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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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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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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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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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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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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오묘한 세계대백과(24)기이한 눈
    평소에 우리가 보는 눈은 모두 흰색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첩첩백설”이라고 하며 눈이라고 하면 당연히 흰색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헌데 기실 눈은 단지 흰색뿐이 아니라 기타의 색갈도 있다. 중국 서장의 자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와 남극 등 지방에는 일찍 붉은색의 눈이 내린적이 있고 중국 내몽골에는 노란색의 눈이 내린 적이 있으며 북빙양의 어느 한 섬에는 록색의 눈도 내린적이 있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탈리아 토로타이와 스웨덴의 남부에는 검은색의 눈마저 내렸다고 한다. 이로보아 우리의 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오색찬연한 눈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그 채색눈은 또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눈에 일부 색채가 있는 물질이 섞였기 때문이다. 예하면 색채를 가진 조류, 검은 색의 작은 벌레거나 석탄부스레기 등이 섞이면 눈을 곧바로 상응한 색갈로 변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은 색채가 있는 눈만이 아니라 더욱 기이한것은 “육월비설(六月飞雪)”라는 보기드문 현상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육월비설”은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조성된 것이다. 즉 화산폭발시에 산생하는 수백만톤에 달하는 화산재가 대기층에 올라가 곳곳에 날리면서 몇달간씩 태양을 가리우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면 낮에는 태양의 빛을 볼 수가 없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없으며 그리고 허다한 지방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여름에도 눈이 내린다. 연구에 따르면 기원 537년 중국에서 발생한 한차례 여름에 내린 눈은 곧바로 기네아동남부에서 발생한 한차례의 화산폭발로 조성된 것이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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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4)
    보로부두르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인도네시아, 지점: 괄바도중부 함의: 보로문교의 유적은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임 보드보르(婆罗浮屠)는 “천불탑(千佛塔)”으로 그 뜻은 “구릉상의 불교사당”으로 풀이된다. 보로보그성지는 인공으로 쌓아올린 작은 산언덕에 솟아있는데 화산암으로 건축된 흑회색건물이다. 이 건물은 기원 8-9세기 경에 싸란드라(萨兰德拉)국왕이 남겨놓은 역사유적이다. 로드보르불탑은 공사량이 방대하고 웅위롭고 장엄하여 중국의 장성, 애급의 피라미드와 캄보디아의 씨엠립굴과 더불어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보드보르불탑 1000여년전 싸란드라 국왕은 석가모니를 숭배하던 나머지 10만명의 노예를 고용하여 10여년의 세월을 거쳐 이 보드보르불탑을 세웠다. 불교에서는 천지를 삼계로 나누는데 밑으로부터 위를 위욕계(为欲界) 그리고 색계(色界)와 무색계(无色界)로 나눈다. 보드보르불탑의 설계가 바로 이런 사상을 체현했는바 토대대표의 욕계, 5층 방형평대 및 부조회랑(浮雕回廊) 대표의 색계와 3층 원형대 대표의 무색계로 나누었다. 살아 숨쉬는듯한 부조각들 보드보르의 부조(浮雕)예술은 극히 걸출하다. 장장 2500미터의 탑기초위에는 도합 2500폭의 부조각이 있는데 하나하나를 이어놓으면 4000미터의 길이가 된다. 그 중 어떤 부조각은 불교역사에 근원이 있고 어떤 것은 신화이야기와 종교의식을 갖고 있으며 어떤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습성을 기록하기도 했고 또 어떤 조각들은 꽃과 새 그리고 열대과일의 조형이다. 이런 예술걸작들을 두고 후세사람들은 “돌우의 사시(史词)”라고 일렀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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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윤리문화시리즈(4) 여성의 정도띠
