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 말기 기원 220년 전, 그러니까 3국 정립이 이뤄지기 전에 동탁은 황제를 지마음대로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이른바 ‘황제폐립’이란 패악무도한 짓을 저질렀고, 원소는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려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가 좌절되었고, 다음에는 원술이 아예 자신을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이 세 인물의 행위를 정리하자면 동탁은 ‘황제 폐립’을, 원소는 ‘황제 별립(別立, 另立)’을, 원술은 ‘황제 자립(自立)’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황위(皇位)를 건드리는 것은 최대 난신적자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 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 세 사람을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맥락에 의해 한 챕터에 묶어놓았다.
원술은 원소의 동생이다. 둘 다 같은 아버지 원봉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형제를 친형제라 하기도 하고 사촌 형제라 말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분명한 것은 원소는 첩의 자식으로서 ‘서출(庶出)’이고 원술은 정실의 자식으로서 ‘적출(嫡出)’이라는 것이다. 전통시대에 있어서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지위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자식일지라도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적자에게만 부여하고 서자는 배제시켰다. 서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출세의 길이 막혀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는 두목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홍길동, 장길산, 최제우 등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
한편 적자는 서자보다 타고난 자질이 좋고 인물도 낫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원소와 원술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원소는 인물이 잘 생기기로 유명했고 정계에서 명망도 원술보다 훨씬 높아 인기가 매우 좋았다. 원술은 이에 불복하여 이를 갈고 형과 죽기내기로 싸워서 누가 나은지 승부를 보려고 했다. 원술이 원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후한서> 원술전에 의하면 세상은 원소의 편에 서는 호걸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원술은 욕을 퍼부어댔다. “더러운 놈들, 나를 안 따르고 거꾸로 우리 원씨 집안의 종놈을 따르다니!” 또한 원술은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는 원씨 집안의 씨앗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원소는 원술에게 크게 격노하게 되었다.
원술이 원소를 이렇듯 경멸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원술이 정말 원소보다 나은 점이 있었을까? 이 형제는 서로 피장파장이요, 도진개진이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원술을 ‘도량이 좁고 모략만 좋아한 탕아’라고 요약했다. 사실 이 두 형제는 출신이 고귀해서 콧대가 높았고 오만했으며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이 면에 있어서 원술이 원소보다 더 어리석었고 더 멍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술은 원소의 행위에 대해 얕잡아 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원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술은 편지를 보고 콧방귀를 꼈다. “첩에게 난 자식은 역시 싹수가 노랗다더니 뜬금없이 이런 멍청한 생각이나 하는구나. 따로 황제를 세운다고? 남을 세우느니 차라리 제가 황제로 서지! 우리 유서 깊은 원씨 집안이야 일찍부터 사세삼공의 가문이라 네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세워도 기껏해야 사세삼공에서 오세삼공으로 바뀌는 정도인데 무슨 대단한 게 있다고?”
원술은 동탁이나 원소와 달리 자신이 황제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나름대로 황제가 되려는 논리도 그럴듯했다. 한나라는 이미 관 속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고 유씨도 이미 서산에 지는 해이므로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야 한다. 유씨를 대신할 자격은 누구보다 원씨에 있다. 원씨 집안은 사세삼공의 오래된 집안이며 필적한 만한 다른 집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원씨 가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은 원술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적출이고 원소는 서출이기 때문에 첩의 자식이 황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술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뜸을 들여 봤다. 원소와 조조 연합군에게 패한 원술은 양주 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양주를 지배했을 때 같은 삼공 집안의 자식인 진규(陳珪)에게 편지를 보냈다. “옛날에 진(秦)나라가 통치를 잘못하여 천하의 모든 영웅이 다투어 그 정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마침내 천명을 받아 정권을 잡았소. 지금 세상일은 혼란스럽고 또한 와해되는 형국이니 진실로 영웅호걸들이 일어나야 할 때요. 나와 그대는 오랜 친구지간이니 설마 나를 돕지 않겠소? 만일 내가 큰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가 실로 내 심려(心膂, 가슴과 등뼈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중신을 의미함)가 될 것이오.”
진규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옛날 진나라 말기에는 내키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대로 굴어 포악함이 천하에 넘쳐 그 해악이 백성에게 미쳤소. 낮은 위치에 있는 백성이 살아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붕괴된 것이오. 지금은 비록 말세이지만 멸망한 진나라처럼 가혹한 폭정은 존재하지 않소. 조조 장군이 명민하고 무용이 있으면서 시대의 요청에 순응해 과거의 법과 형벌을 되살리는 한편 흉하고 사특한 세력을 쳐서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이오. 그대가 천하 영웅들과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한나라 왕실을 돕는다지만 법규도 없는 계략을 몰래 세워 직접 화를 실험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 만일 그대가 길을 잃었다가 돌아올 줄 안다면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진실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 비록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육친의 애정이 들어 있소. 내가 사사로움을 쫓아 그대에게 아부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죽음에 처하더라도 할 수 있소.”
