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이진숙

 

결혼 1년 후인 1971년 12월, 큰 딸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때로부터 만 1년이 지난 1973년 1월에 뒤질세라 둘쨰 딸애가 또 태어났다. 연연생이란 말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옛말처럼 말하지만 그 때는 정말 인생계획 밖의 일이라 어이가 없어 좋은 줄도 기쁜 줄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배치받아 간 곳은 헤이룽장성 치따이허(七戴河)시 어느 자그마한 조선족마을의 소학교었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다. 의학상식, 건강상식…그런 와중에 연속 애를 갖다 보니 “우둔한 놈 곰 잡는 바보 엄마”가 되어 동네방네 웃음거리가 됐다. “아유, 기가 차라, 어쩜 그렇게까지…” “병신 안 된게 천만다행이야!”


정말이지 둘째 딸애가 이 세상에 나온 기적적인 사연에 대해 너무도 끔찍스러워 혀를 끌끌 차지 않은 사람이 없다. 큰 애가 석달 푼히 됐을 때부터 나는 온몸이 몹시 불편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고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쩍하면 오가는 감기는 내 몸에 와 붙어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암을 모르는 세월이고 촌 마을이어서 그렇지 지금 같으면 위암을 의심하며 검사받느라 야단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 때는 농촌합작의료여서 나는 쩍하면 의사한테 가서 소화에 좋다는 약이라면 엇바꿔가며 줄기차게 먹었다. 그래도 그 상이 장상이다. 찌들어가는 나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침을 맞아보라고, 기와집 할배가 의사는 아니지만 사정하면 침을 놔줄 거라고…


“바쁜 놈이 우물파기”라고 의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그 날로 침할배를 찾아가 증상을 말했더니 “배속에서 여기저기 움직이며 꿈틀대는 건 적”이라며 나더러 누우란다. 주저할게 뭐람, 아파 죽을 지경인데- 나는 누워서 옷을 거둬 올렸다. 할배는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더니 동침을 빼들고 배의 몇 곳에다 호박 찌르듯 쓱쓱 꽃는 것이었다. 나는 먹지 못하는 고통에서 한시 바삐 벗어 나려고 찍소리 없이 그 침대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도 호전이 없었다. 나는 그냥 약을 밥먹듯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차 11월 말에 우리는 전근령을 받고 연변으로 나오게 되었다. 간단한 세간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돐도 안 된 큰 딸애를 업고 달랑 셋이 몸만 차에 실었다.


나오는 길에 우리는 먼저 밀산에 있는 큰 시형네 집에 들렸다. 길에서 극도로 지친데다 감기까지 걸린지라 나는 시형네 집에 도착하자 마자 동네의사를 보이고 링게르를 맞았다.


그런데 하나님 맙소사! 의사말이 임신이란다. 새해 1월 말이 출생예정일이었으니 따져 보면 그 때 벌써 여덟달 된 셈이다. 바보, 바보! 이런 바보가 또 어디에 있담? 몸집이 그다지 알리지 않았어도 평소보다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 모르다니…진짜 바보야.


첫 애에 이어 두번째 애가 잇따라 생길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이보다 더 무지한 바보가 따로 없다. 무지하면 미련한 법이다.

하지만 옛날속담에 “우둔한놈 곰 잡는다” 했다.


“자식은 하느님이 주는 선물”이라 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서인지 이 미련둥이 우둔한 엄마는 진짜 “호걸”이 되었다.태아 때 벌써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딸애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머리 또한 매우 총명했다. 공부에서는 처음부터 1등 자리를 굳혀왔다. 연변1중에서 칭화대학에 추천(동점일 때 우선)되었을 때 그 걸 마다하고 딸애는 베이징우정학원에 갔다. 졸업하여 베이징에 배치받았고 우정부장의 통역으로 일본과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 우정장관이 중국방문 때는 전 리펑 총리의 통역으로 되어 중국 중앙TV방송에도 나왔다. 정말이지 TV방송에서 리펑 총리의 곁에 서있는 딸애를 보던 순간이 나한테는 더없는 영광이었고 자호였으며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심정이었다.


딸애는 지금 중국 이동통신 베이징시 ××구 분국의 부총경리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족 여자애가 이만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조련찮은 일이냐며 다들 가문의 자랑으로 가슴 뿌듯해 한다.


“사선에서 살아 남으면 꼭 복이 온다”더니 “우둔한 엄마”, “바보엄마”를 만나 세상구경도 못해볼 번 했는데 딸애는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자랑을 안겨 주었던가.


하긴 불쌍한 몸과 정신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애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찍해난다. “만일에, 만일에” 정말 그제날 그 일을 떠올리기가 무섭다. 그리고 딸애가 무척 고맙고 대견스럽다.


세상엔 결코 “절대적” 또는 “100프로”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이란 단어가 하필이면 모든 일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겠는가. 그 “만일”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역전되면서 때로는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게 “바보엄마”인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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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바보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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