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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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FC 특집보도]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김철균 기자 프로필 1957년 8월 26일 생연변대학 통신학부(현재의 성인학원) 졸업선후로 훈춘시방송국, 연변라디오방송국, 연변일보사에서 사업현재 연변일보 종합신문 편집국장, 길림신문 축구논평원,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등 겸임단편소설 “잃은 것과 얻은 것”, “수산나”,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실화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조선족”, 수필 “사향심” 등 200여편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합작저서 “야망의 축구스타”, 번역작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오묘한 세계대백과”, “연변레저지남” 등이 있음청년생활 “화연문화상”, 연변라디오방송국 “라디오문학상”, 길림신문 “신춘문예상” 등 여러편 수상 연변팀 고훈 감독편 길은 개척하기에 달렸다 길림오동팀 고훈 감독이 보는 갑A 제1단계 경기 가렬처절하던 1999년 중국축구 갑A 시즌 제1단계 경기가 지난 9일에 끝났다. 9일까지 우리 길림오동팀은 3승, 4무, 2패로 잠시 갑A의 제6위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감독으로서 나는 오늘과 같은 좋은 성적을 위해 하나처럼 똘똘 뭉쳐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과 팀에 열정적인 성원을 보내준 광범한 연변의 축구팬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지난 9라운드의 경험과 교훈을 잘 총화해보는 것도 팀의 앞길에 이롭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시즌이 끝난 그 당시 전반 팀이 탈진상태에 처해 있었고 그 때의 그 상태로 새해시즌에 뛰어든다는 것은 억지다짐이고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연변축구구락부 지도층에서는 거듭되는 연구끝에 몇가지 방침을 제정하고 그것을 즉시 실천해 나갔다. 첫째, 일찍 손쓰고 빈틈없이 준비했다. 우선 팀의 지도부력량을 강화했다. 원 감독진의 기초상에서 코치직을 구락부의 전명호 주임이 맡기로 하고 원 2팀에 있던 김광수지도를 보충했다. 목적은 감독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각자가 맡은 바의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지도진영이 결정되자 즉시 외적 선수 및 국내 선수 물색에 달라붙었다. 아시안게임과 조선선수 고찰 및 조경과 해경 훈련기지에서 수많은 외적 선수들을 반복적으로 고찰하다가 최후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테니 선수를 선택했고 국내선수 영입에서는 수십명을 고찰하던 끝에 왕해파, 학위동, 우용 이 3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둘째, 동계전지훈련을 일찍 시작하고 훈련량을 늘이었다. 지난해 시즌에서 거의 탈진상태에 처한 팀을 보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지만 우리 팀한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서 지난해 시즌이 끝난 20여일만에 강훈련에 들어갔다. 그 목적은 체능시험에 무난히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그 강도를 보면 신체가 좋다는 왕해파 선수마저도 “이건 훈련이 아니라 사람잡이”라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극한의 훈련을 통해 고종훈을 비록한 모든 선수들이 1차적으로 체능시험에 통과되어 올해의 경기에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한 한편 남호, 정동칠 등 싹수가 보이는 선수들을 새로 발견하여 공격선과 수비선에 큰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셋째, 외적선수 영입과 국내선수 영입이 비교적 적중했다. 조선의 조인철, 리창하, 강춘일 등 선수들을 받지 않은데 대한 축구팬들과 매스컴에서도 의론이 많았지만 그들을 받지 않은 이유라면 그들이 우리가 수요하는 위치(그 위치의 선수는 우리 팀에도 많음)의 선수가 아니었고 또한 그들이 갑B리그에서는 출중했지만 갑A리그에서도 작용이 클까 하는 것이 미타했으며 그들이 또한 한국행 훈련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블라이마와 졸라 등을 계속 유임시키는 전제하에서 테니를 새로 받았다. 그 목적은 졸라는 기술형이고 테니는 충격형이어서 각 자의 특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내선수 영입에서는 미드필더진과 수비진에 주로 모를 박았는데 왕해파와 학위동이 비교적 이상적이었다. 이쯤되니 우리 팀의 실력이 지난해에 비해 많이 강화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팀들을 경시할 수 없었으며 금년도 목표를 정할 때 여전히 갑A 보존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남들도 실력이 많이 제고됐기 때문이었다. 갑A시즌이 개시되자 우리 팀은 제1라운드에서 원정경기로 광주송일팀과 맞붙게 됐다. 원정경기인데다 송일팀의 내막을 잘 알지 못했기에 우리는 맹목적인 공격에만 병력을 투입한 것이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몇차례의 역습을 들이댔다. 결과 송일팀은 공격차수가 훨씬 많았지만 견고한 우리의 방선을 뚫지 못했고 반대로 우리 팀은 몇번 안되는 공격이었지만 챤스가 좋았기에 1골을 성사해 3점을 따게 됐다. 송일팀과 이긴 뒤 우리는 계속하여 상해신화팀과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에서도 역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역습을 시도하는 전술로 강팀인 이 두팀과도 무승부로 손을 잡게 됐다. 이렇게 송일팀과 이기고 상해와 대련팀 및 천진팀과도 빅자 우리들한테는 알게 모르게 자만정서가 나타나게 됐다. 그 원인은 갑A의 제1집단군이라 할 수 없는 산동노능과 중경융흠팀이란데서 기인된듯 싶다. 모두가 알다싶이 산동과 중경과의 두번의 경기에서 연속 졸전을 치렀고 나도 “샤커(下课)”이란 소리를 듣게 됐다. 그것을 검토해 보면 아마도 감독으로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냉정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또한 대 천진팀전에서 팀의 약점이 드러났음에도 계속 그 약점을 시정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 두 졸전을 치른 후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냉정한 자세로 진영체계 및 기전술응용을 재삼 검토하면서 경기마다 신경을 쓴 결과 과연 사천전흥팀과 요녕팀과는 이기고 북경국안과는 비기는 결과를 낳게 됐다. 전 9라운드에서 제일 잘 치른 경기라면 물론 사람마다 보는 견해가 다르겠지만 감독인 내가 보건대 결과는 요녕팀과의 경기가 제일 좋았고 경기풍격을 보면 아마도 대 상해신화팀전,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북경국안팀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다. 그리고 두번의 졸전에 대해서는 우선 감독인 내가 잘 검토하고 다음에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으며 축구팬들한테 죄송함을 재삼 밝히는 바이다. 또한 나의 감독직에 대해 이전에도 언급한적이 있지만 팀이 계속 부진을 겪는다면, 다음 더욱 훌륭한 감독이 나타난다면 나는 언제든지 자리를 내줄 용기가 있다. 허나 경기에서 실패란 피면하기 어려우며 상승장군이란 있을 수 없듯이 갑A 의 중간집단군에 속하는 오동팀이 계속 이기는 경기를 치른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또한 계속 이긴다면 대련만달팀이지 오동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될수록 적게 패하고 많이 이기는 경기를 치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신진들을 많이 단련시킬 것이지만 축구협회컵 경기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치러 나갈 것이다. 총적으로 보아 우리는 제1단계의 경기에서 기본상 예정된 목표에 도달했으며 경기결과에도 만족하게 된다. 