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80.jpg【동포투데이 김철균】나많은 노부부, 아들·며느리까지 스포츠에 장끼와 싹수를 보이는 가정, 그들인즉 지난 세기 60연대에 각각 길림성축구팀과 연변배구팀에 몸을 담근 적 있는 정순도/김명숙네 일가이다.


“나늘 놓고 보면 1962년 체육운동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아이스하키팀을 따라 길림성 청소년아이스하키선수권경기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러다 체능이 좋고 속도가 빠른 덕에 1964년 길림성축구팀으로 자리를 옮겼겼는데 경기장에서 한창 전성기를 맞이 할 무렵 맹랑하게도 문화혁명이 터졌다.”


그 후 팀이 해산되고 연길시 농구공장에 배치받았지만 축구꿈만은 버릴 수 없었던 정순도 선생이었다.


그는 함께 배치받은 김석주, 홍종우, 김윤철, 허태열 등 원 길림성팀에 있던 동료들과 함께 종업들속에 축구봄이 일게 했는바 그가 소속된 공장팀은 1970년대에 들어 연길시내 각종 명목의 축구경기에서 줄곧 앞자리를 차지했다. 외지의 전업팀이 와도 해당 부문에서는 자주 연길시 농구공장팀을 내세우군 했다.


정순도 선생은 지난 2009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정순도 선생은 연변 주 노년축구팀 일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아이스하키종목의 국가1급심판원으로 스포츠분야에서 남다른 열성을 보이였었다.


고 정순도 선생의 부인 김명숙 여사는 초중시절에 워낙 농구선수였다. 키가 껑충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연변 주정부 남명학 부주장이 언젠가 기층학교를 돌던 중 그녀를 보고 “넌 머리칼이 많으니 이악스럽겠구나. 배구나 좀 전공해 보렴”라고 말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연변 주체육운동학교를 거쳐 연변배구팀 선수로 부상하였다. 그 시기 그녀는 말그대로 이악스러웠는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장거리달리기를 포함한 모든 고강도 훈련을 용케 견디어 냈으며 얼마 안되어 팀에서 한다 하는 주력선수로 부상, 1965년에는 팀을 따라 전국여자배구리그에 참가하여 2등까지 하였다.


문화혁명후기 소속배구팀을 따라 연변신화인쇄공장에 배치받은 뒤 김명숙 여사는 공장과외배구팀과 함께 훈련에 정진, 애어머니로 된 몸임에도 처녀들 못지 않게 경기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이군 했다. 특히 주종업원 여자배구팀이 제7회 길림성운동회에서 여자배구우승을 할 때는 6살난 아이를 달고다니며 경기에 참가하여 관람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뒤 연변 주마마배구협회가 서자 김명숙녀사는 솔선적으로 그 조직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고는 저조기에 처한 연변의 배구운동을 재활시키고저 동분서주하였다.


고 정순도 선생의 아들네 내외도 스포츠인이다. 아들 정은철씨는 교통분야에서, 며느리 최은숙씨는 소학교 체육교원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서 사업하게 됐지만 스포츠집념은 그들 사이를 더욱 가깝게 되게 했다.

지금 정은철씨는 주 공안분야의 과외축구팀 일원으로, 최은숙씨는 체육교원으로 서로 장끼를 보이고 있다.


고 정순도 선생은 육상은 모든 체육을 잘할 수 있는 기초로서 우선 육상관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고 김명숙녀사는 이악스럽고 고생을 이겨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으며 정은철, 최은숙부부는 기술을 잘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육인으로서 더듬어 낸 각자의 관점, 모두 일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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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가정 정순도일가 노부부, 아들 내외까지 스포츠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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