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내한테 각별했던 어머니의 그 사랑
■ 현룡선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 있기 마련이랄가? 지천명에 들어서면서 나는 가끔씩 홀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과거에 대한 회포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보군 한다. 그때마다 지금껏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온 자애로운 어머니가 눈앞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나고 눈가에 이슬이 맺혀오군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식이 많았건만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각별했으니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던 해는 1961년, 바로 우리 나라가 3년 재해로 극히 어려울 때였다. 그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지나친 영양실조로 근본 젖 한방울 낼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좁쌀죽물로 젖을 대신, 간혹 나는 동네 애기엄마들의 젖을 빌어먹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당시 나는 동네의 여느 애들보다 더욱 어렵게 자랐다 한다.
나는 6남매중 다섯째였으며 그 고난의 년대에 태여나서인지 늘 앓군 하여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 썩이였다.
내가 7살나던 해로 기억된다. 어느날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비자루를 들고 장판구들을 쓸던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눈앞이 캄캄해나며 그만 쇼크하고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집과 가까이에 있는 신흥위생원으로 가게 됐다.
의사는 나의 기색을 살펴보고 또 맥을 짚어보고하더니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증이라 진단을 내렸다. 내가 점적주사를 맞는동안 어머니는 마음이 퍽 속상했던 모양이였다. 어머니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고 몇번이나 이런 말을 곱씹는것이였다.
“엄마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빚진게 너무 많구나.”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말아요.”나 또한 너무나도 어린지라 어머니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흐느끼니 리유없이 따라 울었다.
그후의 나날에 어머니는 여러 자식들중 나한테 각별한 관심을 돌려오셨다. 당시 그 많은 식구들이 아버지 혼자로임에 매달려살다보니 생활난에 쪼들리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식량사정이 어려워 밥을 지어도 밑에 감자를 썰어 납작하게 깔고는 그우에 옥수수쌀을 얹고 맨우에 입쌀을 조금 얹어서 짓군 했다. 그러면 이밥과 옥수수밥을 섞어 먼저 아버지그릇에 담고 다음 나의 그릇에 담았으며 그 다음 입쌀 한알 없는 옥수수에 감자투성이인 밥을 다른 형님누나들과 함께 나눠드시군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색다른 반찬만 있으면 어김없이 따로 그릇에 담아 나한테 특별히 안겨주군 했다. 어머니는 내가 다른 집 애들과는 달리 키가 작고 몸이 약한것이 젖을 못먹고 자란탓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한테 큰 죄를 진 못난 엄마라고 장탄식하군 했다.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느라 어머니는 나한테 늘 지극정성을 다했으리라.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아마 내가 소학교 2학년때였을것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였는데 학부모 한명씩 참석하게 하였다. 운동경기가 반쯤 진척이 됐고 점심시간이 되자 학급의 애들은 저마끔 자기 부모를 찾아 나무아래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게 되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으로 이밥에 콩나물반찬을 준비했었다. 우리 집 생활형편에서는 일년에 몇번쯤이나 먹어볼수 있을가싶은 고급반찬이였다. 헌데 나옆에 앉은 아이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반찬을 아주 맛나게 먹고있는것이였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나의 코구멍안을 살살 간지럽히고있었다. 그 세월 돼지고기는 아주 희귀했다. 명절이 돌아와야 집집들에서 표를 가지고 살수 있었는데 한사람당 몇냥씩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가정들에서는 심한 경제난으로 몇달에 한번씩이나 먹어볼수 있는 돼지고기도 사지 못하다보니 표는 그냥 남아 다른 집에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먹는 돼지고기반찬이 너무도 먹고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운 눈길로 넉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한팔을 확 끄잡아당겨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외면하는 어머니의 두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어머니는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소리없이 가냘픈 두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내가 그토록 돼지고기반찬이 먹고싶어 침을 흘리고있을 때 나를 그처럼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아팠으랴.
철없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다 읽을수 없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나의 생일날이 돌아오게 되자 어머니는 매일 강변에 나가 모래와 자갈을 치는 부업을 했다. 전에도 어머니는 가끔씩 강변에 나가 그런 푼돈벌이를 해서는 집살림에 보탰다. 사실 찜통더위속에서 자갈을 치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여서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어머니는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며칠간 견지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 한푼한푼에는 어머니의 피땀이 고스란히 슴배여있었다.
드디여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해동안 모아두었던 돼지고기표 여러장을 갖고 시장에 가더니 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채로 사왔다.