한편 경기에서 영원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갑A보존을 완수하면 갑A우승을 노리게 되고 거기서 성공하면 또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을 노리는것이 모든 축구인들의 욕망이다. 그렇다. 축구에서는 영원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김철균 대필 《연변일보》 1999년 5월 17일 싸리나무 한가지 꺽기 쉬워도 아름드리나무는 꺽지 못하리 고훈 감독과 오동군단 A B C 국자호 선수가 한명도 없는 건 물론 고종훈 선수만 빼면 다른 갑A팀에 가서 주력으로 뛸만한 선수도 별반 없는 상황이지만 선수들이 하나의 군단만 형성하면 그 어떤 강팀도 타승할 수 있는 것이 오동팀의 현주소라 할 때, 국가팀마저도 평가전을 꺼려하는 오동팀의 실력요소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들어있을까?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추적과 분석을 해봤다. 단결은 힘, 단결은 승전의 담보 팀의 단결은 최은택 교수가 사령탑을 잡고 있을 때부터 지금 고훈 감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강조하고 있는 팀의 좌우명었다. 오동팀의 감독진영을 놓고 보면 각자가 자기의 맡은 부서에 따라 일을 하지만 팀의 단결에 한해서만은 감독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서로 감독하고 책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오동팀은 조선족, 한족과 외적 선수까지 뒤섞여 있다 보니 단결문제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팀에서는 단결에 불리한 그 어떤 언행도 엄금되고 있으며 일단 일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부터 잘못을 검토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지난해 시즌초기 팀에서 데려온 싸싸와 발렌티가 표현이 그닥지 않자 사회상에서는 의론이 있었고 팀 내부에서도 “숱한 돈을 받는다는 여석들이 왜 그 모양인가?” 하는 등 말썽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당시 사령탑을 잡은 최은택 교수는 “이는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지 선수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후 누가 단결을 파괴하면 작게는 벌금, 크게는 경기참전권 취소 등 일련의 제도를 내왔다. 그 후부터 선수들은 경기에서 지는 등 일에 봉착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과 실수부터 검토하군 했다. 특히 지난번 대 중경융흠팀과의 경기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도 참답게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단결제일을 강조한데서 그것이 사천전흥팀과 요녕팀을 타승할 수 있는 중요한 활력소가 될 수 있었다. 뜨거운 혈형 “오동형” 사람의 혈형은 A, B, O, AB 등 네가지형으로 나뉜다. 하다면 각종 혈형으로 군단을 이룬 오동군단의 총체적 혈형은 과연 어떤 형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동형”이라고 명명함이 지당할 것이다. 사람들의 인상속에 훈련장과 경기장에서의 고훈은 엄한 감독으로 통하지만 생활속의 고훈 감독은 인정이 그렇게도 많은 자애로운 사나이었다. 그한테는 한권의 특수한 수첩이 있었다. 김청 : 1977년 11월 29일생 이광호 : 1971년 9월 16일생 왕광위 : 1978년 1월 6일생 이렇게 오동군단 모든 선수들의 출생 연월일이 기록돼 있다. 감독진에서 선수들한테 보내주는 생일선물은 근근히 생일축하 케이크에 불과하지만 감독과 선수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다. 외적선수에 한해서는 워낙 블라이마가 팀에 대한 기여도 크고 집에 자식이 많은 등 상황에 근거하여 크고 좋은 집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선수들의 정서에 영향이 생긴다는 점을 감안해 졸라와 테니한테도 똑같은 집을 주고 아내와 자식까지 데려오게 했다. 아니나 다를가 올해초 얼마간의 불만이 있던 졸라 선수도 인차 안착하고는 상한 팔에 붕대를 감고서도 열심히 경기에 뛰어들고 있다. 선수들의 생활을 돌볼줄 모르는 감독은 감독자격이 없다는 것이 현임 고훈감독이 신조이다. 팀이 일단 봉페식 훈련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집으로 다녀올 수 없게 됐지만 고훈 감독은 특수상황은 특수하게 처리한다. 얼마전 졸라의 안해가 출산했다. 그녀를 놓고 말하면 만리타향에 와있는 몸이라 친인도 없고 언어소통도 안되기에 남편의 도움이 몹시 필요했다. 고훈 감독은 인차 졸라선수의 고충을 헤아리고는 그더러 가끔씩 집에 다녀오게 했다. 과연 그가 훈련과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독의 관심에 대해서도 몹시 감격해하군 했다. 오동군단의 애향심 고향을 사랑하지 않을 선수가 그 어디에 있겠소만 소수민족 주축으로 이뤄진 군단 – 오동팀 건아들의 애향심은 특별하다. 조사에 따르면 팀의 주력선수 거의 모두가 아무리 높은 보수를 준다고 해도 다른 그 어떤 팀으로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음식습관, 언어소통 등 원인으로 다른 팀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거나 다른 팀에서도 잘 써주지 않는 점도 원인으로 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 고향축구를 위해 힘다하려는 것이 오동팀 선수들의 최대 소망이다. 하기에 고향을 떠나면 마치 축구생애가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선수들마다가 최선을 다하는 기적을 낳군 한다. 이는 또한 선수들한테 무한한 애향심을 불러 일으키는바 부모와 선수들 사이 그리고 선수와 축구팬들 사이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하기에 30만명을 좀 웃도는 작은 연길시건만 오동팀이 경기가 있다 하면 수만명씩 경기장에 모여들 수 있고 선수들 또한 고향의 부모형제 앞이라 그들의 응원에서 자신심과 용기를 얻고 열심히 경기와 훈련에 투신하기에 국내이적 선수들도 일단 오동군단에 오면 명선수가 되고 스타가 되는 것이다. 오동팀 선수들의 정신에 감화되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력진영에 들수 없는 망신도 하니까 100%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실례로 이전의 황경량이 그랬는가 하면 오늘의 왕해파가 그렇게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제실력이 보잘 것 없고 인구가 적은 지구에서 무어진 오동팀이 6년간아니 갑A에서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원인에 대하여 고훈 감독의 기발한 기전술응용 등 여러 가지 실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책략과 조치도 모두 팀 전체를 하나로 묶어세우는데 귀결되는바 그 어느 환절도 단결, 박투, 헌신과 응집력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싸리나무 한가지는 꺾기 쉬워도 아름드리나무는 꺾을수 없는 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5월 24일 낙낙장송 큰 나무도 다듬어야 동량된다 길림오동팀 고훈감독의 신진양성 관리경험 동량이란 무엇인가? “우리 말사전”에 따르면 그건 건축에 쓰이는 대들보를 일컫는 말이다. 하다면 매 하나의 애목이 동량으로 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이런 가설로 오동팀의 신진 양성 및 그 관리에 대해 진맥해본다. 팀의 운명과 신진양성 주지하다싶이 길림오동팀은 그 지리적 위치와 경제상황 및 등 여건으로 외적 선수와 국내 선수 영입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는 구단으로 이는 축구를 혹애하는 연변인들의 심리와는 크게 모순된다. 가령 연변에 오동팀마저 없다면 이 곳의 정신문화생활도 크게 공허하기 마련이다. 이를 감안해 연변 축구구락부 및 오동구단의 주요 과제가 바로 신진발견과 그에 따르는 양성관리었다. 올해 길림오동팀에서는 잠시적인 구단이익에 손상이 가더라도 대담히 신진양성에 모를 박았다. 이는 소장파 감독인 고훈의 굳은 결심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연변태생인 고훈 감독은 장기간 연변팀에서 일해왔기에 연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신진양성의 긴박감도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늘 “나도 언젠가는 감독직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 때의 팀이 크게 병든 팀이라면 나는 연변축구사의 큰 죄인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군 했다. 