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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갑그리그 연변팀 최후의 홈장경기 무료로 개방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갑급리그에서의 연변장백산천양천축구팀 최후의 홈장경기를 무료로 축구팬들에게 개방한다. 중국 갑급리그 제29륜 무한줘르팀과 연변장백산천양천팀 홈장경기가 10월 25일 오후 2시 용정해란강체육장에서 펼쳐진다. 연변축구클럽 측은 이번 경기는 중국 갑급리그전에서의 연변팀의 최후 홈장경기로 장시기동안 연변축구팀에 대한 광범한 축구팬들의 지지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축구팬들이 무료로 체육장에 입장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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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3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6)
    ■ 허 헌 10월 28일 저녁 9시 30분경, 우리가 탄 중형버스는 중화민족의 발원지인 하남성 정주땅에 도착, 거기서 기차로 정주에 도착한 연변축구팬협회 유장춘 회장네 일행 4명과 합류했고 또한 우리를 마중나온 연변축구협회의 이동철 주임의 알선으로 어느 한 초대소에서 잠시 하루밤을 묵은 뒤 이튿날 아침 정주시 강하호텔로 다시 숙박처를 옮겼다. 이날 아침 우리는 강하호텔에서 행장도 풀지 못한채 세기팀 선수들이 훈련한다는 하남성 체육센터 1호경기장으로 찾아갔다. 머나먼 중원땅에서 다시 보는 낯익은 얼굴들, 우리는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아침전훈련이 끝나자 우리들의 감격적인 상봉이 시작됐다. 고훈 감독과 지도들, 그리고 선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의 손을 잡아주면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라고 위로해주는 순간, 급기야 나의 아내인 이순복씨가 “와…”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눈시울이 붉어진건 우리도 마찬가지었다. 그날 아침 김국진 부장이 “연변팀” 하면 우리는 “필승! 필승! 필승!”하고 3창하는걸로 세기팀 선수들한테 백전백승의 자신감을 주입한 뒤에야 호텔로 돌아와 행장을 풀었다. 제1라운드의 1차전 대 산동태안구거룡팀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10월 30일, 우리는 아침 5시경에 기상하여 분주한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한복을 나눠줄 차례가 되자 유회기 부장이 제일 먼저 차려입었는데 한족이었지만 그는 그 어느 조선족에 못지 않은 극성팬이었다. 그리고 그 한복은 내가 연길시 하남가두 맥천사회구역의 채영숙 치보주임을 통해서 가져온 것으로서 맥천사회구역의 노인들은 연변축구의 갑급진출을 위해서라면 뭐가 아깝겠느냐며 환갑 때 한번만 입어보았던 한복들을 서슴없이 내놓은 것이었다. 차에 올라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유장춘 회장이 “오늘의 응원은 허헌 부회장이 총지휘하게 되니 멋지게 한번 해보자”고 지시하자 나는 근심이 앞섰다. 성공적으로 해낼수 있을까? 20여명밖에 안되는 응원팀으로 그 넓은 경기장에서 아무리 웨친들 소리가 제대로 전달될까 하는 우려가 태산같이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날 아침 7시경에 경기장에 도착하여 깃빨을 박고 프랑카드를 달면서 모든 사전준비에 착수, 앞줄에 한복을 입은 팬들로 북 6개에 징 4개를 갖게 했고 뒷줄엔 붉은 응원복에 머리엔 모두 “세기팀 필승”이란 글을 쓴 흰 천을 이마에 동여매게 했다. 오전 8시 정각, 제1라운드 1차전 대 구거룡팀전이 개시되자 우리의 응원은 상상외로 잘 되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합창하던 리듬에 따라 총지휘자인 내가 “연 ㅡ 변 필승!”하면 타악기들인 북과 징이 “×ㅡ× ××”하고 울렸고 뒤끝엔 “와”하고 응원의 클라이막스로 이끌어갔으며 또 내가 “연변팀” 하면 아래에서 “필승, 필승, 필승”하는 3창으로 응해주군 했다. 이렇게 우리의 응원이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 “잘한다, 잘한다, 우리 선수 잘한다”는 응원리듬소리를 냈다. 뒤돌아보니 송경천 부회장과 그를 따라온 젊은이 배학송군의 목소리었다. 뒤이어 우리는 2002 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부르던 우리 민족의 명곡 “아리랑”을 빠른 리듬으로 합창, 그 멜로디에 맞춰 세기팀의 득점율도 높아갔다. 1 : 0, 2 : 0에 이어 계속하여 4 : 0까지 됐을 때 정주 TV방송국 기자가 나한테 마이크를 들이댔다. 문: 연변축구가 갑급진출에 성공할 수 있는가? 연변축구의 지난날과 앞으로의 전망은? 답: 이번에 연변축구는 꼭 갑급진출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연변은 축구의 고향이다. 1965년엔 중국갑급리그의 우승보좌에 올랐고 1997년엔 갑A리그의 4강신화를 일궈냈다. 연변축구가 갑급은 물론 앞으로 슈퍼리그에 진출하여 우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 축구가 그렇게도 좋은가? 답: 그렇다. 연변축구는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 …… 그 사이에 경기성적은 5 : 0에 잇달아 6 : 0으로 됐고 우리의 열광적인 응원은 계속됐다. 한편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정주의 관중들은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응원을 구경할 지경이었으며 이튿날의 “정주일보”, “정주석간”, “대하보” 등 신문들에서는 연변 원정팬들의 응원으로 경기장은 완전히 연변홈장같은 분위기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1라운의 쌍회합전을 거쳐 연변세기팀은 총점 8 : 4로 구거룡팀을 제압(11월 1일의 2차전에서는 전부 후보진영이 출전해 2 : 4로 졌지만 우리의 응원은 변함없었음), 4강에 선뜻 올라섰다. 그러자 11월 2일 우리는 소림사관광을 떠났다. 소림사엔 불상도 있고 향불을 피워놓고 념불을 외우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물론 불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걸 믿는건 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은 돈을 내고 자기의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두손을 합장해 미동자세로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그것인즉 연변세기팀의 갑급진출성공을 소망하는 것이 분명했다. ▲생방송에 여념이 없는 연변라디오방송국 일꾼들 11월 3일은 갑급진출을 결정하는 관건경기의 첫 게임, 어차피 부딪쳐야 할 결사전을 각오해야 했다.