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16일은 중국의 첫 핵무기인 원자폭탄이 실험에 성공한 날이다. 이날 중국의 신화넷은 이를 기념하여 “안정된 유산 ㅡ 중국의 첫 핵무기 원자폭탄 탄생하기까지”란 제목으로 된 특별기획을 실었다.  
 
50년전 중국이 신강 놀누루(罗布泊)에서 첫 원자폭탄의 실험에 성공하면서 중국은 미국, 구소련,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다섯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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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의 영화와 중국의 “상수리나무령” 
  
1954년 청해성 해북장족자치주 목민들의 생활을 반영한 영화 “금은탄(金银滩)”이 중국내지에서 방영되자 대뜸 센세이션을 일으컸다. 헌데 약 반년 뒤 갑자기 이 영화가 긴급 방영금지가 되었고 그 원인은 미스터리었다.  
 
그 뒤 4년이 지난 1958년의 겨울, 23세에 나는 낙양광산기계공장 리프링(吊装) 기술원 두학우는 이미 임신한 아내의 곁을 떠나 수십명에 달하는 공장직원들과 함께 모란의 도시를 떠나 서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몇년이 지난뒤 영화 “금은탄”이 방영이 금지된 미스터리가 풀리었다. 한시기 중국제2공업기계부 군사공업국 부국장을 맡았던 장치나의 회억에 따르면 1958년 여름 동료들과 함께 중국 서부에서 핵무기연구제작기지를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이 선택한 적합지의 하나인 청해성 북주지구 해안현(海晏县) 경내에 있는 금은탄에 이르자 수행인원인 구소련 전문가는 “중국에서 이곳보다 더 좋은 핵무기연구제작기지감은 없다”고 인정했다.  
 
금은탄 핵무기연구개발 기지 
 
금은탄은 해발 3200미터이고 면적은 1100평방킬로미터였으며 동남쪽은 무연한 초원이었다. 그리고 지형이 평탄하고 동, 서, 북에 높은 산으로 둘러있었으며 특히 주변의 구릉지대는 폭발시험을 하기 알맞춤했다. 거기에 인적이 거의 없어 핵무기제조연구기지를 건설하기에는 아주 이상적이었다.  
 
이렇게 되어 금은탄은 원자폭탄을 연구제작하는 중국의 “상수리나무령기지”로 되었고 비밀고수를 위해 영화 “금은탄”의 방영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상수리나무령기지”란 미국의 221공장기지로 일찍 1942년 미국이 테네씨주의 상수리나무령에 건설한 핵무기연구제작 기지를 말하는 것이다.  
 
1945년 8월 미국은 이 상수령나무령기지에서 연구제작한 원자폭탄 2매를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1매씩 투하해 일본을 굴복시켰다. 그 때로부터 인류는 핵무기시대에 진입했으며 이어 냉전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수차례에 거쳐 서방세계로부터 오는 핵위협을 받아야 했다.  
 
두학우에 따르면 당시 서행길에 오르기전에 그가 원자폭탄에 대한 풍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를 자기와는 연계시켜본적이 없었다.  
 
난주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린 후 그들은 재차 트럭에 앉아 2주야를 달린 뒤 드디어 금은탄에 도착했다. 사전에 간고한 생활에 대한 심리적 준비는 있었으나 정작 그곳의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사전의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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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에서의 첫 날) 
 
두학우 일행이 금은탄에 도착한 첫날 큰 눈이 내렸기에 그들은 서둘러 막사를 설치하였다. 당시 그들의 행장에는 방한용으로 되는 “네가지”가 있었다. 그것들로는 개털모자, 양털탄자, 두터운 솜신과 솜외투뿐이었다. 그들은 내리는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사를 치다보니 모두가 하얀눈을 맞았으며 한결같이 “산타할아버지”와도 같았다.  
 
그 뒤 중국이 “3년의 고난시기(1959 – 1961년)”에 들어서자 두학우 등 금은탄 기지의 일군들한테는 인당 매달 10킬로그램의 식량뿐이었고 부식이란 거의 없었다. 당시 그들은 너무나 굶다못해 다리가 붓기고 손톱이 빠진 사람이 수두룩했다.  
 
이렇듯 간고한 조건하에서도 1963년 중국 핵무기연구제작기지의 기초시설건설은 기본상 완수되었고 그해의 여름 마침내 두학우와 그의 동료들은 목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5년만에 해보는 첫 목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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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탄 기지에서의 첫 창업) 
 
한편 북경 모 과학연구소에서 사업하던 청년공정사 유조민은 북경 기차역에서 출발, 가족한테는 그저 “전방으로 간다”는 말만 남기고는 서북으로 향발했으며 최종 역시 금은탄에 도착하였다.  
 
금은탄기지에서 유조민의 연구항목은 폭파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실험설비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다. 특히 폭파약절단 등 극히 위험한 작업도 사람이 직접 쇠톱으로 잘라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폭발위험은 수시로 있었다.  
 
당시 유조민은 중국내 20개 성과 시의 400여개 공장과 연구기구의 1만여명 과학연구일군과 기술 노동자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을 감내하면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며 그 1만여명의 사람들 역시 이곳으로 올 때까지 자기가 원자폭탄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1964년 1월, 중국에서는 원자폭탄제조시 원료를 담을 때 쓰이는 존재비(丰度) 90%인 우라늄병 235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고 그해 4월에는 첫 핵부분품생산에도 성공했으며 5월에는 무기급 우라늄핵심부품생산준비가 기본상 완성되었다. 
 
