들 앞이라 내 체면 챙겨주시지만 이제 교실서 친구들 앞에서 혼나게 될게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했고 참 존경스러웠다. 엄마는 가장 사랑하기에 선뜻이 매서운 회초리로도 교육하지 않는가? 때리지 않지만 봉사로 혼내는 빵상쌤 버럭버럭 소리 높지도 않으면서도 어떤 상황에도 학생들께 잘못을 따끔히 알려주시는 빵상쌤 저 천사같은 목소리 뒤에는 겨울의 혹한같은 무서움도 있고 봄날 날씨와도 같은 포근함도 함께 있다. 혼낼때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혼내지만 여자애들에게는 여자쌤만의 남다른 사랑이 있다. 그날따라 되는일이 없자니 그런지 갑자기 배가 아파 엎뎌있는데 따끈따끈한 생강차 한잔 손수 타서 들고 오신 쌤 얼굴은 걱정으로 완연했다. 아무것도 안 마신다고 도리머리질하는 나에게 아무리 아파도 따뜻할때 홀홀 불면서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면 금시 좋아질거라며 달래는 쌤, 엄마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마구 얼굴을 책상에 팔베개로 파묻고 싫다해도 얼리고 닥치고 쌤은 컵이 빈것을 확인하시고서야 자리를 뜨셨다. 벌칙도 있고 사랑도 있기에 존경이 생기고 왜소한 체구에 힘도 별로 없는 빵상쌤이지만 전학교 남학생 남자쌤 모두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상대다. 정말 학교벌칙이라면 폭력이나 폭행 아니면 왕따 XX으로 하는 욕 이런 불쾌한 어구들이 연상되지만 내가 다니는 공연예고에는 한국에 보편화된 학교 폭력과는 상관없는 학교다. 그렇다고 아무리 합리화된 벌칙도 누구나 다 원해서 벌 받는 학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빵상쌤의 벌칙은 참 다양해서 번마다 틀린다.누구는 벌점을 지우기 위해 영어 깜지(영어단어 빼곡히 쓴다)를 10장 쓰고 누구는 학교마당서 청소로 봉사를 한다.나는 엄마랑 같이 남산에 오른 인증샷을 카메라에 담아와서 2점을 감점했다.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것은 당연하지만 빵상쌤의 책벌은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100배로 뉘우친다.여느쌤처럼 에네르기 소모도없이 애들이 다 두려워하는 날씬한 몸매에 애교만점 센스쟁이 빵상쌤의 매력은 전 대한민국 선생님들의 본받아할 우상으로 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고등학교 학교폭력이 이름난 한국서 서울 구로동 아름다운 산기슭에 자리잡은 학교에 빵상쌤과 같은 선생님들 전부 다 천사같은 교사다. 집에서 받는 엄마 사랑을 학교서도 누릴수 있는 학생은 아마 1년내내 학교서 생활하고 싶을것이다. 부모의 초청도 없이 중국국적으로 D-4비자로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고등학교에 미성년자로 유학온 내가 바로 그 행운아라면 믿어줄 사람이 아마 없을것이다. 내가 다니는 서공예 담임인 빵상쌤으로 본 한국은 꿈속 동화같은 학교다.이제 앞으로 나는 이 학교서 2년반동안 빵상쌤이랑 호흡을 맞출것이다. TV서 보던 공포는 찾아봐도 찾을수가 없는 학교정원은 산과 잇닿아 있다.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빵상쌤과 우리반 전체 친구들의 반가운 개학상봉의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손가락을 꼽아본다. 평화가 잠자는 우리 학교 바로 우리 빵상쌤의 벌칙과 사랑을 받으면서 여기서 나는 연습생으로 가수로 데뷔를 준비할것이다. 이제 졸업식때 내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담은 이 사진을 선생님께 드리려고 생각한다. 세월이 퍽 흘러 선생님이 수많은 학생들 떠나보내고 기억이 아리송하실때 이사진을 보시면서 제자중 혀네언니란 별명을 가진 쭝국애도 제자였다는것을 기억해주시게.......
