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실화]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연재 ( 3 )
■ 허길성 (전번기 계속)1950년대말 대만으로 쫓겨갔던 장개석의 국민당군대가 대륙의 복건과 광동 지구에서 자주 도발을 감행하면서 “대륙수복”을 떠들어대기도 하고 한국의 비행장을 리용하여 대륙의 동북지구에도 비행기를 파견하여 간첩을 락하시키는가 하면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전단지도 살포하군 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비해 인민해방군에서도 대륙의 전략적요충지마다 주요 병력들을 배치했는데 우리 부대 역시 중앙군위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였던것이다.
교하에서 집합한 우리 부대는 고사포장비들을 인계받은 뒤 인차 진지를 구축하고는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종목은 여러가지였다. 경보소리와 함께 진지에 진입하기, 정해진 시간내에 전투태세를 갖추기와 목표의 고도와 속도에 따라 그 목표를 조준하기 등으로 그중 일단 어느 한 종목의 훈련을 시작하면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낼수 있을 정도로 숙련될 때까지 10차례고 20차례고 반복하군 했다.
당시 교하에는 우리 136사단의 본부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별의별 병종부대가 다 있었다. 례하면 포병부대, 고사포병부대, 땅크병부대, 자동차운수병부대 등이였다. 그 몇가지 병종부대중 나는 자동차운수병부대가 제일 부러웠다. 왜냐하면 다른 병종의 기술을 배워서는 제대후 써먹을수 없겠으나 자동차운수병부대만은 제대후에도 계속 자동차를 몰수 있겠으니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묘할 때가 많다. 어떤 일은 아무리 기회를 노리며 노력해도 헛수고일 때가 많지만 어떤 일은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척척 

풀릴 때가 많은법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당시 대포와 고사포 등 부대는 포를 끌고다니기 위해서도 부대에 자동차가 있어야 했던만큼 이런 부대의 사병들은 반드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워야 했으니 이는 나를 놓고볼 때 큰 행운일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배운다고 하니 기쁜중 근심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나같은 시골뜨내기가 이전에 자동차를 구경은 했어도 언제 운전대 한번 잡아본적도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우리 고사포병부대 장병들을 둘러보니 그 거개가 나같은 농촌출신이였고 도시출신은 별반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운전면허가 있는 사병 또한 그 무슨 큰 학교를 나왔거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였다. 순간 나는 려순앞바다 소평도에서 한어글을 배우던 나날들이 떠올랐고 열심히 하면 꼭 배워낼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겼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달라붙자 시작이 절반이라고 난제가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우리는 자동차리론교재를 외우는 한편 진짜 자동차가 아닌 모형자동차에 올라 조작훈련을 했는데 훈련초반에는 모두가 자동차운전기술을 익히는것이 엇비슷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내가 다른 사병들보다 앞서는것이 알리기 시작했고 그 차이 또한 날이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알고보니 내가 그 무슨 남보다 뛰여나게 총명해서가 아니였고 훈련시간을 더 잡아먹어서도 아니였다. 그것인즉 내가 평소에 글공부에 중시했기에 남들보다 교재내용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터득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나는 자동차운전면허시험끝에 함께 시험을 친 사병들중 제일 첫진으로 합격되여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였는데 나의 리론시험성적은 전 사적으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1959년 부대에는 또 새로운 명령이 중앙군위로부터 떨어졌다. 우리 46군에서 자동차운수련을 새로 내오는데 각 사단으로부터 가장 우수한 운전사 2명씩 선발하게 된다는것이였다.
중앙군위의 명령에 따르면 그해 중국인민해방군이 서장으로 진군하면서 후근운수가 아주 간고하기에 각 군구에서 운수부대를 조직해 서장진군부대의 후근을 책임진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전반 심양군구에서는 몇개 련대가 조직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었으나 우리 46군에서는 한개 련대가 조직됐으며 우리 사단에서 선발된 2명의 운전사중 바로 내가 있었다. 그해봄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 집결됐다. 당시 운수련대는 도합 45대의 자동차에 매 차량마다 전사 6명씩 배치되였다.