이로 보아 그는 눈앞의 이익과 명예만을 위해 일하는 일부 다른 감독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올시즌 중반부터 고훈 감독은 팀의 중견인 황동춘 대신 오영군을 자추 출전시키군 했다. 그러자 당시 축구팬들은 “오영군한테 무슨 싹수가 보이는가?”, “고훈 감독이 오영군을 각별히 고와하는 모양이다” 라며 그의 인격과 전술사상까지 의심했다. 허나 후일 오영군의 출전차수가 잦아짐에 따라 축구팬들은 이 신진의 유망정도와 고훈 감독의 뜻을 보아내게 됐다. 그외 블라이마를 대체한 고수춘의 기용, 졸라와 학위동을 대체한 유봉과 남호의 기용 등은 모두 “샤커”소리까지 들으면서 떠올린 고훈 감독이 대담한 시도였다. 과학적인 신진기용법 신진양성이 중요한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루 아침 사이에 신로교체를 완수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길림오동팀의 난제였다. 신진기용 방법상 길림오동팀은 매 훈련 및 경기 단계를 거쳐 신진을 고찰한 후 선수 차이를 두고 신진기용 시간을 정하군 했다. 고훈 감독이 작성한 선수서류를 펼쳐보면 거기엔 선수마다의 슈팅능력, 헤딩술, 공통제력과 경기의식 등이 점수제로 기록돼있는가 하면 그 선수들의 특점 예하면 정동칠은 득점챤스 잡기에 능하고 왕광위는 순발력과 원거리슈팅 능력이 강하며 오영군은 수비와 공격에서의 종합적 재질이 보이고 유봉은 이악스럽고 발과 몸돌림이 빠른 등으로 나열돼 있다. 고훈 감독은 이에 기초하여 상대방 실력과 결부하면서 매 한차례의 경기방안을 짰고 경기흐름에 따라 부단한 전술변화도 일으키군 했다. 그 사례로 올 4월 1일, 대 천진태달전시 경기종료를 앞두고 교체해 들어간 정동칠이 넣은 동점골, 그 후에 있은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요녕팀전에서 넣은 왕광위의 원거리슈팅과 프리킥의 성공도 다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고훈감독은 팀과 선수 매개인의 전도를 한고리로 삼고 틀어쥐였다. 곡식을 키우자면 제때에 북을 돋구고물과 비료를 주면서 김도 매고 해야 하듯이 그는 매 선수한테 모두 기회를 주고 싹수가 보이면 제때에 기용해야 한다고 인정, 특히 한 선수가 부진을 겪거나 그에 대등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이에 따르는 예비발굴과 위치바꿈이 필요했는데 올들어 왕광위의 위치를 앞으로 옮기고 문광혁을 수비선에 배치한건 모두 그런 범주에 속했다. 엄한 관리와 솔선수범 길림오동팀에 있어서 생활관리 또한 훈련이나 경기보다 못하지 않은 중요한 고리이다. 목하 축구선수의 사회적 위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그들의 주위에는 이성팬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모이기 마련, 이는 일종 좋은 현상인 반면에 선수 자신과 전반 팀을 해치는 역작용을 할 가능성도 큰 법이다. 이에 대비해 팀에서는 엄한 규장제도를 세움과 동시에 사업, 이상, 도덕에 관한 인생관교양을 강화하였다. 예하면 공중장소에서의 언행, 몸관리에서의 삼가할 점, 훌륭한 애정관 수립 등으로 말이다. 동시에 규장제도 집행상황은 추호의 여지도 없었다. 한번은 진강 선수가 몰래 맥주를 마시다가 고훈 감독한테 들통나 호된 비판을 받고도 2주일간 매일 모아산까지 왕복으로 뛰는 처벌까지 당했다. 또한 선수들이 말미를 얻지 않아도, 식사 및 취침 시간을 어겨도, 특히 정한 양의 음식을 낭비해도 그에 해당한 처벌을 면치 못했는바 모든 스케쥴이 일절 군사화되었다. 한편 이 모든 것은 감독의 솔선수범이 필요했다. 고훈 감독은 워낙 친구가 많은데다 주량도 큰 사나이었다. 하지만 감독직을 맡은 후 술좌석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술을 절제했고 될 수 있는한 자기의 숙소에서 선수들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외출과 외박은 극력 삼가했다. 또한 취재접수시나 공중장소에 나설 때면 항상 옷차림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자기의 모든 소행이 전반 팀의 형상과 연관된다는 것을 시시각각 념두에 두었다. 따라서 그외의 감독진 성원과 선수들도 자연히 자기의 직업도덕을 두고 항상 유의, 오동팀 상하의 이런 행동은 팀의 형상수립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놀게 했다. 그리고 최근 몇년래 오동팀 선수들한테는 마약투여나, 이성과의 스캔들은 물론 흐지부지 술에 취하는 선수도 없었으며 모두가 내지의 다른 팀 선수들에 비하면 아주 순결하다는 평가를 받군 했다. 이는 그닥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선수들로 구성된 집단이라 할 때 생활도덕 규범상의 일대 변혁이며 프로축구팀 관리에서의 귀중한 경험축적이 아닐 수 없다. 《연변일보》 1999년 11월 29일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인간 고훈과 그의 정감세계 1999년 시즌에 고훈 감독이 이끄는 길림오동팀은 “거물사냥군”으로, 중국축구의 갑A무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킴과 아울러 사상 처음으로 축구협회컵 4강에 진출했으며 소장파 감독인 고훈 역시 두번이나 국내 권위성이 있는 스포츠 전문지에서 선정한 최우수 감독으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듯 일련의 자랑찬 성과앞에서 고훈 감독은 오히려 더욱 차분한 모습이다. 그는 오동팀과 자기의 모든 것이 성공과 실패가 동반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한쪽에만 매달리다 보니 다른 한쪽은 늘 부끄럽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이었다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인간의 삶이란 사업과 가정이 항상 병존되기 마련, 하지만 일절 가정의 모든 것을 포기한채 축구에만 신경써온 인간 고훈의 삶 – 다른건 다 제쳐 놓고라도 그는 적어도 아들 학파한테만은 합격된 아빠가 되지 못했다고 자탄했다. 일찍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고훈은 가정에서의 자기의 의무에 충실히 잘해 보려고도 했다. 헌데 그 해에 겨우 강등을 면한 오동팀, 그는 어깨위의 중임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동팀을 갑 A 에서 떨어지지 않고 굳건히 생존하게 이끌자면 당분간 계속 가정이나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8년 시즌이 끝나자 미처 피로도 채 풀기도 전인 20여일만에 팀을 거느리고 동계훈련에 들어갔고 동분서주하며 외적선수 고찰도 했으며 남먼저 조경훈련기지로 진주하여 팀 전체가 1차적으로 체능시험에 통과되게 했다. 결과 길림오동팀은 1999년 시즌이 시작되자 첫 스타트를 멋지게 떼여 연속 무패행진을 할 수가 있었다. 팀이란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시즌 제5라운드와 제6라운드에서 길림오동팀은 남한테 허점을 잡혀 산동노능과 중경융흠과의 대결에서 참패를 당했다. 헌데 그 때인즉 상해의 여동생한테 가있던 아들 학파가 사연에 의해 거기에 더는 있을 수 없게 됐다. 이는 아버지인 고훈으로 하여금 무척 골치가 아프게 했다. 이런 일은 워낙 아빠인 고훈이 직접 나서서 처사해야 했다. 하지만 2연패의 후유증으로 전반 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판에 개인의 일 때문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고성희한테 재차 부탁할 수밖(후에 녀동생이 학파를 책임지고 북경에 전탁시켰음)에 없었다. 후에 길림오동팀은 과연 존엄과 사기를 되찾고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북경국안팀전 그리고 대 요녕팀전에서 2승 1무로 “거물사냥군”의 본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가령 감독인 고훈이 개인정감에만 빠졌더라면 오동팀의 경기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한편 고훈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었던만큼 불안과 동요가 생길 때도 가끔씩 있었다. 지난해 시즌의 제10라운드 대 심수평안팀전이 있은 후 고훈은 처음으로 사직의 뜻을 내비쳤다. 