    • 오피니언
    2014-11-13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9)
    ■김철균 ( 3 )위에서도 자주 언급되다싶이 순자의 가정은 워낙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였다. 신흥소학교 동쪽의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 식구가 많았고 또 남편 김용환 한명의 노임으로 살아가다보니 생활이 어렵다는 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문화혁명 기간 남편이 갇히어 노임이 제대로 발급되지 않은데다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일자리에서 나오다보니 수입내원이 줄어들어 매일 매일의 식생활을 이어대기가 극난이었다. 당시 순자한테는 자식 6명이나 딸려 있었다. 큰 아들 영남이, 큰 딸 영순이, 둘째 딸 영옥이, 셋째 딸 영애 그리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 이렇게 연연생 혹은 2-3년 터불씩 여럿이 되었고 모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으며 사회에 진출해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순자 한사람만 쳐다보는 이 가정의 상황에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시 뭐 생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이 몇 집 안되고 거개가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은 건 사실이었으나 순자네 가정은 더할 나위가 없이 근근득식의 계속이었다. 한창 클 나이었던 둘째 딸 영옥이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노랗게 되었고 둘째 딸 영옥이는 역시 영양실조로 15살 어린 나이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백모녀”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둘째아들 경남이는 누가 “뭘 먹었느냐”고 물을 때마다 “푸대죽”이라고 대답하여 별명조차 “푸대죽”으로 되고 말았다. 푸대죽이란 말 그대로 시래기와 옥수수 가루를 마구 섞어갖고 끓인 죽으로서 그 때 그 시기 아주 오랫동안 순자네 집에서는 그 푸대죽이 주식으로 되었으며 밥을 해먹을 때가 아주 적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위생학교에서 교직원들한테 뭔가를 나누어도 독재대상이 된 김용환한테는 늘 몫이 없었다. 그 때 중학교 이상의 학교들마다 거의 모두가 농업실천기지가 있었는데 연변위생학교에도 그런 기지가 있어 거기에서 수확되는 벼, 옥수수와 콩은 흔히 학교 교직원들이 나누기가 일쑤였다. 인당 그닥 많이 차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쌀 한알이 귀한 세월이라 그것은 어려운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환이네 가정은 항상 제외되었다. 처음에 순자는 학교에서 그런 나누기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불평의 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를 싫어하고 공짜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순자는 가난해도 절대 그런데는 손을 안 내민다고 단언했던 터였다. 헌데 나중에 볼라니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위생학교에는 김용환처럼 “독재대상”이 된 교직원이 11명이 되었는데 순자네뿐 아니라 그런 가정들이 모두 학교의 “나눠가지기”명단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몇몇 아낙네들이 찾아가 제기했으나 학교지도부에서는 “오류분자”의 가정은 제외된다면서 번번히 면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자기네만 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불공정했다. 순자는 학교내에서 배척받고 있는 모든 가정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학교에서 학교둘레를 막은 널판자 배자를 뜯고 벽돌담장을 쌓으면서 뜯어낸 널판자들을 교직원들한테 나눠주게 되었는데 이 역시 김용환을 비롯한 11세대 독재대상자의 가족은 그 명단에서 제외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순자는 그 11세대 가정의 “권익”을 위해 무작정 위생학교 지도부를 찾아갔다. “뭐?! 배자를 뜯어낸 널판자를 달라구? 동무는 그래 ‘오류분자’가정에서 그걸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뭐가 ‘오류분자’ 가정인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의 남편 김용환 선생은 당의 훌륭한 아들로서 건국초기 연변의 위생사업을 개척한 선구자중의 한사람이예요. 당신들이 뭔데 당의 훌륭한 간부인 김용환 선생을 가두어 놓은 것도 모자라 이런 나눔에서도 우리와 같은 가족을 외면하는가요. 그 심보는 뭔가요? 당과 모주석께서 이러라고 당신들한테 시킵데까?” “이 동무가 이거, 왜 함부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만 말하시오. 듣기 싫소.” 사무실일군이 손을 내저었지만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말을 시작하자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아니, 계속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가요. 바로 당신같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이야말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당과 모주석께서는 극소수의 나쁜 놈들을 제외하고는 광범한 인민대중과 단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저희들 가족들까지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까?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요. 당신들이 이렇게 우리 가족들까지 계속 무시하고 배척해 보세요. 