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김철균

지난해 필자는 연변 주내 모 예술분야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한테 중국 인민폐로 2만위안 정도 사기당했다. 어릴적 훈춘에서부터 함께 자라던 송아지 때의 친구한테 당했으니 분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 돈을 받으려고 그가 근무하는 예술단을 찾아다녀보기도 하고 변호사를 찾아 해당 법률자문도 해보았었다. 그러다가 올해에 들어와서는 단 한번도 그한테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 돈을 받을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 예술단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 법원에 기소해 법적으로 재정으로부터 지급되는 그 “친구”의 봉급을 동결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가 있었다. 그저 시간적으로 빠른가 늦은가 하는 차이가 있을뿐이었다.

올들어 내가 그를 찾아가지 않는건, 그한테 찾아다니는 정력과 시간이면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한테 시간과 기회를 주어 자신을 반성해보게 하려는 것도 있었으며 또한 바꿔놓고 빚진 인간으로서의 그의 입장을 생각해본 것도 사실이었다.

하다면 그가 나의 돈을 빌려간 것도, 갚지 못하는 것(노름을 했거나 다른 한 빚진 곳이 있거나)도 사연이 있을 것이며 이것 때문에 그 또한 심한 고통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도둑이 제발등 저리다”고 전화 한번 걸려와도 빚재촉 전화인가 하고 긴장할 것이고 거리를 나서도 누가 다가와 뒤덜미를 덜썩 잡을까봐 조심조심 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돈을 떼운 나는 발편 잠을 잘 수 있어도 그만은 심한 모순과 번민속에서 모대기며 뜬 눈으로 밤을 샐 수도 있었으리라…

잠깐, 이리고 보니 “문화혁명” 후기에 있은 일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1978년 여름, “문화혁명”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우리 가정에도 “정책낙실”이 되었다. 아버지의 묘와 어머니의 묘를 합장하던 날, 촌의 여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나의 부모님을 지독하게도 박해하던 사람도 몇명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는 불이 일었다. 10살에 아버지를, 11살에 어머니까지 잃고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숱한 고생을 감내해왔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울컥 하는 원한을 참을 수 없어 우리한테 “용서”를 빌며 사죄하는 김××란 인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먹 하나를 날리려던 찰나, 당시 훈춘시병원의 부원장으로 근무하는 형님 김승균씨가 나의 팔을 잡으며 한사코 뜯어말리는 것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한테서 한두매 맞았으면 할거다. 그러면 맘이 편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극단적으로 ‘원수’를 갚으면 새로운 ‘원한’을 살 수도 있는 법이다. 넓은 가슴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긴 그랬다. 그들은 우리와 부딪치는 걸 몹시 꺼려했다. 길가에서 만나도 저만큼씩 피했고 혹시 모임에서 한 자리에라도 앉게 되면 그 모임을 파하기 전에 자리를 뜨군 했다. 그리고 간혹 피할 수 없을 장소이기만 하면 항상 얼굴에 어색하고도 “비굴함”과 비슷한 웃음을 바르면서 담배도 권하고 술도 따라주면서 그랬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말한다면 몇해가 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절명하더라 그 것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어떻게 하늘아래서 허리 펴고 살 수 있느냐?! 하늘이 천벌을 내린 것이다” 라고들 했다. 하지만 필자는 “하느님”이 천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심한 번민과 자책과 고통속에서 병을 얻었고 또한 그것이 “암”이 되고 “불치의 병”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싶었다.

한시기 “홍위병 사령”이요, 혁명위원회 주임이요 하며 사람을 개 패듯 하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쓸쓸했고 지어는 “애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에 “자업자득(自业自得)”이란 사자성어도 생겨나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때 나는 “득(得)”이 있으면 꼭 거기에 정비례가 되는 “실(失)”도 반드시 있게 된다는 철리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18세기~19세기 당시 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있다 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도 이제는 세계패권을 미국한테 내놓은지 100년이 돼오고 있고 미국이란 “국제경찰”의 호시절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한시기 독재자로 유명했던 싸담 후쎄인, 무바라크와 카다피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도 최후의 운명은 모두 비참했다.

중국국내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시진핑 정권이 반부패의 화살을 날림에 따라 지난해에는 보이시라이가 도마위에 올랐고 올해는 저우융캉이 보이시라이의 뒤를 따라 법망에 걸려들었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ㅡ 한시기 얼마나 위풍을 날리며 제밖에 없노라 턱이 높았던 사람들이었던가. 그들이 지금 “가련한 신세”가 됐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의 실각, 이는 중국 반부패운동의 확실성을 긍정할뿐만 아니라 “득”이 있으면 반드시 “실”이 뒤따른다는 철리를 더욱 잘 설명해준다.

이는 인간 대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남한테 얻어맞아도 괜찮고 남한테 잃거나 사기를 다해도 속은 편하겠지만 남을 때렸거나 남의 것을 공짜로 가지고 또 사기를 친다면 남의 저주를 받기에 앞서 자신의 양심이 몹시 찔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남한테 조금씩 밑지고 베풀고 또 조금씩 남을 생각하며 살자. 겉보기에는 바보인 것 같지만 그것이 제일 현명한 “인생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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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과 “실”은 항상 병존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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