당시 우리가 몰게 된 자동차는 구쏘련제 가스차였는데 차가 낡아 자주 고장이 생기는데다 힘도 휴발유차에 비해 많이 못했으며 거기에 그때는 청장도로가 닦이지 않아 길이 엉망이여서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서장 동료장족자치주까지 다녀오자면 한달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것이였다.
1959년 4월초,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출발, 매인당 20일씩 먹을 식량(주로 빵이나 과자 등)을 준비했다. 당시 매차량마다 운전
사가 2명씩이였고 자동차우에는 기관총 1정을 걸어놓고 4명의 전사가 비상사태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사가 2명씩이였고 자동차우에는 기관총 1정을 걸어놓고 4명의 전사가 비상사태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당시 서장으로 가는 곳에는 토비들이 득실댔는데 토비들은 자동차같은것이 지나가는것을 보면 곧잘 기습하군 하였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자동차가 산굽이를 돌 때와 부락으로 들어갈 때면 흔히 기관총 20여발씩 쏘군 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동차 45대가 기본상 동시에 움직이였다. 산사태같은것이 발생하여 길이 막히거나 자동차가 물웅덩이같은 곳에 빠질 때면 공동히 힘을 합쳐 돌사태를 제거하거나 물웅덩이에서 차를 구조하군 하였다. 또한 우리의 차 45대가 거대한 행렬을 지어 움직이면 토비들도 감히 달려들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의 자동차행렬은 될수록 부락에 들어가지 않고 허허벌판에서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그래도 안전하였고 백성들한테 신세를 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놓고보면 서장의 부락들에서 가족만 마을에 있고 남정이 산에 들어가 토비노릇을 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당시 서장의 백성들은 공산당 및 중앙정부와 인민해방군의 민족정책이나 “3대규률 8항주의” 등에 대해 거의 100% 정도로 모르다보니 우리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모습이였다. 아마 그들은 우리를 당지의 무장토비나 기타 다른 군벌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때문에 장정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돌멩이같은것을 들고 달려들 태세를 보였고 부녀자나 기타 로약자들은 우리를 보면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한편 그들은 우리가 해방군이라는것을 쉽게 식별할수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백성들중 누가 토비이고 누가 선량한 평민인가 하는것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서장으로 들어가는 첫진의 운수차대중 서장의 장족부락에서 토비들의 기습을 당한 사례가 자주 있었으며 전사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운수부대는 이미 먼저 간 차대의 교훈을 들은지라 그 대비책을 면밀히 하였다. 그 대비책인즉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될수록 마을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았고 차가 굽인돌이를 돌 경우에는 백배의 경계심으로 그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기관총소사를 하는것으로 우리의 힘을 과시하군 하였다. 때문에 몇차례에 거쳐 청해 고려에서 서장의 동료로 오가면서 단 한차례도 토비들한테서 기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돌사태와 질병 등으로 우리 운수차대의 270명 장병들중 6명이나 이러저러한 사고로 희생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청해에서 떠날 때는 모두 신체검사를 하고 각종 예방주사같은것을 맞았으나 15일 이상씩 목욕 한번 못하고 더운물 한번 마시지 못하면서 불철주야로 달리다보니 아무리 억대우같은 사나이도 견디기가 힘들었던것이다.
이렇게 1년간 우리는 청해와 서장 사이를 5차례 오가면서 중앙군위에서 맡겨준 운수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했는데 한번씩 갔다가 올 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1년간의 시일이 지나 원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생활이란 항상 변수가 생기는법, 언제 또 어떤 일이 발생하고 또 어떤 명령이 떨어지고 하는것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도 바칠수 있을 각오가 있어야 부대생활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만약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런 군인은 군인자격이 없으며 군인생활을 잘할수 없을것이 분명했다.
