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지금은 한국의 황금시대다."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 AI 협력 행사에서 남긴 이 한마디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재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등이 참석한 이번 행사는 AI 시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자리로 평가됐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차세대 인프라를 중심으로 협력 확대가 논의되면서 한국이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협력의 중심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있다. 생성형 AI와 초거대 언어모델의 급속한 확산으로 AI 서버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처리해야 한다. 이에 따라 GPU의 연산 성능뿐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공급하느냐가 AI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업계에서는 AI 경쟁의 초점이 단순한 연산 성능에서 메모리 대역폭 확보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현재 HBM 시장은 한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업계는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이 뒤를 추격하는 구도로 보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이 확대될수록 HBM 수요도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한국 메모리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 AI 기업들은 단순히 메모리를 구매하는 수준을 넘어 장기적인 공급망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첨단 메모리 공장은 건설부터 양산까지 수년이 걸리고,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HBM 생산능력을 먼저 확보하는 기업이 AI 인프라 경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하지만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서 모든 주도권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 AI 반도체 설계는 엔비디아와 AMD가, 클라우드와 AI 플랫폼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생성형 AI 모델은 오픈AI와 앤트로픽 등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AI 산업에서 핵심 메모리를 공급하는 중요한 제조국이지만, 기술 표준과 플랫폼을 설계하는 위치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공급망의 핵심 축이면서도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설계자'는 아니라는 점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과제로 지적된다.
삼성전자가 안고 있는 과제는 더욱 복합적이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SK하이닉스와 HBM 경쟁을 이어가는 동시에, 파운드리에서는 세계 최대 업체인 TSMC와 첨단 공정 경쟁을 벌여야 한다. 차세대 2나노 공정의 수율과 양산 안정성은 향후 글로벌 고객 확보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꼽힌다.
SK하이닉스 역시 공격적인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부담도 적지 않다. 첨단 메모리 생산에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확보와 막대한 투자, 전문 인력 양성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현재의 HBM 중심 구조가 장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업계에서는 연산내장메모리(CIM), 광자 인터커넥트, 차세대 패키징 기술 등이 상용화될 경우 AI 메모리 시장의 경쟁 구도가 다시 변화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지정학적 환경 역시 중요한 변수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으며, 중국은 여전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요 생산기지이자 중요한 시장이다. 한국은 미국 AI 공급망에 깊이 참여할수록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중국 시장에서의 사업 전략은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될수록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공급망 관리와 외교적 균형 감각도 함께 요구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력의 진정한 의미가 계약 규모 자체보다 공동 연구개발(R&D)에 있다고 보고 있다. 차세대 HBM과 첨단 패키징, AI 인프라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국제 기술 표준 수립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만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공급업체를 넘어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주체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젠슨 황이 말한 '한국의 황금시대'는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이 확보한 경쟁력을 높이 평가한 표현이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에서 오늘의 생산 우위가 내일의 주도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AI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반도체를 생산하느냐보다 차세대 기술 표준과 생태계를 누가 설계하고 주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이 이번 AI 호황을 일시적인 특수로 끝낼지, 아니면 AI 인프라의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국가로 도약할지는 연구개발 역량과 기술 혁신, 그리고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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