그러다가 그 가족들이 정말 앙심을 품고 나쁜 사람들 켠으로 넘어갈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는 당신들같은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예요……” 이 때 40대쯤 되어보이는 간부 한명이 문을 떼고 들어서다가 순자와 사무실일군이 언쟁을 하는것을 보고는 그 사무실일군을 불러냈다. 그 40대의 간부가 사무실일군을 불러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순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약 10분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그 일군은 한결 부드럽게 어투를 바꾸며 순자네를 비롯한 그 11세대 가정의 집주소를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 사무실일군과의 설전에서 순자는 일단 승리하였다. 순자가 밖으로 나오자 위생학교의 목수일을 하던 리동무가 감탄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치를 잘하십니까? 그 사무실일군은 말 마디가 막혀 한 마디도 못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2일 후 위생학교에서는 실제로 순자네를 비롯한 11세대 가정에 널판자를 실어다 주었다. 헌데 순자네 집에 실어온 널판자는 운전수가 집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는 큰 길옆에 부리웠고 또한 순자네 집에 제때에 알리지 않은데서 길가던 사람들이 불쏘시개용으로 하나 둘씩 주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순자가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별반 남아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큰 길가에 널판자를 부리워놓은 운전사도, 또한 그 널판자를 하나 둘씩 주어가는 사람들도 탓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에 큰 욕심이 없는 순자로서 다만 문화혁명의 피해대상인 그 11세대 가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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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1-02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6)
    ■김철균 내가 8살 때 소학교에 붙었으니까 그 해가 아마 1966년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 아버지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던 1957년부터 그 때까지 아버지는 별로 “외출”을 하지 않았으며 어디에 갔다가도 밤만은 꼭꼭 집에 와서 자군 하였다. 또한 바깥에 나가 돌배 한알이라도 생기면 건사했다가는 꼭 집에 온 후 나를 주군 하였다. 그만큼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정치상에서도 크게 “진보”했다. 아버지의 “혁명경력”이 은을 냈던지 아버지는 촌 당지부서기로 일했던 것이다. 글공부를 거의 하지 못한 아버지가 촌지서사업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 아버지가 얘기를 잘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중국어에 대해서는 청산유수였다. 조선어면 조선어, 중국어면 중국어 이렇게 중조 두가지 언어에 대해 막힘이 없는 아버지였으며 그 당시 촌에서 두가지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아버지외 별반 없었다. 아마 그래서 상급당조직에서는 아버지한테 촌지서사업을 맡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데 내가 어섯눈을 뜨면서 지켜볼라니 그 때의 아버지는 자주 한숨을 내쉬며 뭔가에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자주 “내가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왜 내가 그런 못된 짓을 했노?”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리군 했다. 그 때 아마 아버지는 그 무슨 폭풍우를 예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몇년 뒤 아버지는 문화혁명중에 반란파들한테 물매를 맞게 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세상을 하직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망하기 전 아버지는 나한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아비가 남들의 봉창을 당한 거란다. 봉창을… ”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려주었다. 1964년은 중국에서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었다. 그 때 상급에서 사회주의교육공작대가 내려왔고 촌당지부에서도 정풍운동이 크게 벌어졌다. 바로 그 때 촌학교의 한 여성 당원교원이 당시 당지부의 부서기로 있던 김××와 눈이 맞아 돌아친 것이 탄로되었고 아버지는 당지부 지도부회의에서 그 여성당원을 호되게 비판하였으며 거수표결로 그녀를 당내 엄중경고 처분(당적을 보류하고 지켜보기)을 주었다고 한다. “낸들 그러기 좋아서 그랬겠느냐?!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처가 그 일을 알고는 속을 태우다 못해 목을 매고 자결했으니 일이 데럽게 꼬였단 말이다. 그 여자를 보호할 여지가 없었단 말이다.” 한편 그 일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서도 많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당신이 뭔데 시집도 가지 않은 남의 여자를 회의에서까지 망신시켜유?! 당신은 얼마나 깨끔한 사람인데 다 그런대유…” “남들이 뒤에서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는지 알기냐 해유?! 나 참 챙피해서 그 말 입에 담지 못하겠수.” 어머니의 꾸중에 아버지는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워낙 옛날의 성미가 많이 죽어든데다 아버지 자신 또한 그 일때문에 몹시 참회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6년 여름, 상해에서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의 폭풍은 마침내 연변의 작으마한 농촌마을인 나의 고향에도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제일 선참으로 반란파들에 의해 붙잡혀나와 투쟁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명은 여러가지였다. 