    [동포투데이] 정조띠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럽의 많은 전통적인 이야기 특히 이런 이야기중의 의식 등은 아직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부 여성들이 정조띠를 착용하고 혼례식에 참가해서는 신혼의 밤에 그 정조띠 키를 신랑한테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종 신조와 헌신정신을 표한다. 2003년초 한 영문대학생이 인터넷을 통해 “자아단속(自我约束)”이란 토론을 벌였는데 한 여대생은 자신은 기꺼히 정조띠를 착용할것이며 미래의 혼례식에서 그 정조띠이 키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조띠를 착용하고 있는 한 싱글여성은 이렇게 쓰기도 했다. “현재 나는 계속하여 정조띠를 착용하고 있다. 그것은 나한테 한 안정된 남자가 나타나기까지이다. 결혼전 이 남자는 내가 계속 정조띠를 착용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여야 한다. 결혼전에 그가 정조띠의 키를 요구해서는 절대 안된다. 신혼의 밤 그가 나를 정조띠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바랄뿐이다. 그때면 나는 기꺼히 정조띠를 착용하고 그를 기다릴 것이다. 이는 나의 달콤한 꿈이다.” 현시대에 유행되고 있는 정조띠 현시대의 정조띠는 그제날 유럽에서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가 착용하던 그 불수강 정조띠의 양식이 주류로 유행되고 있다. 이 정조띠는 허리위치에 둘러가며 보호띠가 있고 불수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내부와 변두리는 인체에 해가 없는 연한고무로 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허리띠보호부분은 각 회사의 제품마다 독특하지만 보통 납작하고 원형으로 되어있으며 될수록 의복밖에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키의 내구결구는 매우 정밀한바 특수제작된 키에 의해서만 열리도록 되어있다. 여성의 정면에는 구멍이 있어 여성들은 정조띠를 착용한 상황에서도 배설하고 샤와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오늘까지도 정조띠의 속박을 통해 인간은 물질 및 정신적인 압박을 감수하게 되는바 이는 정조띠 착용자들한테 더욱 많은 성적인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일종 특수한 흥분상태에 빠져있게도 한다. 정조띠는 권력의 성감화로 인간의 성관계중 항상 제한적인 학대와 폭력의 환상이 겯들게 된다. 그리고 성학대의 활동중 권력의 관계도 개방되는바 주인이 노예로 변할 수도 있고 노예가 주인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는 현실생활에서 권력에 대해 맛보지 못하고 권력에 대해 과도하게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특히 흡인력이 강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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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재조명해보는 임표의 “9.13사변”
    중공의 9차 당대회 이후 중국 국내의 형세는 안정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은 결속지을 때가 되었다”고 표했고 9차대회 이후 중앙의 문화혁명소조를 취소하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당시 임표가 그루빠를 형성해갖고 공산당과 나라의 더욱 큰 권리를 갖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택동도 생각밖이었다. 당시 두가지 사건이 임표 그루빠의 정치적 야심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하나는 임표가 이른바 “임부주석의 1호 명령”을 발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주석 자리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1969년 10월 10일, 소주에 있던 임표는 북경에 있는 군위판사조 조장이며 총참모장인 황영생에게 즉시 “전쟁준비를 강화하여 적의 돌연적인 기습을 방지할데 관한 긴급지시”를 각 군구에 발부할 것과 “정예한 작전지휘진을 조직하여 즉시 전시지휘위치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군위판사조가 “임부주석의 명령(1호 명령)”의 명의로 그 날 저녁 각 군구에 전화로 전달되었고 각 군구는 즉시 긴급임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임표는 이미 하달한 명령을 “전화기록”의 형식으로 모택동한테 보고하였다. 모택동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전의 보고도 없이 임표가 제멋대로 이런 군사명령을 내려 각 대군구가 하루밤 사이에 임전상태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극히 엄중하고도 비상적인 사건이며 매우 위험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에 모택동은 임표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고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의 “1호 명령”은 일종 목적성이 있는 시탐성 행동으로 모택동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며 다가오는 한차례의 폭풍우를 예견했던 것이다. 1970년 3월 8일, 모택동은 당중앙에 제4기 전국인대를 개최할 것과 헌법수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면서 국가주석을 두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처음으로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에 대해 내놓은 의견이었으며 이 의견이 전달된 후 모두 일치하게 동의하였다. 그러자 소주에 있던 임표는 엽군한테 “임부주석은 국가주석을 두는데 찬성한다”는 의견을 황영승과 오법헌한테 전달하게 하였다. 그 뒤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를 놓고 임표는 늘 반상적인 태도를 보이었으며 완고하게 모택동과는 반대의견을 내놓군 하였다. 이는 뚜렷하게 당내 부동한 의견의 정상적인 쟁론범위를 벗어났는바 거기에는 필연코 남한테 공개하지 못할 목적이 있었다. 특히 엽군(임표의 부인)은 도처에서 임표의 진정한 면모를 보이며 여론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만약 국가주석을 두지 않는다면 임표는 어디에 부임시키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자리의 설치여하에 관한 쟁론은 9기 2중 전회에서도 계속 되었다. 8월 23일, 9기 2중 전회가 개막되었다. 이날 회의개시를 앞두고 임표는 갑자기 모택동과 기타 상무위원들한테 발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원래 개막식에서는 모택동이나 임표 모두 발언하지 않기로 되어있었다. 