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 경기장으로 가는 동안 유장춘 회장의 훈시가 또 있었다. “오늘의 경기가 관건이라는걸 모두 알 것이다. 우린 이 날을 위해 4년이나 기다렸다. 어떡허나 응원도 잘하고 경기도 이겨야 한다. 여하튼 여러분들을 믿는다.” 이렇게 말을 마친 유장춘 회장은 눈물을 좔좔 흘리였다. 이겨야지, 아무렴 이겨야 하구말구, 전날 소림사에 갔을 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머리를 깎고 소림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싶다던 유장춘 회장의 얘기가 그냥 농담으로만은 들리지 아니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생각밖으로 조선족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하남성 허창시의 조선족팬, 정주에서 공부하는 30여명의 조선족대학생팬 및 화룡시축목국에서 출장간 일꾼들까지 합세하니 100명은 될 것 같았고 당지의 축구팬들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연변축구를 알게 됐다면서 우리의 대오속에 끼여들기도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2일전 할빈협력팀을 7 : 1로 쓰러뜨린 그들은 그 여파를 빌어 세기팀을 압도하려 시도, 슈팅한 공이 세기팀 문대에 맞혀나오고 문전혼란이 펼쳐지는 등 아슬아슬한 장면도 몇번 있었다. 이에 우리 세기팀은 침착하게 응전했고 우리의 팬들은 목이 쉬도록 응원성세를 올리였다. “싸워라, 싸워라, 우리 선수 싸워라”, “잘한다, 잘한다, 우리 선수 잘한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선수 이겨라”…100여명의 함성과 북소리, 징소리는 하늘땅에 메아리쳤고 그 응원에 힘입어 경기 개시 4분경 문호일선수가 선제골을 작열, 14분경 정림국선수가 추가골에 성공했다. 이렇게 세기팀이 승기를 잡았지만 상대방은 굽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키가 큰 우세로 대거 진공을 발동, 손바닥에 땀이 배이는 긴장속에 상대방 14번 선수의 헤딩슈팅이 골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기 중간휴식시간 나는 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단소를 들고 나섰다. 그러자 주위의 카메라 렌즈들이 나한테로 쏠리었다. 중원의 경기장 관람석에서 단소를 부는 한 조선족사나이의 “농부가”가 아미 인기를 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지인들은 조선족 복장을 보고 신기하게 만져보았고 민족타악기인 북을 보고도 뭔가고 물어보군 했다. 후반들어 세기팀은 2 : 1로 앞선 기세를 몰아붙이며 전반전보다는 퍽 원활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고훈 감독의 전술변화도 보이었고 선수들의 기동력도 매우 날이 섰다. 드디어 후반 27분경, 한송봉이 살짝 넘겨준 프리킥을 김청이 힘있게 슈팅 ㅡ 공이 그물에 철렁 걸리자 승부는 이미 결정된 셈이었다. 환호하는 경기장, 격동의 눈물 ㅡ 경기장은 대뜸 환락의 도가니로 변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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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3
  • 연변축구팀 을급리그전 잘 치러낼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북경시간으로 18일 오후 3시, 2014년 중국축구 갑급리그전에서의 하나의 초점경기가 심양중택과 연변천양천간 펼쳐졌으며 최종 심양중택이 양검비와 류초가 골을 넣는 통에 홈장에서 2 대 0으로 연변팀을 이겨 3점을 올리고 심양팀은 성공적으로 갑급을 보존하게 됐다. 이로써 명년에 심양팀은 계속 중국축구 갑급리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된다. 이날 경기가 끝난 후, 연변팀의 왕건 코치가 기자회견에서 이번 경기를 평가했다. 그는 “우리의 축구팀이 이미 지난번 리그전에서 강등되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은 많은 노력을 했으며 선수들의 표현은 코치진의 긍정을 받았다. 경기는 후기에 진입했다. 우리 축구팀 선수들이 부상이 심해 이번 경기에 비교적 젊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다. 우리의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 했다. 현지 심양 축구팬들의 지지에 감사 드린다”고 밝혔다. 연변축구는 최근 몇 년간 줄곧 순탄치 못했다. 자금이 결핍했고 직업적인 관리모식도 결핍했다. 헌데 오늘날 연변축구팀은 자금이 충족한 상황에서 불행하게도 강등되었다. 이 원인에 대해 연변팀의 왕건 코치는 “지난번에 축구팀이 원정경기에서 강등될 때 적지 않은 광동의 언론들에서 나에게 소수민족 지역 축구 대표로서의 연변축구팀은 직업화의 개혁이 시급하지 않냐고 물었었다. 20년 전, 모두가 전업화 체제로 될 때 우리의 축구팀은 정상급 리그전에서 전국 최강의 대오였다. 20년 후 중국축구의 직업화 개혁이 심입됨에 따라 우리가 비록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고백했다. 연변축구팀의 명년 갑급에로의 진입 계획에 대해 그는 “명년에 우리는 틀림없이 중국축구 을급리그전을 잘 치를 것이다. 중국축구 갑급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는 실력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클럽의 직업화 운영과 관리 면에서 반드시 전복성 개혁을 진행할 것이며 이로써 관리가 기필코 개혁의 절주에 오르고 기업화 관리에 적응하도록 할 것이다. 올해 우리의 관리에는 결점이 많았고 전업체제하의 관리방식이 결핍했다. 거기에 기타 원인들도 적지 않았다. 종합적인 원인이 축구팀의 강등을 초해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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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9
