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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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길시 제1회 밤 문화축제 개최
    [동포투데이] 현지 매체에 따르면 연길시 제1회 밤 문화축제는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연길 국제회의 전시·예술센터 광장에서 펼쳐진다. 이번 축제에는 국내외에 소문난 인터넷 스타 미씩 상가들과 연변 조선족 특색 먹거리들이 선보이게 되며 연길 백화 미씩 상가와 당지 유명한 먹거리들도 참가하게 된다. 실내와 실외에 설치된 80개 미식 부스는 풍부하고 다양한 먹거리들로 관객들의 발길을 이끌 전망이다. 또한 유명한 음악인을 초청하여 소비자들에게 전자음악을 선물함과 동시에 ‘장백산 영웅’ 자유격투 시합도 펼친다. 연길시정부에서 주최하고 연변융회회의전시미디어에서 주관하는 이번 밤 문화축제는 야시장 경제를 활성화하고 밤 문화를 풍부히 하여 활력이 넘치는 연길을 구축하고 시민들의 생활 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취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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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조선족 마을의 변화, 빈곤마을에서 관광목적지로
    [동포투데이] 몇 년 전만 해도 빈곤마을이었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수남촌에 들어서면 조선족 특색 주택과 맑은 시냇물, 구전한 관광시설들로 마치 풍경구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된다. 관광성수기에 접어들면 수남촌은 집집마다 닭곰에 된장찌개 등 조선족 특색음식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대접하느라 분주하다. 한 마을 주민은 "관광객들이 도착하면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로 도우며 요리를 하고 공연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래 정부의 동서부 가난구제 협력프로젝트의 지지 하에 수남촌은 관광객 접대센터, 수학여행기지를 세웠고 마을의 여러 역사건축들도 보수되고 보호를 받게 했다. 해마다 마을에 천여 명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다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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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9
  • 연변자치주 왕청 '동산초두부' 무형문화유산으로
    [동포투데이] 연변자치주 왕청현 동광진 동산마을은 마을의 별미 음식인 초두부를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신청하고 계승인 신수향(申秀香)을 선줄군으로 온 동네에 제작 공예를 보급하여 팔방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동산초두부’는 작년 12월에 현급 빗물질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였다. 밥상에는 농가야채와 초두부, 밥 그리고 옥수수 전병이 차려져 있었다. 버들 소반에는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초두부가 담겨져 있었는데 다진 고기, 목이버섯, 감자, 파, 생강, 다진 마늘로 만든 양념장을 끼얹으니 고소한 콩냄새와 양념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부드럽고 순한 초두부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듯했다. ‘동산초두부’는 백 년 된 오랜 우물물로 정성들여 만든다. 오랜 우물과 전통공예가 합쳐져 별미 초두부가 만들어졌다. 마을에서는 ‘동산초두부’를 왕청 현성이나 연길시로 옮기려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이 오래된 우물을 떠나면 그 맛을 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동산초두부’의 브랜드를 대외에 홍보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현재 ‘동산초두부’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맛보려 찾아오는 관광객은 미리 예약해야 한다. 한편 신수향네 전병도 이미 상하이와 닝보에까지 팔리고 있다. ‘동산초두부’는 동산촌의 명물이 되였으며 많은 촌민들은 신수향을 본받아 초두부를 만들어 관광객을 접대하기 시작했다. 올봄부터 마을 주민들이 기르기 시작한 토종닭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농가 식탁의 또 다른 인기음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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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5
  • 연길공항-왕청도시공항터미널 계약식 진행
    [동포투데이] 지난 22일, 연길공항과 연변신항그룹은 왕청현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항공 승객의 출행수요에 만족주기 위해 연길공항 왕청도시공항터미널 프로젝트에 대한 합작 의향을 달성하고 계약식을 가졌다. 연길공항과 연변신항그룹 관계자들이 계약식에 참석했다. 왕청도시공항터미널의 성공적인 계약과 함께 연길공항을 중심으로 도시공항터미널의 지상 교통서비스 네트워크 국면이 현실화 되였다. 왕청-연길공항 직행 셔틀버스도 곧 사용에 투입돼 여객들은 "집 앞'에서 공항까지 가는 "원스톱 서비스"를 향수할 수 있게 되었다. 건물이 개통되면 왕청지역 승객들의 출행에 큰 편리를 갖다 주고 공항 터미널 내 체류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공항의 피복 면을 넓히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또 도시공항터미널과 공항 터미널 사이 실시간 정보를 공유해 항공편 상황을 보다 편리하게 조회하고 안전 1차 검사(安全初检)를 앞당김으로써 편리한 항공여행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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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4
  • 中 연길시, 과음으로 인한 구조요청 급증
    [동포투데이] 7월에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자 술 한 잔을 마시면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이 현저히 늘고 있다고 16일 연변일보가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지난 11일 새벽, 택시기사 이 씨는 차에 탑승한 승객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120 구급센터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구급 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하니 그 남성은 과도하게 술을 마셨는지 온몸에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 말에도 집 주소 대신 헛소리를 하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구급 대원들은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하는 이 남성을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했다. 구급 대원 풍 씨는 “여름철에 들어서면서 술에 취해 120 구급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연길시 구급센터 관계자는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심하면 급성 알코올중독이거나 쇼크,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으니 음주 시 자기의 신체 정황을 고려하여 과한 음주를 피할 것을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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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6
