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태국의 야시장 노점상이 중국 관광객에게 “위챗페이로 할까요, 알리페이로 할까요?”라고 묻고, 베트남 공장에서 현지 반장이 중국인 관리자에게 중국어로 생산 상황을 보고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전자상거래 라이브 방송에서는 중국어로 중국산 제품을 소개하는 장면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동남아 전역에서 지금, 과거와는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한때 반중 정서가 강했던 지역에서 전례 없는 ‘중국어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
HSK 접수 1분 만에 마감… “중국어가 스펙이 됐다”
동남아에서 최근 가장 경쟁이 치열한 시험 중 하나로는 단연 중국어 능력시험(HSK)이 꼽힌다.
2023년 베트남에서는 HSK 접수 시스템이 열리자마자 1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시험 좌석이 매진됐고, 서버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대학생들은 SNS에서 집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베트남 하노이국립대 외국어대학 중국어과의 입시 경쟁도 극심하다. 만점 40점 중 합격선이 38점을 넘긴 해도 있었는데, 이는 전국 최상위권 학생만이 중국어과에 진학할 수 있다는 뜻이다.
태국은 ‘위에서 아래로’, 인도네시아는 ‘억눌림의 반작용’
태국의 중국어 확산은 정부와 왕실이 주도한 ‘상향식 확산’의 전형이다. 시린톤 공주가 40년 넘게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 문학을 번역해 온 사실은, 왕실에 대한 존경이 깊은 태국 사회에서 강력한 상징 효과를 낳았다.
현재 태국은 전 세계에서 공자학원과 공자교실이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3000곳이 넘는 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어 학습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부 지방의 화교 학교에서는 말레이계·인도계 학생 비율이 절반을 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수하르토 정권 시절 32년간 중국어 사용과 한자 간판이 금지됐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금지가 해제된 뒤, 중국어 학습은 일종의 ‘보복적 반등’처럼 급속히 확산됐다. 화교 가정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토착 엘리트 가정에서도 중국어를 필수 교육 과목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국어를 아느냐가 월급을 가른다”
이 같은 중국어 열풍의 핵심 배경에는 산업 구조의 변화가 있다. 중국 기업들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지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현지에는 독특한 ‘언어 피라미드’가 형성됐다. 정점에는 중국 본사 및 파견 관리자, 하단에는 현지어만 사용하는 일반 노동자가 있고, 그 사이에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간 관리자 계층’이 자리 잡는다. 이 계층이 바로 생산과 관리, 소통을 잇는 핵심 인력이다.
베트남의 한 전자공장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약 2300위안 수준인 반면, 중국어를 구사하는 현지 반장은 5800위안까지 받는다. 이 차이가 바로 ‘언어 프리미엄’이다.
중국 기업이 전 산업망을 함께 해외로 옮기면서, 설비·부품·관리 시스템은 물론 식당 기계 매뉴얼까지 중국어가 기본 언어가 됐다. 공급망의 언어 주도권이 동남아 현지 엘리트들에게 중국어 학습을 사실상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기술·표준·플랫폼… 중국어는 ‘산업 언어’가 됐다
중국의 직업교육 해외 진출 브랜드인 ‘루반공방’을 통해 고속철, 신에너지차, 통신 장비 관련 기술 교육도 동남아에서 진행되고 있다. 태국의 직업학교 학생들이 중국어로 된 전기차 회로도를 읽고, 통신 장비의 중국어 인터페이스를 다루게 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중국 기술 체계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전자상거래와 플랫폼 영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동남아 주요 플랫폼의 배후에는 중국 기업이 자리하고 있고, 현지 MCN과 전자상거래 조직의 핵심 운영 인력 역시 중국에서 파견된 경우가 많다.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알고리즘, 운영 전략, 공급망 접근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많은 동남아 판매자들은 중국 쇼트폼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상품을 확인한 뒤 중국 도매 플랫폼을 통해 물건을 들여와 현지에서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 격차를 해소하는 도구가 바로 중국어다.
관광·부동산·금융까지… 중국어는 ‘부의 언어’
동남아 관광 산업도 변하고 있다. 중국인 방문객은 더 이상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부동산 구매자이자 투자자다. 태국의 부동산 중개인이 중국어를 하지 못하면 광둥·푸젠 출신 고객을 상대하기 어렵고, 말레이시아의 고급 병원 간호사와 싱가포르의 프라이빗뱅커들 역시 중국어 능력을 경쟁력으로 삼고 있다.
과거 동남아가 서구 관광객을 위해 영어를 연마했다면, 이제는 부의 결정권을 쥔 집단이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언어는 화폐다”… 동남아의 선택
언어는 일종의 화폐다. 그 가치는 해당 언어가 연결해 주는 자원과 시장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한 세기 동안 영어가 ‘언어의 달러’였다면, 동남아는 지금 산업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자원 언어의 교체기’를 겪고 있다.
고속철, 전력망, 5G 기지국 등 핵심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마주하는 기술 문서와 운영 체계의 언어는 대부분 중국어다. 젊은 세대가 중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문화적 동경이 아니라, 세계 최대 제조국의 산업 인터페이스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이는 금융 중심의 언어 패권보다 훨씬 단단한, 실물 경제에 기반한 언어 영향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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