  • 연변천양천팀 심양중택에 0 : 2로 무릎꿇어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8일 오후 3시, 심양시 오리하 올림픽체육센터에서 있은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8라운드에서 원정경기를 치르는 연변장백산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은 승부와는 상관없이 영예전을 펼친끝에 상대방의 양검비와 유초한테 각각 한골씩 허락하면서 0 : 2로 심양중택팀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3라운드 앞당겨 갑급에서 강등한 연변팀은 이날 신진들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어린 선수들인 염인걸, 이현준, 박세호 등을 선발출전시켰고 후보석에도 역시 신진들인 이성림과 왕맹 등을 대기시켰다. 경기초반 연변팀은 초반부터 보수적이 아니었다. 원정임에도 그들은 중택팀을 향해 맞공격을 개시, 심양팀을 혼난속에 몰아넣었으며 선후로 로란, 김기수 등이 몇차례의 슈팅을 날리기도 했다. 중택팀은 경기 25분경이 돼서야 진세를 바로잡고 공격다운 공격을 조직, 5분뒤 유초의 패스를 이어받은 양검비가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 뒤 경기 42분경, 심양중택의 간판골잡이 허사이가 헤딩슈팅을 날렸지만 연변팀 골키퍼 윤광이 몸을 솟구치며 공을 앗아냈다. 후반들어 심양중택팀은 경험과 홈구장 우세로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 공을 주로 양측변선에 수송하면서 돌파를 시도했다. 후반 7분 연변팀은 수비지역에서 공을 처리하다 실수, 공을 앗아낸 상대방의 양준걸은 침투해들어가는 유초에게 패스했고 유초가 그대로 슈팅하여 추가골에 성공했다. 그 뒤 연변팀은 로란 대신 박만철을 교체멤버시켰으나 별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으며 경기종료를 앞두고 역시 교체멤버된 연변팀의 고만국이 날린 프리킥이 동료선수의 헤딩슈팅까지 이어졌으나 너무 정면이어서 공이 심양팀 골키퍼 양군의 품에 안기었다. 오는 25일, 연변팀은 올시즌 마지막 홈구장경기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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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9
  • “좁쌀”에“보총”으로“핵폭탄”과 대결해온 10년
    [동포투데이] 연변프로축구가 10년간 중국축구 갑급권리그에서 버티던 끝에 끝내 “천애절벽”같은 갑급고지에서 추락하며 강등이란 쓴 맛을 보게 되었다. 요즘 연변의 날씨는 쌀쌀하다. 추위가 막 덮쳐들기 직전이다. 하지만 연변의 축구팬들한테는 닥쳐오는 추위보다 연변천양천팀의 강등소식이 더욱 냉혹하게 뼈속까지 스며들고 있다. 1994년 중국축구가 프로화단계에 진입한 이래 연변축구는 두번 강등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첫 번째는 2000년 시즌 갑A리그의 결속을 몇 경기 남겨두고 앞당겨 강등하였다. 1997년 갑A의 4강에 올랐었고 1999년에는 갑A의 “거물킬러”로, 축구협회컵 4강에도 진입했던 연변축구가 그 이듬해 무너지기 시작하니 거침없었다. 2004년 연변축구가 을급으로부터 갑급으로 진입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한시기 박성, 김경도, 한청송, 배육문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을 때인 2010년에는 갑급 3위라는 놀랄만한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헌데 그 뒤 박성, 김경도, 한청송 등이 이적해가고 그 다음부터는 해마다 시즌 후반부터는 갑급잔류를 위해 버둥대며 늘 “연변보위전”이 펼치군 하였다. 올해도 홈구장 연 6경기가 있던 6~7월경에 들어 벌써 연변구단에는 “연변보위전”이란 슬로건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올해의 “연변보위전”이 실패하면서 추락되는 구단을 “동산재기”시키지 못했고 나중에는 갑급강등팀이란 “오점구단”으로 되고 말았다. “연변팀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점검도 하고 추측도 많이 하였다. 일찍 갑A시절 어떤 사람들은 “연변팀은 기수해(单数)에는 잘 되고 우수해(双数)에는 잘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기수해란 바로 최은택이 사령탑을 잡던 1997년과 고훈감독이 리더로 있던 1999년이었다. 우수해란 간신히 갑A잔류를 하던 1996년과 강등이 결정되던 2000년이었다. 또 당시 연길시 낡은 체육장의 길을 수건하자 내지의 어떤 매체들은 “길림오동팀이 갑B로 내리막질을 하는 길을 수건한다”고까지 빈정댔다. 하다면 올해 연변팀의 대부분 경기가 새로 건설된 연길시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하다면 올해 새경기장에서 경기를 하자 을급으로 추락한 것일까? “기수해”와 “우수해” 그리고 낡은 경기장시절의 길수건과 올해 현대적인 새경기장에서의 경기- 그렇다면 이는 진짜 그 무슨 오묘한 련관이 있는 이치일까? 요즘 갑급권에서의 연변팀 강등을 놓고 화제가 뜨겁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축구법칙에 따르지 않은 경영방식과 비프로적 결책실수”,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은 봉페적인 선수기용으로 국내의 우수선수 영입 무시”, “하혈만 하고 수혈을 하지 않은 실책”, “빈번한 감독교체로 구단 불안정”, “고종훈 감독부임 시간상의 차질” 등으로 신문과 인터넷을 도배되고 방송의 목소리도 높다. 참, 모두가 축구전문가들이고 연변구단의 사정을 속속히 꿰뚫어보고 있는듯한 느낌(연변축구클럽에 자주 드나드는 필자도 잘 모르는 사정임)이다. 총적으로 “탁상공론”이고 연변팀에 대해 이때라 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풍조 아닐까? 기자들은 또 “특종”이나 만들어볼까 하고 말이다. 연변구단의 경영방식이 어떻단 말인가? 연변의 현실에서 다른 구단들처럼 시장화진입이 쉬운줄 아는가? 구단의 경영방식이란 수학공식이 아니다. 현지상황에 맞는 결책이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한번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필자의 소견이라면 선수들의 기량문제와 감독의 능력여하이다. 특히 외적용병의 능력여하이다. 모두가 알다싶이 1997년 최은택 교수가 감독석에 있을 때도 연변오동팀은 첫 5경기에서 1점밖에 따지 못하였다. 그러다 유진 블라이마, 졸라와 카리싸 등이 합류하면서 일약 반전에 성공하며 최종 갑A의 4강고지에 올랐다. 이는 결코 국내 선수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문제가 아니다. 연변팀은 그래도 조선족 위주의 구단이 돼야 풍격도 독특하고 배합도 이상적인 구단이 될 수 있다. “8군 연합군”이 독판치는 중국의 축구무대라 할 때 더욱 그렇다 할 수 있다. 외적용병이 없는 갑급무대를 한번 상상해 볼까? 연변팀은 절대 강등할 팀이 아니다. 아니, 갑급4강내에는 장담할 수 있는 팀이다. 을급리그 시절인 2004년 연변팀은 북방경기구 리그에서 단 한번의 패전도 없이 정주에서 펼쳐진 8강전에 합류했고 8강 결승전에서 준우승을 하였다. 감독인 고훈 선생의 능력을 보여준 그해의 리그였으며 그의 공로가 컸다. 동시에 을급리그에 외적용병이 없다는 점을 반드시 감안해야 할바이다. 중국축구의 갑급무대에서 외적용병의 역할이 어느 정도 큰가 하는 것은 연변팀의 10년 갑급여정을 살펴보노라면 “기수해와 우수해의 법칙”과 “낡은 경기장의 길수건과 새경기장에로의 진입”이란 논법이 황당하고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란 답이 나온다. 2005년 연변세기팀의 시발점은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협찬기업인 연변세기그룹에서 이럭저럭 미루며 협찬금을 주지 않은데서 연변축구클럽은 심한 자금난에 시달렸으며 해남성 금흠전훈시 감독 고훈선생이 주머니를 털어 감독진과 선수들의 생활비용을 발급하기도 했다. 