  • 연변조선족자치주 6개촌 중국 향촌관광중점촌에 선정
    [동포투데이] 중국 문화관광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제2진 전국향촌관광중점촌 선정결과를 공시했다. 전국 680개 향촌이 선정된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 돈화시 안명호진 대산촌, 돈화시 안명호진 소산촌,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등 6개 촌이 이름을 올렸다. 전국향촌관광중점촌은 국가 지원 정책을 선차적으로 향수 받게 된다.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방천국가급풍경명승지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방천촌은 중국, 러시아, 조선 삼국 변계에 위치해 “동방 제1촌”으로 불리고 있다. 촌민 전부가 조선족으로 구성된 이 촌은 지금도 원초적인 문화적 정취와 민족적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사면으로 뭇 산에 감싸여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촌에는 조선족예술공연장, 민속문화 전람관 등 관광시설이 있어 조선족의 역사문화를 전면적으로 전시하고 관광객들도 조선족의 민족풍정을직접 체험할 수 있다.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 홍기 민속촌은 현 소재지에서 72킬로미터, 주소 재지 연길시와는 140킬로미터, 장백산과는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장백산으로 통하는 명장 도로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홍기촌은 안도로부터 장백산으로 통하는 길에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한 순수 조선족으로 구성된 촌이다. 산을 등에 업고 물을 끼고 있는 이 촌은 민족 건축 특색이 짙은 가옥들이 줄느런이 서있고 주변에는 바둑판 같은 논밭이 있어 조선족의 농촌마을 풍정을 만끽할 수 있다.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 홍일촌에는 30년대의 조선족 가옥 양식으로 복원한 항일투사 김백문의 옛집과 백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독일식 교회당 건물을 원 모양으로 보존한 촌사관을 대외에 개방하고 있다. 돈화시 안명호진 대산촌 여러 민족 집거지인 대산촌(대산취자촌)은 한족, 조선족, 만족등 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각 민족은 서로 동화를 이루면서도 자기의 전통적인 문화 습관을 보존하고 있다. 이 촌은 독특한 자연 풍광과 쾌적한 기후,다양한 관광환경과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목단강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주변에 수많은 저수지와 호수들이 있어 예로부터 “어미지향, 북국의 강남”으로 불리고 있다. 돈화시 안명호진 소산촌 길림성과 흑룡강성 접경지대와 안명호국가자연보호구의 핵심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소산촌은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맑은 물이 마을을 에돈다. 안명호는 장소천이 쓴 “안명 호반”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소산촌은 안명호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촌에는 “안명호 어항”으로 이름 지은 풍경구가 있는데 이 곳에서 식사와 숙박을 할수 있고 수상 오락으로 즐길 수 있다. 수상 오락장에서 배놀이, 뽀트놀이, 낚시로 휴식의 한때를 즐기고 또 배를 타고 안명호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시구역과 7킬로미터 가량 떨어지고 도문경제개발구와는 0.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수남촌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남촌에 가면 조선족 특색이 짙은 가옥과 문패루, 민속전람관, 나무잔도, 관광계단, 백년나무, 백년우물을 구경하고 조선족가무, 모닥불야회도 즐길 수 있다.(사진=中國朝鮮語廣播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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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중국 조선족 학춤(鹤舞)과 유래
    학춤은 기원이 오랜 학모양의 탈을 쓰고 날 새의 움직임을 재치 있게 무용화한 특이한 민속춤이다. 한마디로 학의 모양을 춤으로 재현한 예술이다. 학춤에 대한 문헌기록은 고려시기부터 보이는데 《고려사》의 기재에 의하면 학춤은 77명이 참가한 대형가무중의 한부분이였는데 “오방처용무”가 끝나면 “학련화대”가 추어졌다고 한다. 학은 전반 과정에서 연꽃을 터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악학궤범》에는 “박을 치면 청학과 백학이 나는 듯이 밟고 지당 앞에 나가…”라는 춤보법을 묘사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학춤도 독립적인 궁중무용임을 설명해준다. 전하는데 의하면 조선조(1392년~1910년)시대 학춤은 궁중에서 공연 되였던 무용이다. 조선조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후 궁중에서나 공연 되였던 학춤은 그 전승이 단절 되였다. 1935년 당시 천재적인 춤꾼이라고 불렸던 한성준(1874년~1942년)은 자신의 창작무용발표회에서 다시 학춤을 창작무로 선보인 후 학춤은 조선반도에서 전승이 이어졌다고 한다. 중국 조선족의 학춤은 민간예인 김재선(녀 金再善)에 의해 전승되고 시연되였는데 그가 마을에서 학춤을 출 때는 흰옷을 입고 초신을 신고 흰부채를 만들어 학의 날개로 만들어 추었다고 한다. 김재선은 1890년에 조선 강원도 금강의 한 민간예술인 가정에서 태여났는데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여러가지 무용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1936년 고향을 떠나 지금의 연변자치주 안도현 만보진 일대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학춤과 같은 전통무용을 전수하고 자랑하였다. 1952년에 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학춤을 선택하였는데 이불보를 뜯어 학을 만들어 공연하였다고 한다. (자료제공 : 안도현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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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3
