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 이진숙

 

현재 내 나이 70세가 됐음에도 가끔씩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너무도 너무도 못 견디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나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총명했고 계산에 참 빨랐다. 가감도 구구도 모르는 엄마임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신기하다.


나의 엄마는 근면하고 무던한 분이시다. 일가친척들과 동네에서는 나의 엄마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 다 그러했듯이 나의 엄마 또한 자식들 사랑에 극진했다. 말수가 적었어도 묵묵히 그 행동으로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었다.


온나라가 굶주림에 떨던 지난 세기 60년대초, 3년 “대식품해”를 겪던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때 오빠와 언니는 이미 외지에 가서 사업에 참가했고 집에는 초중생인 나와 동생 둘이 있었다. “공산풍”이 불면서 거의 집집마다 집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우리 형제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는 아침마다 밥그릇을 들고 10분씩 걸어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식당에 가서 밥을 타왔다. 배급소에서 주는 식량표준은 한달에 성인 27근반, 중학생은 35근, 출근하는 사람은 31근이었다. 그 중에서 입쌀은 겨우 2~3근뿐이다. 정말이지 육류도, 채소도, 부식도 없는 때라 허기찬 배를 달래기는 어림도 없었다. 똥배는 왜 그리도 컸는지 먹고 돌아 앉으면 또 배가 고팠다. 엄마는 우리 애들의 배가 부르게 하느라고 타온 밥(혼자 다 먹어도 성차지 않을 양)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이지 않으면 이삭으로 주은 감자와 시라지를 삶다가 밥을 섞어 수량을 늘이었다.


얼마 후 상급의 지시가 있어 식당들은 다 문을 닫고 우린 더 큰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진짜 “대식품해”였다. 개떡, 누룩떡, 나무잎떡…학교에서는 대식품 잘 하는 곳도 참관시켰고 구사회의 쓰라림을 회고하는 대회도 열면서 간고분투하라고 교육했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용평 뒤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마대에 넣어 가득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걸 가루내여 수십번 우린 다음 떡을 만들었다. 웬걸 그게 뭐 떡이냐 쓰디쓴 약이였다. 배가 고픈지라 나와 동생들은 풍로불을 온 가운데 놓고 떡을 새까맣게 태워서 먹었다. 쓴맛과 탄맛이 범벅이 되어 먹기가 한결 나았다. 뽀얀 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탄것엔 발암물질, 연기는 환경오염-무지했던게 다행이었다. 이럴 때면 아버지 그저 “쯧-쯧”하면서 우리를 외면했고 엄마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세월에 엄마는 사시절 짬만 있으면 산이나 들로 나가 뭐든지 먹을 걸 찾느라 말 못할 고생을 다 겪었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엄마는 배가 불렀다”, “난 그걸 안먹는다” 하면서 우리들에게 넘겨준다. 부모는 사흘 굶어도 먹을 것이 있으면 자식들한테 준다는 말 후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 고생은 다 둘째였다. 그 때 엄마는 쌀도둑으로 몰리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굶주림만 더한게 마음고생이라더라.


지난 세기 60년도의 겨울이었다. 옆집에 애 한명을 가진 중년부부가 이사해 왔다. 엄마는 한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면서 늘 진심으로 남의 일을 관심하고 걱정하셨다. 한번은 엄마를 따라 옆집에 놀러 나갔는데 마침 그 아줌마가 부지런히 입쌀을 주머니에 퍼넣고있었다. 이윽고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일이 있어 며칠간 집을 비우겠는데 이 쌀을 어디다 두면 좋겠슴둥?” 했다.


엄마는 한참 이리 저리 보더니 “그래도 부엌쪽에 숨겨 두면 좋겠구만”라고 했다.


쌀주머니는 그 자리에 옮겨졌고 그 아줌마는 엄마보고 집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걱정 마우.”


그런데 웬걸, 그 아줌마가 돌아오던 날 난리가 터졌다. 우리 집에도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 사이 도둑이 들어 그 아까운 쌀을 주머니채로 몽땅 들어갔단다.


“아는 사람이 도둑”이라고 엄마는 하루밤새 쌀도둑으로 몰리웠다. 신흥대대 치보위원인 김××가 찾아와 빈정대며 엄마더러 솔직하게 탄백하란다.


천백번 아니라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버선목이면 뒤집어라도 보이겠건만 하늘도 무심했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온집안에 먹장구름이 쫙 꼈다. 선비인 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빤다. 엄마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여서는 종일 집에 누워서 한숨만 쉰다. 하루는 내가 집으로 오는데 동네 아줌마 둘이 수근대며 서있었다.


“풍더분하게 생긴 분이 보기와 다르네. 사람속은 정말 모르겠당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집으로 막 뛰여와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엄마는 “후-”한숨을 내뿜었다.


“도둑때는 어느 때건 벗는다더라, 걱정 말어라.”


겨울방학이 되자 오빠가 돌아왔다. 엄마가 도둑으로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오빠는 성난 사자처럼 씩씩 거리더니 씽하니 옆집문을 열고 소리쳤다.


“우리 집 빨래줄에 널어놓은 옷들을 당장 벗겨갑소. 우리가 또 도둑질하면 어쩔라구.”


우리 모두 속이 다 시원했다.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했는데 오빠의 그 한마디에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움에 김치 가지러 나갔던 엄마가 빈바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되면서 낮은 소리로 겨우 말했다.


“열지도 않은 김치 한독을 누가 몽땅 퍼갔다.”


엄마는 온돌에 올라와 털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떤 김치인데? 더구나 대식품해에 김치 한독이 어떤건데? 우리 모두 맥이 풀렸다. 배고프던 세월에 기나긴 겨울밤은 견디기 어려웠다. 밤참을 좋아하는 오빠는 저녁이면 배추김치 한포기씩 먹었다. 덕분에 우리도 더불어 끼워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김치를 아껴 먹으면서 오빠를 기다리면서 새독은 열지도 않았었다.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웠다. 도둑때를 벗지 못했으니 내놓고 말도 못했다.


이듬해 봄의 어느날 길건너 집에 또 도둑이 들었다. 온동네가 떠들썩했다. 파출소도 동원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를 짚으면 어떡하지?)


겁이 더럭 났다.


맙시사, 원 세상에! 알고보니 도둑은 다름 아닌 그 아줌마였다. 엄마를 도둑으로 몰아붙힌 그 철면피한 여자였다.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도둑질하면서 그 물건들을 집안 곳곳에, 지어는 구들고래에까지 감추어 놓았단다. 쌀도둑은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고 김치도둑은 그 아줌마였다는 것이 천하에 밝혀졌다.


시루떡빛이 된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한 광주리나 떠이고 초점잃은 두눈을 멀정하게 뜨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 아줌마의 모양새는 정말 천하 꼴불견이었다.


도둑놈의 더러운 딱지를 달고도 참고 또 참으면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던 엄마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함과 분노에 온몸이 전률했다.


“너, 당장 이 동네를 떠나라.”

 

“도둑이 도둑이야 한다더니 참…”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동네사람들이 분노하여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는 그 여자의 앞에 가서 소리쳤다.


“도둑은 앞으로 잡으라 했다. 멍텅구리야. 오늘보니 오누이 똑같은 도둑이네.”


 “하하하…”


온동네가 들썽한다.


그날 나는 일자무식이지만 사리밝고 점잖은 우리 엄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식들의 마음 상할라 억울함도 묵묵히 참아가면서 속으로 눈물 떨구신 위대한 우리 엄마! 지금도 엄마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 어두웠던 그림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난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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