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韓流의 성공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계에 김연아의 한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이영애의 “대장금”이 아시아와 중동지역을 석권하였고 “소녀시대”등 한국의 걸 그룹이 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미국에 진출하고 있다. 최근 한국 여인들이 만들어 내는 한류의 성공을 보면서 과거 한반도 출신으로서 기구한 운명을 맞아 중국에서 황후로 일본에서 순교자로 생을 살면서 역사의 뒤안 길에 숨어 있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700년 전 당시 세계의 으뜸제국인 元의 황후가 되었던 奇小姐의 조국 사랑은 대제국 元에 고려의 문화를 전달하여 오늘 날의 한류의 원조가 되고 있다.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을 이유로 몽고는 오고타이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한다. 이후 1231년 살리타의 침략 등 28년간 7차례 항쟁 끝에 1259년 고려는 몽고가 세운 元의 속국이 되어 元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 元에 부족한 여인을 공물로 바치고 貢女제도가 있었다.


행주 대첩과 행주 奇씨


서울 근교의 고양시에 한강을 굽어 보고 있는 행주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다음해 1593년 2월 서울 탈환을 위해 권율장군이 이끄는 3천명의 소수정예가 조선 침공 총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 폭에 돌을 싸서 투석전을 도운 것으로 돌을 싼 치마를 행주치마로 불러 주부들의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


행주는 奇씨들의 집성촌이었다. 奇씨는 중국의 殷(商)나라의 왕족으로 점령군 周의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에 망명한 箕子의 후손으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48대손인 馬韓의 元王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백제 사람이 된 우성이 행주에서 奇씨를 창성하였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각각 신라에 이주 청주 韓씨로, 고구려에 벼슬하여 태원(충청도) 鮮于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奇-韓-鮮于 3씨는 한집안으로 결혼도 잘 안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퇴계 李滉선생의 문하생이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가지고 스승 퇴계선생과 四端七情 논쟁을 한 고봉 奇大升같은 유학자도 행주 출신이다. 그 보다 수백년 앞서 고려 말 幸州의 세도가 奇子傲의 딸로써 공녀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 간 奇小姐가 오늘 날 한류의 원조인 “高麗樣”의 바람을 일으켰다.


황후가 된 고려처녀


奇소저가 간 곳은 元의 大都. 지금의 北京이다. 그녀는 미모에다 총명하여 고려 출신의 환관의 도움으로 황제의 차 시중을 드는 궁인이 되었다. 당시 원에는 고려의 공녀뿐만이 아니라 고려의 지식인이 환관이 되어 유학지식이 부족한 몽고의 관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원을 세운 쿠빌라이는 고려의 남자는 학문에 깊고 여인들은 미인에다 총명하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원의 황제(순제)는 고려에서 온 奇소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황제 자신은 11세 때 황실간의 세력다툼에 희생이 되어 멀리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1년 6개월을 고려에서 지낸 추억으로 고려 여인에 대한 특이한 향수가 있었다. 서해 5도의 하나인 황해도 앞바다의 대청도에는 지금도 원의 순제가 어린 시절 보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제는 태자를 분만한 奇소저를 황후가 되도록 하였다. 몽고의 전통은 외국인이 황후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奇소저는 황실의 여러 가문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30여년간 우매한 순제를 제치고 원의 황실은 실세가 되었다.


한류의 원조 고려양


기황후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해낸 것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황후로서 중신들이 고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省)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막아 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정 국가를 지도상에서 없애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오히려 원의 중신들을 회유하고 元의 황실에 고려의 아름다운 풍습을 전파시켰다. 고려는 세련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나라임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元에 유행한 고려의 유행을 高麗樣이라고 하였다.


