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김철균
     3
 
순자 옆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계속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인류생활사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고 또 결혼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은 자연적인 윤리라 하지만 그 당시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인 집체호로 인해 우리 중국에 나타나 수천수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정든 도시와 부모의 곁을 떠나 농촌으로 가야 했다.
 
순자의 가정도 영남이와 영순이가 떠난 뒤를 이어 1970년에는 영옥이가 떠났고 1973년에는 영애, 또 그 뒤엔 경남이까지 집체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용환이는 비록 돈화의 “5.7” 간부학교로부터 돌아와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의료대 성원으로 뽑혀 몇 달씩 내몽골과 기타 지구에 가있군 하다보니 역시 생이별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에는 집체호에 내려갔던 둘째 아들 경남이까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면서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게 된데는 순자의 역할이 아주 컸다. 당시 경남이는 연길시 장백공사 동풍대대에 하향하였다. 그는 하향한 이듬해에 군에 신청했다.
 
둘째가 군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순자는 아들이 매우 대견스럽게만 느껴졌다. 엄마의 잔등에 업혀 재롱을 부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 덧 성인이 되어 집체호로 내려갔고 이젠 또 군에 신청하다니 그야말로 볼수록 자랑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신체검사나 기타 심사에서 탈락하지는 않을는지 슬며시 우려되기도 했다.
 
기실 순자는 해방군을 몹시 흠모하였었다.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을 하고 나섰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져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아들 영남이를 군대에 신청하게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당시엔 남편인 김용환이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있었기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정출신이 좋겠다, 남편도 “외국특무”란 누명도 벗었겠다 거기에 신체까지 좋은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안절부절하던 순자는 마침내 둘째 아들 경남이가 하향한 동풍대대를 찾아갔다.
 
동풍대대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을 만난 순자는 찾아온 목적을 이실직고하였다.
 
“저는 아들 셋이나 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아들 셋 중 군대에 간 아들은 아직 한명도 없답니다. 큰 아들은 한시기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있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걔들 아버지의 모자도 벗었으니 둘째 아들만은 꼭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께서 아무쪼록 저의 아들이 신체만 합격된다면 첫 사람으로 추천해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순자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뭔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니, 경남이는 집체호 지식청년이기에 몇년 안 있어도 노동자 모집으로 도시에 올라갈 수 있겠는데 왜 부디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군대에 가면 농촌 못지 않게 힘들고 고생스러울텐데요?!”
 
“그것 때문이 아니랍니다. 남자대장부로 생겨서 나라를 지키는 일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생을 겪어봐야 더욱 견강한 남아가 될 것이 아닙니까? 또 아들 셋이나 두고 그 중 한명도 군대에 보내지 못하면 제가 어떻게 당당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몹시 감동돼하면서 경남이가 평소의 표현도 출중하고 신체도 좋으니 경남이를 적극 추천하겠노라고 답복을 주는 것이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과 작별한 순자는 또 장백공사 무장부에도 찾아가 무장부장한테 재삼 이상과 같은 부탁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남이가 평소에 잘해서인지 아니면 순자가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외교활동”을 적극 벌여서인지 그 해 겨울 경남이는 자신의 뜻대로 군대에 나가게 됐다. 그것도 일반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입대에 성공했다. 소속부대는 광서에 있는 모 해군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의 남부 변경지대의 형세는 몹시 복잡했다. 1975년 베트남 북방이 남부를 해방하고 통일을 실현한 후 점차 구소련의 힘을 믿고 중국과 등지는 외교를 해오다가 1976년 9월 중국의 모택동주석이 서거하자 공공연히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과 엇서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당연히 변경에서의 집탈로 표현되었다. 베트남군은 쩍하면 포사격으로 중국 변경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였는가 하면 때로는 중국 쪽으로 건너와 중국주민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중국 주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화교들을 탄압하고 내쫓는 행위를 감행, 한시기 양국의 변경다리로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화교들로 줄을 잇기도 했다.
 
베트남당국은 중국의 참을 수 있는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계속했다.
두나라 관계는 일촉일발의 전쟁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바로 이럴 때 경남이가 군에 입대, 그것도 중국과 베트남 변경인 광서로 가게 되었다.
 
드디어 경남이가 참군한 그 이듬 해인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에는 운남과 광서의 변방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이네가 소속한 해군부대도 출격한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장기간 전쟁이 세례를 받은 베트남 군대는 몹시 지독하다”느니 “부상당한 베트남의 여민병은 중국군대의 등에 업혔다가도 비수를 뽑아 중국군대의 목에 찌른다”느니 “인원상에서는 중국군대 측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수없이 나돌았다.
 
(혹시 경남이네도 전선에 나가 베트남해군과 맞붙지는 않았는지? 또한 싸움 중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순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년간 키워오면서 남의 집 애들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는데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여 혹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자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건 순자 역시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순자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되지 않았던가.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깝다고 붙잡고 있으면 이 나라는 그래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순자는 부대에 간 아들 경남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또한 혹시 그 경남이한테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아들을 부대로 보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4
 
순자의 막내아들 김진이는 다행히도 하향지식청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자녀 5명이 농촌으로 하향하면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라의 정책이 있었기에 그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7평방미터가 되는 작은 집에는 순자와 막내아들 김진 이렇게 모자 두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식구가 단촐하면 살림을 조직하기가 보다 쉽다는건 살림살이를 해본 모든 주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군 하는 이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자네만은 그 예외였다.
 