임무를 마치고 교하의 사단본부로 돌아오니 나의 체중은 1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서장에서 교하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서장으로 갔던 동료와 나를 크게 표창했고 우리 2명에게 한달간의 휴가를 주면서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당시 나의 신체는 진짜 휴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곧 음력설이 닥쳐오는 때인지라 집생각이 간절한것도 사실이였다. 헌데 세상일이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것 같았다. 바로 내가 교하 – 조양천행 렬차표를 사놓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갑자기 부대에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사단내의 모든 장병들은 일률로 부대를 떠날수 없으며 이미 휴가로 집에 갔던 장병들도 몽땅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명령이였다. 또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음력설날 저녁 우리 부대에는 이동명령이 하달, 무작정 기차에 고사포 등 중장비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역시 어디로 가는지 뭘하러 가는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때인즉 음력설기간이라 산악지구인 교하의 날씨는 몹시 맵짰고 바람도 세찼다. 하지만 부대의 움직임은 명령과 더불어 매우 신속하였다.
자정이 지나 새벽 1시가 좀 넘었을 무렵 우리는 교하역에서 모든 장비를 상역한 후 화물차에 올랐다. 우리가 화물차에 오르자 미구하여 기차는 기적을 길게 뽑으며 출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차바람에 더욱 추워났다. 하지만 전사들의 관심사는 추운날씨가 아니였다. 바로 어디에 가며 그곳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는것이였다.
공교롭게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은 동쪽인것 같았다. 그러자 전우들이 나름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가는걸 보니 틀림없이 조선쪽이야.”
“그래 아무래도 이상한걸 조선에서 또 전쟁이 터진게 아니야?”
“그 가능성이 크다구. 어쩐지 기차에 오를 때부터 예감이 이상하다 했는데…”
……
헌데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 기차가 조양천역에서 멈춰서더니 모두가 내리게 하는것이였고 이어서 함께 싣고왔던 고사포와 같은 중장비까지 하역하는것이였다.
조선으로 나가자면 도문쪽으로 계속 가야 할텐데 조양천에서 내리게 하는걸 봐서는 조선으로 가는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에도 나는 조선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전쟁이란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었다.
조양천에서 하차한 부대는 각 련대별로 그 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하고 한개 련대는 광석촌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에 있는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전 한국을 거쳐 날아온 국민당군 비행기 한대가 우리 나라 상공에 날아들었다. 당시 해방군 레이다부대에서는 이를 발견하고 즉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에 전달했으며 사단본부에서는 각 고사포부대들에 즉시 전쟁상태에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국민당군 비행기는 연길쪽 상공으로 날아왔고 마침 연길 공원뒤산에 우리 군 고사포부대가 있었다. 헌데 고사포를 군용트럭뒤에 달고 이동하자고 하니 차고에 있던 트럭마다 기름이 얼어 시동을 걸수가 없었다. 당시 고사포부대 장병들은 그저 하늘로 날아지나는 적기를 바라볼뿐 속수무책이였다고 한다.
하기에 그 교훈을 살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는 연변의 곳곳에 고사포부대를 증가시킨 한편 직접 진지를 구축하여 대기시키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진지를 다 구축하자 련장인 허국선은 전 련대의 사병들을 집합시킨 뒤 부대가 조양천에 오게 된 목적에 대해 알려주는것이였다.
“지금 미제국주의와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우리 동북변경지구에 수차 비행기를 파견하여 삐라를 뿌리기도 하고 간첩도 투하시키군 하고있다. 얼마전에도 국민당 비행기 한대가 개산툰지구에 날아와 삐라를 뿌리고갔고 조양천과 연길의 상공에도 나타났었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이제 적기가 나타나는족족 그것들을 격추시키는것이다. 알았는가?”
“알았습니다.”
임무는 분명해졌다. 이제 국민당 비행기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 적기를 향해 일제히 고사포로 대공사격을 할것이고 적기 또한 우리한테 폭탄을 투하하거나 기관총소사를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사상자가 날수도 있는것이다. 이는 전쟁이였다. 틀림없는 전쟁이였다. 준비가 빈틈없어야 하고 장병 모두가 희생될 각오도 돼있어야 했다.
