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철균
인생살이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질문하면 당신은 과연 어떤 답안을 써 넣을지? 당신은 가능하게“여기에는 공식적인 답안은 없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 여기에 공식적인 답안을 써넣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획분할 방법이 없다. 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 보노라면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컸다. 그냥 60%요, 70%요 하고 획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한테 많이 주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니, 나한테 뭔가를 많이 주기는커녕 나의 곁을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10살때와 11살 때 각각 돌아갔다. 모두 그 동난세월이었던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되고 어머니 또한 매를 이기지 못해 훈춘강에 몸을 날리며 자결을 선택했었다. 헌데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막을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8년 8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전, 전날 밤 “독재소조”에서 매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면서 나한테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비가 내리기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더니 그냥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는 그 길로 훈춘강가로 향했고 그 다음은 2일 만에 경신향의 두만강 나루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어머니ㅡ 그때 가령 내가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던 어머니를 따라갔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그 때로부터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란 그리움과 후회 사이로 오가는 무형의 존재였다. 형수님의 슬하에서의 4년, 집체호 생활의 3년 그리고 7년간의 기나긴 숙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를 머리속에 떠 올렸고 간혹 지나 가는 40-50대 여인만 보아도 “저 분이라도 나의 어머니로 돼 줬으면”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기대를 해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편 나는 원래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외토리로 생활해 본 적도 있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생활이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막말로 “아내는 다시 찾아 맞아 들이면 될 수 있으나 한 번 간 어머니는 영영 돌아 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비중ㅡ 이를 저울로 뜰 수는 없지만 또한 사람마다 가늠하는 척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내가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이 돌아가면 늘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다면서 후회한다. 특히 여인들이 그렇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나 또한 장모님을 몇 년간 모셔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아내는 장모님과 어짢은 일 갖고도 자주 다투고 언성을 높이군 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된다고 80세 고령인 장모님이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돌아가기 전의 2 – 3년간 치매 비슷한 현상이 오면서 그런거였다.
후에 장모님이 사망하자 아내는 평소에 장모님과 싸우던 일을 외우면서 자주 울군 했다. 아내의 사례를 보아도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는 모양이다. 주지하다 시피 우리 세대는 이제 오래잖아 60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노인취급을 받을 것이고 어짢은 일에도 자식한테 서운하고 더 나아가 노여운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럼 바꿔놓고 내가 부모한테 잘 했는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자.
부모한테 잘 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식한테 효도를 바라는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作者地址:延吉市光明街89号延边日报综合周报金哲均
电话:0433-2512568(办公室),138-4433-1207(手机)
그렇다. 여기에 공식적인 답안을 써넣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획분할 방법이 없다. 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 보노라면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컸다. 그냥 60%요, 70%요 하고 획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한테 많이 주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니, 나한테 뭔가를 많이 주기는커녕 나의 곁을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10살때와 11살 때 각각 돌아갔다. 모두 그 동난세월이었던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되고 어머니 또한 매를 이기지 못해 훈춘강에 몸을 날리며 자결을 선택했었다. 헌데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막을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8년 8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전, 전날 밤 “독재소조”에서 매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면서 나한테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비가 내리기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더니 그냥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는 그 길로 훈춘강가로 향했고 그 다음은 2일 만에 경신향의 두만강 나루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어머니ㅡ 그때 가령 내가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던 어머니를 따라갔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그 때로부터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란 그리움과 후회 사이로 오가는 무형의 존재였다. 형수님의 슬하에서의 4년, 집체호 생활의 3년 그리고 7년간의 기나긴 숙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를 머리속에 떠 올렸고 간혹 지나 가는 40-50대 여인만 보아도 “저 분이라도 나의 어머니로 돼 줬으면”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기대를 해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편 나는 원래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외토리로 생활해 본 적도 있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생활이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막말로 “아내는 다시 찾아 맞아 들이면 될 수 있으나 한 번 간 어머니는 영영 돌아 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비중ㅡ 이를 저울로 뜰 수는 없지만 또한 사람마다 가늠하는 척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내가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이 돌아가면 늘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다면서 후회한다. 특히 여인들이 그렇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나 또한 장모님을 몇 년간 모셔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아내는 장모님과 어짢은 일 갖고도 자주 다투고 언성을 높이군 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된다고 80세 고령인 장모님이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돌아가기 전의 2 – 3년간 치매 비슷한 현상이 오면서 그런거였다.
후에 장모님이 사망하자 아내는 평소에 장모님과 싸우던 일을 외우면서 자주 울군 했다. 아내의 사례를 보아도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는 모양이다. 주지하다 시피 우리 세대는 이제 오래잖아 60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노인취급을 받을 것이고 어짢은 일에도 자식한테 서운하고 더 나아가 노여운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럼 바꿔놓고 내가 부모한테 잘 했는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자.
부모한테 잘 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식한테 효도를 바라는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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