奇황후는 元의 중흥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통하여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황제의 비협조로 타이밍을 놓친다. 결국 元의 황실은 홍건군에서 시작한 明에 의해 大都를 빼앗기고 八達嶺을 넘어 몽고고원으로 쫓겨 가야 했다. 실의에 빠진 奇황후는 고려의 아름다운 靑山을 그리면서 삭막한 몽고초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살으리랐다. 살으리랐다. 靑山에 살으리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으리랐다”라는 청산별곡은 그 무렵 高麗樣을 가져다 준 奇황후가 즐겨 불렀던 고향의 노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줄리아


일본에는 “오타아 줄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일본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여 聖人이 되었고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월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小西行長)가 조선을 지원하러 파병된 李如松의 明軍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면서 평양인근에서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를 발견하였다. 그 고아가 줄리아로 3세 때였다. 고니시는 평양을 빼앗기고 서울로 후퇴 권율장군의 조선군과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보다 1년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침공을 명령했다. 일본군 20만명이 부산에 상륙한 때는 1592년 4월 12일로 조선 건국 2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침공의 직접 목적은 엉뚱하게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들 鶴松이 조선의 使臣과 함께 온 이름 모를 조선 귀신에 씌여 죽었다고 믿고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두사람이 선봉장이 되었다. 가토는 불교신자였지만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동양 최초의 이상한 “십자군”


유럽에서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16세기 중반에는 적극적 해외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회가 창설된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짜비에르가 인도 고아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의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효과가 있었는지 16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천주교(切支丹) 신도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천주교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늘어나고 그 중에서 고니시 家門도 포함되었다.


“아우그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니시의 조선 침공 제1군은 주로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졌으며 붉은 비단장막에 흰 십자가가 그의 군기였다고 한다. 동양 최초의 “십자군”이었지만 무고한 조선을 침공 인민을 살육하는 그들의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고니시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군사제를 요청, “세세페데스”신부가 종군하였다. 고니시의 “십자군”은 부산상륙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고 개전 2개월 만인 6월 13일 평양성도 수중에 넣었으나 이듬해 李如松軍에 패퇴한 것이다.


줄리아는 고니시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고니시의 수양딸로 성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부모를 잃고 일본군에 사로잡혀 일본에 보내지거나 제3국에 노예로 팔려 나간 조선인이 3-4만명이 넘는다. 이태리 화란 등 유럽의 무역상인들이 많았던 지방에서는 일본에서 팔려 간 조선인 노예의 후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의 7년전쟁은 끝났다. 순천에 왜성을 쌓고 명령을 기다리던 고니시군은 토요토미가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귀국명령을 받고 귀환 도중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중국 수군제 독진린(陈之粦)장군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돌아간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순직한 해전이다.


聖人이 된 전쟁고아


일본에 돌아 온 고니시를 기다리는 것은 7년 전쟁중에 세력을 키운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東軍과 토요토미 사후 그를 대리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西軍과 내전이었다. 서군편인 고니시는 1600년 “세끼가하라”전투에서 東軍에 패배하였다. 고니시는 이시다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된다.


양부모를 잃은 소녀 줄리아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도꾸가와의 시녀가 되나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절조있는 생활은 도꾸가와를 분노케 하여 오시마(大島)로 유배된다.


불교 신자인 도꾸가와는 천주교의 금교령을 내리고 천주교신자를 고문으로 개종케 하였다.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당시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잔인한 “후미에(踏繪)” 방법을 고안했다. 성모 마리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펴 놓고 신도들이 진흙 발로 얼굴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 자연스럽게 밟고 지나가면 통과되나 초상화를 밟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곧바로 체포 모진 고문을 하고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교 박해 속에 줄리아는 오시마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니지마(新島) 그리고 고쓰시마(神津島)로 유배된다. 유배되는 곳마다 지방관리와 현지인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여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줄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실한 신앙을 쌓아 그가 죽은 수백년이 된 지금에도 오시마 및 고쓰시마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400여년전 천주교에 귀의한 조선의 전쟁고아의 종교 한류가 일본 현지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글_ 유주열(전 주중대한민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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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와 오타아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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