그 때 그는 확실히 지쳐 있었으며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딘가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훌륭한 감독이 되지 못할 바엔 훌륭한 아빠라도 돼보자는 것이 그 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고훈은 팀이 역경에 처할수록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겁한 행위라고 인정했다. 물론 고훈도 자기보다 더 훌륭한 감독적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하학”할 담력과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적으로 제기되고 논의돼야 하며 적어도 팀의 사기나 안정을 되찾아준 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수차 있었다. 특히 축구협회컵 대 산동노능과의 준결승, 제2회합 경기는 길림오동팀한테 있어서 1965년 이래 재차 전국급 경기에서 우승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헌데 애써 준비했던 경기에서 최후 연장전에서의 경기종료 2분을 앞두고 상대방한테 동점골을 허락해 홈장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면 원정팀이 이긴걸로 한다는 축구협회의 규정에 의해 결승권을 상대방한테 넘겨줄 때 고훈은 형언할수 없는 아픔이 온몸으로 하여금 전률케 했다. (주: 그해에 산동노능팀은 과연 중국축구협회컵의 우승보좌에 올랐음) 축구인 생애에 전국우승을 할 기회가 과연 몇번이나 있단 말인가! 이날 밤 고훈은 수년간 입에 대지도 않던 술병을 꺼내들었다. 안주도 없이 위스키의 병뚜껑을 연 그는 그대로 입에 대고는 꿀꺽꿀꺽 굽까지 바닥이 나게 깡그리 마셔버렸다. 그러나 선수들을 원망하거나 질책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실력차이가 엄연한 경기에서 선수들도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산동노능팀이란 우승후보도 별 것이 아니라는데서 얼마간의 희열도 맛봤고 자신심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25일 새천년을 일주일 앞두고 광동성 조경의 훈련기지로 향하는 고훈은 또다시 시간의 긴박감을 느꼈다. 외국인감독이 쓸어 들어오는 중국축구계의 현실, 고훈은 또다시 신들메를 조이고 여느 감독보다도 더 생각하고 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아들 학파한테 관심을 보다 더 돌리고… 하지만 고훈의 이러한 가정사업계획은 또 한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변일보》 2000년 1월 24일 축구인의 재도약 꿈꾸며 오동팀 전임감독 고훈 축구왕국 브라질로 향발 10일, 길림오동팀의 전임감독 고훈씨가 드디어 축구인생에서의 재충전을 목적으로 연길을 떠나 축구왕국 브라질로 향발했다. 일찍 “이 내 남아의 한생을 축구에 바치리라”고 굳은 결심을 다져왔던 고훈씨, 다년간 오동팀과 함께 중국 축구무대에서 남정북전하면서 축구에 혼신을 쏟았고 최은택 교수의 뒤를 이어 재차 오동선풍의 “계렬브랜드”인 “거물사냥군” – 오동팀을 지휘했던 고훈씨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운조화란 예측키 어려운 것, 새천년 시즌초기 오동팀이 겪은 부진은 끝내 억대우같은 사나이었던 고훈씨로 하여금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병상에서 몸부림치게 했다. 인생의 갈림길 – 축구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 하는 선택 중에서 고훈씨가 골라잡은 것은 그래도 축구였다. 그만큰 그의 인생은 축구와 끈끈한 인연을 맺았고 더는 떨어질 수가 없었다. “한국의 352전법이 중국에서 큰 소리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는 한국이나 중국을 포함한 전반 아시아 축구가 기술축구 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축구인으로서의 나는 아직 젊고 더 배워야 하며 연변축구계에 새로운 축구사상을 주입시킬 사명감이 있다. 이는 어려운줄 알면서도 끝까지 브라질고찰연수를 선택하고 고집한 이유이다.” 이번에 고훈씨를 초청한 브라질측은 상파울루 이로만축구클럽이다. 고훈씨에 따르면 이 축구클럽은 브라질내에서 실력있는 축구팀이 있는 외 감독대오와 모든 훈련 및 경기 시설이 비교적 완벽한바 고찰과 연수에 대단히 유리할 것이라 한다. 또한 브라질의 기후상황으로 보아 축구운동을 펼침에 있어서 지금부터가 가장 좋은 계절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브라질행을 위해 고훈씨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지난 8월부터 출국신청을 했지만 번번히 여건이 풀리지 않아 북경에만도 8차 다녀왔다. “순 자비로 출국연수를 떠나는 이는 중국축구계에서 아마 내가 첫 사람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조금도 후회같은 건 하지 않는다. 축구감독한테 있어서 성공과 실패만이 있다고 할 때 성공하는 비결이란 오직 부단히 배우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훈씨의 브라질연수기간은 약 1년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연수를 계기로 고훈씨가 재차 중국축구계에 새로운 돌풍을 말아올릴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연변일보》 2000년 11월 13일 70일 - 축구왕국 브라질에서 원 오동팀 감독 고훈씨의 해외축구견문기 조선족축구인 고훈씨가 해외축구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 약 1년간을 목적으로 브라질연수행을 떠난 고훈씨였으나 브라질내에서의 프로 1부 경기의 결속, 국내에서의 처리해야 할 몇몇 사항 등으로 하여 원 계획보다 크게 앞당겨 귀국했다. 비록 70여일이란 짧디 짧은 해외연수였건만 그 70여일 사이 그가 보고 느낀 세계축구조류와 브라질의 축구분위기 – 고훈이 받은 감수는 실로 대단히 컸다 장시간의 비행끝에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하여 숙소에 여장을 푼 이튿날부터 고훈씨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개최한 축구고급감독 강습반에 참가, 강사들로는 국제축구연맹에서 파견한 고급강사와 브라질 본토의 유명한 축구감독 10여명이 됐다. 강습내용은 경기에서의 기전술구사, 후비력 양성에서의 인재발견 및 기둥선수양성 등이었다. 강습반에서 고훈은 기전술구사에 대한 강의도 의미심장하게 들었지만 후비력양성에 대한 주요 환절과 세계축구의 흐름세에 대해 그 마디 마디를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으면서 그 전부를 상세하게 필기를 하기도 했다. 강습심도가 깊어짐에 따라 고훈씨는 연변의 후비력양성수단과 그 방법 및 그 환경에 대해 재반성해보게 됐다. 남들이 다 한다는 후비력양성절차, 연변축구는 왜 청소년시기에 우쭐하다가 성년기에 와서는 남한테 뒤지는가? 외국의 선진축구가 연변에서는 어느 정도 실행되고 있으며 아직 존재하는 치명적인 허점은 무엇인가 하는것 등등이었다. 강습반이 끝나자 고훈씨는 브라질에서 유명한 축구클럽들인 싼토스클럽, 상파울루클럽, 포르투갈클럽, 고린챠스클럽 등을 돌면서 브라질의 축구환경, 클럽경영 및 프로선수들의 직업자질 등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축구클럽은 1선팀 외 2선팀과 3선팀까지 보통 있었는데 그런 팀들에서 1선팀에 정품선수를 수송하는 것은 중국과 대체로 비슷했다. 그리고 비교적 큰 축구클럽들은 일반적으로 홈경기장 1개, 5 - 6개의 훈련장과 80-90명의 선수대오를 갖고 있는 상황, 1선팀 즉 프로 1부(중국의 갑급팀에 해당)의 선수로 되자면 만명당 1명꼴로 겨우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경쟁이 치열하기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었다. 특히 펠레, 리와우도 등 세계급 정상스타를 산출해낸 싼토스클럽은 그 경제력이나 감독진영 및 선수대오가 아주 막강하여 브라질 내의 프로선수 거의 모두가 이 클럽에서 선수로 뛰어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선수자질은 우리 중국과는 천양지차를 보였다. 사회치안이 비교적 어지러운 브라질 환경에 비해 프로선수들의 문명의식과 직업도덕수준 대단히 높았다. 훈련시간만 되면 모두 절로 옷을 바꿔입고 훈련하는 모습, 감독이 지켜보건 말건 마찬가지었고 강요나 책벌을 당하는 선수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고훈은 진짜 차원이 높은 구단일수록 감독의 선수관리가 쉽다는 것을 절감, 그도 그럴 것이 고훈이 본 브라질 축구클럽의 감독들 거개가 선수들한테 훈련내용이거나 전술포치에 대해 한번 말해주면 감독으로서는 그 것으로 끝이었고 그 다음은 선수들 자신이 열심히 훈련하는 것이었다. 다음 프로축구경기의 열광 정도는 우리 중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화끈한 분위기었다. 