  • 中 50쌍 남녀 창바이산서 대형 집단혼례 거행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지난 8일, <가장 아름다운 역행자들에게 경례하자>란 슬로건으로 된 대형 집단혼례가 지린(吉林) 연변의 창바이산(长白山)에서 거행되었다고 9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망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일의 혼례식에는 중국 전국의 코로나 19 대응 일선에서 온 50쌍의 청춘 남녀가 행사의 주인공으로 참가, 코로나 19 때문에 혼기를 연기한 이들은 후베이(湖北), 지린, 산둥(山东)과 쓰촨(四川) 등 성시에서 왔으며 의무일꾼, 인민경찰, 후방 기층 근로자 및 자원봉사자 등이었다. 한편 이 날의 혼례식에는 2299뿌리의 인삼으로 엮은 <서로를 지키며 흰 머리 될 때까지(长相守 到白头)>란 글발이 선보여 장내의 이채를 돋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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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코로나19 속 중국 대학입시 본격 개시, 연변주 9185명 응시
    ▲7일 오전 9시, 연길시의 888명 조선어 수험생들은 연변1중 시험장에서 조선어문시험을 맞이했다.ⓒ연변일보 [동포투데이] 2020년 전국 보통대학교 학생모집 통일시험이 7일 전격 펼쳐졌다고 현지 매체 연변일보가 보도했다. 코로나의 여파로 한 달간 미루어지며 더욱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대학입시이다. 오전 9시, 연길시의 888명 조선어 수험생들은 연변1중 시험장에서 전 시의 3349명 수험생들과 일제히 어문시험을 맞이했다. 연길시 학생 모집판 공실에 따르면 올해의 대학입시를 위해 연길시는 연변1중, 연변2중, 연길시 제1고중을 시험장소로 정하고 120개의 시험장을 마련했다. 한편 연변주는 지난해보다 717명이 증가된 9185명의 수험생이 참가하는 올해의 대학입시를 위해 8개 시험지역, 12개 시험장소, 350개 시험장을 설치하고 격리 시험장 42개, 예비 시험장소 8개에 예비 격리 시험장소 8개를 더 설치하고 현, 시마다 지정병원에 격리시험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올해 대학입시 한어시험(소수민족 한어능력 등급시험)이 전국 보통대학교 학생모집 통일시험 후인 9일로 미루어져 조선어 수험생들의 대학입시는 7일부터 9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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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7
  • 연변자치주 왕청현 계관향 제1회 검정귀버섯축제 개막
    [동포투데이] 길림성 왕청현 계관향 제1회 검정귀버섯(목이버섯)축제가 지난 4일 개막했다. 개막식에서는 검정귀버섯규모재배호들을 표창하고 당지 은행과 농산물기업이 계관향과 빈곤부축합작협의를 체결했다 개막식에서는 또 검정귀버섯채집, 포장 경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져 축제에 열기를 더했다. 계관향 검정귀버섯 재배역사는 근 50년에 달하며 현재 검정귀버섯 산업은 전 향의 기둥산업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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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사람들 검색결과

  • 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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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1

오피니언 검색결과

  • 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
    ●김 혁 찜통더위에 꺼둘린 7월 22일,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 소기마을에서 최창호 선생 조각상 설립식이 조촐하게 펼쳐졌다. 허물어져가던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가 보수되었고 최창호 선생의 100년 고택도 다시 손길이 닿아 초옥의 운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 고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사과배의 선구자’로 정평되는 농예인 최창호 선생의 한백옥 흉상(胸像)이 건립되었다. ▲22일 오전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에서 최창호선생의 조각상 (낙성) 및 사과배 종나무(宗树) 기념비 확장공정 준공식을 가졌다. 최창호는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에 조선 리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 1916년에 드디어 다다른 곳이 바로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여서 ‘작은 버치골’로 불리는 용정 로투구진 소기(小箕)촌이였다. 최 씨 일가는 화전을 일구어 첫해 농사를 지었고 지세 높고 양지바른 곳에 8칸 초가집을 지었다. 최창호네 집 뒤편에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그 언덕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나무를 서렬열로 심었다.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였다. 1921년에 최창호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김치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짚으로 싸고 삼으로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렇게 6년째 되던 해의 봄 3그루의 과일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나무가 연변에서 생성된 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사과배는 연변은 물론 동북지역과 내몽골, 화북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기지인 연변과수농장 만무과원이 용정에 조성되었다. 사과배는 국내외에 소문 높은 브랜드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사과배산업은 연변 농업경제의 중요한 기둥 산업으로 간주되었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이다. 150여년의 이민 정착 역사를 경유해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있다. 이렇듯 이민 민족인 조선족은 중국 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이념을 키워온 조선족 문화를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년 세월을 경유해오면서 사과배는 중국 조선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의 상징물로 부각 되였고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의 중요한 역사, 경제, 문화 유산으로, 소중한 향토교재로 각광받게 되였다. 