그날 저녁, 구수한 돼지고기국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고 온집식구가 기분좋게 밥상에 마주앉았다. 어머니는 다 익은 돼지고기를 칼도마우에 놓고 썰어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밥상에 올렸다.
“네가 지난번 운동대회때 그렇게도 먹고싶어했는데 오늘 생일날 실컷 먹어라.”
어머니는 손수 젖가락으로 고기 한점을 짚어 간장에 뚝 찍어서는 내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셨다.
“야, 맛있다!”
나는 감탄을 련발하며 냠냠 맛있게 먹어댔다. 그 시각 어머니는 분명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즐거웠으면 나의 볼에 뻑뻑 뽀뽀까지 해주셨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그 정경만은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류수같은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나이 50세를 넘겼고 딸애도 이젠 나의 키를 넘어서고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감싸안아주고싶은 응석둥이아들로 남아있다. 인젠 85세 고령의 년로한 몸이여서 시름시름 앓는 형편이면서도 짬만 있으면 집에서 나의 빨래감부터 찾는다. 극구 말려도 어머니의 고집을 못말려낸다. 어머니는 또 나와 함께 식사할 때면 부지런히 내가 즐겨먹는 반찬을 내 밥그릇에 집어놓아주시군 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그 옛날 젖이 나오지 않아 나한테 젖 한방울 먹이지 못했던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던것 같다. 긴긴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도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그 일이 평생의 빚으로 맞혀오고있는것이였다.
아! 부모란 바로 이런 존재로구나. 순간, 나의 두눈에 이슬이 맺혔다. 눈앞의 모든것이 뿌옇게 보였다. 미구하여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씻고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다른 자식과는 달리 이다지도 나를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씀하셨다.
“다른 원인이 없지, 너는 내자식이기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이런 말씀에 접한 나는 또다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났다. 평생 자신의 모든것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바쳐왔음에도 그에 대한 보답은 꼬물만치고 바라지 않는 어머니이시다. 정녕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 하신 어머니이시다. 까놓고말해서 나는 지금껏 어머니한테서 너무 많이 받은 대신 엄청 많은 빚만 지면서 살아왔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이 자꾸 하늘처럼 높이 쌓여만 가니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질수밖에 없다. 늦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어머니한테 해드려야 할일은 오직 효도일뿐이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어머니한테 효성을 다 할것입니다.
BEST 뉴스
-
극우, 이제는 때려잡아야 할 때
극우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내의 한 극우 청년단체가 미국에서 첫 공개 활동을 열었다는 소식은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다. 그들이 쏟아낸 말은 정부에 대한 저급한 욕설, 선거가 조작됐다는 허무맹랑한 주장, 종교를 빌미로 한 선동뿐이었다. 사실은 실종되고 증거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음모론과 분열의 광기뿐이다. ... -
“터무니없는 괴담, 정치 선동의 불쏘시개 될라”
글 | 허훈 최근 온라인 공간에 떠도는 ‘중국인 괴담’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내년까지 중국인 2천만 명이 무비자로 들어온다”, “아이들이 납치돼 장기 적출을 당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버젓이 퍼지고 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임에도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수십 차례 공유하... -
인천 앞바다의 선택, 인간애가 남긴 울림
며칠 전 인천 앞바다에서 있었던 구조 소식은 제 마음을 오래 붙들었습니다. 34살 해경 이재석 경장은 새벽 바다에 뛰어들어 위기에 처한 중국인 노인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밤중의 차가운 바다, 거센 파도 속에서 그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 천지를 마주하다
[동포투데이] 2025년 9월 26일 아침, 백두산 자락은 맑은 하늘 아래 싸늘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목에는 이른 시간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카메라를 든 한국인 청년들, 러시아와 몽골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백두산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긴 오르막을 지... -
“이게 한국의 환영 방식인가”…이태원 식당의 ‘금뇨(禁尿)’ 표지판이 던진 질문
[동포투데이] 서울 이태원 한 식당 앞. 영어와 한국어, 중국어로 적힌 안내문이 서 있다. “길을 막지 마세요, 조용히 해주세요, 금연.” 얼핏 보면 평범한 문구지만, 중국어 문장에는 다른 언어에는 없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禁尿(소변금지)’. 그 한 단어는 마치 중국인만 따로 주의가 필요하다는 듯...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동포투데이] 백두산 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서면 용정시 명동촌이 나온다. 소박한 기와집과 푸른 담장이 맞아주는 이 마을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 시인의 생가를 넘어선다. 근대 조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교육·종교·문화가 교차한 북간도의 심장부였다. 1906년 서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