축구라 하면 우선 정부차원의 중시부터가 컸다. 매번 국제경기나 프로 1부의 8강전같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정부에서 이 날을 휴일로 정하고 모두가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농후한 축구분위기는 경기장뿐이 아니었다. 도시의 건물과 길옆의 공터만 있어도 거기에서 공차기를 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고 휴일이면 직장끼리, 가족끼리 야외에서 축구유희를 했으며 동료 5-6명만 모여도 축구게임이 조직되군 했다. 한편 열광적인 축구분위기와는 달리 브라질의 사회치안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비교적 어지러웠다. 한번은 고훈씨가 당지 축구인들과 함께 상파울루 해변가에서 산책을 하는데 불현듯 흑인장정 3명이 나타나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라고 협박,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고훈씨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돈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내놓았었다. 액수가 꽤나 되는 금액이었다. 후에 숙소에 돌아와서 동료들한테 물어보니 그들의 말인즉 외출할 때면 남한테 줄 돈을 얼마간은 쉽게 꺼낼 수 있는 호주머니에 넣으며 다른 돈 역시 몸의 여러 곳에 감추고 다녀야 한다면서 강도를 만나면 적은 돈이나마 꼭 줘야 안전하다는 것을 들려주더라는 것이었다. 고훈씨의 브라질연수는 생각밖으로 빨리 끝났다. 약 70일간이 지나니 브라질 내의 1부리그가 끝나고 축구경기가 별로 없는데다 그냥 관광이나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고훈씨는 아마죤강 등 유명관광지나 돌아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고훈씨가 북경 수도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연길행 비행기에 오르자 마침 음력설을 쇠려고 고향 연변으로 향하는 절강녹성팀의 현춘호, 김청, 천학봉 등 10명의 조선족선수들이 비행기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순간 고훈씨의 감정은 희와 비의 회포가 주마등마냥 흘러지나갔다. 타관땅으로 팔려간 뒤 그래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어 연변으로 향하는 선수들, 고훈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슬그머니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연변일보》 2001년 2월 12일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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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8
  • [연변FC] “천재일우”의 기회, “동산재기”의 청신호
    ■ 김철균 연변대지에 봄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다. 단지 자연계의 봄만이 아닌 연변축구에도 “새봄”이 오는 것 같다. 바로 연변천양천팀의 갑급권 복귀가 연변축구의 “새봄”인 것이 아닐까? 지난해 연변천양천팀이 갑급에서 강등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여 세상은 돌고 돌아 연변팀한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준 것 같다. 연변축구ㅡ 돌이켜보면 이렇쿵 저렇쿵 할 얘기들이 많고도 많다. 어떻게 보면 조선인들이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왔을 때부터 당시 청국(清国)이라 불렸던 이 땅에는 축구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한민족(韩民族)을 놓고 너무 한(恨)이 많아 한민족이 됐다며 농담삼아 말했다 한다. 당시에도 아마 그러했던가 싶다. 한(恨)이 많아 그 걸 해소할 곳을 찾다가 축구란 놀이가 생기자 발끝에 힘을 주어 어금이빨을 옥물면서 공을 찼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2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아야/ 황황한 대한넋 발휘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달았네// 반일대적 연습하세 후일 공훈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니더냐… 이 때의 연변축구는 반일이 목적이였다. 지금 국가간의 축구경기를 놓고 볼 때 한국대표팀은 일본대표팀한테만은 질 수 없다는 굴강함이 알게 모르게 나타나군 한다. 이는 아마도 지난 세기 20~30년대부터 조선인들한테 형성된 일종의 민족적 오기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만주국축구대회와 일만(日满)축구경기에서 늘 간도성축구팀이 우승을 차지, 이 중 일만축구경기시에는 일본이 형편없이 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찰이 권총을 쥐고 심판을 봤다는 설도 있었다. 중국의 현대축구에 “헤이소(黑哨)”라는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축구경기장에는 “권총심판”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연변축구 ㅡ 연변축구는 “8.15” 광복과 더불어 비로서 조선민족축구로서의 기틀을 잡고 볕을 보게 시작, 1949년 공화국의 창립되면서부터는 광활한 중국대지를 주름잡으며 조선민족축구의 위력을 떨치기도 했다. 1952년 상해에서 있는 전국축구선수권에서 준우승, 1957년 길림성 전업축구팀(연변조선족 위주)의 고고성, 1965년 중국축구 갑급리그(1부 리그)에서의 우승고지 점령…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연변축구는 몇차례의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 가장 큰 재난은 “문화대혁명”이었다. 당시 “우승신화”를 엮었던 공신들이 모두 농촌과 공장으로 쫓겨갔다. 이들 중 훈춘시 어느 한족부락으로 하향했던 이광수 선생은 연변대학 체육학부로 올라오기까지 거의 10년이란 세월을 농촌에서 땅과 씨름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의 10년, 이는 연변조선족 축구인들한테 있어서도 힘들고 가슴아픈 10년이였다. 그리고 연변축구가 중국의 1부리그 갑급권(지금의 슈퍼리그)에 복귀하여 입지를 굳히기까지 거의 30년(1994년)이란 노력의 과정을 거쳤다. 그 뒤엔 또 경제상의 어려움으로 2000년엔 강등되어 타성에 선수진 전체가 매각되는 재난을 겪었고 다시 2004년에 갑급권에 복귀했다가 2014년에 재강등하는 등을 번복했다. 지난해 우리 연변축구는 다년간에 거쳐 누적되며 “곪고 곪아 오던 것”이 끝내 성적부진, 선수들의 사기저락, 단조로운 감독의 기전술 등이 강등이란 현실로 노출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꼭 나쁜 효과를 나타낸 것만은 아니었다. 피고름을 짜내고 심장이 마르는듯한 고통과 뼈저리는 교훈앞에서 연변의 축구인들은 정신을 차리었다.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50~60연대처럼 중국축구무대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진작 역사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구단운영시스템이 내지의 규범화된 구단에 비해 떨어져도 한참은 떨어졌다는 것과 또한 본토감독들의 기전술운영술도 재삼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도록 하였다. 연변의 축구인들은 “산전진통)과 비슷한 몸부림속에서 연변축구의 현유페단을 진단했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였다. 또한 국가 및 성 해당부문의 어르신들도 연변축구가 천애절벽 낭떨어지에 추락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지난해 말 국가체육총국 유붕(刘鹏) 국장이 동북광야의 강추위도 무릎쓰고 연변을 찾아 연변축구를 부활시킬 대책을 강구하면서 많은 관심을 보이었고 성과 주의 지도일군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연변축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기도 하였다. 희소식은 연속 뒤를 따랐다. 침체되어 있던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에 “기적”이 나타났다. 이는 필경 흔하지 않은 중국축구계에서의 “기적”이었다. 