이에 용정시정부에서는 지난 1987년 최창호 선생의 호흡이 서린 소기촌에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정부와 용정시정부에서 ‘사과배소개기념비’를 세웠으며 오늘에는 드디어 그 사과배의 ‘산파’인 최창호 선생의 기념석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용정지역에는 모아산 기슭에 과수원을 건설할 구상을 무르익혀 오늘의 만무과수원을 일구어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연변의 첫 반일시위운동의 선두에 섰던 조선족 화가 한낙연, 조선족 교육의 일번지 명동학교의 창시자 김약연,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등 명사, 명류들의 기념 동상이 들어서게 되였다. 이러한 동상들은 지역사회의 역사와 정체성을 우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지역사회의 둘도 없는 랜드 마크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돌을 쫏고 나무를 깎아 형상 하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선대 혹은 당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려 정성껏 세운 동상은 역사를 기억하려는 지성인들의 정열과 민족심의 발현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리고 글로벌 시대 세계로 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명예와 공훈에 걸맞은 기념비, 동상을 적지에 건립하는 일은 이곳을 찾는 시민, 타지의 관객들에게 지역사와 현대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될 것이다. 민족역사의 보존, 전승, 특히 지역사회의 위상에 걸맞은 기념물의 건립은 역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찬란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7-27
  • 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김호림 알고 보면 정암촌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 마을에 딱 들어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 바위는 멀리부터 마을의 비석처럼 시야에 안겨온다. 이 바위는 3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동, 서 두 쪽으로 나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사이에 나무가 뉘여져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 바위를 드나드는 경우를 두고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는 말고 가 생겨날 정도이다. 정자 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 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오랜 옛날부터 백의 겨레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 바위 아래의 석두하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 바위처럼 유표했다. 공교롭게 함경도 마을은 바로 남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석두촌(石头村)으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석두하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만주국 강덕(康德) 원년(1934) 함경북도에서 백여 가구의 농부들이 집단 이주하여 이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은 조선 총독부에서 관리했다고 해서 시초에는 “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렸으며 1936년 집단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남도 충청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북쪽에, 북도 함경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남쪽에 위치하면서 남도와 북도는 이 고장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어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아예 송두리째 소실된 마을도 있었다. 번신령(翻身岭)은 벌떡 자빠졌다는 속설 때문에 불리는 지명인데 정암촌에서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북쪽 약 3리부터 시작되는 골짜기이다. 세 부락이 있었고 한때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전부 골짜기 밖으로 철거 되였다고 한다. 정암촌도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 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월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区)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였다. 심범극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려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청주 아리랑”은 이역의 새 마을 정암촌에 정착하였고 또 정암촌의 이미지로 되고 있다. 구경 이 노래가 이민들의 70년 이주생활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또 어떻게 본고장의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의 운명과 생활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는 아무런 온난의 여지가 없다. 중 한두 교전에는 학자들이 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이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었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고도(孤岛)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23
  • 까울령 저쪽에 고려마을이 있었다
    ●김호림 예전에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려면 꼭 그 산마루를 넘어야 했다. 일명 까울령, 그 무슨 까마귀가 날아가다가 울음을 떨어뜨린 이름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산이 하도 가파르고 높아서 새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었을까. 까울령은 두만강 기슭까지 머리를 쭉 내밀고 장벽처럼 앞뒤를 가로막고 있다. “겨울이 되면 어떤 차들은 산길을 버리고 얼음 위로 달렸지요.” 조만길씨의 어릴 적 기억에는 바퀴 달린 “썰매”가 그 무슨 동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때 두만강의 빙판에는 네발 달린 소가 가서 얼음구멍에 빠진 네 바퀴 차량을 끌어내는 진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조만길씨가 살던 경영촌(庆荣村)에서 집집마다 식탁에 늘 반찬처럼 올리던 한담 거리였다. 아이러니하게 조만길씨는 훗날 그 얼음구멍을 만들던 강물의 관리자로 된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향하여 진수력관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흥진촌)입구에 있는 이름비. 경영촌은 까울령동쪽의 첫 동네이다. 광서 15년(1889년), 이곳은 나루터가 생기면서 배 선(船), 나들목 구(口)를 넣어 선구라고 불렸다고 한다. 1924년, 동네는 20여 가구로 늘어났으며 동쪽의 지상표지물 같은 굴륭산(窟窿山)의 이름을 빌어 공동산(孔洞山)이라고 새롭게 불렸다. 