임표의 제안은 돌연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표는 서면으로 준비한 자료를 갖고 한시간도 더 넘게 발언하였는데 주요하게 헌법수개의 문제상에서 모택동의 영도지위에 대하여 논하였다. 동시에 사전에 있은 임표와 엽군의 포치에 따라 진백달과 오법헌이 국가주석 자리를 설치할데 관한 헌법수개조문을 만들어가지고 회의에서 크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모택동이 이미 예견하고 있던 것이었다. 회의에서 모택동은 임표일당의 반상적인 현상에 대해 즉시 제지시키면서 “국가주석 자리설치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가 국가주석이 되고 싶으면 그더로 되라고 하시오. 어쨌든 나는 국가주석자리가 탐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임표에게도 “권고하건대 당신도 국가주석에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일침을 놓았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에게 직격탄을 날리지 않고 진백달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임표가 반성하게 하도록 하기로 하였다. 이는 자신이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던만큼 임표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보호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71년 8월 15일,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남하하였다. 모택동은 중남, 화동 등 성시를 순회하면서 각지의 책임자들과 다각도로 담화하였다. “이번에 노산회의에서 그들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돌연습격을 들이대고 계획 있고 조직이 있으며 강령까지 만들어놓고 행동하고 있다. 임부주석을 보호하긴 해야겠지만 그 역시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래도 임표가 반성하기를 기다렸다. 9월 5일과 6일, 북대하에 있던 임표와 엽군은 모택동의 남방순회담화의 내용을 탐지해 듣고는 드디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7일, 임표의 아들 임립과는 “연합함대”에 “1급전시령” 지령을 내렸고 8일 임표는 친필로 “임립과 동지는 즉시 주우치 동지가 전달하는 명령대로 실행하라”는 명령서에 싸인하였다. 그 뒤 하지만 그 음모가 탄로되자 임표는 남하하여 광주에 중앙을 따로 세우고 분열을 꾀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자 황망히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주하다가 몽고의 언더르한에 추락하여 분신쇄골이 되었다. 임표가 외국도주 도중 추락해 죽자 모택동은 그저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하늘은 비를 쏟으려 하고 여자는 출가하려 하니 어쩔 수 없구려.” (신화사 자료 발췌)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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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8
  • 적당히 굶으면 수명이 길어진다?
    1. 남성은 녀성과 많이 접촉하면 수명이 길어진다. 미국로쇠방지연구소의 최신 연구결과 녀성과 비교적 많이 접촉한 남성의 수명이 길었다. 행복한 혼인생활은 생활질을 개선할뿐만아니라 로쇠를 늦춘다.2. 더욱 좋은 물질생활과 더욱 높은 정신경지를 추구하면 수명이 길어진다. 영국학자들의 연구에서 충족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를 갖춘 사람들은 영양식을 하고 량호한 의료조건과 풍부한 업여생활을 즐긴다는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들의 몸에서 분비되는 일종 호르몬은 심장혈관질병위험을 낮추고 수명을 연장하는데 유조했다.3. 조금 뚱뚱한 체중의 사람들의 수명이 길다. 영국 과학자들이 12년간 1만명 성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금 뚱뚱한 체중의 사람들이 기준형 체중의 사람보다 사망률이 낮았다.4. 소리내여 노래하면 수명이 길어진다. 미국 예일대학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경상적으로 노래하면 비타민을 복용하는것보다 건강촉진에 더욱 효과가 있다고 한다. 노래하면 압력을 줄이는데 유조할뿐만아니라 심장, 페, 복강과 등을 단련할수도 있다.5. 성생활을 알맞춤하게 하면 수명이 길어진다. 영국의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건전한 성생활을 하는 부부들이 7살은 젊어보인다고 한다. 이는 성생활이 압력을 낮추고 만족감을 더해주고 수면질을 높여주는것과 련관될수도 있다. 연구학자들이 웨일스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장수조사결과 매주 두번씩 성생활을 하는 사람에 비해 한달에 한번정도 하는 사람들의 사망위험이 곱절 높았다.6. 화초를 재배하면 수명이 길어진다. 원예로동은 심장혈관을 보호할수 있고 근육의 유연성 등을 단련해준다. 한시간동안 원예로동을 하면 약 5마일(약 8000메터) 산보하는것과 같다.7. 적당히 찬음식(冷餐)을 먹으면 수명이 길어진다. 적당히 찬음식을 먹으면 위장기능을 증강하고 유기체의 면역력을 높여줄수 있다. 샐러드무침과 같은것은 남새가운데 비타민을 최대한 보존해주며 조림, 볶음, 튀김 음식에 비해 일정한 정도에서 암유발물질이 적다.8. 학자, 대가(大师)들이 장수한다. 단마르크의 조사에서 밝혀진데 의하면 창조력이 강한 사람들의 수명이 길었다. 창조력이 강한 사람들은 평소에 뇌를 많이 사용하기에 인식능력이 일반인보다 늦게 떨어지고 만성질병 발병률도 좀 낮다.9. 적당히 굶으면 수명이 길어진다. 미국 과학자들의 최신연구결과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적당히 굶으면 대뇌기능을 제고할수 있으며 체중을 줄이고 수명연장에도 유조하다고 한다. 그밖에 정기적인 금식이 장수에 유익한 원리는 동물들의 동면과 아주 비슷하다고 한다.10. 차를 마시면 암을 방지한다. 차잎에 함유되여있는 폴리페놀은 자유기제거와 항산화작용이 있다. 동물실험에서 록차 또는 홍차가 동물의 식도암, 위암, 피부암을 70% 줄일수 있다는것이 밝혀졌다.