지난 1월부터 연변구단의 갑급복귀설이 솔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희롱”하더니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되었다. 말그대로 “하느님”이 연변구단에 하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었고 “동산재기”의 청신호였다… 올해 연변구단은 일찍2007년부터 2011까지 한국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었던 박태하 감독이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 박태하 감독이다. 올해는 양띠해다. 필자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사자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써왔다. 한국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가 그랬는가 하면 연변팀을 맡았던 최은택과 고훈이 그랬다. 100%는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하다면 호랑이가 이끄는 양떼 역시 호랑이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 “호랑이가 이끄는 호랑이무리”ㅡ 참 그럴듯한 표현이다. 2015년 중국갑급시즌에서의 연변팀이 명실에 부합되는 “호랑이구단”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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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연변천양천 실력점검 단계 진입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국내 전훈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이 3라인(수비, 미드필터, 스트라이커)의 실력점검 단계에 진입, 자주 타구단과의 평가전을 치르는 한편 약한 고리가 발견되는 족족 그 허점을 미봉할수 있는 국내 및 외적 용병 물색에 나서고 있다. 현재 연변팀 감독진에 의해 영입이 확정된 외적용병으로는 브라질적으로 2012년부터 중국축구 슈퍼리그(1부리그) 상해신흥팀에서 활약하던 찰스턴 선수이다. 이 선수는 1990년생으로 신장이 1.65m, 체중이 71kg이며 선수위치는 스트라이커(前锋)이다. 그리고 연변팀과의 계약가능성이 큰 선수들로는 원 광동일지천에서 뛰던 심봉 선수이며 테스트를 받고 있는 선수들 중에는 1명의 튀니지 외적선수와 1명의 국내선수가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연변팀은 곤명에서 거의 매일 타구단과의 평가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 2월 4과 5일, 강서연성과 연속 2경기를 치른 결과 1승 1무를 기록했고 2월 7일에 있은 청도중능 2선팀과의 1 : 0으로 상대방을 가볍게 눌렀다. 연변팀은 오는 15일까지 청도중능, 하북중기 등 팀과 몇차례의 평가전을 더 치르다가 16일 연길로 귀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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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8
  • 연변천양천팀 섬서오주 대신 갑급권 자격 획득
    (곤명해경기지에서훈련에 땀동이를 쏟고있는 연변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2014년 중국축구 갑급리그에서 제16위로 강등되었던 연변장백산 천양천팀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2015년 갑급리그 참전권 등록을 두고 변수가 생겨 섬서오주팀이 갑급참전권을 박탈당하고 대신 연변천양천팀이 갑급권 자격을 얻게 되었다. 1월 31일, 중국축구협회는 2015년 갑급권에 참가하게 될 각 축구클럽 명단을 발표, 정해진 시일까지 지난해의 “감독진과 선수 및 클럽 직원들 노임/상금 지불 명세서”를 중국축구협회에 바치지 못한 섬서오주팀(원 광동일지천팀)의 갑급리그 참전권이 취소되고 대신 연변천양천팀이 갑급리그 참전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연변천양천팀이 갑급리그 참전권을 획득하게 된데는 몇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 중국축구협회의 2015년 갑급리그 자격권 등록표준이 그 어느 해보다도 엄격했다. 이 요구에 따르면 섬서오주, 청도해우, 심양중택 등 클럽들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으나 연변천양천클럽이 바친 등록신청서는 그 어느 팀보다도 중국축구협회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둘째, 규정에 따르면 갑급권 참전권 명액이 하나 남으면 원래 지난해 갑급 15위로 강등한 성도천성팀이 갑급권 획득이 가능했으나 이 구단 또한 중국축구협회에 “감독진과 선수 및 클럽 직원들 노임/상금 지불 명세서”를 바치지 못한데다 해산하게 되어 결국 이 명액이 연변천양천팀에 차례지게 되었다. 한편 연변천양천 축구클럽은 일찍 구단의 갑급권 획득 가능성을 두고 두가지로 준비해 외적용병물색을 시작, 몇몇 매니저들도 연변팀에 적극적으로 외적용병을 추천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연변천양천팀에서 주목하고 있는 외적용병으로는 한국 경남FC팀의 중앙방어수와 아프리카 잠비아의 국자호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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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박태하 감독, 신뢰가 바탕이 된 팀을 만들고 싶다
    [동포투데이/연변일보] 박태하감독(46살)의 수첩 첫장에는 “2015년 연변팀 목표는 갑급리그 진출”이라고 적혀있다. 선수단에 대한 꼼꼼한 메모가 적힌 이 수첩을 박감독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보는걸 감안하면 갑급리그 진출에 대한 열망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곤명 해경기지에서 팀 전술을 강화하고 화끈한 축구를 선보이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있는 박태하호. 23일 그의 숙소에서 이번 전지훈련의 성과와 올시즌 목표에 대해 박태하감독과 얘기를 나눠봤다. 전지훈련이 중반으로 치닫고있다. 기대치는 달성했는가? 해남 전지훈련에서 체력훈련을 위주로 기술적인 부분도 가미해 훈련을 했다. 4주간의 고찰을 거친 뒤 체력, 기술, 종합자질 면에서 차이가 나는 선수 15명을 탈락시켰다. 나의 임무는 팀 재건이다. 어린 선수들을 탈락시키며 가슴아팠지만 갑급리그 진출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훈련에 저애가 된다고 판단해 이들을 정리했다. 해남 전지훈련 말미에 선수들의 상태를 전부 파악하는 등 단계성 목표를 달성했다. 곤명 전지훈련에서는 경기를 많이 치르고있는데 성적이 괜찮다. 승패에 의미를 두는것은 아니지만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선수단에 새롭게 바뀐 구성원이 많기때문에 이들의 적응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있다고 생각한다. 팀에 대한 팬들의 주목도가 높다. 어떤 팀을 만들려는가? 신뢰가 바탕이 된 팀을 만들고 싶다. 서로간의 신뢰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선수들을 안아주고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독이 되고 싶다. 선수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려 노력하고있으며 나름대로 선수들도 잘 따라주고있다. 현재 팀 내부에서 선의의 경쟁이 매우 치렬하다. 경쟁이 없이 안주하면 팀이 발전할 수 없다. 경쟁을 통해야만 개개인 기량이 발전하고 개개인 기량의 발전을 토대로 해야만 팀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선수들 개개인의 특성과 장단점을 잘 파악해 포메이션(阵型)을 결정할 것이다. 올시즌 한가지 전술 가지고는 안 가겠다. 상대팀에 따라 변화를 줄 생각이다. 최소 두세개 전술를 갖고 가겠다. 이번 곤명 전지훈련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지난해 연변팀 경기 DVD를 매일 보고있다. 어이없는 실점이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이번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에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주문하고 있다. 또 하나는 경기력을 높이는 것이다. 