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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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③

기사입력 2018.02.2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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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PNG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许成淑)이다.

1938년 5월,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2군을 따라 수개월에 달하는 일제와의 조우전을 벌이면서 마침내 겹겹으로 되는 적의 봉쇄와 추격을 벗어나 로야령산속에 진입,로야령에서 항일을 견지하고 있는 항일연군 제1로군과 승리적으로 합류하였다.
 
합류 후 제2군의 4사와 제1군은 배합하여 연속 몇 차례의 대승전을 거두었다. 그 후 제2군은 다시 화전, 교하와 연길지방으로 진출했다.
 
1939년 1월, 제2군의 4사는 화전에서 항일명장 양정우가 인솔하는 부대와 합류하였다.
양정우 사령의 인솔하에 일거에 화전현 경내에 있는 목기하림장과 따푸차이허진을 공략했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허성숙은 상급에서 준 정찰임무를 원만히 수행, 적군의 인수와 병력포치 등 정보를 부대에 제공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어 또 안도현 경내에서 있은 어느 한 차례의 매복전에서 지혜롭게 적의 기관총 한 자루를 노획하기도 했다.
 
u=3360059274,2080046153&fm=173&app=25&f=JPEG.jpg▲ 대사하전적기념관 허성숙 열사 동상
 
1939년 7월, 항일연군 제4사와 제5사의 주력은 개편되어 항일연군 1로군 제3방면군으로 되었고 허성숙은 제3방면군 13퇀 기관총반의 반장으로 되었다.
 
부대재편성이 끝난 후 제3방면군에서는 항일투쟁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기 위하여 적들의 요새지역인 대사하진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적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우리 부대를 두개 방면군으로 나누어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수 있는 대장강남골과 소사하 방면으로 파견하고 주력부대는 대사하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24일 아침 주력부대는 총공격을 개시하여 대사하진 경찰서를 점령하고 자위단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2시간 후에는 대사하진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사하진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송강에 주둔해 있던 적들은 급급히 부대를 동원하여 대사하 방면으로 달려왔다. 이때 남골에 파견된 우리 부대는 기회를 보아 순식간에 대장강과 동양툰부락을 점령함으로써 명월구의 적들로 하여금 부득불 증원부대를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날 밤 지휘부에서는 적들이 추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허성숙과 한 전사를 동양툰에 파견하여 보초를 서게 하였다. 그들은 임무를 받고 동양툰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놈들은 6대의 트럭에 앉아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태는 매우 긴급하였다.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지휘부가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이 함께 부대에 연락을 간다면 적들을 견제하지 못하므로 부대의 안전에 위험이 끼칠 수 있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견제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허성숙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장엄한 임무를 자기가 맡을 것을 결심한 허성숙은 명령조로 다른 대원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서 지휘부에 소식을 전하오. 내가 적들을 견제하겠소!”
 
bandicam-2018-02-22-20-06-58-026.png▲ 동양툰 허성숙 희생지
 
허성숙은 그 전사를 지휘부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탄 자동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허성숙은 자리를 정한 후 침착하게 앞에서 달리는 자동차를 겨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놈들은 항일연군의 매복에 걸려든 줄로 여기고 자동차를 세운 채 어쩔 할 바를 몰라 하며 헤덤벼 쳤다. 한참 후에야 대방이 소수임을 눈치 챈 적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허성숙을 향해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탄알은 빗발치듯 허성숙을 향해 날아왔다. 허성숙은 완강하게 저격하였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안달아난 적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돌격해왔다. 지휘부의 안전을 위하여 허성숙은 개인의 안전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유리한 지세로 옮겨가며 대응 사격을 가했다.
 
“땅!” 아츠러운 총소리와 함께 적탄이 허성숙의 다리를 명중하였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적들을 견제해야 한다!”
 
허성숙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러나 연속 날아드는 적탄은 또다시 그의 복부를 명중하였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사격이 중지되자 적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곧추 마을을 지나 지휘부가 있던 산으로 향하였다. 얼마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허성숙은 있는 힘을 다하여 부대가 있던 산 밑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으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얼마 안 지나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부대는 안전하게 전이하였다. 그 이튿날 항일연군은 대장강남 골에서 멋들어진 매복전으로 적들의 “토벌대”와 특설부대 170여 명을 전부 소멸해버렸다. 그러나 부대의 안전을 위하여 단신으로 적들을 견제한 허성숙은 이 기꺼운 승리도 보지 못한 채 24살 꽃 나이로 전우들과 영영 이별하였다. 허성숙은 청춘과 생명을 성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아낌없이 바치었다. (끝)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
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
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
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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