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안성호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 조선족과 한국

1980년대 시작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와의 교류도 이젠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980년대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동포애’라는 감성적 요소를 핵심으로 하는 감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들고 간 한약재 중의 가짜 상품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양측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반세기 동안의 단절로 인한 문화적 차이는 서로간의 불신과 저촉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1990년대 후반기에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호간의 이해가 깊어지고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 되면서 상호간의 신뢰와 교류만이 두 사회의 양호한 발전에 유리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몇 차례 조선족에 의한 형사사건은 다시 한번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은 고마우면서도 아직도 융합되기 어려운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

문화적 측면으로 볼 때 조선족과 한국인은 분명 전통문화의 기초를 공유하고 있고 같은 민족이다. 김치, 된장 등 음식문화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연중행사, 언어와 문자 등 거의 모든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두터운 무형의 장벽이 있고, 이로 인하여 조선족사회는 늘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나(조선족)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답이 없어 비롯된 현상이며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국민국가의 사이에 끼어 사는 과경민족(跨境民族)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이해하려면‘국민국가’라는 근대국가모식과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 ‘국민국가’, ‘타자’와 ‘민족상상(想象)’

국민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며 국민의 동질성과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시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유럽의 국민국가 이념을 도입하였으며 한 개 나라, 한 개 민족이라는 이념으로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단일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므로 “일본 = 일본인 = 대화민족”이라는 국민성과 민족성이 고도로 일치되는 국민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국민국가의 건설은 국민의 동질성 즉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다”라는 인식을 강요한다. 이러한 동질성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구별되는(혹은 대조되는) ‘타자(他者)’가 필요하였다. 즉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민을 만들기에는 ‘우리’와는 서로 달라 구별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재일(在日)조선인들이 ‘타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재일조선인들은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일반공(反日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한국 = 한국인 = 한민족”이라는 국민국가 건설의 길을 걸어왔다. 즉 한민족과 한국인, 한국국민이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수요에 맞추어 ‘국악(国乐)’, ‘국어(国语)’ 등의 개념을 창출하였고 국민들의 동질성과 배타적인 문화체제를 수립하여 왔다.

한민족이 절대 다수인 한국에서는 화교 즉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타자’로 분류되어 배척과 차별의 상대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에 비해 한국의 화교의 숫자가 적어 ‘타자’가 양적으로 너무 부족하였으므로 내부에서도 계층에 따른 ‘타자 만들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바 이에 따른 ‘왕따’와 차별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와 서로 다른 ‘타자’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만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새로운 ‘타자’로 분류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다”라는 인식을 더욱 강조하고 외국인을 ‘타자’로 몰아 붙임으로써 민족주의를 통하여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민족국가로서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이념이 량계초 등에 의하여 도입된 후 다민족 국가라는 현실에서 ‘중화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구상되었다. 근대의 민족이란 실체가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에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상상된 공동체라고 주장한 프레드릭 앤더슨의 말을 빌리면 ‘중화민족’은 일종 ‘상상의 민족공동체’인 셈이다.

중화민족 아래에 56개의 민족을 둠으로써 “중국 = 중화민족 = 중국인”이라는 국민문화를 형성하여 가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적 요인으로 인하여 중국문화는 역사적으로 배타성보다는 포용력이 강하였고 보다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였다. ‘우리’와 ‘타자’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개개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지는 않았다. 다민족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민족을 통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타자’와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이루어 졌다.

◇ 조선족의 '타자'

조선족의 경우,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주로 조선족 마을에서 생활하였고 주변에 한족 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들과 어울려 살았으므로 ‘우리’는 조선족 자체였고 주변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다.

1980년대까지 조선족 사회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보다 ‘조선사람’이라는 명칭이 더욱 일반적이었다. 조선사람은 조선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융합력이 강한 중국에서 민족의 얼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였다. 조선족 사회는 중국에서 살아 나가면서 늘 “타자”를 의식하면서 생활하였다.

“조선족 마을들은 기타 민족 마을들 보다 깨끗하다.” 이는 조선족 마을이 ‘타자’인 기타 민족의 마을과 구별하는 선명한 특징의 하나로 되었다. 백의민족으로서 예로부터 위생습관을 잘 지켜왔다는 해석도 되지만 ‘우리’와 ‘타자’의 관계에서 볼 때 ‘타자’와 구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마을 내부에서 조차 어느 집의 솥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가 비기는 습관은 이러한 타자의식의 내부침투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은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것은 동북에서 조선족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를 통하여 ‘타자’인 기타 민족과 구별하고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타자’의 시각은 교육에 대한 열정, 징구량(征口粮)의 초과 납부, 농토 건설, 마을 건설 등 여러 분야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늘 한족 등 기타 민족과의 비교를 통하여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은 다민족국가 중국이라는 맥락에서 진행되었고 중화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조선족사회가 중국 국민국가의 건설에 동조하게 되었다. ‘조선사람’으로부터 ‘조선족’으로의 호칭 전환도 이 과정에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한국과의 교류와 조선족의 ‘타자’ 인식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족의 ‘우리 - 타자’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원래 조선족에게 있어서 중국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고 한반도의 사람들은 자신이랑 똑 같은 ‘우리’였다. 하지만 조선족 사회는 이미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조선족, 즉 ‘중국의 국민’이라는 인식이 정착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한민족이면서도 중국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인들은 “한민족 = 한국인”이라는 동질적 국민의식을 확립하고 있었다.

40년의 단절을 겪고 난 이후 1980년대 중엽부터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 같은 ‘우리’라는 동포애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내용은 이미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중국을 “우리 나라”라고 하는 조선족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배신감마저 느낄 만큼의 충격을 받았고 조선족에게 한국인임을 승인하여 달라고 강요하였다.

조선족 사회 또한 한때 자기와 같은 ‘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차별을 경험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같은 민족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두 국민국가의 문화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서로가 상대방을 ‘우리’라고 여겼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아닌 ‘타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실망과 배신감이 더욱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인’ 즉 ‘타자’라는 인식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이미 굳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재한(在韩)조선족 사회가 20여 년간 한국에서 점차 정착해 오면서도 늘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뛰어 넘을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을 감지하는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기타 외국인에 비하면 완전히 ‘타자’인 것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타자’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경우에 따라 완전히 ‘우리’로 인정될 때도 있다. 한국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한조선족 엘리트계층도 이미 많이 성장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정도 ‘우리’로 인정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한민족으로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시대의 발전 흐름에 맞는 것이며 조선족의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본다.

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 조선족들이 오랫동안 간직하여 왔던 ‘우리’라는 동질감이 한국과의 교류 가운데서 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은‘우리’가 아니라 ‘타자’로 인식되었을 때 ‘우리’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수단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한족 등 타민족과의 ‘타자’ 구별에서 활용되었던 언어, 례의범절, 생활습관 등 근거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국과 한국의 직접적 교류가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족으로서의 존재감 조차 무력해지지 않을까 하는우려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기초 민족문화를 공유하는 기타 지역 한민족과 구별하기위하여서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확정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조선족,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

사실 “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족문화가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면서 형성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융합을 가능하게 하였던 조선족의 사회발전 시스템에 대한 탐구, 조선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색을 발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조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문화의 다양성, 중국문화의 다양성, 글로벌 시대에 대한 적응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안성호 프로필: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할빈사범대학 력사교육학부 졸업

일본 고베대학 연구생원 석사, 박사과정 졸업

현재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1990년부터 조선족 정체성과 문화성격 등 조선족사회를 비롯해 문화인류학을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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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시각에서 본 조선족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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