새롭게 짜인 수비라인의 조직력과 공격 전술에 중점을 두고있다. 또 약속된 플레이를 경기에서 활용할수 있도록 다양한 패턴의 전술도 훈련중에 있다. 올시즌 눈여겨볼만한 선수가 있다면? 팀 주장 문호일선수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팀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한몫 할 것으로 보고있다. 문학, 윤창길, 김파, 리성림 등 선수들의 기량이 부쩍 늘고있다. 다만 신인들이라 프로무대에 적응하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있다. 연변팀이 올시즌 갑급리그를 다시 뛸 가능성도 있는데? 아직 정식 문건으로 통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일단은 기본적으로 구상은 하고있다. 결정되면 발빠르게 움직여야 할것 같다. 그때 가서 귀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을 또다시 흔쾌히 수락하겠다. 설은 어디서 쇠게 되는가? 가족관계는 어떠한가? 전지훈련이 끝나는대로 곤명에서 직접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단란히 모일 것이다. 연변팀과는 한국에서 합류하게 된다. 남편이 하는 사업을 믿어주는 안해가 있고 두 아들이 있다. 큰애(20살)는 대학 재학중이고 작은애(15살)는 중학교에서 축구를 하고있다. 연변의 축구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연변팀에 보내준 많은 성원에 감사한다. 올시즌 연변팀은 선수보강 등을 통해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다. 팬들이 원하는 축구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에겐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된다. 팬들의 격려와 애정어린 비판이 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연변일보 리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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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9
  • 연변천양천팀 곤명서 전훈에만  전념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연변천양천팀의 갑급권 복귀를 놓고 화제가 뜨거운 가운데 해남으로부터 운남곤명으로 이전해 전훈에 투신한 연변팀은 갑급권 복귀설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훈련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번 해남과 운남의 전훈에서 연변팀은 기초체력 다지기부터 시작해 경기체력 향상을 목적으로 긴장하게 훈련, 약 한달간의 고찰을 거쳐 15명의 선수가 요구미달로 탈락되었고 그 기간의 훈련은 상병선수가 별로 없이 선수들 몸상태가 상당한 정도로 회복되였고 경기 컨디션에서도 보다 업그레이드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12년 연변팀에서 큰 활약을 펼치다가 다리를 상한 손군 선수가 20일부터 팀과 합류해 회복훈련을 하고 있어 팀보강이 유력해지고 있다. 연변팀은 2월 13일까지 곤명에서의 훈련을 마친 뒤 연길로 귀환, 구정연휴가 끝난 뒤 2월 23일부터 4월 10일까지 한국전지훈련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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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5
  • 연변팀 갑급참전권 회복 희망 보여
    섬서오주 갑급리그 참전권 취소당해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섬서오주(원 광동일지천)팀의 갑급리그 참전권이 취소되면서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의 갑급참전권 회복가능성이 있게 됐다. 16일 중국축구협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2014년 갑급리그 각 클럽의 노임·상금 지불 확인표를 공시, 갑급의 16개 구단 중 14개 구단은 이 확인표를 바쳤으나 광동일지천과 이미 강등한 성도천성팀이 이를 바치지 못한 것으로 밝혀였다. 일찍 12월말, 중국축구협회에서는 각 축구구락부에 통지를 전달하면서 반드시 2015년 1월 15일 17시전으로 2014년의 구단 노임 및 상금 지불 확인표를 바쳐야 한다고 밝히었으며 2015년 시즌 사업의 중점은 구락부의 로임체불문제를 청리하는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만약 만약 섬서오주축구클럽과 성도천성축구클럽이 갑급 및 을급 리그참전권이 완전취소가 될 경우 갑급리그에는 참전권 명액 하나가 남게 된다. 그러면 올해 갑급에서 강등한 연변천양천과 지난해 을급리그에서 3위를 한 팀이 보충경기를 거쳐 승자가 갑급참전권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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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8
  • 박성웅 - 연변 장백산축구클럽 1임자로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지난 13일, 연변 장백산축구클럽에 따르면 원 연변체육관의 관장 겸 연변체육복권관리센터 주임이었던 박성웅씨가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 총경리로 임명되면서 반행정화 구단인 연변 장백산축구클럽의 주인이 재차 바뀌었다. 박성웅씨는 지난 20여년간 연변 체육복권관리센터의 주임으로 있으면서 연변체육복권의 년당판매 총액을 1억(장춘시와 길림시에 이어 성내 3위)위안으로 넘기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려 그의 운영루트와 관리능력이 해당부문의 인정을 받았다. 올해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의 목표는 중국축구 갑급리그로 복귀하는 것이다.
    • 스포츠
    2015-01-18
  • 동포투데이 선정: 2014 연변FC 10대 뉴스
    [동포투데이] 실망과 비운으로 몸부림치던 연변천양천축구팀의 2014년이 지나갔다. 새해인 2015년 벽두에 들어서면서 동포투데이는 2014년 연변천양천팀의 10대 뉴스를 선정하였다. 그 10대 뉴스들로는 다음과 같다. 이호은 연변축구의 사령탑 다시 잡아 갑A시기 1994년부터 3년간 연변팀의 감독이었던 이호은이 재차 구단의 사령탑을 잡았으며 이광호가 코치로, 이재호, 김광주, 고종훈, 김청 등이 감독조리를 맡았다. (특정상 2014년의 감독진은 2013년 11월 22일에 구성됐음) 장백산천양천 기업 연변팀 후원 연변장백산천양천 기업이 2014년부터 연변축구의 관명권을 매입하고 후원기업으로 되었다. 첫 5라운드 1무 4패 2014년 갑급리그에 들어서면서 연변천양천팀한테는 전례없이 첫 5라운드까지 원정경기었다. 제5라운드까지 연변천양천팀은 1무 4패를 기록, 사상최악의 스타트를 뗐다. 이호은 감독의 경질 제6라운드 신강천산팀전에서는 1 : 0으로 가까스로 이겼으나 그 뒤 5월 10일, 홈장에서 북경이공한테 1 : 5로 대패하자 연변축구의 결책층은 이호은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팀 코치었던 이광호를 감독으로 정해 팀을 이끌게 했다. “헤이소”의 난무 7월 19일 연변홈장에서 있은 호남상도전에서 심판원은 호남상도팀에 질의가 짙은 페널티킥 기회를 선사해 연변팀은 1 : 2로 패하였다. 이어서 7월 26일에 있은 연변홈장경기에서 심판원 마녕의 “헤이소(黑哨)”에 의해 연변팀은 북경팔희팀에 1 : 1로 무승부를 기록했고 8월 2일에 있은 홈장에서도 “헤이소”에 의해 석가장영창한테 1 : 2로 패했다. 자책골과 연속적인 페널티킥 실축 8월 9일, 홈장에서 있는 성도천성전에서 최민 선수가 경기초반에 자책골을 넣어 팀 사기를 떨구었다. 이어 8월 16일, 청도해우팀과의 홈장야간경기에서 연변팀은 김기수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상대방과 2 : 2로 비겼고 8월 23일에 있은 심수홍찬과의 홈경기에서는 고만국이 페널티킥을 실축해 상대방과 0 : 0으로 손잡았다. 이광호 사퇴, 고종훈 부임 9월 6일, 제 22 라운드 중경역범과의 원정경기에서 1 : 5로 처참하게 무너지자 지난해 갑급잔류의 공신이었던 이광호 감독도 사표를 표했고, 이어 9월 8일, 연변축구결책층에서는 고종훈한테 계주봉을 넘기었다. 고종훈이 만들어낸 첫 원정승 9월 21일, 북경이공대학 체육장에서 진행된 제23라운드에서 연변팀은 이훈 2골, 김도형과 로란이 각각 1골씩 터뜨리며 결국 4 : 2로 학생군단 북경이공을 압승, 이는 2014년 갑급행로에서의 첫 원정승이자 유일한 원정 1승이었다. 3명 감독 각각 1승씩에 그쳐 2014년 갑급리그에서 연변팀을 맡은 3명의 감독은 모두 각각 1승씩 거두는데 그쳤다. 그 경기들로는 제6라운드의 신강천산전(이호은), 제12라운드의 광동일지천전(이광호), 제25라운드의 북경이공전(고종훈)이었다. 3경기 앞당겨 강등 10월 11일, 연변천양천팀은 제27라운드 광동일지천과의 원정경기에서 1 : 4로 상대에 무너지면서 3경기 앞당겨 갑급리그에서 탈락하여 2015시즌부터는 을급권 구단으로 뛰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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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10)