이렇게 전시준비단계에 들어가자 부대의 규률은 더욱 엄격해졌다. 우리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교대별로 진지를 지키면서 하늘을 응시했고 잠을 자도 옷을 입은채로 자야 했으며 통신병은 교대별로 무전기옆을 지키면서 레이다부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기록하군 했다. 일단 적정이 나타나면 즉시 전투에 돌입할 태세가 다 되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집이 있는 룡정이 멀지 않았지만 좀처럼 갈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근무하던 태양향도 마찬가지로 놀러갈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의 고사포병부대가 조양천지구에 포진하자 적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우리가 오기전에는 그놈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했었는데 왜 우리 고사포부대가 오자 깜쪽같이 “꼬리”를 사리는것일가?
당시 나를 놓고 보면 전쟁이란것이 어딘가 무서운건 사실이였다. 솔직하게 말해 세상에 누가 전쟁이 무섭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한편 한번 통쾌하게 전쟁에 투신해보고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특히 군에 입대했다면 싸움 한번 해보는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인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럼에도 적기가 나타나지 않다니? 이는 당시 모순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후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우리가 포진한 뒤 대만의 국민당군 비행기는 조양천지구를 피해 훈춘쪽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럼 적들이 어떻게 조양천에 해방군 고사포병부대가 포진하고있다는것을 알아냈단 말인가?! 틀림없이 적기가 투하한 첩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기들 본부에 무전을 날린것이 분명했다.
다른 한편 그렇듯 전시준비단계에 있으면서도 나는 한어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나는 책을 모를 글자가 있으면 곧잘 기타 한족전우들한테 물었고 글자를 익히는 동시에 군복안속의 흰천에 새로 배운 그 글자를 적어두군 했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지원군들이 입던 군복을 물려받아 입었는데 군복의 안속은 흰천으로 박은것이였기에 거기에 글을 쓰기가 알맞춤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도 귀했지만 종이에 적으면 쉽게 찢어지거나 잃어버릴수가 있었기에 그래도 쉽고도 오래동안 보관하려면 군복의 안속이 최고였다. 또한 아무 때건 글자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인차 군복을 벗어 다시 볼수도 있어 좋았다.
이렇게 오래동안 매일 몇글자씩 적은것이 얼마 안되여 군복안속은 한문글자로 수백자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내가 어떻게 열정스레 군복 안속에 한어글을 적었던지 많은 전우들은 나를 리해하지 못했다. 지어 어떤 전사들은 나를 “정신환자”라고 놀려주기도 했으며 나중에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정신환자”란 이 말은 허국선련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였다.
어느날 련장이 나를 불렀다.
“허길성, 너 옷 한번 벗어봐라.”
내가 옷을 벗어 넘겨주자 련장은 옷속을 한참동안이나 까근히 뜯어보더니 다시 나한테 물었다.
“너 왜 옷속에 글자를 써놓는거냐?”
“옛 련장동지, 전 지금 한어글자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제가 조선족이기에 한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기타 전우들의 문화수준을 따라갈수 있을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자 련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시 정색해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 너 정신환자인것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전사로구나. 너희들 조선족들한테 정말 탄복한다. 정말 끌질기고도 결심이 크단 말이다. 나도 이곳 조선족지구에 와서 조선말을 좀 배우고싶었으나 좀처럼 되지 않는구나.”
그것을 계기로 련장은 나에 대한 시선을 달리했다. 기실 련장은 지원군 고사포병부대에서 근무한적이 있는 로병으로서 일자무식인 문맹이였지만 지식을 아주 중하게 여기고 지식인을 존중하는 군인이였다. 거기에 거기에 허국선련장은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시원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허국선련장은 늘 몰래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자주 말도 걸어오면서 나를 무척 아끼고 관심하는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고사포진지를 구축한지도 몇개월이 잘되였다. 하지만 적기는 여전히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땅이 녹으면서 농민들이 논갈이를 할 계절이 다가오자 우리는 논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수하게 되니 일단 안심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전쟁터에서 아무리 용맹을 떨치던 군인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진지에서 철수한 뒤 삼봉동과 광석에 포진했던 련대는 다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의 청산으로 가게 됐다. 우리 련대에 다른 임무가 떨어졌던것이다.
