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동포투데이 리포터 철민] 인간운명에 있어서 선택이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어제의 약자가 오늘의 강자 되고 오늘의 거지가 내일의 부자로 될 수 있는 세상, 여기서 물론 노력과 분투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겠지만 선택 역시 노력과 분투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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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희 -  태평양 건너 세계의 최강국이며 제일 부유하다는 아메리카란 나라에서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된 여인이다.

워낙 중국 연변의 일개 수수한 조선족 여인에 불과했던 그녀, 어릴 적 스포츠에 신체적 소질이 있었고 육상같은 종목에 재질을 과시한 적이 있었으나 가령 후날 여자격투기계에 투신하지 않았더라면, 여자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치고 차고 깔아뭉개는 혈투에 끈질긴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오늘의 그 녀가 없었을 것이다.

심영희 – 그녀의 이름은 워낙 이영희었다. 1963년 중국 연길시 철남 동광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8살 적부터 체육에 재질이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체육운동에서 남다른 싹수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만도 연변의 스포츠 분야는 그 종목별로 아주 단조로왔던 상황, 영희가 선택한 것은 육상종목이었다. 다리가 길고 동년배들에 비해 5센치메터가량 키가 더 큰 영희로 놓고 볼 때  이는 정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영희의 아버지는 늘 “육상은 모든 체육의 기초이므로 체육선수라면 반드시 이 관문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았고 기량연마에 땀동이 쏟기를 아끼지 않았다. 결과 소학교시절에는 육상경기의 1500미터와 3000미터 달리기에서 늘 우승해 어릴 때부터 저력을 보여줬고 중학교 시절에는 배구, 농구 등 구기종목에서도 두각을 자주 나타냈다.

그녀가 무술에 취미를 느낀 것은 고중을 졸업해서부터였다. 그 때인즉 중국의 영화관과 극장가에서 무술영화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헌데 당시만 해도 연변에서 무술을 배울만한 체육관과 무술지도가 별로 없었던 상황어서 무술계에 입문하고 싶어도 생각뿐이었다. 또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정에서도 “하필이면 여자가 무슨 무술인가”고 하면서 내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생각을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몇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차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을 계기로 중한 사이가 급기야 가까와졌다. 그러자 오래동안 품었던 영희의 꿈도 실현될 희망이 보였다.

“그렇다. 남조선(한국)으로 가서 무술을 배운다.”  그래서 1988년 무작정 한국행을 한 그녀였다.

새롭고도 커다란 꿈을 갖고 한국땅에 발을 들여 놓은 이영희, 하지만 그녀를 맞은 한국사회는 이전에 그렇게도 동경하던 “무릉도원”이 아니었다. 우선 동포라고 하면서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고 인격과 대우면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우선 그녀가 취직해 일하던 음식점 주인부터가 중국조선족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보다 봉급을 적게 주는가 하면 나중엔 차일피일 미루더니 3개월치까지 체불했다. 그래서 왜 “나의 봉급만을 체불하는가”고 따졌더니 “너 불법체류신세에 뭘 따지느냐”면서 파출소로 가자며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인내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 가자. 파출소로 가면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너 오늘 사람 잘못 선택했다. 난 여기서 안하고 중국에 가면 그만이지만 너 어떻게 되나 좀 보자.”

영희는 수많은 중국조선족이 한국땅에서 기시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 음식점 주인을 엄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멱살을 잡자 키가 작은 음식점주인은 영희가 흔드는대로 휘친거렸다.

“너 파출소로 갈래 아니면 여기 2층에서 떨어져 볼래?!”

음식점 주인여자는 영희앞에 무릎을 꿇면서 빌었다.

“안돼, 오늘 파출소로 간다. 너 이제 사정하긴 이미 늦었어. 너와 나 오늘 판을 깬다. 나 보따리 싸고 강제귀국 당하고, 넌 내 봉급 지불하고 벌금까지 당해야 해.”

좀 지나치긴 했다. 하지만 영희의 거동은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많은 한국인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그들은 “미스리의 봉급은 자기들이 조해시켜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파출소행만은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가까스로 참았던 영희의 눈물이 쏟아졌다.

“저도 중국에서는 잘 나가는 여자였어요. 제가 왜 한국에 와서 저런 저질적 여자한테서 기시를 받아야 되죠?!…”

후에 영희는 그 음식점이 있는 동의 동장과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체불됐던 봉급도 다 받고는 보다 일당이 많은 건설현장으로 일자리를 옮겨 남자들도 힘들다는 “노가다판”에 뛰어 들었다 …

한국에 체류하는 2년간 그녀는 음식점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긍긍하면서 막노동에 투신하는 한편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무술기능을 연마하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무술계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니 중국조선족인 영희로서는 한국정상급의 무인들과 만날 수가 없었고 혹시 만난다 해도 그들이 그녀를 받아 줄런지도 미지수였다.

그 기간 영희한테는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방방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녀는 하마트면 무술연마를 포기할 번하기도 했다.

1990년 마음속으로부터 일종 실망의 그림자를 지니고 귀국했던 그녀는 인차 결혼했고 그 이듬해엔 아들 김영국이를 낳으면서 일약 가정주부로 됐다.

헌데 인간이란 자기가 희망했던 것을 쉽게 포기할수 없는 법, 때마침 중국의 스포츠 격투기분야에서는 미국 권투계의 타이센이 새별로 떠올랐다.

이는 거의 사그라지던 영희의 가슴속에 새로운 욕망이 불타오르게 했다.

새로운 꿈을 찾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은 가까이에 있는 한국이 아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또한 멀리에 있는 나라이다. 비자를 받기가 힘들거니와 간다 해도 어떻게 자리를 잡는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녀는 갖은 경로를 통해 끝내 미국행비자를 손에 쥐고야 말았다.