지난날 술을 좋아하다 못해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술까지 받아 마셨으니 부화타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주자파”였고 문화혁명전 조선으로부터 민주연군시기의 전우가 찾아왔었으니 “외국스파이”었으며 조선에 있는 여인과의 일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생활작풍상에서도 문제가 엄중한 “계급이색분자”였다. 당시 아버지를 가장 호되게 족친 사람은 다름 아닌 소학교의 당원교원인 이금자란 여자와 당지부 부서기었던 김정범이란 남성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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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1-02
  • 오묘한 세계대백과(24)
    근 100년래 전반 지구의 기후가 보편적으로 따뜻해지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10년의 지면의 평균기온은 1961년부터 1990년의 평균치보다 약 0.6도가 높아졌다. 그럼 지구는 어찌하여 “열”이 나는가? 근 한세기 이래 인류는 석탄, 석유 등 광물연료를 대량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 등 온실기체를 대량 배출하고 있다. 대기중의 온실기체는 한층의 두꺼운 유리마냥 지구로 하여금 큰 온난방처럼 만들면서 전반 지구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지구의 지속적인 온난화추세는 전반 지구의 강수량을 다시 분배하면서 빙천과 동토가 해동이 되고 바다물 평면이 높아지는 등 자연생태계통의 평형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아울러 인류의 식물공급과 거주환경에 위협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만약 전 지구의 온난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억제하지 못하면 미래의 100년중 지구의 온도가 1.4도 내지 5.8도까지 올라가게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100년이 되면 세계에서 1/3이 되는 동식물 서식지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 수많은 동식물 종류가 새로운 생존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어 멸종이 된다고 한다.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협력하여 지구기후의 온난화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생존환경을 찾아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0-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5)
    트로이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터키, 지점 터키 트로아스평원 함의: 호메로스가 쓴 동화색채가 충만된 옛성 유적 기원전 9세기 고대그리스의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 중에는 트로이(特洛伊)전쟁을 제기한적이 있는데 이로하여 트리오성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2000년 기간에 일찍 한 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버려진지 몇 세기 후 그리스인들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 후에 이 지방은 선후로 페르샤인 알렉산드르 황제와 로마인이 통치하게 되었다. 324년 후 이곳은 점차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트로이유적에는 오래된 성곽, 옛성 등으로 형성됐던 층층의 폐허와 여신 아테네(雅典娜)의 무덤이 모셔져 있으며 트로이로 하여금 가장 매력적인 세계 문명고적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토로이목마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의 기재에 따르면 트로이왕자 패리스(帕里斯)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ㅡ 아내 헬렌(海伦)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를 다시 빼앗아오기 위하여 스바다(斯巴达)왕은 형제 아가멘놈(阿伽门农)한테 간청하여 그리스 연합군과 합류하여 트로이를 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장 10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는데 최종 그리스군대가 숨겨져있는 한 거대한 목마(木马)를 통해 몰래 트로이성내로 진입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현재 트로이 로구역입구에는 재건된 거대목마가 있으며 이미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풍경선으로 되고 있다. 아홉개 성의 중첩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트로이유적은 9개의 부동한 시기의 유적들이 중첩돼 함께 형성된 것이다. 그 중 유적의 제일 아래층으로부터 5층에 이르면 이 트로이성이 부단히 확대되었던 상황을 볼 수가 있다. 제 6 층의 폐허는 트로이문화에서 하나의 전변기로 이 때 북방의 초원민족이 트로이로 진입하면서 도시의 면모가 이전과 다르게 되었다. 제 7 층의 페허는 호메로스(荷马)사시에 기재된 트로이성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제 8 층과 제 9층 은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시기와 로마 통치시기의 도시면모를 갖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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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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