굴륭산은 북쪽 산비탈에 작은 동굴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1949년 마을은 상서로운 뜻을 부여하여 번영을 경하한다는 의미의 경영이라고 개명하였다. 1980년대 초 경영촌에는 약 200가구 살고 있었으며 그중 한족은 10가구 정도 되였다고 한다. 그 후 꾸역꾸역 밀려온 한족이 두만강의 물처럼 마을을 야금야금 잠식하며 지금은 마을을 거의 반 정도 삼키고 있다. 어쨌거나 조만길씨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경영촌의 사람들은 한족을 내놓고 선조가 거의 다 한 고향이였다. “저기 강 건너 쪽입니다. 저처럼 모두 함경북도에 원적을 두고 있었지요.” 조만길씨의 말을 따른다면 예전의 마을에는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산마루를 불렀던 이름인 “까울령”은 분명히 그들의 고향인 함경도의 방언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이 “까울령”은 훈춘의 지명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낼듯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까울령은 옛날 고이산(高尔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이산은 만족말로 홰나무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고이산을 우리말로 음역하면 “까울령”이 된다. 1964년 고이산을 다시 경영촌남쪽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남고령(南高岭)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까울령의 수목은 재생림이며 홰나무가 주종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서 홰나무의 산이라는 의미의 고이산이라고 이름을 달았는지는 영문을 알수 없다. 더구나 그 후의 이름인 남고령은 경영촌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한다. 기실 까울령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은 흥진촌(兴进村)이다. 창문을 열면 아스라이 솟아있는 산이 금방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흥진촌은 흥성하고 전진한다는 의미로 1984년에 지은 이름이다. 선통 2년(1910년)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봄이면 산과 들에 살구나무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행화촌(杏花村)이라고 불렸으며 훗날 마을에 조선인만 살고 있다고 해서 고려촌이라고 불렸다. 한때는 서쪽의 수남촌(水南村)소속으로 있었다. 수남촌은 동쪽의 봉오골(凤梧沟)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봉오골은 일명 봉오동이라고 하는데, 선통(1908~1912년)년간에 개발된 무려 25리의 긴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에는 하, 중, 상 등의 마을이 30~60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까울령”의 험준한 산줄기는 이 봉오골을 병풍처럼 빙 둘러치고 있다. 흥진촌 아니 고려촌은 그 병풍 바깥쪽에 기대여있었다. 고려촌의 북쪽 고개를 넘으면 금방 봉오골이 나선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봉오골을 북봉오골이라고 불렀고 고려촌을 남봉오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봉오골이라고 하면 대뜸 우리 마을인지를 알았지요.” 고려촌 태생인 한룡범씨의 말이다. 예전에 항간에서 남봉오골이라는 이 이름은 고려촌이나 흥진촌보다 더 잘 통했다고 한다. 한용범씨는 고려촌에 몇몇 남지 않은 토박이였다.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 은덕군에서 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조손 4대가 거의 100년 동안 한 고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은 인가가 한때 50여 가구에 이른 적 있지만 현재는 30가구 정도이며 그나마 사람이 들어있지 않는 가옥이 적지 않다. 한용범씨의 말을 빈다면 두메산골이라서 사람들을 붙잡아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려촌은 이전에는 조와 콩 농사를 지었으며 지금은 옥수수와 콩을 위주로 심고 있었다. 하도 척박한 고장이라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 무렵 마을의 으뜸가는 부자는 지주 아닌 부농이었다고 한다. “북 봉오 골운 정말 ‘만석 부자’의 고향이지요.” 한용범씨는 고개 하나를 사이 둔 봉오 골에 여간 부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봉오 골은 금처럼 귀한 송이버섯은 물론이요, 영지와 황기, 기름 개구리 등 특산물이 산판에 널려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봉새가 깃든 오동나무의 골짜기라는 것. 전하는 바에 의하면 봉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오동나무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동나무가 나는 터는 천하의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봉오 골이 세간에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오동나무 때문이 아니다. 1920년 6월 봉오골에서 홍범도(洪范图), 최진동(崔振东)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韩军北路督军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 추격대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했다. 한편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였다. 봉오동전투는 유명한 청산리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투가 된다. 이때 일본군은 함경도 풍서리에서 봉오골에 지원부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풍서리는 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며 바로 경영촌의 강 맞은쪽에 위치한다. 일본군 지원부대는 두만강을 건너고 경영촌을 지나 봉오골로 향발했다. 이 무렵 경영촌은 또 “용배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미”는 함경도 사람들이 뱀을 이르던 말이니 “용배미”는 용과 같은 뱀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원체 마을 동쪽의 굴륭산에는 뱀이 유난히 많았고 또 용과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으니 그럴법하다. 각설하고 이날 저녁 까울령동쪽에 있는 비파골(琵琶沟)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후문이지만 일본군 지원부대가 봉오동에서 철수하는 부대와 저들끼리 혼전을 벌렸던 것이다. 비파골은 골짜기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현지인들은 중국말 발음을 따서 피페골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인가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벌에 내려와 살고 있다. 