    ■ 허 헌 (당고의 바닷가에서) 2일간의 회의를 원만히 마치고 나는 몇명 대표들과 함께 먼저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이튿날 천진여행을 해야 하기에 준비하고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5일 아침, 북경역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정각 7시에 천진으로 향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완행열차여서인지 기차의 속도는 몹시 늦었다. 그 사이에 나는 밀려 오던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약 2시간이 지나서 눈을 뜨자 열차는 어느 덧 천진역 플래트홈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나의 첫 여행지는 바다가였다. 천진을 몇번 와 봤어도 바다구경을 못해 보았기에 또한 해변가도시 대련에는 여러번 갔었지만 백사장에서 노닌적은 없었고 또한 여객선을 타고 상해를 가본적은 있지만 그냥 바다구경을 했을뿐 바다가에서의 여행은 해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천진역 출구를 나서다가 보니 앞에 아츨하게 높은 건물이 일떠서 있었다. 주위 사람들과 물어보니 그 건물은 높이가 400미터도 넘는다고 했다. 영화나 그림에서만 보아 오던 높은 건물이 천진에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해변가를 가자면 천진 남쪽 끝의 당구로 가야 했기에 행인들과 물어 겨우 당구로 가는 버스를 탔다. 헌데 교통이 어찌나 복잡한지 길이 자주 차들로 막히면서 버스에서 지체한 시간만 해도 2시간 정도가 되었다. 어쨌거나 그럭 저럭 당구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당구에서도 해변가로 가자면 한참 가야 한다기에 또 택시를 타게 되었다. 택시요금은 60위안이라 했다. 이렇게 택시에 앉아 30분만에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시가 넘었다. 해변가에 도착한 후 매표구에서 30위안을 내고 입장권을 사서는 입장하려다가 망설이게 되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였다. 그리하여 식당을 찾았으나 식당마다 문을 꽁꽁 잠그워놓아 배고픔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백사장에 들어섰지만 앞은 방파제가 막혀져 바다는 전혀 시원한 멋이 없었고 싸늘한 가을날씨에 여행객까지 없다 보니 적막하기 그지 없엇으며 게다가 갈증과 배고픔까지 더하다 보니 바다물이라도 퍼마시고 싶었다. 그와 중 그래도 바닷가에 사업일군들이 있었기에 기념사진을 부탁하고 먹을 것을 찾으니 저 앞에 공짜로 주는 달걀빵(鸡蛋糕)이 있다고 했다. 내가 사업일군들이 가르쳐 주는대로 찾아 갔더니 어느 빵공장에서 광고용으로 내놓은 빵으로서 한개씩만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헌데 그 내속을 알리 만무했던 나는 무려 5개나 먹어치웠다. 먹는 것을 놓고 말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다 먹은 후에 그 곳의 사람들은 이는 하나씩만 맛보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순간 나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아이구머니나, 저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실로 거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크게 무안을 당한 나는 그곳에서 슬며시 빠져 나왔다. 그러고는 웨쳤다. “다시는 안온다, 천진은 아름다운 해변도시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의 다리위로 달리는 작은 열차가 눈에 띄었다. 알아보니 천진역까지 다니는 작은 열차라 했다. 북경에는 지하철, 천진에는 공중열차가 있었다. 좌우간 앉아보자. 아니나 다를가 앉고 보니 30분도 안되어 천진역에 도착하였다. 내가 돌아볼 두번째의 목적지는 등탑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교통체증은 여전했다. 천진역에서 등탑까지 가는데 3시간이 소요되었으니 이날 나는 차에서만 8시간 이상 보낸 셈이었다.  그런대로 등탑에 도착하였고 그 주위의 모텔방을 잡으니 투숙비용이 제일 싼 방이 280위안이라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행장을 풀고는 등탑으로 향했다.  등탑은 호수중심에 있었으며 말 그대로 하늘이 무서운줄 모르고 가늘게 우뚝 솟아 있었다.등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가격은 30위안이었다.  내가 등탑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이미 밤 장막이 짙게 내린 저녁이어서 오르면서 보는 천진시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230미터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그 경관, 다시 언제쯤 와 볼 수나 있을까?! 나는 독한 흰술과 간단한 요리 두접시를 청해서는 천진의 밤경치를 감상하며 황홀경에 취해있었다. 그러노라니 저도 몰래 감탄한 나머지 시흥이 무르익었다.  그러자 나는 인차 가방에서 노트와 필을 꺼내서는 보이는대로 적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 자취 감추고 땅에 내렸나 하늘 뚫고 뻗어 있는 등탑 무서워 땅에 내렸나 온 누리에 펼쳐진 별무리 반짝 반짝 때로는 깜빡 깜빡 때로는 움직이고  때로는 줄지어 달리기도 명명하는 그 별빛 하늘 향해 비추니 쓸쓸한 이 내 마음 달래여지고  황홀한 경치 더불어 술잔 기울릴제  기쁨에 취해 웃노라 교통체증이 심한 천진시가 밤경치가 이렇게도 아름답고 황홀할 줄은 진짜 꿈에도 상상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반시간에 한 바퀴씩 돌면서 등탑식당에 앉아 천진시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며 크게 흥분하고 있을 때 불현듯 어디선가 “헬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눈이 새파랗고 코가 큰 서양인 4명이 맥주를 들면서 나한테 알은체하며 손짓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 역시 “하이”하고 답변하니 그들 4명은 차례로 나한테 다가와 악수를 청하였다.  이어 내가 마시던 독한 흰술을 한잔씩 권하자 그들은 모두 코와 눈을 험상굳게 잔뜩 찡그리며 사절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한테 손질과 발질을 해가면서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하고 물으니 그들 또한 말은 안 하고 손바닥에 글로 써보이며 “USA”라며 자기들은 미국인이라고 소개해왔다.  그러자 그들 또한 눈짓, 손짓을 해가며 나한테 뭔가를 묻는 것이었다. 헌데 그 뜻을 알아차린 나였으나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조선족이라 표현할 수 있을랴.그래 고민하던 중 엉결에 한국인과 조선족은 한 민족이란 생각이 불쑥 떠올라 서툰 영어로 “코리아(KOREA)”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대뜸 크게 기뻐하면서 입에서 함박꽃이 피였다.그들은 한국과 미국은 제일 친한 나라의 사이라면서 재차 나한테 악수를 청해왔고 이어 두팔을 벌이면서 포옹까지 해주었다. 아차,뭐가 잘못돼도 한창 잘못됐다.이게 웬 꿩고기 먹고 닭고기 타령이야! 내가 한국인이라니, 어제까지도 북경에서 중국축구를 위해 중국축구협회로 회의하러 왔던 놈이 한국인이라니 너무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들한테 손들어 보이고는 위생실을 찾는 것처럼 꾸미며 줄행랑을 놓았다. 36계를 놓았다. 왜 도주했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코리아인이 아니기 때문에… (끝)
    • 스포츠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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