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자식사랑
글/해피하우스
한국에서 돌아온 이튿날, 평소 어머님이 즐겨드시던 바나나랑 떡이랑 사들고 비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양로원으로 찾아갔다.
한국에서 돌아온 이튿날, 평소 어머님이 즐겨드시던 바나나랑 떡이랑 사들고 비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양로원으로 찾아갔다.
양로원에 당도하니 호리원인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를 안내해주시는것이였다. 퍼그나 널직한 주방겸 활동실인듯한 방에 머리결이 하얀 노인들이 앉아서 한담을 하고 계셨다.
그 속에서 체구가 왜소한 어머님을 대뜸 알아보고 뛰여가서 부둥켜 안으면서 <어머니!>하고 불렀다.
예고도 없이 찾아간 나를 두고 꿈이냐 생시냐 싶은듯 <이게 뉘기요?> 라고 하시면서 원래 노화되여 잘 보이지 않은 눈을 부비고 또 부비셨다.
<어머니, 내 흠이 에미임다.
<뉘기라오?>
<뉘기라오?>
드디여 나를 알아보시고 외국에서 얼마나 힘들었냐고 몸은 아픈데 없냐고 하시면서 가냘픈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감싸주시는것이였다.
몸이 아프면 젊은 내가 아니고 82세 고령인 당신이 더 아플텐데 이렇게 며느리 걱정을 해주시는 시어머니한테 부끄러움이 앞서면서 머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서 나는 와락 시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러는 우리 고부간을 보고 곁에 할머니가 물으신다.
<이 각시 뉘김둥? 아매 딸임둥?>
<아이꾸마. 우리 둘째며느리꾸마. 한국에서 왔으꾸마.>이러시면서 보고 싶었다면서 내 등을 어루쓸어주시는것이였다.
시어머님이 계시는 방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90세 할머니 한분, 그리고 60대인데도 치매1단계인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끼니마다 된장국에 쌀밥이라는 양로원, 숟가락만 있고 저가락은 아예 없다는 양로원… 생전 음식탐을 하지 않던 어머님은 어느날에는 삶은 돼지고기가 드시고 싶더라는것이였다.
그러시는 어머님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파서 나는 또 한번 눈물을 쏟았다. <울지 마오, 나는 괜찮소…>이렇게 오히려 나를 위안해주시면서도 바나나를 드시는것이였다.
얼마나 속이 허하셨으면 저러실까…
가족의 돈 천소시나 받으면서 식사만이라도 좀 잘 챙겨드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양로원측에 서운함이 없지 않아서 의견을 드리고 싶었지만 그 화가 시어머니한테로 돌아올것 같아서 꾹 참고 말았다.
<어머니, 이제 우리집 가기쇼, 내가 잘 모시겠슴다.>
내가 집으로 모시겠다는 소리에 대뜸 얼굴에 화색이 돋더니 인츰 <에구ㅡ, 제 무슨 소리를 하오? 내 이 늙은게 여기서 있다가 죽으면 되지. 자식들 집에 가서 페를 끼치겠소. 여기가 좋소. 동미도 있구…>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집에 가고 싶으면서도 자식들한테 부담이 된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사랑앞에 다시 한번 감동에 목이 메였다.
불현듯 그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에, 마누라의 등쌀에 못이겨 늙은 어머니를 쪽지게에 앉혀서 깊은 산속에 버리러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을가바 길옆의 풀을 꺾어서 표시를 해주었다는 그 이야기…
한평생을 자식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시고 만년에 당신이 기력이 부족하여 자립할수 없으니 양로원 보내달라고 단식투쟁을 하셨던 어머니셨다. 결국엔 시아주버님도 어머님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 뜻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날래 내가 죽어야 저네 시름 놓겟는데… 어째 내 몫숨은 이렇게 질기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는 어머님이셨다.
그날도 시어머니는 애가 하학하기전에 얼른 집가서 밥해놓고 기다리라면서 내 등을 떠밀으셨다.
<부모가 열번 생각할때 부모생각 한번 생각하는 자식은 효자이다.>란 속담을 실감하면서 시어머니의 한없는 자식사랑에 많은 인생공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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