진짜 피페한 골짜기로 된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일부인 비파골의 전투 역시 “피페”한 역사로 사라질 번 했다. 다행히 20여년전 연변의 사학자들이 경영촌에 가 현지 70, 80세 노인들의 목격담을 채집하여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주전장인 봉오골은 끝내 세월의 깊은 물에 종적을 감췄다. 봉오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로 봉새가 골라서 마신다는 전설의 단물이라고 한다. 이 시내물이 나중에 도문사람들의 수원지로 되였던 것이다. 1977년 골짜기에 저수지를 세우면서 봉오골의 사람들은 골짜기를 떠나 도문의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이제 저수지의 물 위에는 구름과 산과 나무가 비껴있을 뿐이며 옛날 골짜기를 메웠던 총과 칼의 그림자를 볼수 없다. 산비탈에 고독히 서있는 봉오동전투기념비가 흐릿한 옛 기억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봉오골은 더는 인가가 여기저기 널려있던 동네 봉오동이 아니다. 오동나무는 물에 잠기고 봉새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사실 오동나무에 깃드는 새는 봉새이지만 오동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하는 새는 까마귀라고 한다. 까마귀는 산마루에 울음소리만 아니라 오동나무에서 물어온 씨앗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까울령은 애초부터 봉오골과 뭔가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러했다. 봉오골 역시 고려촌처럼 시초부터 조선족들이 살고 있던 고려마을이며 이 때문에 예전에는 봉오골과 고려촌의 남쪽에 위치한 높은 산을 남고려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문이 아니라 도문지명지의 기록이다. 나중에 줄인 말로 남고령 혹은 고령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까울령은 “고령”이 중국지명으로 고착된 후 다시 우리 말로 음역된 이름이라는 해명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지방 문헌마저 이렇듯 이름의 뜻을 제각기 해석하여 혼선을 주고 있다. 더구나 산은 또 두 지역의 경계선으로 되고 있어서 이름 못할 뭔가의 뉘앙스를 피여올리고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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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7-19
  • 용두레 우물과 포대 그리고 장성
    ●김호림 마을 한복판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반듯한 돌로 둘레를 쌓아올렸고 용두레를 잣아 드레 박으로 물을 퍼서 올렸다. “물이 많고 맑았는데 맛 또한 좋았지요.” 최흥수씨는 우물처럼 깊은 기억을 퍼서 다시 눈앞에 떠올렸다. 그는 이 우물 근처의 동네에서 집을 짓고 살던 사람이다. 예전에 우물은 동네방네 소문을 놓았다고 한다. 용두레우물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우물이 있는 마을도 용두레마을이라고 불렸다. 용두레마을은 청나라 선통(1908—1912)년간 조선인들이 와서 세웠다고 한다. 훗날 중국말로 지명을 적으면서 용두레의 용(龙)자와 우물 정(井)자를 묶어서 “용정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옛 우물가에 있었던 백년가옥. 잠간, 이야기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용두레마을 즉 용정이라고 하면 뉘라 없이 자연스럽게 해란강기슭의 옛 마을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실 이 용두레마을은 해란강이 아닌 훈춘하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연변에서 이런 동명의 지명은 결코 한두 개가 아니다. 남쪽의 양지바른 곳 혹은 작은 여울이라는 의미의 남양(南阳)은 무려 일여덟 번이나 등장한다. 다만 용정은 하도 유명한 지명이라서 류달리 이상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 용두레 우물 역시 몇 십 년 전에 땅밑에 묻혔다. 이에 비하면 우물가에 있던 옛 기와집은 운이 좋은 셈이다. 허물리지 않고 길 서쪽에 통째로 옮겨졌던 것이다. 용두레 우물의 옛 주인이 살고 있었을지 모를 백 년 가옥이었다. “마을에서 잘나가던 부자라고 해요. 토지개혁 때 청산되었다고 하지요.” 미구에 용두레마을 역시 선후하여 동광촌(东光村) 1대(촌민 소조), 전선촌(电线村) 4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옛 우물은 그렇게 옛 가옥의 부자처럼 말끔하게 “청산” 된 셈이다. 한때 용두레 우물이 두레박처럼 이름을 걸고 있던 동광촌은 춘경촌(春景村)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춘경은 민국(1912—1949) 초년 조선인 몇 가구가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인데 말 그대로 “봄날의 경치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1940년 무렵 일본 다카스 개척단(高鹫开拓团)이 진입하면서 이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는 산산조각이 되여 버린다. 개척단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원래의 이름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일본개척단은 일명 “만몽개척단满蒙开拓团)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대규모의 이민은 1936년 백만 가구 이민계획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간 무려 860여개의 개척단이 만주땅에 들어섰다. 이때 일본은 수매(收买)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땅을 빼앗았으며 또 “위험한 땅”, “군용지”, “치안유지” 등 잡다한 구실로 좋은 땅을 몰수하여 개척민들에게 나눠줬다. 원주민들은 부득불 외지로 이주하거나 황량한 지역에 가서 또 다른 “개척민”이 되였다. “만주개척년감(满洲开拓年鉴)”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까지 이런 개척민은 무려 4만 0771가구의 20여만 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훈춘에 출현했던 개척단은 8개, 의용단은 1개로서 도합 3004명이었다. 의용단은 말이 개척단의 일부이지 실은 일본군 예비대로 주요하게 청소년들로 구성되었다. 개척단과 의용단은 모두 1부락, 2부락, 3부락 혹은 상, 중, 하 부락 등 이름으로 원래의 마을 이름을 바꿨다. 와중에 다카쓰 개척단은 여섯 부락을 설립하며 이때 동광 지역에도 그들의 집단부락을 앉혔다. 일본이 전패하면서 그들의 개척단도 파산한다. 다카쓰 개척단은 1945년 8월 훈춘진에 집결하며 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6년 후인 1951년 일본 정부의 통지를 받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훈춘 경내의 일부 조선인들이 옛집단 부락에 와서 국영농장을 세웠다. 1956년 고급 농업생산 합작사를 세울 때 “동광”이라는 새 이름을 짓고 일본인 부락의 흔적을 밀어냈던 것이다. 동광촌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이르러 22가구의 작은 동네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개척단 일본인의 잔영은 오랜 후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닭 덕대 산’까지 전깃줄을 늘였다고 합니다. 그 전깃줄이 우리 마을을 지났다고 하지요.” 최흥수씨가 자못 정색해서 말하는 전선촌의 내력이었다. 옛날 전깃줄은 시골에서 사막의 물고기만큼이나 생소한 물건이었다. 이에 따라 전깃줄이 드리웠던 마을은 아예 “전선촌”으로 불리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이름이 다른 지명을 물리치고 현지에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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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8
