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는 훌륭한 남편
지금까지 조조에 대한 정치적 얘기와 군사적인 얘기만 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 사는 평범한 부부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남자는 집 바깥에서 바른 위치를 얻고 여자는 집 안에서 바른 위치를 얻으면 천지의 대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고대의 명철한 제왕들 중에서 후비 제도를 명확히 하고 천지의 덕에 따르지 않은 예가 없다. 따라서 국가의 쇠망과 흥성, 존재와 멸망 항상 후비의 문제에서 연유된다. 이것이 전통사회의 정치 모습이었다.
먼저 원소의 후비 경우부터 살펴보자.
관도대전에서 패한 원소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원소는 생전에 아마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했던 모양이다. 원소의 시체가 채 싸늘해지지도 않았고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그의 부인 유씨(劉氏)는 원소가 총애하던 다섯 명의 첩을 전부 죽이면서 이 여우들이 자기 남편의 정력을 상하게 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여인들의 얼굴을 훼손하면서 이렇게 해야 구천에서 원소를 유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상은 이 짓거리를 도와 그 여인들의 가족들마저 몰살시켰다. 아들이 나서 이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람됨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소는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아주 잘못했다. 당시 최고 실세였던 원소가 조조에게 패한 주요 이유가 사람됨이 아주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후비문제를 어떻게 대해왔을까?
고대사회를 다룬 사서들은 여인들에 관해서 자세하기 기록하지 않았다. 진수의 <삼국지>도 그렇고 <후한서>를 비롯한 기타 사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까닭에 왕실 여인들과 관련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조조와 그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사료가 턱없이 부족해서 매우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찾은 사료에 근거하여 간단하게나마 언급하려고 한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조조의 원부인 유부인(劉夫人)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조의 아들 조앙, 조비, 조식 등이 유부인의 소생이다. 유부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정부인(丁夫人)이 그 자리를 이었다.
장수가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의 장남 조앙이 전사했다. 정부인은 조앙의 죽음에 대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퍼하고 비통해 하였다. 또 목 놓아 대성통곡했고 늘 곡하고 욕하면서 조조를 이렇게 책망했다.
“우리 아들 죽여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거죠.”
조조도 그토록 듬직하게 믿었던 후계자가 죽었으니 슬프기는 마찬가지인데 정부인의 비통함에 줄곧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정부인이 쫓겨났다고 기록했는데 이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알 수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조는 정부인을 집에 데려오려고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몸소 정부인의 친정을 찾아가 그녀를 만나 설득했다. 하지만 정부인은 꿈쩍도 않고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조는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함께 수레를 타고 집으로 갑시다.”
정부인은 조조의 성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조는 문밖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어떻소?”
정부인은 이번에도 쌀쌀맞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조는 아무런 방법이 없이 씁쓸하게 그저 그녀와 헤어질 도리밖에 없었다. 천하의 조조가 이렇듯 부인을 배려한다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부인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조조는 수절하지 말고 재가하라고 권유까지 하는 배려도 베풀었다. 다만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스토리를 보면 정부인이 쫓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조조의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혼이다. 조조는 정부인과 이혼했던 것이다. 만약 이혼이 아니었다면 정부인에게 재가를 권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조조도 법적으로 변부인을 정실로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조조와 정부인의 이혼은 조조 측의 강제 이혼이 아니고 정부인 측이 원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조조는 정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변부인을 정실로 맞이했다.
변부인은 본래 가기(歌妓)출신이었다. 내로라하는 조조가 창녀를 첩으로 들이다니? 당시는 정조의 관념이 별로 없었다. <금병매>의 주인공 서문경도 창녀를 첩으로 들였고 한다하는 역사적으로 고관대작들도 창녀를 첩으로 들인 사례는 보편적이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변여인이 스무 살 때 조조가 초현에서 변후를 맞아들여 첩으로 삼았다. 나중에 조조를 따라 낙양에 왔다.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조조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난을 피했다. 원술이 조조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전하자 당시 조조를 따라 낙양으로 온 첩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변후는 그녀들을 말리며 말했다.
“지아비가 생사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분이 오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내일 지아비께서 이곳에 돌아오신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지아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다들 변후의 말을 듣고 따랐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서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변후의 마음씨에 감동한 조조는 결국 그녀를 정실로 들였다.
정부인과 변부인을 대하는 조조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훌륭한 남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한 발 물러서서 말한다 해도 가령 훌륭한 남편에 못 미치더라도 적어도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려놓을 줄 아는 사나이다운 조조
사내대장부라면 일을 저질러야 할 때는 저지를 줄 알아야 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는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男子漢大丈夫, 應當能拿得起放得下).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사나이를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기준이다.
큰일을 하다가 내려놓는 것은 말이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이 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욕심의 포로가 되어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살아 있을 때 갖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죽음에 임하여 유언을 남기는 것에서 내려놓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생전에 처했던 위치에 따라 유언이 다르다. 조조 같은 천하를 주름잡아온 정치가는 유언을 거창하게 남길 줄로 여기기가 일수인데 반대로 전혀 정치 얘기가 없이 평범한 가장의 유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신의 공적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한 마디만 남겼다.
“내가 군중에서 법을 집행한 것은 대체로 옳았는데 화를 내거나 잘못을 범한 점은 본받을 가치가 없다. 비첩과 예기들은 모두 평소에 애쓰고 고생했으므로 내가 죽은 뒤에도 동작대에서 살게 해주고 그녀들을 홀대하지 말라. 남은 향은 나누어주고 제사에 쓰지 말아야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여인네들은 한가할 때는 한가하게 지내더라도 새끼 꼬는 법을 배워 짚신이라도 팔 수 있을 것 아니냐. 나는 일생 동안 한 모든 일 중에 후회할 만한 일이 있다고도, 누구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저승에 간 다음에 자수(子修, 조조의 장자 조앙의 자)가 제어미를 찾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속담에 이르기를,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하는 말이 착하다.’ 조조는 죽음에 임박하여 실로 착한 말들을 남겼다. 옛말에 ‘흥분한 마음을 토로하며 죽음에 이르기는 쉬우나 정의를 위해 침착하고 의연하게 죽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조는 정의를 외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장의 유언을 남기고 의연하게 죽었다.
조조가 평범하고 자잘한 유언을 남겼다는 이유로 후세 사람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진대(晉代)의 육기(陸機)는 그의 <조위무제문(弔魏武帝文)>에서 “괴로운 마음을 외물(外物)에 매달고 자잘한 생각을 규방에 남겨, 처자식에 미련을 둔 점은 애석한 일이요. 그래서 유언이 조금 세세했던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송대의 문인 소동파는 조조에게 영 우호적이 못했다. “평생을 간사함과 거짓으로 살더니 죽을 때가 되어야 진성(眞性)을 보였다.”고 형편없이 깎아내렸다.
필자는 조조의 유언을 통해 그가 진정한 사나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왜냐? 큰일을 저지를 줄도 알고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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