청산으로 갈 때 나는 이미 부패장으로 진급했었다. (연재 3)
ⓒ 인터내셔널포커스 & 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
중국을 싫어한다면서 왜 마라탕은 먹을까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생성 이미지 최근 중국 SNS에서는 한 베트남인 노동자가 올린 영상이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직장에서 중국인 손님이 오면 일부 한국인 관리자들이 뒤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한국 사회에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
태극기 뒤에 숨은 극단주의의 얼굴
한국 사회에서 극우는 더 이상 주변부 현상이 아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와 일부 집회 현장에서만 목격되던 극단주의 담론은 이제 정치권과 종교계, 유튜브 생태계, 거리 시위까지 확산되며 공적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벌어진 계엄 논란과 탄핵 정국, 부정선거 음모론, 법원 난입 사태 논란 ... -
외국인이 언제 투표권을 달라고 했나
선거철만 되면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사회적 갈등이 커지거나 정치적 논쟁이 격화될 때마다 외국인 투표권 문제가 다시 소환된다. 그리고 그 화살은 어김없이 특정 국가 출신 외국인, 특히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향한다. 하지만 논쟁이 시작될 때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사라진다. ... -
혐오의 이름으로 소환된 연변 사람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증거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음모부터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투표소와 개표소 주변에서 "중국이 개입했다", "조선족... -
[연변 기행 ②] 숲속에 잠든 발해, 육정산 고분군을 걷다
'해동성국' 발해의 숨결이 남아 있는 육정산 발해고분군. 둔화 지역은 발해 건국 초기 중심지로 거론되는 곳으로, 오늘날에도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인터내셔널포커스] 육정산 발해고분군으로 향하는 숲길은 예상보다 한적했다. 금정대불 주변에 모여 ... -
[연변 기행 ①] 천년의 시간을 품은 둔화 육정산, 불심과 역사가 만나는 곳
중국 길림성 둔화 육정산 문화관광구의 금정대불.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청동 좌불상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육정산은 불교문화와 발해문화가 어우러진 연변의 대표 관광명소로, 세계 최대 규모의 비구니 도량인 정각사와 함께 동북아 불교 성지로 꼽힌다. (사진=육정산 문화관광구) ...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스포츠
more +-
연변 룽딩, 도밍고스 원더골 앞세워 포산 2-0 완파…2경기 무승 탈출
[인터내셔널포커스] 연변 룽딩이 세트피스에서만 두 골을 터뜨리는 높은 결정력을 앞세워 귀중한 원정 승리를 거뒀다. 최근 두 경기 동안 승리를 챙기지 못했던 연변은 분위기 반전에 성... -
한국, 32강행 벼랑 끝…조 3위 8위 추락, 남은 3장 티켓에 운명 달렸다
[인터내셔널포커스]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가 막바지에 접어든 가운데 한국 축구대표팀의 32강 진출 전망이 더욱 불투명해졌다. 27일(한국시간) G조와 H조, I조 최종전... -
세네갈, 이라크 5-0 완파…32강 희망 살렸다, 월드컵 대진에도 변수
[인터내셔널포커스] 세네갈이 이라크를 상대로 화끈한 골 잔치를 벌이며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 희망을 이어갔다. 비록 조 1·2위 직행에는 실패했지만, 대승으로 골득실을 ... -
뎀벨레 전반 해트트릭 폭발! 프랑스, 노르웨이 4-1 완파…조 1위로 32강 진출
[인터내셔널포커스] 프랑스가 우스만 뎀벨레의 전반 해트트릭을 앞세워 노르웨이를 완파하고 조별리그를 1위로 마무리하며 우승 후보다운 위용을 과시했다. 프랑스는 27일(한국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폭스... -
일본, 스웨덴과 1-1 무승부…조 2위로 32강 진출, 브라질과 운명의 맞대결
[인터내셔널포터스] 일본 축구대표팀이 스웨덴과 승부를 가리지 않았지만 조별리그를 무패(1승 2무)로 마치며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을 확정했다. 조... -
[북중미 월드컵] 코트디부아르, 퀴라소 2-0 제압…사상 첫 월드컵 32강 쾌거
[인터내셔널포커스] 코트디부아르가 니콜라 페페의 멀티골을 앞세워 퀴라소를 꺾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토너먼트 무대에 올랐다. 이번 결과는 E조 순위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32강 진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