그 해 6월 6일, 금은탄 221기지에서는 유조민 등이 참여하에 폴리메라아제(聚合酶)의 폭발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는 중국의 원자폭탄 연구제작기술이 이미 기술난관을 정복했음을 표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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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탄 211기지의 실험일군들) 
 
 서북의 상공에 피어오른 “버섯모양의 구름” 
 
1963년 말경, 두학우와 그의 일행은 재차 서북행 열차에 올랐다. 가족과는 역시 그저 “전방에 나간다”는 말만 남겼고 모든 것은 비밀에 붙였다.  
 
최종 그들이 도착한 곳은 금은탄에서 서북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신강의 놀루르(罗布泊)란 지방이었다. 그 때로부터 짧디짧은 수개월 후 이 곳에는 높이가 102미터 되는 철탑이 도합 8600여개가 땅을 차고 일어섰다. 바로 이 곳에서 중국의 첫 원자폭탄실험이 있게 된 것이다.  
 
후에 중국의 과학연구부분에서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원자폭탄을 실험하던 당시 두학우와 함께 원자폭탄을 설치하고 조절한 사업일군은 도합 5058명이었다고 한다.  
 
1964년 10월 16일 아침 6시 30분, 원자폭탄에 뇌관이 장착되었고 마지막 인원들이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두학우는 당시 맨 나중에 철수한 수십명중의 일원으로 근본 자기의 뒤에서 원자폭탄이 터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로 위험한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두학우와 동료들은 60킬로미터 밖에 있는 백운강 관측점에까지 철수, 그 곳에서 원자폭탄의 폭발장면을 견증하게 되었다.  
 
그 날 15시경, 드디어 거리가 멀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하나의 거대한 버섯모양의 구름같은 것이 놀루르의 상공에 솟구치더니 점차 하늘높이 피어올랐다.  
 
“당시 나는 흥분된 나머지 뭐든지 관계치 않고 보호안경과 모자를 벗어버리고는 면목이 있든 없든간 앞에 보이는 사람을 끌어안고 환호하였다. 이어 나는 옆에 있는 군인의 권고하에 다시 보호안경을 걸었다. 그 군인이 고마웠다. 그가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눈은 꼭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두학우의 말이었다. 
 
그날 밤 중국에서는 방송을 통하여 중국에서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을 세계에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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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되는 순간) 
 
한편 원자폭탄의 연구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유지민은 “나 역시 그날밤의 방송을 통해여 몇년간 우리가 해온 사업이 기실은 원자폭탄을 연구제작해온 사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당시 크게 놀랐다고 했다. 그 역시 약 한달 뒤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야 그 “구름모양의 버섯” 현상을 보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자폭탄의 실험이 성공될 때까지 기지에서는 원자폭탄연구제작이란 말을 일절 쓰지 않고 실험항목이 “쟁기폭탄(争气弹)”이라고만 했던 것이다.  
 
중국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는 전반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서방의 언론들은 “중국의 핵실험 성공은 국제균형을 깨뜨렸으며 중국은 이전에 비해 더욱 빨리 제3세계의 지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 때로부터 중국은 핵실험의 성공과 더불어 상규군사력이 부단히 발전장대해지면서 미국과 구소련 등 강대국들도 더는 중국을 무시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것을 계기로 지난 세기 60연대 중반을 계기로 중국은 외교방면에서 번번히 성공, 특히 1971년에는 유엔에서의 합법적 석위를 회복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중국은 원자폭탄의 실험성공을 발단으로 1966년 10월 27일에는 핵탄두를 장착한 첫 지대지 미사일(地对地导弹)의 발사에 성공했고 그 이듬해 6월 17일에는 첫 수소폭탄의 실험에도 성공하였다.  
 
에필로그 
 
1984년 첫 원자폭탄의 실험이 성공한 20년 뒤 중국은 국제원자능기구에 참가하였고 1992년에는 “핵무기비확산조약”에 싸인하면서 핵무기비확산의무를 지킬 것을 승낙했으며 1996년 이래 그 어떤 핵무기실험도 하지 않았다.  
 
그 때로부터 금은탄의 소음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1987년 중국정부는 금은탄의 211기지를 전면 철거하기로 결정, 1993년에는 211 기지의 원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두학우와 유조민 등 600여명의 일군들은 1990년에 서녕에 있는 211가족원에 이주하여 행복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  
 
2009년에 중국은 금은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청해원자성기념관을 대외에 개방하였고 그 이듬해 당연 금은탄에서 일했던 두학우 노인은 20년만에 처음으로 유람객의 신분으로 금은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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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금은탄) 
 
오늘의 금은탄은 일망무제한 초원이 펼쳐지고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 최초의 원형을 회복했다. 다만 凸형으로 된 기지의 옛터만이 그제날의 그 이야기를 말해주는듯 하다.  
 
그렇다. 평화를 지향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핵무기로 남을 억누르던 시대는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평화, 그리고 중국이 안전하게 경제건설시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강대국들이 갖고 있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출처: 신화넷,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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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첫 핵무기- 원자폭탄 탄생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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