이렇듯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연변팀은 그해 10승 3무 13패로 갑급 8위가 되었다. 이해 시즌 연변팀 선수멤버들을 보면 원 갑A시절의 선수들인 현춘호, 천학봉, 김청, , 고수춘, 송소우, 왕광위, 정동칠, 유봉 등이 있었는가 하면 공격라인에는 정림국과 문호일이 있었고 중원에는 한송봉이 버티고 서있었으며 수비라인에는 조명, 한광화, 백승호 등이 활약했었다. 특히 이해 시즌엔 1970년생인 졸라가 용병으로 가담해 크게 한몫 하였다.  2006년 이 해는 연변팀에 있어서 정붕휘란 내지 사람이 와서 한바탕 휘저어놓고 간 해이다. 하지만 고훈, 김광수을 중심으로 한 감독진은 드팀없었다. 이 해에도 연변팀은 시즌 중반 이기지 못한 경기가 연속 6경기나 되었다. 그해 자금사정은 역시 갑급제후들 중의 가장 힘든 “빈곤호”였다. 이 해 연변팀은 8승 5무 11패로 역시 갑급 8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 해의 연변팀 멤버들을 보면 정동칠, 왕광위, 송소우 등 갑A시절의 주력들이 은퇴하고 지난 세기 80연대생들인 탕초, 강홍권, 최영철, 최남일, 지문일 등 신진들을 수혈하였고 정림국, 문호일, 한송봉, 조명 등이 가장 큰 중임을 떠멘 주력멤버가 되었고 6번 현춘호, 11번 천학봉, 14번 김청 등이 그냥 팀에 남아있으면서 신진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해 졸라가 역시 연변팀 전포를 입고 큰 동량을 떠멨으며 외적용병으로는 브라질적 월리엄이란 선수가 있었다. 그해 연변팀의 성적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한 것은 신로교체해였던 관계가 가장 컸으며 기타의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2007년 이 해의 연변팀은 비교적 안정한 기록을 낸 해로 되고 있다. 이 해에 연변팀은 현춘호와 졸라가 퇴역하고 신진으로 박성과 최인, 허파 등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출한 스타는 없지만 조선으로부터 영입한 김영준 등은 그래도 몸값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2007년 초기 연변의 모 기업인이 연변클럽을 도맡고 총경리로 되었다. 연변의 문체사업에 관심을 둔 그였으나 그 역시 방대한 축구클럽을 운영하자고 보니 인맥상, 재력상 힘이 몹시 딸리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시즌에서 조선용병들인 김명철(34번), 김영준(35번), 서혁철(36번), 김성철(37번)은 개인기가 고르고 거의 나무람할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특히 김영준은 조선국가대표로 그 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까지 참가한 선수였다. 이 해 연변팀은 9승 6무 9패로 갑급 6위를 기록, 그 중 제13라운드부터 제17라운드까지 5연승을 달성했고 넣은 골이 36골이고 허락한 골이 35골이었다. 연변팀의 2008년 시즌은 감독풍파로 얼룩진 한해였다. 이에 앞서 2007년 시즌이 한창이던 그 해의 10월경, 필자는 어느 한 축구팬으로부터 “새해 시즌엔 고훈을 자르고 조영원을 감독으로 기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헌데 그것이 현실되 되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해 11월 20일, 연변 주 체육국 회의실에서는 이른바 감독초빙선거가 있었으며 말 그대로 고훈 감독이 잘리고 조영원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되었다. 이는 당시 고훈 감독도 진작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냥 맹목적으로 자르자고 하니 구단이 안정되고 성적도 좋으니 자를 명목이 없었던 것이다. 조영원이 감독으로 된 그 해 연변 주 체육국과 연변구단은 “슈퍼리그 진출과 전국체전에서 우승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른바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 해 조영원 감독은 몇경기를 지휘하다 성적부진이 지속되니 사표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 조영원 감독의 뒤로 황용이 팀을 맡았다가 역시 경질되었고 현춘호도 2경기를 지휘(2전 2승)했었으나 결국 지휘봉은 김광주한테로 넘어갔다. 이 해 연변팀은 레비, 산토스 등 외적용병을 영입했고 통역 겸 선수였던 졸라까지 전포를 입었으나 최종 8승 4무 12패로 두마리의 토끼는커녕 쥐 한마리도 잡지 못하였으며 겨우 갑급잔류에 턱걸이를 하였다. 2009년 시즌 역시 김광주 감독의 지휘하에 연변팀은 비교적 안정된 성적을 따내였다. 이 해에 연변팀은 원 국가청년팀 대표였던 김경도를 합류시키면서 팀을 보강시켰으며 최종 7무 8승 9패로 갑급 6위를 기록, 팀을 안정세로 돌려세웠다. 이 해 연변팀에서 영입한 외적용병들로는 압둘살람. 리카도, 이만뉴얼, 꽈예 등 아프리카와 남미 선수들로 비교적 외적용병 영입사업이 성공적이었다. >2010년 이해 시즌에 연변팀은 갑급사상 가장 휘황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 시즌 연변팀은 기존의 주력외 콰예, 레비, 루둘라 등 외적용병을 영입,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어 최종 12승 4무 8패의 기록으로 갑급 3위에 올라섰다. 이 해 연변팀은 슈퍼리그진출의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나 당시 갑급에는 광주항대와 성도셀틱이란 두 “거물”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 두팀을 꺾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2011년 연변팀은 많은 변동이 있었다. 구단 절대적인 주력이던 박성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해가고 관건위치에서의 주력 선수가 몹시 결핍하였다. 이 해 초반 연변팀의 외적용병들로는 이광재, 박종우, 우주령 등 외적용병들을 영입하였으나 그들의 작용 또한 이상적이지 못하였으며 성적부진은 계속되었다. 이 해 연변팀의 성적은 8승 5무 13패로 갑급 11위였다. 2013년 연변팀은 정상룡이 맡았다. 그것은 그 전해 김광주 감독이 이룩한 성적이 그닥지 않아 강등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파악이 있는 감독을 선정한다는 것이 바로 정상룡이었다. 