당시 순자의 남편 용환이의 노임은 55원이었는데 의료대로 외지생활을 하는 용환이한테 매달마다 얼마씩 보내고 난 뒤 나머지로 집안의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아니, 집체호에 내려간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의 비누와 치약 등을 사는 생활비용도 대주어야 했다. 그것은 남편과 모든 자식들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할 때보다 그 생활비용이 곱절 더 들었다. 생활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같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그것이 흔히 아주 적어 눈에 차지 않고 만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퍼주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자리나게 축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집에서 여러 곳에 지원하며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로서는 적은 생활비로 여기 저기에 맞춰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남편의 노임을 받는 날로 그것이 거덜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달에는 쌀밥 한끼를 해먹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었고 기타 배급표로 나오는 돼지고기같은 부식품을 사먹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바로 이 때 신흥가두판사처와 제 9 거민 위원회에서는 순자네 가정의 생활형편을 요해한 뒤 토론을 거쳐 순자더러 연변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가 임시일이라도 하려면 거민 위원회에서 주민들이 선거추천하고 가두판사처의 토론과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종 “빈곤부축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만 가정이 가난해서만 여기에 뽑혀 임시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출신토대가 좋고 사회적인 평가도 좋은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판 “노가다”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사장에서 임시일을 할 수 있게 된 김순자, 이는 건국전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순자한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순자는 억울했다. 명신여자중학교때의 동창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봐도 억울했고 자갈치기, 벽돌부리기와 시멘트반죽을 나르던 몸이 데친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채 퇴근해서는 또 뒤죽박죽이 된 집안을 거두며 저녁밥을 지을 때도 억울했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억울함을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순자는 이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생학교 기숙사의 임시공일을 할 때도 그랬고 건축공사장의 막 일을 하는 그 때도 역시 순자는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였다.
 
한편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는 순자의 정신세계는 그 곳 건축공사장에서도 체현되었다.
 
당시 공사장에는 순자처럼 임시공일을 하는 ×××이란 젊은 한족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공사장 책임자한테 며칠간 휴식하련다고 말미를 맏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말미를 맡고 며칠씩 나오지 않는 일이란 흔히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자는 그녀가 말미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있나보다고 여겼을뿐이었다. 헌데 며칠 뒤에 나타난 ×××이란 여인은 얼굴색이 백지장같고 몹시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다.
 
(저 여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순자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 여인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현훈증을 느끼는지 외바퀴밀차를 밀다말고 자주 땅에 주저앉는 것이았다. 그리고 그닥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내돋군 하였다.
 
“아니, 임자. 자네한테 웬 일이 있는 모양이구만.”
 
“아니, 아무런 일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언니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두손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분명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아니 임자, 웬 일이요? 내가 조선족이라고 거리감을 두지 말고 언니처럼 생각하오. 어서 말해보오. 대체 웬 일이요?”
 
“언니, 기실… 기실 제가 2일전에 낙태수술을 했어요.”
 
“뭐, 유산을 하고 일하러 나왔다고?! 쯧쯧…그 몸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어?! 내가 책임자한테 말할테니 집에 들어가 며칠 푹 쉬다가 나오라구.”
 
그러자 ×××여인은 급기야 순자의 입을 막으며 사정했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기실 저의 집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예요. 그러다가 책임일군이 혹시 저를 자르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에 순자 역시 짚이는데가 있었다. 자신 역시 가정의 생활고 때문에 건축공사장에서도 제일 힘든 임시공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죽했으면 이 몸을 갖고 일나오겠는가!
 
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가 일하던 모래를 치는 곳에 가서 삽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여인한테 돌려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있어 순자는 다시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안되겠어. 임자 내가 하던 모래치는 일을 하라구.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테니.”
 
“?!…”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뭘해? 어서 저 쪽에 가서 모래를 치라구?”
 
그제야 순자의 뜻을 알아차린 ×××여인은 “언니, 감사해요”라고 하면서 외바퀴밀차를 순자한테 넘겨주었다.
 
순자가 하던 모래를 치는 일을 하는 ×××는 자주 감동으로 어깨를 들먹이었다.
 
후에 몸이 완쾌되자 ×××여인은 호떡 2개를 사가지고 순자를 찾아왔다. 자기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맡아준 순자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순자는 그 호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족 여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임잔 참 성질이 곧은 아낙네구려. 그럼 임자가 나의 일을 대신 해준다면 나는 조선족 찰떡을 사주어야겠구만.”
 
순자의 농담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도 참”하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한편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는 3년간 순자는 해마다 “선진사업자”와 “민족단결모범”을 되었다. 이는 임시공들 중에서는 유일한 “선진사업자”였고 “민족단결모범”이었다. 또한 건축공사와 순자와의 계약은 더는 가두판사처의 추천과 소개를 거치지 않고 건축공사에서 직접 채용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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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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