  • 조선족 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까
    ●김희수(중국)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일부 조선족 간부들은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그들은 조선글로 발언 고를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면 자신의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체면이 깎이고 명예가 손상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반면에 한어로 발언하면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체면이 서고 명예가 빛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해야 하고 조선족을 대변하여 말해야 한다. 이는 조선족 간부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조선족인 것을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이 아니다. 조선족 간부가 조선족이 아니면 간부로 존재할 수 있을까? 조선족 사회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기에 민족 정책에 따라 조선족 간부는 소수민족간부 비례의 혜택을 받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다면 그 많은 조선족 간부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아닌 한족 지구를 살펴 보라. 조선족 간부가 몇이나 되는가? 조남기, 이덕수, 전철수 등 조선족 간부는 모두 연변조선족자치주 출신이다. 조선족 간부는 자신이 조선족이기에 그 자리에 간부로 설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선족이 아니라면 한족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데 그 결과는 밀릴 것이 뻔하다. 하기에 아무리 한족말(중국어)로 발언해도 소수민족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족은 간부로 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더는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글로 글을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는 것을 더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조선족임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족을 위해 일하고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조선족 간부는 단순한 간부가 아니라 간부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있는 간부이다. 조선족 간부, 왜서 간부가 뒤에 있고 조선족이 앞에 있는가? 이는 간부인 나보다 조선족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하는 간부,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는 간부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족 간부는 항상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간부 앞에 조선족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면 자신이 간부로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 조선족 간부라면 항상 조선족 간부로서의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조선족 사회의 언어, 교육, 문화 등이 발전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하도록 일조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족 간부들에게 간부 앞에 조선족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할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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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7-17
  • 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김희수(중국)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중국 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주류 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농촌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 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 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 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 돈벌이에 의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 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을 지키고 중국 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중국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 학교도 줄어들고 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둘씩 폐교되고 있다. 조선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 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조선족 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 민족에 동회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 조선족 인구가 줄고 줄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 학교도 폐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전 방송도 없어지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 잡지도 없는 우리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 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희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 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 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 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 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 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 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완전히 동화될 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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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7-05