하지만 그해 연변팀이 영입한 외적용병들이 앞구실을 잘하지 못하는데다 김경도, 한청송, 최영철 등이 이적해간데서 연변팀은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시즌중도에 정상룡이 경질되고 한국인 조긍연이 사령탑을 맡았으나 부진국면을 돌려세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조긍연 감독은 선수들의 체능문제를 발견하고 시즌중도였지만 체능올리기에 정력을 쏟으면서 엄한 관리를 하였었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불만을 야기, 그 역시 시즌 후반단계에 들어 지병을 구실로 사표를 냈으며 그해 역시 김광주가 지휘봉을 잡아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2012년 시즌의 외국용병은 홍진섭, 버비치, 쿠리바리 등이었다. 이 중 쿠리바리가 시즌 후반단계에 출전하면서 연변팀의 갑급잔류에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 그 해 연변팀은 10승 4무 16패로 갑급 13위에 머물었다. 2013년 시즌 연변팀은 재차 한국적 조긍연 감독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조긍연이 복귀한다는 소식에 배육문, 한광화, 고만국, 최영철, 허파, 강홍권 등 주력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조긍연 감독에 대한 불평을 표했다. 이에 조긍연 감독은 손군, 박도우, 석철 등 신진들로 겨우 팀을 구성해갖고 이 해의 시즌에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초반의 성적이 좋을리 만무했다. 또한 시즌 도중 내부불화가 생겨 주력선수들이 훈련거부로 팀을 이탈하면서 결국 조긍연은 재차 보따리를 싸게 됐다. 그 뒤 이광호가 팀을 맡고 모든 선수들을 아껴주고 관심해주면서 이 해의 갑급잔류를 완수하였다. 이 해 연변팀은 외적용병으로 이재민, 고기구, 김기수 등 3명의 한국선수들을 영입했는데 이 해의 갑급잔류에는 이들 3명의 기여가 컸다. 특히 이 해 이재민은 연변팀을 위해 도합 18골을 성공하며 골잡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해 연변팀은 9승 7무 14패로 갑급 11위를 기록했다. 주지하다싶이 올해는 연변구단의 갑급 10년이래 자금투자가 가장 많이 들어간 한해이다. 관명권 기업도 나타났고 선수들의 대우상에서도 많이 개선되었다. 감독진도 이호은, 김광주, 이광호, 고종훈, 김청 등으로 갑A시절의 감독과 주전들이었다. 헌데 외적선수 영입상 크게 실패했다. “킬러”감으로 한국의 김도형을 영입했지만 그의 실력은 너무 수수했고 원태연은 주력멤버에도 들지 못하였고 이 중 제일 괜찮은 용병이래야 김기수었지만 올들어 그가 상하고 옐로카드 누적 등으로 불참한 경기가 여러번 되었다. 또한 본토선수들의 실력도 저하되었다. 지난해 시즌 싹수가 크게 보이던 손군 선수가 상병으로 1년내내 치료받는 상황이고 절대적 주력인 최인도 자주 상병으로 시달렸으며 비교적 큰 활약을 펼친 선수로는 지충국을 꼽을 수 있었으나 그 역시 공을 패스해줄 선수가 마땅치 않은 고전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활약적인 선수로는 최민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는 가끔씩 치명적인 실수가 나타나 축구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약체로 투신한 올시즌 결국 이호은 감독은 9경기에서 겨우 4점을 기록한채 경질되었고 이광호가 지휘봉을 잡았으나 그 역시 용빼는 수가 없어 제22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고종훈한테 넘겨주고 말았다. 그 뒤 고종훈은 대담한 공격축구의 카드를 내들고 사활전을 펼쳐 제23라운드 홈장에서 천진송강팀과 1 : 1로 비겼고 제24라운드 북경이공과는 4 : 2로 이기면서 갑급잔류의 희망이 보이는듯 했다. 그러다 제25라운드 하북중기와의 홈장에서 0 : 1로 패했다가 원정에서 청도중능과 1 : 1 무승부를 기록, “원정킬러”로 되는듯 했으나 지난 11일 광동일지천과 1 : 4로 패하면서 갑급잔류의 목표가 영영 물거품으로 되었다. 올들어 지금까지의 경기를 보면 객관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는가 하면 자아실책도 많았다. 시즌초반 5경기가 원정이었고 “헤이소(黑哨)”가 크게 난무했으며 3차의 페널티킥 실축에 자책골까지 있었다. 이상 10년간 연변팀의 갑급여정을 살펴보면 산재한 이러저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노출되었지만 관건적인 실패는 외적용병 영입의 실패가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즉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잘된 해인 2007년, 2010년에는 구단성적이 기본상 이상적이었다. 특히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잘되고 본토선수들까지 알준하던 2010년의 경우 그 당시 구단의 자금투입만 크게 늘였다면 슈퍼리그진출도 가능하지 않았을가 하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리고 본토선수진영이 엉망이던 지난해는 그래도 외적용병 영입이 비교적 성공적인데서 갑급 11위라도 했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올해는 그럴만한 카드가 없었다. 외적용병, 본토선수 통털어봐야 최전방에는 골을 많이 낼만한 “킬러”가 없었고 중원 또한 공방조절을 확실하게 할만한 기둥선수가 없었으며 수비선 또한 실수투성이로 어이 없이 실점할 때가 아주 많았다. 말그대로 선수들은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공방조절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기량이 모자랐으며 거기에 운도 몹시 나빴다. 현재 축구클럽의 관리와 시장화 문제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연변 장백산천양천 축구구락부를 자주 도마위에 올리고 있다. 하긴 확실히 기타 구락부들에 비해 문제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올해는 많이 개선됐고 비교적 잘한것 같다. 축구경기장 도우미들도 조직했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시도를 한 것이다. 연변축구의 갑급시대는 올해로 끝이 나고 있다. 그냥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단지 그 강등의 비운이 지난해가 아니고 올해에 왔다는 것 뿐이다. 강등의 운명, 이는 연변축구만 당하는 일도 아니다. 중국축구권내 슈퍼리그와 갑급리그의 32개 팀 중 이러한 비운에 빠지는 팀은 많다. 그것에 울며 너무 통탄하지 말자. 새로운 모습으로 신들메를 조이자. 연변축구의 갑급복귀 그것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다.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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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4
  • 연변축구팀 버티지 못하고 을급으로 강등
