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염과 왕인미.ⓒ인터넷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왕인미는 1914년 호남 장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친 왕정권(王正权)은 일명의 교사로서 지식이 연박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귀한 것은 사상이 아주 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왕인미한테 몇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왕정권은 딸들에게 전족(裹脚)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지어는 보모로 들어온 어멈까지도 발이 큰 여인이었다. 그리고 왕인미의 모친 역시 자상하면서도 엄한 민국의 여인이었다. 왕인미가 7살 되던 해 셋째 오빠가 몰래 밖에서 노름을 하다가 모친한테 발각되었는데 원래 몸에 병이 있는데다 아들이 노름을 하는 것을 본 모친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아들의 귀쌈을 세 번 때린 후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 그냥 사망되고 말았다고 한다…
왕인미는 바로 이른 가정의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다…
1934년, 왕인미는 채초생 감독이 찍은 영화 <어광곡(渔光曲)>에서 여 주인공을 맡은 한편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전반 상해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금중외로 연예권에서 관중들을 정복한 여 스타가 탄생하면 이에 뒤따르는 건 당연히 애정거리가 화제로 되기 마련이었다. 왕인미 역시 마찬가지었다. 당시 그녀가 추구한 남자는 바로 당시 상해탄 연예권에서의 풍류남아 김염이었다.
기실 왕인미는 명월가무단에서 가수로 활동할 당시 김염과 합작하여 영화촬영을 한 적이 있었고 당시 김염은 그녀에 대해 아주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영화황제>이고 여자는 <영화여왕>이라 둘은 아주 빨리 애정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갔다. 헌데 왕인미의 가정에서 김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줄이야. 하지만 왕인미는 김염이 아니면 그 누가한테도 시집가지 않겠노라며 버티었다. 지어 그녀는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김염은 중국인이 아니지만 독립사상으로 충만된 청년이다. 때문에 난 나라를 잃은 망국자와 결혼할지언정 절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어 왕인미는 결국 김염과 단란한 가정을 뭇게 되었다.
결혼 후 왕인미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렸다. 하나는 예전처럼 계속 연예 권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안 살림에 충실하면서 현모양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정교양의 영향으로 독립자주의 의식이 비교적 강한 왕인미는 결혼 뒤에도 여전히 자기의 두 손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 진보단체인 대붕극단(大鹏剧社)과 계약을 맺았고 또 미군 타자원으로 활동하려는 생각도 하였다. 이에 남편 김염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결국 왕인미는 김염과 타협하여 극단과의 계약을 해제하고 전심전의로 가정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란 일방의 희생으로 원만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왕인미는 임신하였다. 임신초기 여러 가지 활동으로 태아가 위험해지게 되자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여 태아가 안전하게 들어앉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녀가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김염은 겨우 한번 그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이는 그녀한테 큰 상처를 남기었다. 그리고 더욱 상심이 큰 것은 아이가 조산하여 8일 만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는 김염과 왕인미의 결혼생활에 어느 정도 결렬이 생기게 했다. 그 뒤 둘은 언짢은 일 같고도 자주 다투었으며 결국 1944년에는 이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혼당시 둘은 격렬한 다툼도 정면적인 소통도 없이 그냥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기실 당시 왕인미한테는 이혼은 하였지만 김염에 대한 미련마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헌데 김염은 그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 되어 김염은 왕인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듯 재차 다른 여인과 결혼해 버렸다. 그것도 같은 연예권의 동료였고 거기에 왕인미보다 훨씬 젊었으며 당시로는 연예 권에서 한창 잘 나가는 진의와 결혼했던 것이다…
……
한편 그 때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왕인미도 엽전예(叶浅予)란 남성과 결혼하였다. 헌데 두 번째로 결혼한 여인은 늘 알게 모르게 원래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를 비교해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하다면 두 남자를 비교해 볼 때 두 남자 모두 사업을 첫째로 놓는 건 같았지만 김염은 직설적이었고 엽전예는 은폐적이었다. 특히 엽전예는 왕인미와 지향하는 세계관이 부동했으며 심지어 생활습관마저 각각이었다…
둘은 상대와의 정감세계에서 점차 서로 멀어져 가면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왕인미는 김염 역시 진의와의 결혼생활이 윤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비록 다시 결합하지는 못하더라도 김염과 왕인미의 옛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정적 환경이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다음에 계속)
BEST 뉴스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⑤] ‘영화황제’ 김염…식민지 조선에서 상하이 은막의 전설로
[인터내셔널포커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영화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선 출신 배우가 있다. 중국식 이름 진옌(金焰), 한국 이름 김염. 본명은 김덕린(金德麟)이다. 그는 중국 영화에 출연한 외국 출신 배우 정도가 아니었다. 중국 영화의 첫 황금기로 불리는 1930년대, 당대 최고의 남자 스타 자리에 올... -
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④…대림동, ‘조선족 거리’라는 두 개의 얼굴
[인터내셔널포커스] 서울 지하철 2호선 대림역을 나서면 서울의 다른 동네와 조금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중국 음식점과 식품점이 이어지고 양꼬치와 만두, 훠궈를 파는 가게들이 골목을 채운다. 한국말과 중국말이 함께 들리고 주말이면 장을 보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중국동포들로 거리가 붐빈... -
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③…가리봉동, 중국동포의 첫 번째 서울
▲ 2000년대 들어 중국동포들의 생활 거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거리 풍경을 형상화한 이미지. 음식점과 식품점 등이 들어서면서 가리봉동은 중국동포들이 고향의 음식과 정보를 나누는 생활공간으로 변화했다.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서울 구로구 가...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⑥] 웹드라마·사극 넘나든 배우 김호진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다 보면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조선족 배우들을 만나게 된다.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채 중국인 등장인물을 연기하고, 때로는 현대극에서 사극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배우 김호진(金澔辰)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4년 8월 8... -
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①…「한국은 없다」 그 후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1996년, 한 권의 책이 한국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연변 출신 조선족 3세 작가 김재국이 쓴 『한국은 없다』였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지 불과 4년.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른바 ‘코리안드림’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들...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④] 김혁,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 ‘미니영화 개척자’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에서 인터넷 동영상이 새로운 영상문화로 떠오르던 2010년대 초, 짧은 러닝타임 안에 영화적 실험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주목받은 조선족 감독이 있다.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허룽 출신의 김혁(金赫) 감독이다. 1983년 4월 7일 허룽에서 태어난 김혁은 처음부터 영화를 전공한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