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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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1931년 말, 일본 여간첩인 가와시와 요시코(川岛芳子)가 일본 관동군의 명령에 의해 천진에 가서 완용을 만주로 데려오게 된다. 그 뒤 1932년 1월, 일본인들의 유혹하에 완용은 여순(旅顺)에서 그녀보다 앞서 그 곳에 도착한 부의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 시기의 부의는 이미 일본 관동군에 의해 조종되는 괴뢰로 되었으며 완용 역시 일본인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당시 만주에서의 완용은 모든 것을 일본인들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으며 그녀의 일거일동 모두가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모덴여성>이었던 완용으로 하여금 가장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결국 완용은 도주를 결심하였다.

 

남경 국민정부의 제1임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顾维钧)의 회고에 따르면 일찍 완용은 만주국정부내의 한 사람을 고물상으로 가장시켜 고유균한테 파견,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고유균 역시 신분상 완용의 탈출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완용은 탈출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8-9월 기간, 위만주국 입법원의 조흔백의 부인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완용은 그녀한테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 때 오직 자기만 탈출에 성공하면 후에 부의까지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한 일본인 첩자가 이를 알아채고는 부의한테 밀고하여 완용의 탈출시도는 재차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그 후 완용은 더는 탈출기회를 찾을 수 없게 됐다.

    

1934년, 3월 1일, 완용은 만주제국의 황후로 책정되었지만 매일 마약과 접촉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병태적인 생활을 지속, 때로는 예쁘게 치장하고 황궁내의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바로 그 시기, 만주국 황궁에서는 완용과 시중꾼 사이의 간통사건이 터지었다. 당시 부의의 말대로라면 완용이 문수를 내쫓자 부의는 완용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아주 오랫동안 완용은 부의로부터 냉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황후라는 존호를 잃을 수 없었는가 하면 부의와 이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반대로 정상적인 생리수요가 있는 여성이었기에 사통이라는 불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완용은 선후로 부의의 시중꾼 이체육(李体育), 기계충(祁继忠) 등과 간통, 나중에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완용의 마약흡입으로부터 사통에 이르기까지에는 오빠의 역할이 컸다는 설도 있다. 일찍 천진에서 대련으로 오는 동안 오빠는 일종의 이익을 챙기고는 자기의 여동생을 한 일본군 장교한테 팔아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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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의 묘
 
1935년, 완용이 여자아이를 출산, 이는 부의로 하여금 대노하게 했다. 당시 부의는 애를 처남(완용의 오빠)한테 맡겨 키우기로 했다고 완용한테 말했으나 기실은 이미 애를 보일러 속에 집어던져 요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분을 삭일 수 없었던 부의는 또 완용을 황궁에서 가장 추운 방에 한동안 가두어 놓기도 했다.
 
그 뒤 완용은 지나친 정신적 타격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병에 걸려있던 나날, 완용은 완전히 미치광이였다. 치장은 고사하고 매일 울고 웃고 하였으며 유일하게 남은 습관이란 곧바로 매일 마약을 흡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이 엄중할 때는 방안(갇혀있는 독방)에서 거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두 눈은 한 점의 광채도 없이 늘 흐리터분하였다. 또한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울면서 자기의 부친을 욕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욕해대군 했다.
 
1945년 8월, 소련은 <8월 폭풍>으로 명명된 군사행동으로 신속히 만주 전체를 점령, 8월 11일 완용은 신경(장춘)을 떠나 통화로 피난 가던 중 따리즈거우(大栗子沟)에서 당지의 유격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완용은 통화, 장춘, 영길(永吉), 돈화와 연길 등지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6년 6월 10경에 연길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 여러 가지 설이 난무, <낡은 온돌 삿자리에 말아 연길 북산에 버려졌다>는 설과 <연길 남산(즉 모아산 주변)에 묻혔다>는 설이 엇갈리었다.
 
그 때로부터 3년 뒤 소련의 시베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부의는 동생 부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완용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비애에 잠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2006년 10월 23일, 완용의 남동생 윤기의 동의를 거쳐 하북성 청서릉(清西陵)밖에 있는 화룡황가릉원(华龙皇家陵园)에서는 초혼(招魂)의 형식으로 된 완용과 부의의 합장의식이 있었으며 묘비에는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라고 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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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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