1999년 그녀가 태평양상공을 날아 넘어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이미 이영희가 아닌 심영희로 탈바꿈한 뒤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녀의 나이 36세, 여자로서 격투기프로로 되자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심영희씨는 지꿎은 노력과 강훈련으로 나이가 많은 것을 미봉했다. 합기도외 유술과 킥복싱도 익혔고 하루 잠자는 시간은 3 ∼4기간에 불과했다.

일종 행운이랄까. 당시 그녀가 찾은 체육관은 덴젤 워싱톤, 제니퍼러그 휴이트와 마이클 타이센 등 세계정상급 스타를 탄생시킨 “할리우드 짐”이었다. 그렇듯 유명한 체육관인만큼 개인지도료도 엄청났다. 미국생활초기 미용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800달러의 절반 이상이 그 비용으로 나갔다. 그 뒤 그녀는 월세 1500달러씩 하던 세집에서 300달러씩 하는 단칸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를 미봉하기 위한 그녀의 훈련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에 수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며 그녀는 어느 덧 합기도 5단, 중국무술 5단, 검도 5단 등 무술 종합 15단에 달하는 헤비급 무인으로 발돋음했다. 그 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4차례의 감사장을 받으면서 심영희란 이름은 미국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얼마 안돼 그녀는 로스안젤레스 웰셔 경찰서로부터 평생회원배지을 발급 받았으며 또한 미국사상 처음으로 여자경호원증을 수여받기도 했다.

심영희씨가 미국 이종격투기계에서 소문을 놓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미국 로스안젤레스를 방문한 당시 한국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의 경호를 맡아해서부터였다. 당시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도 한다하는 무술인들이 많았다. 특히 거의 본질적으로 중국 조선족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기시부터 하는 한인사회에서 심영희씨가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무술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만큼 심영희씨는 미국사회의 도처에서 무술시범을 보여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국무술, 합기도와 검도 등에 정통한 조선족 여중호걸이었으며 또한 5톤 짜리 자동차가 배우로 지나가도 끄떡없는 기합도 가진 그런  “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한테는 무술시범을 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어느 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아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여자이종격투기계의 챔피언이 되어 이 분야를 제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 이듬해 4월, 그녀와 맞붙은 상대는 먼저 번 세계여자이종격투기 챔피언으로 등극했던 멕시코의 이사벨 마르테네즈였다. 당시 심영희는 이미 44세가 되는 중년층이었지만 상대는 22살이 되는 프로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었으며 특기 또한 발차기로 세계에서 유명했다.

심영희씨는 사전에 마르테네즈의 특기에 대해 깊히 연구했다. 몸이 날래고 특히 발차기를 잘한다는 것, 그 것을 잘 피하고 자기의 특기인 둘러 메여치기를 잘 활용해야 했다. 겨루기가 시작되자 아니나 다를가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발길이 수시로 날아왔다. 만약 그녀의 발길에 요해 부위만 맞았더라면 나의 챔피언꿈은 수포로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영희는 마르테네즈의 발길을 잘 피했고 수차에 거쳐 상대를 둘러 메치기에 성공했으며 그 뒤엔 마르테네즈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팔로 상대의 목부위를 휘감아 머리를 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심영희의 전술은 과연 효과를 봤다. 이종격투기에 있어서 밑에 깔린 측이 항상 힘을 더 빠져 버리기 마련이었다. 2회전에 거쳐 수차씩이나 심영희한테 깔려 일어나기에 실패한 마르테네즈는 3회전을 앞두고는 아예 기권해 버렸다.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이역만리 아메리카땅에서 일어났다. 중국 조선족여인이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됐다. 세계가 열광했다. 세계챔피언상과 금띠를 받는 순간 심영희는 울었다. 오, 얼마나 큰 대가로 얻어낸 챔피언 등극이었던가?!

한편 심영희씨한테 챔피언보좌를 빼앗긴 멕시코의 마르테네즈는 목과 어깨부위에 심한 타격을 입은 듯 한쪽 켠에 밀려 의사의 치료를 요청했다. 치명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심영희씨는 미국에서 수차의 이종격투기 경기에 참가, 지금까지 43차의 경기에서 무려 41차나 우승을 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심영희씨는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수차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대통령상 인선 및 추천은 대통령상을 수상한 시민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상을 미국 국민만 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 그 어느 국가의 국민도 미국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얼마전 그 심영희씨가 재차 고향행을 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상을 받은  연길 윤세미용성형병원 윤경애 원장한테 대통령상을 전해주러 왔다. 그 상 역시 심영희씨가 미국사회에 추천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그렇듯 세계를 놀래운 여인이었지만 필자와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차분한 자세였다.

“2007년 저한테 당한 마르테네즈가 몇해전 또 재 도전을 해 왔어요. 두번째에도 보기 좋게 제압해 버렸죠. 어렵게 딴 챔피언띠를 다시 그녀한테 돌려줄 순 없잖아요. 이는 단지 저의 영예뿐이 아닌 우리 연변의 영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해야겠죠?!”

한편 그녀는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유나이티드 유스 파운데이션”이란 도관도 경영, 청소년육성에 성의를 아끼지 않고있다. 그리고 무료시범과 모금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봉사에도 한몫 크게 기여하고있는걸로 알려지고있다.

심영희씨가 무르익히고있는 또 하나의 꿈이라면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자기의 재능을 영화에 재현시키는 것, 현재 할리우드측과도 여러번 접촉이 잦았고 협상도 바야흐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영희 – 중국조선족이 낳은 “철의 여인” 심영희!

이제 그녀가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그날이면 심영희는 미국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 중국조선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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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자격투기 챔피언과 중국 조선족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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