    갑A시대 리그 4강의 신화를 먼 기억으로 남기고 중국 연변축구팀의 강등, 이 무수한 축구팬들의 마음에 풀기 어려운 매듭을 촉발했던 축구팀은 다음 경기시즌부터는 을급 리그에 섞이게 됐다. 중국 축구 “북방의 연변” 판도가 이미 붕괴된 것이다. 돌아보면 당년 연변팀의 감독 한국인 최은택, 눈빛이 부드럽고 행동거지가 겸손하고 온화하며 후방에서 전략전술을 짜는 학자기풍의 멋진 사나이. 연변축구팀의 영혼 고종훈도 마침 때를 만나 축구팀의 책사이자 국가팀의 미드필더의 “지휘관”이었다. 포워드 위치에 줘라를, 골키퍼에 브라지마를 배치했었다. 아프리카 작은 나라에서 온 이 두 선수는 중국축구직업화 초기 영입한 가장 자질 높고 값도 싼 외국선수였다. 당시 연변팀이 내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전면공격과 전면방어 축구였다. 그들은 갑A 리그에서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지어 리그 4강이라는 기적을 창조하며 중국 축구계에 미담으로, 전설로 전해졌다. 하지만 중국축구 직업화 과정이 심입됨에 따라 연변축구팀은 2000년에 갑B로 밀린 후 절강 녹성에 팔렸다. 두 팀은 을급으로부터 시작해 비록 한때는 후의 중국 갑급 리그 제3위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정상급의 리그에 돌아가지 못했고 당년의 광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한 면으로는 날로 감소되어 뒤를 이을 수 없는 현지의 축구인구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오동에서 자금을 철수한 후 축구팀은 장기간동안 기업의 협찬과 시장화 운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연변축구의 쇠락은 보기에는 마치 우연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피면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지난해 신강전운팀의 어린 축구선수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칸에서 몇 십 시간을 서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해 연변축구팀은 비록 고대했던 협찬상을 만났지만 종당에는 강등의 비참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상술한 이 두 가지 일은 비록 아무 연관도 없는 것 같지만 축구운동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보급되고 발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축구의 “고향”에서 민중들이 더는 축구를 담론하지 않고 현지의 우세항목들이 점차 근본상에서 전개할 수 없는 항목으로 전락될 때 모든 중국의 축구팬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할 것이다. 오늘날, 연길시는 이미 “중국에서 가장 행복감이 있는 도시”의 하나로 되었고 부르하통하 양안의 불빛은 이 도시의 밤을 아름답게 비춘다. 2012년 연길시의 인구당 사회소비품 소매액은 지어 상해를 초월했고 2014년, 연변축구팀은 3만여 개 좌석의 참신한 홈경기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연변축구팀 쇠락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고 지어 참신한 소학교 축구장에서 당년 팀을 무어 소리치며 뛰어다니던 조선족소년들을 보기 어렵다. 오늘, 연변축구팬들은 말한다. 강등 상관없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1년에 돌아오지 못하면 1년을 더 기다리고 몇 년에 돌아오지 못하면 또 몇 년을 더 기다릴 것이다. “단지 마지막에 먼저 돌아오는 것이 이 연변팀일지 아니면 전반 연변축구일지 모를 뿐이다” 요즘 연변축구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신화통신 야오야오우밍 기자> 사진 : 시나, 소후 닷컴,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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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3
  • 연변축구팀 3라운드 앞당겨 갑급서 강등
    [동포투데이 연변] 연변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의 강등이 확실시됐다. 11일,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7라운드 원정경기에서 연변팀은 1 : 4로 광동일지천팀에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3라운드 앞당겨 갑급리그에서의 강등이 현실로 되었다. 이제 새해 시즌의 갑급리그에는 연변팀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됐다. 연변팀의 강등, 이는 축구를 열광하는 수많은 연변팬들한테 있어서도 크나큰 정신적 타격으로 예상된다. 요해에 따르면 연변장백산 천양천축구구락부에서는 연변팀의 강등이 확실시된다 해도 명년에 을급리그로부터 재출발해 갑급에 복귀할 타산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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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1
  • 연변 원정서 강호 청도중능과 1 : 1 무승부
    [동포투데이 칭다오(靑島)] 고종훈이 사령탑을 잡으면서 연변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원정 전적(1승 1패)이 홈구장 전적(1무 1패)을 능가하면서 실날 같지만 갑급보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4일, 청도시 천태경기장에서 펼쳐진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6라운드 청도중능과의 원정경기에서 연변팀은 후반 9분경에 터진 로란의 한골로 앞서 달리다가 최종 경기보충시간인 후반 50분에 상대방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1점벌이에 그쳤다. 이번 경기에서 청도중능은 주전인 모검경, 송문걸, 추정균 등이 엘로카드 누적으로 경기에 불참했다. 경기초반 청도중능팀의 왕군과 카스디로가 정채로운 배합으로 연변팀 문전으로 기습, 최종 카스디로가 슈팅했으나 연변팀 지문일 골키퍼의 선방에 맞았다. 이어 상대방은 8분과 14분에 거쳐 송룡, 카스디로가 선후로 연변팀을 위협하며 수차 슈팅을 날렸으나 역시 득점하지 못하였다. 연변팀은 18분경에 한차례 쾌속반격을 조직, 김도형이 금지구내에서 슈팅했으나 상대방 송룡이 솟구치며 막아냈다. 서서히 끓기 시작한 연변팀은 연속적인 쾌속반격으로 점차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22분경 7번 최인이 날린 중거리슈팅을 상대방 키퍼가 몰수했다. 그 뒤 한동안 쌍방의 공방전이 있었으며 중능팀의 프리킥과 슈팅에 이어 43분경 연변팀의 10번 지충국의 롱슈팅(远射)이 중능팀의 크로스바(球门)를 날아넘으면서 상대방 골키퍼로 하여금 아찔해나게 했다. 후반들어 연변팀은 진세를 가다듬고 초반부터 맹공격을 발동했다. 