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시 삼합향에 위치한 천불붙이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 노인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불살라진 땅을 뜻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옮겨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만들어 지어 옛 간도지도에 한자로 天佛旨山으로 표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나타난다. 해방 40년이 지난 후에도 불행하게 이런 왜곡된 지명표기가 이어지어 간다. 1985년 6월에 편찬한 룡정현 지명지에 나와 있는 천불붙이 지명해석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이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전하고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즉 사슴을 가리키며 저것은 말(馬)이다 하니까 정말 말이 되어버리는 고사처럼 천불지산이라는 잘못된 지명이 반세기동안 그대로 작동되어 내려오면서 천불붙이란 네 글자는 어느덧 세월의 비바람에 마모 되여 그 판독조차 어려워지게 되는 너무나도 서글픈 일이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 천부지산이란 잘못된 지명이 엉뚱한 제사 술 상표 이름으로 둔갑하여 각종 신문 방송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화했을 때 흔히 상전벽해라는 비유를 쓴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만치 세월이 무상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붙이는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림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들어와 화전 밭을 일구면서 천불붙이의 역사가 시작 되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 했던 역사는 아니러니 하게도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을 꽁꽁 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 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천불붙이라는 원래의 지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그 대신 천불지산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굳어지어 가고 있다.
상전벽해라는 말대로 뽕밭이 바다가 되었다면 천불붙이는 망망한 림해가 파란만장한 화전민들의 력사를 거쳐 오늘날에 와서는 송이가 나는 보물 밭으로 바뀌었다. 땅속에 묻힌 이왕지사를 굳이 들춰내어 구구히 늘어놓아 봤자 오늘날에 와서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최초의 화전민의 독특한 삼림문화 원형을 간직한 천불붙이에 숨겨진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최초에 두터운 봉금지대 장벽을 뚫고 나온 풀처럼 화전민은 천불붙이 산속에 움터 나온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초들이다. 혹독한 삭풍이 몰아치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드리운 봉금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삶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삶의 꿈이 허무하게 내버리어졌을까. 허나 오랜 세월을 거쳐 이런 화전민의 진출은 끊임없이 해를 이어 거듭되어 마침내 봉금장벽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연변에로 이주 할 수 있는 위대한 터널로 천불붙이는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온갖 전란과 변란에 휩쓸리어 삶의 터전이 무참하게 짓밟히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화전민의 처절한 몸부림은 천불붙이 심산계곡 곳곳에 묻혀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화전민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존재는 닥치는 대로 빼앗는 마적 떼들이었다. 이런 마적 떼들을 피해 천불붙이에서는 연기가 잘 나지 않은 싸리나무만 골라 불을 땠다고 하여 싸리밭데기라 부르는 마을지명까지 생겨났다. 수많은 화전민들은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점점 더 높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아예 입구조차 막아버리고 살아 왔다. 이로 하여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높은 고산지대에 올라와 정착하며 모진 혹독한 추위에 견뎌내야 하였다. 가파른 경사지에서 두 마리 소를 부릴 때 높은 쪽에 서 있는 소의 발이 낮은 편에 있는 소의 등보다 높았다는 지난세기 천불붙이 늙은 농부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날까지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 그 밑바탕에 질펀하게 깔려 있는 과거의 민낯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옛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화전 밭을 일구다 보면 얼굴까지 새까맣게 되어 늦은 저녁 집으로 들어서면 개도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시기 불을 질러 나무와 풀들이 태우는데 곳곳에 타다 남은 나무 밑둥이 많았는데 이런 덜 탄 나무들을 부대라고 불러왔다. 연로한 할아버지들은 종종 한전 밭을 부대밭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화전민들은 순수 흙만 있는 땅보다 굵은 돌들이 섞여있는 밭을 선호하였다. 더욱이 천불붙이와 같은 고산지대에서는 돌들이 열기를 저장하고 수토유실을 막을 수 있어 천불붙이에는 숲으로 우거진 땅에 가끔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웅크리고 있는 곳들이 많다. 토박이 노인들은 그 자리가 바로 그 옛날 화전 밭을 일구던 곳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천불붙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석사 동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었으며 20세기30~40연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산비탈에 북빼기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 한적도 있었다.
연변에는 천불붙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훈춘시 춘화진에도 있다. 훈춘 천불붙이도 삼합 천불붙이와 마찬가지로 화전민들이 최초에 연변에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에 나타난 지명 흔적으로서 이주민들이 이주경로를 파악하는데 관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어쩌면 이는 먼 훗날 이주민들이 연변에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를 앞서 절체절명 시기에 접어들어 화전민들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첫 이정표이다. 천불붙이는 화전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환기시킬 수 있는 연변 이주 역사의 풍토를 정착시키는 주요한 문화 아이콘으로서 천불붙이를 떠올리면 화전민이 으레 따라오고 화전민을 말하면 최초의 이주민을 거론하게 된다.
경관 십년 풍경 백년 풍토 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산천초목의 경관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기여 풍경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대손손 이어진 풍토는 천년 세월을 버텨나간다는 도리이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선인들이 쌓은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거대한 자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일어서고 있다. 화전민들이 불굴의 의지로 천불붙이라는 금자탑(金字塔)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도 이렇다 할 역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천불붙이 지명은 정체불명의 천불지산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묻히어 있다.
진실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문화의 유전자를 찾는 관건적인 첫 걸음이며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로도 될 수 있다.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토종 씨앗처럼 우리 살과 뼈에 녹아들어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으로 움터 자라 날수가 있는 것이다.
천불붙이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천불붙이 이름이 다시 불리이어 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