    • 오피니언
    2014-09-27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6)
    ■ 김철균 2 지금 60여세가 되는 중장년 분들은 거의 모두가 알다싶이 지난 세기 60연대 초반 우리 중국과 구 소련은 그 혈맹관계가 깨여짐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긴장국세가 조성되었다. 당시 구 소련은 중국에 있는 모든 전문가들을 철거시킴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말기 붉은 군대의 동북진출과 중국의 “6.25”참전 시기에 진 구 소련의 빚을 짧은 기간내에 갚으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구 소련전문가들의 철수로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데다 거기에 3년간의 자연재해까지 들이닥쳤다. 구 소련의 압력앞에서 모든 중국인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난관을 이겨내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콩깍지를 매돌에 갈아먹고 풀뿌리와 산에 있는 피나무 껍질을 발라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도처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경제난은 연변도 마찬가지었으며 식구가 많고 남편 혼자의 노임에 의거해 살아가는 순자네 가정은 더욱 생활압력이 컸다. 어느 날 남편 김용환이 영양실조로 강연도중 갑자기 교단에서 쓰러졌고 순자 또한 연이은 기아와 지나친 생활압력으로 몇번이고 몸져눕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내가 쓰러지면 저 것(자식들)들은 누가 키우나”하며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다. 그 때 순자네가 유일하게 의거할 수 있는 식품내원은 봄에는 각종 들나물과 산나물, 여름에는 버섯 등이었고 가을에는 콩깍지, 배추잎사귀 등이었다. 그것을 장만해서는 허기진 배를 달래군 하였다. 특히 늦가을 소영진에 있는 배추걷이가 끝난 밭으로 배추잎사귀를 주으러 갈 때에는 흔히 큰 딸 영순이와 함께 다녔는데 주어온 배추잎사귀와 배추뿌리 등에 옥수수가루라도 조금 넣어 푸대죽같은 것을 끓여놓으면 그것이 소화도 잘되고 다른 음식탈도 생기지 않아 당시에는 “상등식품”에 속했다. 순자는 그렇게 힘들게 주어온 배추잎과 배추뿌리 등을 운신하기 힘들어하는 노인들 가정과 잔식구들이 많은 가정에 보내주군 했다. 그러자 그러는 어머니에 대해 큰 딸인 영순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우리 집 식구들도 지금 굶고 있어요. 저도 지금 배고프고 힘들어죽겠어요. 전 힘들지만 어머니가 하도 불쌍하여 따라 다닌거예요.” “그래? 너한텐 참 안됐구나. 네가 학교에 다니면서 배추잎 주으러 다니자니 많이 고달프겠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우린 그래도 굶어죽을 지경은 아니란다. 저 앞집 ×× 노인네 집을 보아라. 그 집은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진짜 굶어죽을 수도 있단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이 동네 적십자회 주임이란다. 이런 신분으로 내가 어찌 굶어서 쓰러져가는 노인들을 보고도 못본체 할 수 있겠니?” 이 말에 영순이는 말없기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나도 이치에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연대, 거리의 행인들도 생기가 없고 밤을 자고 나면 “어느 동네의 아무개가 굶어죽었소”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려오군 하던 시대였다. 기아가 온역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을 기습하는 시대였고 도처에서 도둑이 살판치군 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렇듯 살벌한 시대에 웬간한 덕성이 없이는 이웃들을 도와줄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영순이도 어느 정도 알리는듯한 모양이었다. 하긴 교육자인 아버지와 역시 높은 교육자질을 소유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는 영순이네 형제들은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먹을 것 따위를 놓고 다툰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기의 배가 고플수록 더 배가 고프겠다고 생각되는 형제를 돌보군 하였다. 그리고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바로 순자네 집이기도 했다. 한번은 순자가 밭에서 한근 가량의 콩알을 주어왔다. 순자는 그것을 솥에 볶아서는 술잔에 담아 학교에 가는 영남이와 영순이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초기가 들면 한두알이라도 먹으면서 그것으로 초기를 말리라고 말이었다. 헌데 애들이 학교로 간 뒤 설겆이를 마치고 볼라니 영남이와 영순이는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던 볶은 콩을 도로 꺼내여 사발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저희들보다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 내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일찍 어른답게 처사하는 자식들, 금방 먹고도 돌아 앉으면 배고플 정도로 한창 먹을 나이었던 영남이와 영순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도리어 눈물이 나왔다. 한편 남편 용환이도 자신이 고아출신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을 적극 도와주고 베풀어주는 아내한테서 계발을 받아서인지 남을 돕는 일에는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위생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푸대죽이나마 한끼 배불리 먹게 했는가 하면 집에서 어쩌다 쑥떡같은 것이라도 하면 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외우군 했다. 그러면 눈치가 빠른 순자는 말없이 챙겨두었다가 남편이 출근할 때면 한보자기씩 쥐어보내군 했다. 이렇게 어쩌다 만드는 쑥떡같은 것도 기숙사학생들한테와 이웃집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보내고 나면 순자는 힘들게 만들고도 때를 거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3 3년간 지속되던 “고난의 나날”도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배고픔에 등이 휘던 사람들도 차츰 허리를 펴게 됐다. 3년간의 “대식품(당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을 식품으로 대용한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음)시대”에 굶어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가통계국의 해당 집계에 따르면 그 3년간 중국에서는 무려 2000여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독일한테 살해당한 구 소련의 희생자수와 맞먹는 수자였다. 