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내셔널포커스] 미국이 유럽연합(EU)의 기술 자립 전략에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며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과의 공조를 강조하고 나섰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국이 유럽의 독자 노선보다 대중국 견제 연대를 우선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지시간 5일 브뤼셀에서 열린 경제안보포럼에서 앤드루 퍼즈더 미국 주EU 대사는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유럽 기술주권 패키지'와 관련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유럽이 핵심 기술 분야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에 대해 "우려스럽다"며 미국과 유럽이 첨단기술 경쟁에서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일 클라우드 서비스, 인공지능, 반도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등 전략 산업에서 유럽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역외 기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정책 패키지를 공개했다.
새 정책에는 공공조달 과정에서 유럽 기업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현재 유럽 디지털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퍼즈더 대사는 AI 분야 경쟁을 언급하며 "서방 세계의 관점에서 미국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기술 우위를 확보할 경우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이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은 미국이 중국과의 기술 경쟁을 이유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확대에 사실상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된다.
EU는 최근 수년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독자적인 산업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특히 반도체 공급난과 희토류 공급망 불안, 생성형 AI 경쟁 격화 등을 겪으면서 핵심 기술의 해외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유럽 내부에서 확대됐다.
EU 집행위에 따르면 현재 유럽에서 사용되는 디지털 제품과 서비스, 핵심 인프라, 지식재산권의 80% 이상이 역외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경제안보와 산업경쟁력 측면에서 취약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부 유럽 정치권에서는 미국 정치 환경 변화에 따라 클라우드 서비스와 디지털 인프라 공급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까지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술주권은 단순한 산업정책이 아니라 안보와 경제주권 차원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유럽이 독자적으로 AI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퍼즈더 대사는 글로벌 영향력을 가진 AI 기업이 유럽에는 부족하고 높은 에너지 비용 문제도 존재한다며 미국과의 협력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 내부에서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지 못할 경우 기술 주권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미국이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와 공급망 재편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 역시 자국 산업 보호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은 이번 논란과 관련해 개방적 협력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럽연합 중국상회는 4일 성명을 통해 중·EU 디지털 경제는 상호보완성이 높으며 개방적이고 안정적인 정책 환경이 기술혁신과 시장 확대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기업들은 유럽 시장에서 현지 투자와 기술 협력을 지속할 의지가 있으며 디지털 전환과 산업 혁신 과정에 적극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 역시 최근 EU의 '디리스킹(위험 축소)' 정책에 대해 보호무역주의는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협력 확대와 상호 호혜적 관계 발전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이 단순한 미·EU 간 정책 이견을 넘어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기술동맹 강화를 원하고 있고, 유럽은 안보는 미국과 협력하되 산업과 기술 분야에서는 독자적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결국 이번 갈등의 핵심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중심의 기술동맹'과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사이의 충돌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와 반도체, 클라우드 산업을 둘러싼 미·EU 간 신경전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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