원술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려는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흥평 2년(195) 겨울 천자가 이각과 곽사에게 추격당한 끝에 조양에서 패하자 원술은 부하를 소집하여 말했다.
“지금 유씨는 쇄미하고 천하라는 솥은 들끓고 있소. 우리 가문은 4대가 모두 삼공을 지냈으며 백성이 귀의하고자 하는 바이오. 나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민심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여러 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다들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부 염상(閻象)이 진언했다.
“옛날 주나라는 후직에서부터 문왕에 이르기까지 인덕을 쌓아 공을 세우고 셋으로 나뉜 천하 중 둘을 다스리면서도 은나라를 섬기고 그 명에 복종했습니다. 공께서 대대로 번영했다고는 하나 주나라처럼 번성한 적은 없으며 한나라 왕실이 비록 쇠약하다고는 하나 은나라 주왕처럼 폭정을 일삼지는 않았습니다.”
원술은 침묵한 채 매우 불쾌해 했다. 원술은 하내 사람 장형(張炯)의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에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이용하여 결국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원술은 한 개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적인 세력도 턱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 황제가 되는 일에 그토록 목을 맬 정도에 이르렀을까? 남달리 무언가 그만이 갖고 있는 비밀무기가 있지 않았을까?
맞다. 원술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강력한 비밀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황제의 옥새다.
저런, 황제의 옥새가 어떻게 원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이 비밀을 알려면 반동탁연대 투쟁을 돌아봐야 한다.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와 조조 그리고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연합을 맺어 작전을 짰다. 손견은 수도 낙양에 진입하고, 조조는 장안으로 도망가고 있는 동탁 무리를 추격하고, 원소는 후방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 공급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 셋은 한마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원소는 두 갈래 진영의 군수물자 공급을 하지 않았다. 조조가 동탁과의 싸움에서 패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후방 지원을 잃은 조조는 장안 입성을 이루지 못했고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손견도 조조가 망하기를 바랐고 조조도 손견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 동상이몽이었다.
낙양에 입성한 손견은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동탁이 휘황찬란하던 궁전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고 능묘들을 파헤쳐 보물을 약탈해갔다. 불에 탄 궁정 폐허에서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 올려 마시려고 했던 찰나 두 눈이 황소 눈이 되었다. 두레박에 노란 황금색 보자기가 건져졌고 그것을 풀어보니 옥새가 들어 있었다. 큰 꿈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손견은 전쟁 중에 유표의 부하 황조의 손에 죽는다. 후계자 손책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까짓 옥새에 목을 매지 않고 원술에게 군대를 빌리는 조건으로 넘겨준다. 이 스토리는 소설 <삼국연의>에 등장한다. 소설은 소설이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 역사사실이 아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손견은 원술의 부하였고 원술은 손견의 부인 손에서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소설이든 역사사실이든 아무튼 옥새가 원술의 손에 있었고 그는 그것을 무기로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가짜 황제였다. 당연히 온통 천하의 반대에 부딪혔다. 원술과 가장 관계가 좋았던 손책마저 편지를 보내 절교를 선언했다.
가짜 황제든 진짜 황제든 황제를 칭했으면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원술은 그런 재목이 아니었다. <후한서>에 의하면 “향락과 사치가 점점 심해져 수백 명의 후궁들은 모두 수놓은 비단 옷을 입는데 사졸들은 헐벗고 굶주려서 장강과 회수 사이의 지역은 사람의 자취가 끊기고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또 자신은 산해진미를 매일 먹으면서 수하 병사들은 차례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다.
원술의 칭제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조조였다. 조조는 직접 원술 징벌에 나섰다. 원술은 조조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원술은 2년간 버티다 건안 4년(199) 여름 도망갈 길이 없어 결국 자신이 황제노릇을 더 이상 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국옥새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씨 형제가 그토록 물고 뜯고 죽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원수 사이였는데 관건적인 시각에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조조는 원술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취했다. 유비를 보내 하비(下邳, 원술의 근거지)에서 퇴로를 차단했다. 원술은 할 수 없이 회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한때 황제를 참칭했던 원술의 말로는 꿀물 한 모금, 보리밥 한 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할 만큼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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