대가는 침통했다. 당시 6억에 달하는 중국인구 중 2000여만명이란 아사자(饿死者)가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많은 수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웬간한 한개 나라의 인구와 맞먹는 수자였다. 하지만 중국인민은 악전고투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통미풍을 발양하면서 묵묵히 이 고비를 넘겼다. 경제는 점차 회복추세를 보이었고 인민들의 생활 또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한편 순자는 이렇듯 3년간의 심한 시련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다 민족국가인 중국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인민들 전체가 더욱 똘똘 뭉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중앙과 모주석 대단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다. 중국인민들이 그렇듯 심한 기아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폭동 한번 일으키지 않으면서 참고 견딜 수 있은데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제도가 극소수의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제도가 아닌 광범한 대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있는 우월한 제도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한 신문에서 “주은래 총리가 세수수건을 2년간 사용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렇듯 나라의 위대한 총리도 3년간의 고난의 세월에는 백성들과 똑같은 간고소박한 생활을 하였다는 대목을 읽고는 감동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었다. 동시에 사람은 없을수록 남과 나눠가질줄 알고 내가 한끼를 덜 먹거나 하루 적게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남겨 남을 돕는다면 타인의 생명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3년간의 “대식품시대”를 통해 또한번 체험하게 되었으며 삶의 진가란 간고할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산할 수 있다는 철리도 터득하게 되었다. …… 우리 나라가 안정적 궤도에 들어서서 융성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1963년 3월 5일, “인민일보”는 1면 톱면에 모택동이 쓴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를 실었다. 그러자 중국인민해방군 심양군구에서 나타난 뢰봉의 사적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센세이숀을 일으키면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일대 열조가 일어났다.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의 “뢰봉따라배우기활동”에서는 항상 순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순자는 거의 적십자회의 주임인데다 보도소조 소조장으로 경상적으로 신문을 읽고 방송을 들었기에 장악한 지식과 이론이 풍부하였으며 번마다 “뢰봉 따라배우기 적극분자 대오”속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순자는 실제적으로 “뢰봉 따라배우기 활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남편이 본직사업에서 성과를 올리는 일군으로 입지를 굳히도록 정성껏 섬기었는가 하면 자식들한테는 “항상 학습성적이 우수하고 모든 활동에 적극적인 학생과 비교하고 생활상에서는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양했기에 자식들 모두가 학교에 가서는 뢰봉 따라배우기 우수학생으로 되기도 했다. 또한 동네에서는 어느 집에 석탄이 떨어지면 석탄을 지원하고 어느 집 밥상의 반찬이 변변치 않으면 김치쪼각이라도 가져다주군 하면서 동네의 화목을 도모했다. 특히 조선족김치를 좋아하는 한족들 가정에 가서 손수 시범을 보이면서 김치를 담그는 요령을 배워주어 한족들은 한결같이 “순자아주머니야말로 우리 거민구역의 조선족 뢰봉”이라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본보기의 힘은 무궁무진했다.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 중에서 순자는 항상 자기의 언행을 뢰봉과 비교해보면서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요구조건을 높이었다. 그 중 1965년 5월 1일에 순자가 한 행동은 그야말로 모든이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순자인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운 초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날 연길시에서는 “5.1절”을 맞으면서 전 시 중학생마라톤경기를 진행했다. 그 때 딸 영순이도 이 경기에 참가했다. 순자의 딸 영순이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헌데 그들이 연길공원 남쪽의 우장거리까지 왔을 무렵, 영순의 친구 중 한명이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입에 거품을 물며 쇼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달리다 말고 쓰러진 그 애의 주위에 몰려들어 손톱으로 코밑 민감부위를 누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하면서 구급했지만 그 애는 깨여날념을 안했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그 애의 어머니가 달려왔지만 어쩔바를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애의 어머니는 키가 작은지라 딸을 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순자가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순자는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그 애를 업을 잡도리를 하였다. “자, 어서 이 애를 당장 내등에 업히워주세요.” “아니?!…” 모두들 이아해하는 눈길로 순자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 애를 업은 순자는 다짜고짜로 연변병원을 향해 달렸다. 기실 그 애를 업기전 순자 역시 이렇게 덩치가 큰 애를 과연 업을 수 있을지 파악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업고 보니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달릴수록 더욱 속도가 빨라졌고 옆에서 바꾸어 업자고 해도 막무가내었다. 