후반 3분 김도형이 상대방의 수비수 한명을 따돌리며 중능팀 문전으로 육박했고 이어 최인이 크로스를 받아 슈팅, 골로 이어지니는 못했으나 장면은 아주 이채로웠다. 결국 연변팀이 넣은 골은 외적용병 로란의 발끝에서 터졌다. 로란은 변선에서 수송해준 묘한 패스를 이어받아 페널티 구역으로 돌입하며 선제골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뒤 중능팀은 동점골을 바라고 빈번히 파상식 진공을 발동, 연변팀은 수비중 자주 동작이 거칠어 선후로 오영춘과 최민 등이 옐로카드 경고를 받았고 김도형은 시간지연이란 이유로 옐로카드 경고를 받기도 했다. 상대방의 밀물식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연변팀은 후반 40분경 한차례 정채로운 배합으로 상대방을 압박, 김도형의 슈팅이 크로스바옆으로 흘렀고 두번에 거친 최인의 슈팅 또한 번번히 상대방 수비가 거둬냈다. 경기는 보충시간이 5분이나 주어졌다. 5분만 버티어내면 연변팀의 3점벌이가 확정되는 판이었다. 헌데 경기종료를 막 앞둔 후반 50분경 수비가 상대방의 롱패스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하는 통에 결국 연변팀은 중능팀에 동점골을 허락하며 땅을 쳐야 했다. 한편 이날 있은 다른 경기구에서 있는 대결결과를 보면 북경이공과 심양중택이 각각 1 : 0으로 천진송강과 청도해우를 가볍게 눌렀고 북경팔희가 원정에서 신강천성을 4 : 2로 대승했다. 그리고 무한줘르가 1 : 0으로 성도천성을 제압한 것이 연변팀한테는 기쁜 기별이었다. 광동일지천과 심수홍찬, 호남상도와 석가장영창의 경기는 5일에 있게 되고 하북중기와 중경역범의 경기는 6일에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갑급순위를 보면 중경역범이 15승 8무 2패 53점으로 여전히 갑급선두로 달리고있고 연변팀은 3승 9무 14패 18점으로 갑급꼴지에 머물러있다. 오는 11일, 연변팀은 원정에서 광동일지천과 6점벌이에 관계되는 사활전을 펼치게 된다. 연변팀 출전멤버 22번 지문일, 5번 진효, 6분 이훈(후반 49분 19번 이군), 7번 최인(후반 43분 32번 박세호), 9번 김도형, 10번 지충국, 12번 강홍권, 15번 김홍우, 16번 오영춘, 20번 최민, 40번 로란(후반 35분 4번 이민휘)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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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5
  • [연변축구] 재 반성해보는 연변팀의 이왕지사
    ■ 김철균 바라지 않았던 연변축구의 “최악”의 사태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27일, 연변천양천팀은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ㅡ 올시즌의 마지막 두번째 홈구장 경기에서 어이없는 “자살실수”로 하북중기에 한골 내주면서 상대방한테 무릎을 꿇었다. 시즌초반부터 예견된 것이라지만 이토록 심각하게 치닫게 될 줄은 몰랐다. 현재 심양중택과 하북중기는 각각 27점으로 둘 다 강급선을 탈출한 상황이고 이제 남은 광동일지천, 성도천성과 우리 연변이 강급모면을 위한 사투를 벌일 판이다. 즉 3개 구단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되는 판이다. 김창권 교수의 말마따나 프로축구의 세계는 잔인하기 마련이다. 남을 죽여야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다. 과연 연변천양천팀이 광동일지천과 성도천성을 “죽음의 낭떨어지”에 밀어넣고 자신이 살아남을는지… 올시즌 연변축구가 강급이 되는가의 여하를 떠나 오늘의 현시점에서 연변프로축구의 지난날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연변축구는 2005년에 갑급행열에 가담했다. 주지하다싶이 중국축구가 프로화에로 진입한 후에도 연변축구는 많은 여건에 의해 반프로화궤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주정부의 지원을 떠날 수 없었고 주 체육국의 직접적인 조종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일련의 질의가 짙은 일들이 터졌다. 2006년에는 정붕휘(程鹏辉)란 내지 사람이 연변축구를 춰세운다며 자신의 운영진을 끌고 와서 백산호텔에서 기자초대회까지 열며 한바탕 떠들썩 하더니 6개월만에 보따리를 쌌다. 당시 그가 올 때 주내 축구계인사들은 대부분 반대의사를 표했고 원 연변축구구락부 주임이었던 정룡준은 “구락부주임 자리는 내겠지만 정붕휘한테만은 넘겨줄 수 없다”고 버티었으며 연변의 축구팬들은 연길상우호텔(翔宇大酒店)에서 집회를 열고 “정붕휘의 구락부인수거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칼날을 쥔 사람”이 “칼자루 쥔 사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랴! 프로축구의 개혁과 시장화를 놓고 여러 모로 모색하고 시험해보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학적이고도 “연변특정에 맞는 순리적인 길”을 선택해야 할 바이며 더우기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로 해야 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른바 정붕휘를 데려온 뒤 결과가 좋았다면 별도의 문제었겠으나 그는 연변축구를 대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하였다. 그 뒤 1997년에는 다른 한명의 연변적 기업인을 구락부 총경리로 초빙했다가 재차 실패하였다. 주관억측이었으며 그 뒤에 숨겨진 “미스테리”에 대해여서는 누구도 알 방법이 없다. … 2007년 9월경, 그 때는 한창 그해의 갑급리그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었다. 당시 필자는 어느 한 축구팬한테서 연변 주 체육국에서 감독이던 고훈을 “하차”시키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믿지를 아니했다. 헌데 약 2개여월 뒤 그것이 현실로 될 줄이야. 다르다면 방법상 이른바 “감독경쟁선거”였다. 사전에 온양됐고 또 외부에까지 파장된 것 갖고 “감독경쟁선거”라니 말도 안되는 “눈감고 야옹”하기었다. 그번 “경쟁선거”에서 말 그대로 고훈은 밀려났다. 그 뒤 연변축구계는 “슈퍼리그진출 및 전국운동회에서 우승”한다는 슬러건을 내걸었다. 이른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결과는 주관억측처럼 돼주지 않았다. 감독풍파로 그해만 선후로 4명이나 구단사령탑을 잡았다 놓았었고 두마리 “토끼는커녕 쥐꼬리”도 잡지 못하였다. 고훈감독 ㅡ 지금 그는 축구에 참여할 권리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기여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그가 사령탑을 잡던 2005년부터 2007년까지의 3년은 연변구단이 가장 안정하던 시기었다. …… 연변팀의 오늘의 현실, 이는 결코 하루 한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속으로 곪아오다 오늘 터지며 고름을 짜게 된 것”이다. 