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허연화

 


연변에서 태여나고 자란 필자는 연변말이 참으로 정겹고 좋다. 일본에서 산지 오래되기에 연변말을 할 수 있는 지인을 만나서 연변말로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소중하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 조선족이거나 한국 지인, 자이니찌분(재일동포)들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을 감추려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과 특수한 중국식 우리말 단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 민족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연변사투리를 혼자 한다는 것이 왠지 낯뜨겁다는 의식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연변말이 정겹고 좋은데 무의식적으로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거나 현재 이런 상황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왜 이렇게 연변말을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는 상황이 발생할가? 그것은 단지 편의를 고려해서일 뿐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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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언어자체는 서렬을 매길 수 없다. 하지만 현실생활에서 의식조사를 해보면 어느 나라에든 낮게 평가되는 방언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동북지역의 방언은 촌스럽고 열등하게 평가되며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일본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방언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한 한국 국내에서도 서울 및 서울말의 패권주의가 사회적문제로 논의되기도 한다.


허나 같은 방언이라도 표준말보다 호의적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교토, 오사카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는 간사이벤(関西弁)이라는 방언은 현재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토지역은 교토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화하고 아름답고 정중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왜 어떤 방언은 열등감을 조성하고 어떤 방언은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일가?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편견에서 온다. 편견이라는 단어는 종종 나쁜 결과와 연계할때가 많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편견이란 어떤 집단의 성원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가지고있는 의견이나 태도를 말한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직면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인 편견을 갖고 있고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정된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기를 거부한다.


그럼 이런 편견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가? 우선 매체의 영향으로부터 분석할 수 있다. 연변사람, 연변말의 경우 한국TV의 뉴스와 드라마, 연예프로에서 부각된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 사실 한국에서의 “조선족”은 연변출신 뿐만은 아니라 흑룡강성, 요녕성출신도 많다. 연변 이외의 출신의 말투는 연변말투와 다르며 경상도쪽의 말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조선족”하면 연변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각된다. 


문제는 메체에서 보도되는 “조선족”의 표상이 특히 한국 진출 초기에는 사회 밑층에서 사는 폭력적이고 거칠며 도시화되지 않은 모습이 위주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진출 초기 조선족이 종사한 일이 같은 한국사람일지라도 천대받고 기피하는 원향어선이나 3D(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통하는것 같은데 아닌것 같은, 서로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끼던 적응단계였기에 크고작은 많은 트러블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매체에서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도 변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초기단계의 이미지가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다. 하여 아직도 조선족이 쓰는 연변말은 흔히 조롱의 대상이 되군 하는게 사실이다. 


연변말의 한국에서의 마이나스적 이미지의 영향은 한국사회 뿐만아니라 중국사회 및 중국의 조선족사회에도 파급된다. 한국과 만나기전의 연변말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여러 억양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는 중심이였고 연변말은 주류어였으며 연변에서는 “표준어”로 통했다. 같은 연변에서 사는 한족들도 연변말을 따라하거나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중심이였던 서시장일대를 가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아재, 아재”하고 말을 걸어오군 한다. “아재”란 연변에서 젊은 여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또한 연변은, 중국의 다른 민족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특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며 깨끗하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55여개 소수민족 중에는 천만을 넘거나 가까운 소수민족도 많다. 200만명(2010년 인구조사에서는 183만명)도 안되는 조선족이지만 예술에 능하고 교육률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국가를 만든 정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강경산원사(중국에서 과학기술방면의 최고학술칭호), 중국대지의 각 대학의 조선족교수들, 우리말/우리문화를 유지하려는 모든 조선족들의 노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붐이 중국대지에 퍼지면서 한국 매체에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중국에서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게다가 중국처럼 큰 땅떵어리에서 소수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없는 지방에서는 되려 한국 매체에서의 “조선족”의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로 자리잡을 때가 많다. 


매체의 마이나스적 효과는 연변이미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매체는 소외, 모방살인, 사람들사이의 무관심의 생성, 편견의 강화,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의 왜소화와 간단화를 조성할 수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시청취자들은 그냥 피동적으로 매체가 보여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시청취자들은 몰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절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별개다. 영국의 어떤 대학의 연구팀에서는 과거 TV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력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뉴스의 객관성보다 화면에 비춰진 폭력적인 기억이 고대로 사람들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류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연구결과이다.


매체가 만드는 것은 부정적인 편견 뿐만이 아니다. 우에서 말한 일본의 간사이지역 방언의 경우가 매체에 의해 전파된 긍정적인 편견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강호동, 류재석으로 통하는 산마, 신스께 등 개그맨거장들이 간사이 지역 출신이고 또한 연예프로그람에서 간사이 출신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함으로써 간사이벤이라는 방언을 전 일본에 침투시켰다. 


상업화된 매체가 주류인 현대사회에서 객관성을 가지기란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매체를 비판적 눈으로 관찰해야 할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편견은 또한 한 집단이 처한 경제적위치와도 관련된다. 한국의 여러 동포들 중에서도 연변말투가 유독 촌스럽다고 부각되는 것은 왜일가?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만난20세기 90년대의 중국의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 많다. 즉 같은 동포라 할지라도 재일, 재미 동포는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에서 온 동경의 대상이고 중국, 구소련 동포들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소련 지역 출신의 동포, 재미, 재일 동포들은 우리말자체의 보유가 매우 어려운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우리말 자체의 유지가 되어있지 못하고 사투리로라도 우리말을 구사할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중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중국소수민족정책이 유효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수민족 집중 거주지에서 민족학교를 꾸리고 조선말로 공부를 할 수 있고 심지어 대학입시시험도 조선어로 시험을 볼 수 있다. 타향에 이주해서도 우리말로 말하고 글을 쓰는 매우 행운스러운 집단이 조선족인 것이다. 물론 연변말은 다른 모든 방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에서 나왔지만 또 자기 지역의 특정에 따라 변이를 거친 것은 사실이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은 것에 대한 자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되려 “고국”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유지해온 우리말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비웃음을 당한격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가난한 동포, “가난하다는건 게으른 것이고 못배워서이다”는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여 조선족이 쓰는 언어마저 가난해지고 천대받게 된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한반도외에서 유지된 소중한 우리말의 변이인데도 말이다.


편견은 또한 역사적, 정치적 요인과도 관계된다. 예를 들면 일본의 동북지역방언이 자타평가에서 열등적으로 평가받는데는 이 지역이 역사상 분단되고 정치적세력이 약화됨으로써 이 지역의 문화자체도 부당한 평가를 받은 역사가 현재까지 내려온 것이 이유가 아닌가고 분석하기도 한다. 반면 교토는 오랜 세월 일본의 중심이었고 일본스러움의 모든 상징으로서 일본인의 귀속의식이 교토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언어의 이미지는 그 지역의 역사적인 평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면서 여러 지역의 우리민족과 접촉해보면 우리말의 다양성과 변이를 느낄 수 있다. 각 지역의 우리말들이 억양이 다르고 쓰는 단어도 다를 때가 있지만 서로 느끼는 우리말의 기본적인 정서는 공통한 것이 너무 많고 정겹다. 작년 3월, 일본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를 읊는 부분에서 필자는 너무 감동을 먹었다. 우리가 다 아는 윤동주의 시들이 서울억양, 재일동포억양, 조선족억양, 일본인의 우리말발음억양으로 각각 읊어 귀에 들려오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감동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연변말이 낯뜨거웠던 그 시절이 낯뜨겁던 순간이었다. 


“우리말”이라는 것이 “표준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범주로 의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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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변말이 창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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