아니, 힘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이 학생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생각에서 죽기 내기로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공원의 우장거리에서 연변병원 근처에 있는 그 애의 집까지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날 웬일인지 지나가는 트럭조차 한대도 보이지 않아 순자는 그 꽤나 먼거리를 그 애를 업고 줄곧 달렸다. 그 애의 집에 도착하여 쇼크한 구들에 눕힌 순자의 온몸은 땀벌창이 되었다. 순자는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내가 정말…저애…를 업고 여기까지 …뛰어왔단…말이지?” 그야말로 자신으로도 자기의 힘에 대해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구급을 거쳐 그 학생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더니 일어나 앉으며 사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애들로부터 “영순의 어머니가 널 업고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알려주자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였다. 그애는 감동을 눈물로 대체했던 것이다. …… 한편 남의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발벗고 나서는 순자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거나 그 어떤 “출세욕”에서 나온 행위라고 의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순자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혹시 신문사나 방송국 등 매스컴 기자들이 인터뷰같은 것을 할라치면 순자는 그저 “힘들고 어렵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체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인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모든 것을 함축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25
  • 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은 우리나라 미래의 귀중한 자산이다
    ■ 이돈구 석좌교수(영남대, 서울대 명예교수, 한림원 정회원) 중국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국가이며 오늘날 인접국으로서 최대의 인적, 물적 교류 국가다. 인적 자원은 물론 거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다. 또한 중국은 우리에게 혈연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나라다. 중국 내 대부분 조선족이 동북3성에 있는데, 2010년 기준으로 길림성 104만 명, 흑룡강성 33만 명, 요녕성 24만 명이다. 특히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를 보면, 1860년대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주를 시작하여 1881년에 1만여 명, 1916년에는 20만 명, 1930년경에 39만 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의 면적은 43,474km2, 총인구 219만 명(2007년 기준)이고, 이 중 약 80만 명이 조선족이다. 이렇듯 중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조선족은 우리와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한 핏줄로서 우리와 중국의 우호관계를 다질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고, 상호간의 이해를 넓히고 교류를 확대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중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1990년에 192만 명, 2010년에는 183만 명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 이유로는 출산율 감소, 국제결혼, 높은 고령화와 사망율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더 우려되는 것은 최근 중국내 조선족들에게서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점점 옅어지고, 자신들이 한민족으로서 한국에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완전한 중국인으로서 동화되고 있어,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동포애를 발휘하여 손을 잡아주고 끌어안아야 한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중국 동북 3성은 중국 내에서도 사회기반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경제성장이 느리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심한 편이다. 따라서 중국 내 조선족에 대한 교육과 경제적 지원을 줌으로써 조선족과 우리와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고, 중국 내 조선족의 교육·경제력의 향상을 통해 중국의 대한국 정책을 더욱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일본은 100여 년 전부터 브라질에 이주하였고, 이주자들이 생산한 농산물 등을 본토 일본에서 구입해 줌으로써 그들이 소득을 올려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해 우리의 이민 정책을 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조선족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 조상의 후손인 형제이다. 과거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 어쩔 수 없이 타국에 가서 지금까지 힘들게 개척하며 살아온 그들을, 지금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는가? 