포토뉴스 검색결과

  • 연변조선족자치주 6개촌 중국 향촌관광중점촌에 선정
    [동포투데이] 중국 문화관광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제2진 전국향촌관광중점촌 선정결과를 공시했다. 전국 680개 향촌이 선정된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 돈화시 안명호진 대산촌, 돈화시 안명호진 소산촌,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등 6개 촌이 이름을 올렸다. 전국향촌관광중점촌은 국가 지원 정책을 선차적으로 향수 받게 된다.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방천국가급풍경명승지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방천촌은 중국, 러시아, 조선 삼국 변계에 위치해 “동방 제1촌”으로 불리고 있다. 촌민 전부가 조선족으로 구성된 이 촌은 지금도 원초적인 문화적 정취와 민족적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사면으로 뭇 산에 감싸여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촌에는 조선족예술공연장, 민속문화 전람관 등 관광시설이 있어 조선족의 역사문화를 전면적으로 전시하고 관광객들도 조선족의 민족풍정을직접 체험할 수 있다.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 홍기 민속촌은 현 소재지에서 72킬로미터, 주소 재지 연길시와는 140킬로미터, 장백산과는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장백산으로 통하는 명장 도로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홍기촌은 안도로부터 장백산으로 통하는 길에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한 순수 조선족으로 구성된 촌이다. 산을 등에 업고 물을 끼고 있는 이 촌은 민족 건축 특색이 짙은 가옥들이 줄느런이 서있고 주변에는 바둑판 같은 논밭이 있어 조선족의 농촌마을 풍정을 만끽할 수 있다.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 홍일촌에는 30년대의 조선족 가옥 양식으로 복원한 항일투사 김백문의 옛집과 백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독일식 교회당 건물을 원 모양으로 보존한 촌사관을 대외에 개방하고 있다. 돈화시 안명호진 대산촌 여러 민족 집거지인 대산촌(대산취자촌)은 한족, 조선족, 만족등 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각 민족은 서로 동화를 이루면서도 자기의 전통적인 문화 습관을 보존하고 있다. 이 촌은 독특한 자연 풍광과 쾌적한 기후,다양한 관광환경과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목단강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주변에 수많은 저수지와 호수들이 있어 예로부터 “어미지향, 북국의 강남”으로 불리고 있다. 돈화시 안명호진 소산촌 길림성과 흑룡강성 접경지대와 안명호국가자연보호구의 핵심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소산촌은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맑은 물이 마을을 에돈다. 안명호는 장소천이 쓴 “안명 호반”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소산촌은 안명호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촌에는 “안명호 어항”으로 이름 지은 풍경구가 있는데 이 곳에서 식사와 숙박을 할수 있고 수상 오락으로 즐길 수 있다. 수상 오락장에서 배놀이, 뽀트놀이, 낚시로 휴식의 한때를 즐기고 또 배를 타고 안명호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시구역과 7킬로미터 가량 떨어지고 도문경제개발구와는 0.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수남촌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남촌에 가면 조선족 특색이 짙은 가옥과 문패루, 민속전람관, 나무잔도, 관광계단, 백년나무, 백년우물을 구경하고 조선족가무, 모닥불야회도 즐길 수 있다.(사진=中國朝鮮語廣播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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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중국 조선족 학춤(鹤舞)과 유래
    학춤은 기원이 오랜 학모양의 탈을 쓰고 날 새의 움직임을 재치 있게 무용화한 특이한 민속춤이다. 한마디로 학의 모양을 춤으로 재현한 예술이다. 학춤에 대한 문헌기록은 고려시기부터 보이는데 《고려사》의 기재에 의하면 학춤은 77명이 참가한 대형가무중의 한부분이였는데 “오방처용무”가 끝나면 “학련화대”가 추어졌다고 한다. 학은 전반 과정에서 연꽃을 터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악학궤범》에는 “박을 치면 청학과 백학이 나는 듯이 밟고 지당 앞에 나가…”라는 춤보법을 묘사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학춤도 독립적인 궁중무용임을 설명해준다. 전하는데 의하면 조선조(1392년~1910년)시대 학춤은 궁중에서 공연 되였던 무용이다. 조선조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후 궁중에서나 공연 되였던 학춤은 그 전승이 단절 되였다. 1935년 당시 천재적인 춤꾼이라고 불렸던 한성준(1874년~1942년)은 자신의 창작무용발표회에서 다시 학춤을 창작무로 선보인 후 학춤은 조선반도에서 전승이 이어졌다고 한다. 중국 조선족의 학춤은 민간예인 김재선(녀 金再善)에 의해 전승되고 시연되였는데 그가 마을에서 학춤을 출 때는 흰옷을 입고 초신을 신고 흰부채를 만들어 학의 날개로 만들어 추었다고 한다. 김재선은 1890년에 조선 강원도 금강의 한 민간예술인 가정에서 태여났는데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여러가지 무용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1936년 고향을 떠나 지금의 연변자치주 안도현 만보진 일대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학춤과 같은 전통무용을 전수하고 자랑하였다. 1952년에 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학춤을 선택하였는데 이불보를 뜯어 학을 만들어 공연하였다고 한다. (자료제공 : 안도현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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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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