현재 연변팀은 “중환자”와 같은 양상이다. “암병”뿐 아니라 “당뇨합병증” 및 기타 질병의 엄습속에 포위되어 있다. 이는 결코 올들어 외적용병 영입의 실패에만 국한시킬 일이 아니다. 지난번의 리광호를 탓할 일도 오늘의 고종훈을 탓할 일도 아니다. 한편 올시즌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막바지인만큼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파악해야 한다. 연변팀이 기적처럼 갑급잔류에 성공할 수도 있고 쓰러진채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영예전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힘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목표는 실패할지 모르지만 연변축구의 풍격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갑급잔류의 사투! 게임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 스포츠
    2014-09-29
  • 한 슈퍼축구팬의 수기(5)
    ■ 허 헌 연변축구가 갑급진출에 성공했다. 세기팀의 갑급고지의 점령, 이 시대적사명을 완수하기끼지엔 많은 사람들의 감동과 격정을 이어주는 하많은 사연들로 얼룩져있다. 특히 그속엔 미치다싶이 축구를 혹애하는 연변팬들의 스토리가 더욱 사람들을 감동케 한다. 그렇다. 세기팀응원을 위해 떠나는 우리는 정녕 결사대였고 무명영웅들이었다… 그날 붉은 응원복에 “세기팀 필승”이란 글발이 새겨진 흰 천을 머리에 동이고 세기호텔 앞에서 떠나는 우리는 연석팀대 기차도 아니고 보통좌석인 소형버스에 앉아 반만리 원정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바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걸 감안하고 있는터였다. 아니, 연변축구의 부활을 위해 미치다싶이 된 우리는 “세기팀 필승, 필승, 필승”이란 구호를 웨치며 그 어떤 곤난과 애로도 전승할 수 있다는 자신심으로 벅차올랐다. 당시 중원으로 향발하는 행열중엔 3명의 여성이 있었는가 하면 64세가 되는 노인도 있었으며 사업을 제쳐놓고 떠나는 공장장, 경리, 원장 및 개체호도 있었다. 그 외 집에 어린 자식과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놓고 떠나는 분, 장기환자의 몸으로 병까지 속이면서 따라가는 분도 있었으니 그들의 목적이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장사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고 관광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한 개인을 춰세우기 위함은 더욱 아니었다. 그날 우리가 바라고 떠난 목적은 오직 하나, 민족적 양심으로 조선족축구를 살리고 우리 민족의 슬기로움과 용맹완강한 위풍을 넓디넓은 중국대륙에 떨치려고 떠나는 것이 분명했다. 일찍 20세기 20~30년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재해와 일제놈들의 무자비한 민족적 탄압을 피해 살길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만주땅에 정착했다. 그 시기 우리 민족은 논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하는 한편 축구운동으로 반일투쟁을 대체하는 근로용감하고 슬기로운 민족이었다. 그 뒤 해방후엔 이 땅에 민족자치주를 창립, 축구로 중국대륙의 장강남북을 넘나들며 영웅신화를 엮은 민족으로 소문높아 연변은 “축구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축구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소형버스 한대로 왕복 만리길에 해당되는 중원행을 한다고 하면 정신 빠진 놈 아니고는 누가 하겠는가고 모두가 믿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또 노인과 여성들까지 동행해서 말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우리가 확실히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남성까지의 여정에서 길림, 요녕, 천진, 북경, 산동, 하북, 하남 등 5개 성과 2개 직할시를 거쳐 중국대륙의 중심지대까지 쳐들어가야 했으니 멀쩡한 정신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노정이 길고 생소한 길이었기에 우리는 여정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렸다. 즉 운전안내와 자금지출엔 김응산 부장이 맡고 안전운행은 김국진 부장이 담당했으며 출납원으로는 이순복씨를 내세워 모두가 그들의 지휘에 복종하게 하면서 엄한 규율단속으로 노정에서 술 마시는것과 기타 자유주의행동을 엄금하기로 했다. 10월 26일 오전에 연길시를 벗어난 우리는 단숨에 20시간을 달려 이튿날 아침 5시경 진황도시에 도착, 거기서 우리 일행은 어느 한 사우나에서 목욕을 한 뒤 잠간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남성목욕탕만 있고 여성목욕탕은 없었다. 세상에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사우나를 마친 뒤 2층 휴식실레 올라가니 남성휴식실에 웬 젊은 여자가 흰 허벅다리를 다 드러내놓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북한대로 우리는 구석자리를 찾아 참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날이 밝아서 툭툭 털며 일어나니 웬걸 어느 한 방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계집애들이 하품을 하며 줄쳐나오는것이었다. 알고보니 그 “사우나”는 사우나라는 허울밑에 다른 짓거리를 하는 “창녀굴”이였다. 하지만 먼 길을 떠나는 사나이는 재수없는 계집을 피하는게 상책이라 했거늘 더우기 연변축구의 갑급행을 기약하며 떠나는 우리었는지라 누구 하나 계집년들에게 눈길 한번 팔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그 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오전 우리는 북대하의 해변가에서 잠간 관광을 한 뒤 다시 정주를 바라고 갈 길을 다그쳤다. 비좁은 차안에서 모두가 피곤기에 잠겨있자 우리 일행은 용정에서 온 이영희씨의 사회로 오락판을 벌였는데 모두가 자신의 “18번지”로 장끼를 보이는 가운데 그래도 꾀꼬리의 목청같은 세기팀 주장 한송봉선수의 어머니 태경애씨의 노래가 제일 인기었고 걸직한 농담으로 좌석을 웃기던 김철균 기자의 목소리도 피곤기를 쫓아버리는데는 제격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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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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