이미 중국에 가서 정착한 우리 동포인 조선족에게 자녀 교육, 학자 교류, 연구비 지원, 교역 등을 아낌없이 지원한다면 첫째는 그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지금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조선족 학교의 교원양성, 안정적인 교원 수 유지 및 교원의 질 향상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족 학교를 통해 조선족에게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민족교육으로 후대를 지켜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조선족 학교가 줄어듦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국어만 하는 젊은 조선족들이 늘어가고 있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들이 우리 민족성을 잃게 되는 것엔 그들에게 무관심한 우리의 책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선족을 돕기 위해서는 연변지역을 포함한 길림성내 조선족 인구의 집중 분포지역에 조선족 중소학교의 교원 양성 및 안정된 교원 수 유지가 매우 중요하며, 여기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현재 연변지역을 포함한 길림성내 조선족 집중분포지역에서 지역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한 교원들의 낮은 수입과 어려운 생활조건은 많은 조선족 교원들의 교직 이탈 및 불안정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농촌지역의 교원양성과 보충의 어려움에 따른 부족한 교원 수는 조선족 학생들의 질 좋은 학습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 도시 진출로 인한 조선족 인구 감소는 조선족 학교의 생존위기와 교사들의 교직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현재 이미 많은 조선족학교가 폐쇄 또는 합병된 상태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청장년의 한국 진출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시골에는 노약자와 일부 어린이들만 거주하고 생활하는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어린이를 현(군에 해당됨) 소재지의 학교에 기숙하거나 친인척에 의뢰하여 학교에 보내고 있는 가정도 많다고 하니, 우리 정부를 통한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을 비롯하여 기업과 시민단체 등을 통한 지원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본인(사진)도 1990년대, 2000년대에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으로 70여 명의 조선족 학자들의 국내 대학에서 수학할 때 도운 경험이 있다. 우리 민족답게 그들은 매우 명석하고 뛰어나며 성실했다. 이미 중국에 정착한 이들에게 우리가 적극 지원해준다면 능히 중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크게 자랄 잠재력이 충분하다. 무한한 자원과 기회의 땅인 중국에서 우리가 더욱 수월하게 진출하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형제이며 혈족인 조선족이 중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질 수 있도록 우리가 적극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은 우리와 함께 통일(統一)된 미래를 열어갈 우리나라의 동반자인 동시에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본 포럼(상임의장 최진호, 한림원 종신회원)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발해로 이어진 우리의 옛 고토(古土) 중국 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의 동북 3성에는 지금도 200만 명이 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우리말 간판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족 동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지금은 영남대 석좌교수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이돈구 교수님의 동북 3성의 조선족 연구와 교육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9-23
  • 중국의 원 부총리 오의 여사의 미혼내막
    중국의 원 부총이 오의(吴仪)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그한테는 비밀이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뭇사람들한테 한가지 큰 의문을 남기었다. 감정이 그렇듯 풍부한 여인이 왜 줄곧 싱글로 생활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오의 여사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생활은 나한테 결혼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시기를 놓쳤으니 억지로 결혼생활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역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은 시절의 오의는 낭만주의와 영웅주의 색채가 짙은 소련문학을 즐겨 읽었다. 언제인가 오의는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란 책을 읽은 뒤 결연히 석유전업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책의 주인공 토만노프(特曼诺夫)와 같은 “백마왕자”가 자리잡게 되었다. 후에 오의 여사는 “백마왕자”란 실제 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다면서 그제날 자기가 너무 이상주의 생활을 추구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젊은 시절의 과분한 이상주의애정관과 분망한 사업 등으로 오의는 줄곧 따뜻한 사랑의 항만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오의는 늘 자신은 “쾌활한 싱글”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성격이 쾌활하고 취미가 다방면으로 북경에서 있은 몇차례의 낚시경기에서 그는 수차 우승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남성동료들은 “이 물고기들이 오의가 이쁘니까 전문 그녀한테로 헤염쳐오는게 아닌가?”라고 우스개를 했다고 한다. 그가 지도일군 직무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수하의 남성들이 수긍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면 오의는 웃으면서 “난 줄곧 남성동료들과 잘 어울린다”고 대답하군 했다. 그는 감정을 중히 여겼고 하급을 잘 관심하여 남성지도일군한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세심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한다치면 과단성이 있어 여성대장부다운 풍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 성장은 “원칙을 견지하고 실제적이며 의리와 감정을 중히 여기는 훌륭한 누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찍 젊은 시절 친구들은 오의 여사의 외관을 두고 “이쁘다”는 말을 아주 적게 썼다고 한다. 원적이 호북 북해인 오의는 1938년 가을 무한의 한 보통 지식분자가정에서 출생, 형제로는 8살 이상인 오빠뿐이었다. 오의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떴기에 기본상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때 오의는 오빠를 따라 사처로 다니며 생활, 한시기 중경에 있는 친척집에 의탁해 살기도 했고 후에 오빠를 따라 난주에 가서는 난주여자중학(지금의 난주시27중)에서 공부를 하였다. 난주여자중학교 노교장의 회억에 따르면 그 시기 여학생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러 땋았으나 유독 오의만은 단발머리를 하여 남학생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의가 치마를 입은 것도 거의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오의는 “이쁘다”는 말을 별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 90연대에 들어 오의를 취재한 한 기자는 오의 여사의 생김새를 놓고 “오의는 이쁘다기보다는 멋지었다. 피부가 희고 오관이 단정하였으며 얼굴윤곽이 좀 클뿐이었다. 이는 오히려 오의로 하여금 더욱 호방하고도 대범하게 보이게 했다”라고 묘사하였다. 1988년 TV방송을 통해 북경시 부시장 후선인으로 선보였을 때 오의는 쟈켓을 입고 테가 굵은 안경을 걸었었다. 후에 오의 역시 자신이 다른 여사들과는 애호가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 “나는 다른 여성들처럼 쇼핑을 즐기는 축이 못된다”고 고백하였었다. 하지만 “미”를 추구하는 천성은 다른 여성들과 조금도 구별이 없었다. 1991년 북경시 부시장으로 된 오의와 기타 도시의 99명 부시장들이 항주에 모여 중국 여시장친목회 설립했다. 설립식이 있은 그날 저녁 53세의 오의는 연회석상에 들어설 때 아름다운 치포를 입고 선보였다. 순간 연회청내는 대뜸 더욱 밝아지는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체들에서 오의를 보도할 때는 자주 “오의는 그 어떤 공공장소에 나타나든 항상 우아한 옷차림을 했으며 새하얀 머리칼은 한오리도 흐트러짐이 없다”라고 묘사하군 하였다. 2003년 3월에 오의가 국무원 부총리로 당선된 뒤 얼마 안되어 중국에는 전국을 휩쓴 사스가 만연되었다. 그러자 국무원 부총리 겸 국가위생부 부장으로 사스를 박멸하는 제1선에 나가 지휘하군 하였다. 그 당시 오의 부총리는 낮엔 사처로 뛰어다니며 사스박멸현장을 지휘하고 저녁이 되면 홀로 임시거처에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위에 던지군 했다. 오의 여사의 회억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고독이란 뭔가를 몰랐지만 나이 60세를 넘기고 보니 신변에 남편도 자식도 없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의는 인차 이지를 되찾고 자신을 달래면서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청년시절 온몸에 이상주의 색채가 농후했던 오의는 “문학청년”으로 될 꿈을 가져봤고 소련문학에 빠지면서부터는 석유공업발전에 자기의 한생을 바치리라는 포부를 지니기도 했으며 후에 소련영화 “서광이 비낀 모스크바”를 본 뒤에는 한명의 유명한 여공장장으로 돼보려는 꿈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의 여사는 너무도 꿈과 이상만 추구하다보니 결국 장장 10여년에 달하는 결혼적령기를 놓쳐버렸고 후에는 아주 결혼꿈을 포기한채 싱글여성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출처: 신화넷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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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1
  • 모택동이 입지 못했던 원수복
    1955년 중국군은 첫 군급제를 실행, 원수가 제1등 군급이었다. 그리고 그 원수급 또한 공화국 대원수와 공화국 원수 이렇게 두가지 계급으로 나뉘었다. 군급제로 말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대원수에 대한 표준규정이 매우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통신 자료에 따르면 당시 모택동더러 대원수 군급을 접수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인대상무위에서는 전문 회의를 열고 이를 토론, 이를 최고입법기구의 결의로 통과시켰다. 당시 회의를 사회한 전국인대 위원장 유소기는 모택동이 긍정코 대원수급 직함을 접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최고입법기구를 통해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종 최고입법기구의 결의도 결국 모택동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그 연고로 후에 군급제 실행식 때 모택동이 대원수급 직함을 거절하였기에 당시 대원수급 자리는 비어있었고 그 뒤 중국의 대원수 자리는 계속 공백으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그 때 만든 대원수제복은 현재까지도 박물관에 소장되어있을 수밖에 없게 됐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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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9
  • 모택동가족중의 최고 미녀 이리리
    일단 모택동의 일가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가족 중 가장 이쁜 여성이 이실(모원신)의 딸 이리리(李莉莉)란 것을 알 수 있다. 리리는 1977년생으로 당시 아버지 모원신이 갓 감옥에 갇히고 어머니 전수봉(全秀凤)마저 격리심사를 받을 때 태어났다. 리리는 태어나서 10개월이 되자 오랫동안 열이 나면서 앓았다. 당시 리리는 마이실린 닝게르를 너무 많이 맞은 탓에 두 귀가 청력을 잃기까지 했다. 1982년 리리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모원신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을 방문, 당시 5살에 불과한 리리는 아버지가 다가와 안으려 하자 어머니의 뒤에 몸을 숨기며 아무리 얼려도 낯선 아버지가 자기를 다치지 못하게 했다. 모원신이 출옥한 후 이들 세식구는 13평방미터가 되는 상해의 한 주택으로 입주, 리리는 늘 옆방에 있는 외삼촌네 집에 가서 거주했으며 모원신이 좀 가까이 하려 해도 외삼촌네 집으로 달려가군 했다. 거기에 언어교류까지 곤란해 부녀사이에 모든 소통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의 가슴에까지 못을 박았구나.” 모원신은 자책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잠을 못이루군 하였다. 그 뒤 모원신은 모든 정력을 딸애의 성장에 돌렸으며 부녀사이는 차츰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리리가 초중을 졸업하고 상해농아청년기술학교 미술반에 붙자 더욱 극성스레 딸애의 뒤받침을 해주었으며 졸업후 사회에 진출해 사업하게 되자 컴퓨터를 사주어 과외시간에 컴퓨터를 연마하게 했다. 리리는 2007년에 상해대학 미술학원 농아성인교육 전과반에 입학했고 2000년도에 졸업증서를 취득했다. 현재 모원신은 딸애의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딸애더러 대학본과시험에 참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딸애의 성장으로 지금 이들 부녀사이의 감정은 갈수록 깊어가고 잇다. 현재 리리는 주동적으로 부친 모원신을 돌봐드리는 착한 딸로 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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